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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과 승정원일기에 등장한 진령군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16.10.28|조회수238 목록 댓글 2

요즘 진령군이 환생했다고, 진령군에게 모든 문제의 화살을 돌리는 글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최진령군 일까? 그를 전적으로 믿고 엄청난 권력을 주고, 그 권력에 기생하던 인간들 모두가 문제다. 

오늘의 일과 유사한 과거의 일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뻔하다.

지금 진령군 환생 사건이 단지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고 유야무야 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너무도 암담할 수 밖에 없다.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1권   >   上(1894년 이전) ⑩   >   26. 중궁과 무녀 진령군

 

중궁과 무녀 진령군


중전이 忠州로 피신하였을 때, 어느 무녀가 찾아와 환궁할 시기를 점쳐 보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그로부터 중전은 그를 신기하게 생각하여 환궁할 때 데리고 간다. 중전이 무슨 질병을 앓고 있을 때마다 무녀가 손으로 아픈 곳을 어루만지면 그 증세가 사라졌다. 이 일로 인하여 중전과 무녀는 날로 친숙하게 되었고, 중전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그 무녀가 자기는 關聖帝君의 딸이라고 하면서 關王廟를 건립하자고 하였다. 중전은 그의 말을 따라 관왕묘를 짓고, 그를 眞靈君으로 봉해 주었다. 그는 수시로 중전을 찾아보았고, 간혹 어느 때는 큰 복장을 하고 찾아왔다. 그럴 때면 兩殿은 그를 가리켜 정말 진영군 같다고 하면서 웃었다. 중전이 그에게 내린 금은 보화가 무수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禍福이 걸려 있어 종종 수령과 변장들이 그의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염치없는 경재들은 그에게 아부하여, 간혹 자매를 맺기도 하고 혹은 義子를 맺자고도 하였다. 그중 趙秉式尹榮信鄭泰好 등이 더욱 심하게 보채었다.
그리고 그 무녀의 아들 金昌烈은 엄연히 대관들의 서열에서 행세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무녀가 堤川과 淸風 사이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9. 조희일과 여규형의 유배


9월에 趙熙一은 薪旨島呂圭亨은 金中島로 유배하였다. 옛날에 閔致祿이 德川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어사趙鶴年이 그의 비리를 적발하여 파직하였다. 이때 중궁의 나이는 겨우 4세로 부친 민치록을 따라 덕천 관아에 있었는데, 민치록이 조학년의 박해를 받아 가족을 이끌고 외숙모 댁으로 가다가 중궁을 안은 채 담에서 떨어져 중궁이 발을 다쳤다. 이것이 커서도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귀인이 된 중궁은 언제나 발을 어루만지며 조학년을 꾸짖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러나 그의 조카 趙熙一은 젊은 명관으로 일시 명망이 높았는데, 이때 중궁은 승정원에 명하여 승진 후보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조희일은 전참판의 직함으로 2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고 두문불출하면서 살았다 그의 아들 趙性載는 應製科에 급제하였는데, 그의 榜目을 공개할 때 중궁은 깜짝 놀라 한탄하며, “조희일의 집안에서 이렇게 대과 출신까지 나다니……”라고 하였다. 조희일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呂圭亨의 가문은 매우 가난하였으나 그는 재주가 있어 기억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여색과 도박을 좋아하여 선비들의 기대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수년 동안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더욱 방자하였고, 또 眞靈君이 양전에게 말하기를, “關帝(관운장)가 呂布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을 관제는 죽어서도 미워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관제에게 복을 받으려면 여규형을 멀리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政院의 관리들은 고종의 뜻을 헤아리고 여규형을 후보물망에 넣지 않았다. 그는 민씨들의 집을 출입하다가 품계가 오른 후에는 閔泳柱을 따라 놀러다니며 술을 마셨다. 이 해의 萬壽節에는 고종이 閔泳達의 집에 饌需를 하사하자 민영달은 명사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며 왕을 기념하기 위하여 시를 지었다. 여규형도 참여하였다. 이때 「山」자의 韻이 나오자 그는 「有酒如淮肉似山」이란 시구를 지었다.
고종은 민영달의 집에서 詩會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그 시축을 구해 보고는, 여규형의 시를 지적하면서 “肉山脯林이라고 한 것은 나를 桀紂에게 비교한 것이다”라고 하며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식년초시가 있자 고종은 御批를 내려 조희일을 서울 제2소의 고시관으로 임명하였다. 조희일은 죄나 짓지 않을까 우려하여 분향재배를 하면서 하늘에 맹서하며 극히 공정하게 선발할 것을 다짐하였는데, 방목이 나온 후 아무 시비가 없었다.
한편, 중궁은 無名輩를 모집하여 鍾街에다가 怪書를 걸어 두었다. 그것은 呂圭亨이 밖으로 보낸 서신 가운데 「조희일이 방목을 다 팔았다」고 한 구절이었다. 임금은 엄한 교지를 내려 둘 다 섬으로 유배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備忘記>에는 자주 여규형에 관한 기록이 있었는데, 그는 행실이 본래 더럽고 말하는 것도 거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기가 산같이 쌓여 있다는 그의 시를 가리킨 것이다.

