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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연개소문에 대하여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03.02.03|조회수338 목록 댓글 0
연개소문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나는 연개소문에 대한 원고를 탈고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연개소문에 대해 잘 안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내가 용감한 발언을 하는 것도 아마도 거의 처음일 것입니다.

그것은 연개소문에 대해서 현재 학계에서 토론하는 것이나, 인터넷에서 여러 사람들이 연개소문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시작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연개소문에 대해 토론을 하려면 연개소문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전제되고, 충분한 사료적 검토를 하면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함에도 현재까지의 논의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장 사람들이 오해하는 몇가지 부분들을 우선 지적하겠습니다.

첫째. 연개소문의 거사는 혁명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 고구려인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아야 한다. 유학자인 김부식의 눈으로 보아서 왕을 시해했다고 보면 안된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인의 지지를 받은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둘째.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연개소문 혁명과 관련이 없다.
- 당은 연개소문 혁명이전인 641년 부터 고구려 침략의 의사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셋째. 당나라는 연개소문 혁명에 대해서 처음에는 문제삼지 않았다.
- 보장왕의 즉위를 축하해주었으며, 나중에 침략명분과 이세민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신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연개소문의 행동을 문제 삼았을 뿐이다.

넷째.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내친 것은 전략적 행동이었다.
- 연개소문의 실수가 결코 아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구토회복의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강유역을 요구한 것이다. 또 신라를 버리고 백제를 택한 것은 고구려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다섯째. 연개소문은 642년 12월 혹은 643년 1월경에 이미 백제, 왜와의 국경정상화에 성공했고, 김춘추는 고구려, 왜와의 국교교섭에 실패하여 이미 궁지에 몰려있었다. - 신라는 이때 망국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642년 연개소문의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대한 기초적인 사료조차 고구려사의 태두라고 자임하는 분부터 제대로 보지 않는 상황이다. 신라를 강조하여 백제의 존재를 망각하는 사례조차 있다.
이런 것들이 우선 잘못이다.

그 밖에도 천리장성의 성격, 안시성 전투에 대한 오해, 주필산 전투와 연개소문의 전략에 대한 오해 등등.

이런 문제들은 기본적인 사료 조차 제대로 읽지 않고 그저 신,구당서 고려전, 삼국사기 등이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전부인냥 착각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기본 연구자료조차 제대로 알 지 못한 상태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3월말 경 내 책이 출간된 이후에 연개소문에 대한 폭넓은 사료가 공개된 이후에 내가 본 연개소문에 대해 여러분과 토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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