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릉비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를 보면 연도가 일년 씩 차이나는 문제는 고구려 연구자들에게는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 중에 하나다.
하지만, 단재의 주장처럼 삼국사기가 믿을 수 없다거나, 박영규가 말한 섭정시기 모두 근거가 없다. 삼국사기를 토대로 고국원왕 말년을 왕의 섭정 시기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쉽게 단정할 문제가 아닌 만큼, 좀 더 따져보자.
(아래 글은 내가 1999년에 썼던 미완성 논문에서 부분만 가져온 것입니다)
@@@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삼국사기』는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가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사의 연대의 정확성이다.
초기기록 부분에 관해서는 불신론, 수정론, 인정론 등으로 열띤 공방이 있어왔지만, 정작 개개의 연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는 충분한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연대가 의문의 대상이 되는 첫째 이유는 동양사 연대편년의 기준이 되는 간지표시가 삼국사기에는 연표를 제외하고는 본문 기사에 없다는데 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등은 전해오는 기록을 중심으로 먼저 연표를 만들고, 이어서 중국의 사료를 해당 연대에 하나 하나 삽입하여 전래 기록의 부족함을 메꾸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사료와 삼국사기의 사료간의 동일연대 기사에 대한 비교는 박성봉의 연구가 있어왔다.
하지만, 보다 정확한 기록인 당대의 금석문과 비교해서 연대를 비교해보면 삼국사기의 연대에는 부분적인 오류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연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조의 연대가 1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사기 연대의 착오가 단지 광개토대왕조에 국한되느냐에 있다. 본 논문은 삼국사기의 연대가 부분적으로 1년이 착오가 난 부분들을 찾아내어 그로 인해 생기는 각 기사들의 상관관계가 변함을 통해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부분적인 오류들을 지적해 보겠다.
1. 광개토대왕의 재위 연대에 대한 문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생몰연대에 관해 다음 기록이 있다.
二九等祚爲永樂太王………昊天不弔卅有九晏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
이 기록에서는 3가지의 연대를 추정해낼 수 있다.
첫째 광개토대왕의 즉위 연대
둘째 광개토대왕의 졸년 연대
셋째 무덤을 만든 연대
먼저 기준이 되는 것은 간지가 있는 연대가 무덤을 만든 연대는 갑인년. 그것은 서기 414년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는 광개토대왕의 즉위와 졸년에 관계가 없는 연대다.
즉위와 졸년의 기준은 영락 5년이 을미라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을미년은 서기 395년이다. 그럼으로 즉위년은 391년이다. 따라서 그의 출생연도는 391-18+1=374년이 된다.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이 391년이란 것은 이제는 상식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죽은 연대이다.
그가 39세에 죽었으므로, 391+(39-18-1)=412년이 된다.
그가 18세에 등극해 39세에 죽었으므로, 그의 재위연수는 분명 22년이며, 이것은 삼국사기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졸년은 희안하게도 413년으로 보고 있다. 이병도의 삼국사기를 비롯한 모든 번역본에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도대체 무엇이 금석문에 나와있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일까.
가장 확실한 근거는 삼국사기 장수왕 원년에 장수왕이 동진에 자사 고익을 동진에 보내어 국서를 전하고 저백마를 선물하고, 진의 안제로부터 고구려왕낙랑군공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송서와 남서 기록에 413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장수왕 원년은 413년이 정확하다고 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죽은 연도와 재위년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역사 연구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잘못된 연대 추론 방식이다.
고구려에서는 유월즉위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10월에 죽은 광개토대왕의 졸년은 곧 장수왕의 원년이 된다. 장수왕의 원년 또한 412년이 옳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고구려의 연대가 줄줄이 틀렸다는 말이 되는가.
여기서 앞서 이야기 한 바대로, 김부식이 먼저 왕들의 연표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중국의 기록을 맞추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즉, 김부식은 광개토대왕 이전부터 1년씩 줄줄이 연대를 뒤로 미루어 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대가 맞아 떨어지는 실제 맞아 떨어지는 연대가 생기게 된다. 지금부터 과제는 그 시점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먼저 장수왕의 즉위년이 412년으로 확정이 되면 현재까지 잘못 해석된 한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의 장례문제다. 광개토대왕은 412년 10월에 죽었는데, 비문은 414년 9월 29일에 세워졌다. 정확히 삼년상이 된다. 지금까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다음해에 비를 세웠다는 설은 잘못 된 것이다. 즉 기년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삼년상을 치뤘다는 것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서 고구려전에 다음의 기록을 보자.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낸다. 부모 및 남편의 상에는 모두 3년 복을 입고, 형제의 경우는 3개월간 입는다.
이 기록에서 고구려 말기까지 평민들도 3년상을 지냈는데, 하물며 왕이야 1년만에 지냈다고 볼 수는 없다.