4. 池錫永의 閔泳駿 請誅 상소


刑曹參議池錫永이 상소하여 閔泳駿과 金昌烈의 어머니 眞靈君을 처형하라고 하였으나 그 청을 윤허하지 않았다. 閔泳駿이 도주할 때 많은 사람들은 분개해 하였으나 장래 그의 위협이 두려워 그를 성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지석영의 상소가 나오자 어떤 사람들은 시체에 매질한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모두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승정원 일기 고종 31년 갑오(1894, 개국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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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5일(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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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7-05[48] 간신 민영준과 진령군을 효수하여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 줄 것 등을 청하는 전 형조 참의 지석영의 상소
○ 전(前) 형조 참의 지석영(池錫永)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중략) 신이 온 나라의 만백성을 대신하여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정권을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들을 착취하고 오직 자신을 살찌우고 윤택하게 함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핍박하여 소요를 초래하고 구원병을 불러 난리를 빚어냈으면서도 외국 군인들이 궁궐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자 장차 먼저 도망하려 하였으니, 간신(奸臣) 민영준(閔泳駿)은 온 세상 백성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하는 자입니다. 신령스러움을 빙자하여 지존(至尊)을 현혹시키고 기도를 핑계로 국가의 재산을 축냈으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농간을 부리고 방백(方伯)과 내왕하며, 화복(禍福)으로 백성을 무함하고 총애로 세상에 방자하였으니, 요사스런 여자 이른바 진령군(眞靈君)은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먹고 싶어하는 자입니다. 아, 저 일개 간신과 일개 요녀는 나라에 해독을 끼친 원흉이고 백성을 좀먹은 대악(大惡)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안치(安置)하고 하나는 죄를 따져묻지 않으시어 마치 사랑하여 보호하듯 하셨으니, 백성의 원통함이 어떻게 풀릴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내려 종가(鍾街)에서 이 두 죄인을 죽여 도성 문에 목을 매달도록 명하신다면 민심이 비로소 시원해질 것입니다. 이어 강직한 사람을 임명해 안찰(按擦)의 임무를 맡겨서 팔도(八道)에 파견하여,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령 중에 매우 탐학한 자와 토호(土豪)와 향리(鄕吏)로서 심하게 백성을 해치는 자를 가려서 경내에서 효시(梟示)하게 한다면 여정(輿情)은 기뻐 복종하고 비도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예전에 순(舜) 임금이 네 명의 흉도를 처벌하자 천하가 다스려졌으니, 잘 다스려 평안하게 하는 방법은 진실로 형법(刑法)을 공정히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신이 정해년(1887, 고종24)에 삼가 엄한 견책을 받들어 섬에 귀양 가 있으면서 한순간도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밝으신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볕 안 드는 벼랑에 봄이 돌아오듯 하시고 엎어진 항아리에 햇볕이 들듯이 하셨습니다. 만분의 일이나마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티끌만큼도 갚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간신과 요녀가 나라를 망쳐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는 분한 마음이 솟구쳐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는데, 신은 죄명이 씻기지 않은 데다가 또 상중(喪中)에 있어서 감히 진언하여 성상을 계도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달 삼년상을 마치고 복(服)을 벗었는데 최근에 은혜를 입어 승진하여 형조 참의의 직책에 제수되었으니, 총애가 상도를 넘어 너무도 황송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재주는 없는데 책임은 막중하니 분의로 볼 때 굳이 사양해야 합니다만, 감히 사양하지 못했던 것은 나라에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머뭇거린 채 떠나지 못함이 죄가 되고 또 이미 감히 사양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찌 마음속의 진심을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제왕의 기강을 준엄하게 하시어 백성을 위해 해악을 제거하소서. 그리하신다면 백성이 비로소 경외하여 물이 아래로 흐르듯 풀이 바람에 쓰러지듯 할 것이니, 어찌 민심이 진정되지 않음을 근심하겠습니까. 그런 뒤에 숨은 인재를 발탁하여 각각 적당한 직임을 맡겨서 그들로 하여금 한결같은 목소리로 협력하여 충성과 정성을 다하게 한다면 부국강병은 당장에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성대합니다. 중흥(中興)하여 만억년의 태평한 기업을 여는 것은 전하의 오늘날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성께서는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참작할 점이 있다.”
하였다.
[주D-001]진령군(眞靈君) : 성은 이씨(李氏)로 무당이다. 관우(關羽)의 딸이라 자칭하고 궁정에 출입하여 명성황후(明聖皇后)의 총애를 받아진령군에 책봉되었다. 관우의 영을 모시겠다고 명성황후를 설득하여 숭동(崇洞)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 그곳에 살면서 구관기복(求官祈福)의 무리들로부터 숭앙을 받아 큰 권세를 부렸다. 고종 30년(1893) 8월 21일 전(前) 정언(正言) 안효제(安孝濟)가 상소를 올려 부당한 제사를 올리기를 좋아하는 자를 처벌하기를 제의하면서 진령군을 언급한 바 있다.

27. 이유인과 진령군


李裕寅은 金海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무뢰배로 무과를 보기 위하여 서울에서 구걸을 하고 다니다가 진영군이 점을 잘 쳐서 국권을 뒤흔든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을 시켜, 이유인이란 사람은 귀신을 부리고 비바람도 마음대로 일으킨다는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진영군은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라며, 즉시 그를 불러 먼저 귀신을 불러 보라고 간청하자 이유인은, “보여 주기는 쉽지만 놀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며칠을 목욕재계한 후 서울에 와서 먹고 있는 영남의 부랑배 소년들을 불러 은밀히 무슨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 진영군을 데리고 北漢山 깊은 골짜기로 갔다. 그곳은 송림이 울창하고 반딧불이 깜박거려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이유인은 진영군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있으니 놀라지 마십시오”라고 하더니 수건을 저으며 「東方靑帝將軍」을 불렀다. 그러자 한 귀신이 팔장을 끼고 앞으로 다가왔다. 귀신은 온몸에 푸른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10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다.
진영군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것뿐입니까? 저 정도가 무엇이 그리 두렵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유인은 “떠들지 말고 기다려 보십시오”라고 하면서 또 「南方赤帝將軍」을 불렀다. 그 귀신의 신장은 10척 정도 되고 온몸은 검붉은 색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리고 머리는 챙이처럼 넓고 눈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었으며, 눈동자가 붉은 유리처럼 툭 튀어 나오고 입으로는 붉은 피를 뿜어내어 그 냄새가 사람에게 풍기었다. 그 모습은 야차처럼 사납게 생기고, 손은 창처럼 들고 서 있었다. 진영군은 잠시 그 귀신을 보더니 이유인의 발을 슬쩍 밟으며, “속히 보내시오. 더 보고 싶지 않소”라고 하였다. 귀신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진영군은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양전에게 모두 말하였다.
양전은 이유인의 入侍를 명하여 1년 사이에 楊州牧使를 임명하였다.
이유인은 진영군을 수양어머니로 삼고 북관묘에서 기거를 하였으므로 추한 소문이 들렸다.

14. 일본인의 대원군 영입


20일, 일본인은 대궐을 침범하여 강제로 맹약을 맺고 대원군이하응을 궁중으로 영입하여 국사를 논하였다. 그리고 大鳥圭介는 外部署로 다음과 같은 조회를 하였다.
“청국인이 귀국을 屬邦이라고 하면서 병대를 출동하여 보호한다고 하니 이것은 자주권을 침탈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귀국이 이런 명분을 용인하여 참다운 길을 잃는다면 청국군들은 오랫동안 귀국의 경내에 머물러 있을 것이니, 이것은 귀국의 자주권을 침해당할 뿐 아니라 그 조약에 기재된, 한국과 일본은 평등하다는 구절이 한갓 文具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그것은 체통이 서지 않는 소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는 빨리 淸軍을 물러가게 하여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할 것을 의논하십시오. 만일 시일을 지연시킨다면 本使는 마음속으로 결정한 바가 있으므로 외부서의 종사관에게 약속을 어겼다는 대답을 하겠습니다.”
이 조회를 보낸 후에도 대조규개는 우리에게 청나라의 속국인지 아닌지를 물어 왔다. 그의 말은 매우 긴밀하므로 沈舜澤 등은 그 명칭을 시정하겠다고 하였으나, 아무 건의도 하지 않고 은밀히 청국인의 병대를 믿으며 관망만 하고 시일을 보냈다.
대조규개는 우리측의 이러한 태도를 알고 병대를 지휘하여 경복궁까지 진주하여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別殿까지 이르므로 우리측의 호위군과 侍臣들은 모두 도주하고 오직 兩殿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하얗게 번쩍이는 칼을 들고 양전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양전은 전전긍긍하면서 자세를 잃고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까닭으로 이러는지 물으려고 하였으나 옆에는 통역관조차 없었다.
이때 마침 安駉壽가 들어왔다. 안경수는 일본어를 잘 하였다. 고종은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통역을 하라고 하였다. 이때 대조규개는 칼을 빼들고 고함을 치며 “國太公이 아니면 人主로서 오늘과 같은 날이 없었을 것이니 국태공을 속히 데려오시오.”라고 하였다. 대원군이하응이 들어오자 大鳥圭介는 고종의 교지를 받아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일병들은 대궐문을 파수하고 있으면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일일이 점검하여 들여보냈다.
金弘集金炳始趙秉世鄭範朝 등이 차례로 들어오고 그 후 沈舜澤이 도착하자 그는 손을 저으며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심순택은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을 물러나와 朝房에서 사흘 동안을 앉아 있었다. 대신들은 대궐로 들어갔으나 그들이 두려워 아무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빠른 시일 내에 옛 제도를 변경하자는 여론을 전개하였다.
대조규개는 대원군을 대궐 안에 구류하고 있었다. 이때 대궐 안에 있던 各司의 관원들은 모두 그곳을 떠났고 御供도 들여오지 않았다.
고종은 배가 매우 고파 운현궁에 명하여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 수라상이 대궐문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던 일병들은 그 음식을 마구 집어먹어, 수라상이 고종앞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빈 상이 되어 있었다. 고종은 그 후 다시는 성찬을 차리지 말라고 하였다.
대조규개가 대궐을 침범할 때 平壤兵 500명은 대궐을 호위하고 있다가 대조규개를 향해 창을 던졌다. 이에 그는 협문을 통하여 고종이 있는 곳으로 가서 고종을 협박하여 함부로 요동하는 자는 참한다는 교지를 내리게 하자, 병사들은 모두 통곡하면서 銃筒과 군복을 마구 찢고 부순 후 도주하였다.
또 여러 營兵들은 下都監에 모여 맹세하기를, “우리가 비록 천한 졸병이지만 국가의 厚恩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변괴가 이런 지경에 이르러 궁중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모르고, 그들은 우리 영병들이 해산하지 않는 것을 알고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만일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면 우리는 결사투쟁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대포를 정비하여 宮墻을 수비하고 있다가, 일병들이 대궐에서 나와 여러 영병을 약탈할 기세가 있으면 영내에서 일제히 대포를 발사하였다.
그러나 대조규개가 고종의 교지를 받아 儀仗兵을 내보내자 營兵들은 분이 나서 칼로 돌을 쳐부수고, 哭聲은 산이 무너지듯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하다가 해산하였으므로 영병의 병기는 모두 일병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에 일병들은 사방을 수색하고 다니며 대내의 보화와 列朝의 珍品과 종묘의 器皿 등을 찾아 모두 인천항으로 싣고 갔으므로 우리 나라가 수백 년 동안 쌓아 두었던 국보가 하루아침에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는 조그마한 병기도 없었고 민씨들도 모두 도피하고 없었다. 이때 閔泳柱는 楊州閔泳駿은 關西로 도피하였다. 閔應植은 그의 아들 閔丙昇과 함께 삿갓을 쓰고 짚신을 허리에 찬 채 맨발로 걸었다. 그 모습은 轎夫와 같았다. 그가 숭례문 밖으로 나가자 妨民들은 그에게 기왓장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하며 “이 사람이 지난날의 閔輔國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閔斗鎬가 春川에 머무르기 위해 가벼운 보물을 싸가지고 內眷을 호화로운 교자 10개에 나누어 태우고 춘천에 도착하였다. 이때 春川民들은 그 교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이런 난리를 만났으니 관동의 도둑을 다시 들어오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민두호는 이런 낭패를 만나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眞靈君과 함께 忠州로 도주하고, 閔泳煥과 閔泳韶만 도주하지 않으면서 “나는 수년 동안 休職하였으므로 아무런 죽을 죄가 없는데 왜 도망을 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 閔泳翊은 香港에서 전화로 말하기를, “만일 대조규개의 말대로 시행하면 그에게 속임수를 당하여 安南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될 것이니 이 문제를 흐지부지하다가는 화를 부를 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 성패가 달려 있으므로, 우리의 주장을 완강히 지키어 우리 스스로를 강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7. 안효제가 진영군의 주살을 간청


이해 7월에 前正言安孝濟가 상소하여 妖巫 眞靈君을 처형하자고 간청하였다. 안효제는 宜寧縣 사람이다. 이 상소가 들어가자 승지閔泳柱와 朴始淳 등은 승정원에 있다가 서로 쳐다보며 어쩔줄 몰라하며 임금께 올릴 여부를 의논하였다.
민영주가 고함을 지르며 “이런 凶疏를 어찌 봉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박시순은, “이것은 나라일에 관계된 상소(言事(疏))인데 어쩐단 말입니까?”라고 하였고 鄭寅學은, “도승지 어른과 상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도승지金明圭는 소매 속에 그 상소문을 넣고 가서 민영준에게 보이며 봉입 여부를 물었으나, 민영준은 벌컥 화를 내고 옷을 털고 나가면서 “이 상소를 올리고 올리지 않고를 도승지도 결정하지 못하는데 세상에 어찌 都都承旨가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김명규는 돌아와서 “나의 역량으로는 결코 봉입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상소문을 물리치자, 박시순은 탄식하며 “비록 자기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남의 말까지 막아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상소가 비록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그 副本이 서울에 많이 전해져 兩殿이 일찌감치 보게 되었다.

8. 경리청의 신설


經理廳을 신설한 후 總戎廳의 병력을 그곳으로 옮하고, 閔泳駿을 總戎使로 임명하였다. 그 체제는 총융, 守禦 兩使의 예를 따랐다.
민영준의 하인 한 사람이 매우 교만하여, 많은 사대부들이 그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하루는 申正熙가 민영준을 방문하였으나 그를 만나지 못하자 자기의 종자들에게 눈짓을 하여 그 하인을 잡아갔다.
이 소문을 들은 민영준은 크게 놀란 나머지 신정희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그를 교살한 뒤였다. (이때 민영준은 眞靈君의 威福으로 세력이 당당하여 사람들은 그에게 이를 갈고 있었으나, 오직 신정희에게만은 그의 하인을 죽였어도 끝까지 손을 대지 못하였다.)

1. 이용직과 민형식 등의 음사, 탐학과 이응서의 선정


李容直은 100만 냥을 상납하고 경상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忠愍公李健命의 祀孫으로 永同縣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무력으로 백성들을 괴롭혀 그 피해는 인근 道民에게까지 미쳤다. 그는 호서의 갑부가 된 후 정도에 넘는 사치와 음행을 자행하여 거실은 대궐과 같고 첩은 10여 명이나 되었다. 그의 나이는 70세가 넘었지만 여자를 대하는 데는 기력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이때 그가 眞靈君의 위력으로 이 관직을 제수받게 되자 조야는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다.

27. 金思黙의 警務使 유임과 眞靈君의 사망


警務使金思黙을 그 직책에 유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金昌烈의 어머니 眞靈君이 사망하자 김사묵은 그의 義子로서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후 김사묵이 경무사직에서 쫓겨나게 되자 고종은 진영군을 생각하여 遞職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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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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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둘째 | 작성시간 16.10.28 글에서 말씀하시고 싶은바와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비교당하는 진령군쪽이 억울할수도 있겠는데요.
  • 작성자공실불 | 작성시간 16.11.06 진령군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수 없지만 그래도 진령군이 민씨 정권의 인사로서 행동한건 사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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