백제의 경우 왕의 장례를 보여주는 것은 무령왕릉 지석이 있다. 무녕왕은 계유년이 523년 5월 7일에 죽었다. 안장일은 을사년인 525년 8월 12일로 만 2년 3개월 여의 간격이 있는 삼년상을 치렀다. 왕비의 경우는 병오년인 526년에 12월에 죽었고, 삼년상을 치르고 기유년인 529년 2월 1일에 대묘로 옮겨 정식 장례를 했다.
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3년상을 치룬 것이다.
2. 광개토대왕 즉위시 신라와 백제의 연대 착오.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이 391년이 됨에 따라 생기는 삼국사기의 착오는 타국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고구려와 타국과의 관련사를 비교해보자. 신라의 경우만을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의하면 내물이사금 37년은 서기 392년이 된다. 이해에 신라는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에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본기」에도 고국양왕 9년 봄에 신라사신과 볼모로 실성이 왔다는 같은 기록이 있고 연대도 역시 392년이 된다. 고국양왕은 그해 5월에 죽었으며, 광개토대왕이 그해에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의 연대는 『비문』에서 확인하였듯이 1년이 늦으므로, 고국양왕 9년은 392년이 아니라, 391년인 것이다.
즉, 신라에서 볼모를 보낸 것은 『비문』에 기록된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인 391년에 고구려에 온 것이다. 즉, 『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이사금조 연대도 1년이 늦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연대 잘못은 『삼국유사』〈내물왕과 김제상조〉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에는 제17대 나밀왕(那密王-내물이사금) 36년을 경인(庚寅)년 즉 390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내물이사금 36년은 서기 391년이 된다. 즉, 삼국유사의 연대가 오히려 비문의 실제 연대와 같은 것이다. 내물왕 37년은 392년이 아니라, 391년이라는 것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에 갔던 실성이 돌아온 내물이사금 46년은 401년이 아니라, 400년이 된다. 고구려군이 신라로 군대를 보내 적들을 몰아낸 바로 그해인 영락 10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성이사금이 왕이 되는 것은 402년이 아니라, 401년이 된다.
구 분, 내물36년, 내물37년, 광개토대왕즉위, 실성 즉위, 착오문제
광개토대왕릉비문, ......, ........, 391년 (신묘), ........, 없음
내물왕과 김제상조, 390년 (경인),........, ........., ........, 없음
삼국유사 연표, ........, ........, 392년 (임진), 402년 (임인), 1년 늦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391년 (신묘), 392년 (임진), .........., 내물 47년,1년 늦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고국원왕 9년, 고국원왕 9년(392), .........., 1년 늦음
실제 연대, 390년 (경인), 391년 (신묘), 391년 (신묘), 402년→401년, .........
『삼국사기』의 연대 잘못을 학계에서는 고국원왕의 재위기간이 9년이 아닌 8년이라고 해결을 해왔고, 광개토대왕의 연대를 1년을 늘이는 것으로만 해결했다. 하지만, 내물왕의 연대도 잘못된 것이다.
『삼국유사』「연표」의 잘못은 일연스님이 별도의 연대를 고증하기 보다는 『삼국사기』를 참조해 연표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된다. 반면, 〈내물왕과 김제상조〉는 『삼국사기』〈박제상열전〉과 다른 전승이나 기록을 참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연대가 실제와 같은 연대가 나온 것 같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삼국사기』의 다른 시기의 연대가 이와 같이 실제 연대와 차이가 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기록 자체의 신빙성을 놓고 다투는 초기기록 부분을 예외로 한다면 아직까지는 특별히 밝혀진바가 없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으로 『삼국유사』〈내물왕과 김제상조〉와「연표」의 연대가 다른 것에 대한 문제에서 「연표」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삼국유사』「연표」의 대본이 된 『삼국사기』의 기록도 고국원왕의 연대만이 아니라, 내물왕의 연대도 문제가 됨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결국 고구려는 신라를 단지 구원하여 백제, 가야, 왜를 물리친 것만이 아니라, 이 기회에 신라 정권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400년 7월 고구려는 군대를 신라영토내로 진입시킬때에 고구려에서 볼모 생활을 했던 실성을 함께 데리고 간 것이다. 고구려는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왜구를 몰아내는 신라구원작전이 종결된 401년 2월 년 신라의 내물이사금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정권을 세우고자, 실성을 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 이 외에도 삼국사기에서 연대가 1년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문자명왕의 사망연대 착오 등 여러 개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하지만, 단재의 주장처럼 삼국사기가 믿을 수 없다거나, 박영규가 말한 섭정시기 모두 근거가 없다. 삼국사기를 토대로 고국원왕 말년을 왕의 섭정 시기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쉽게 단정할 문제가 아닌 만큼, 좀 더 따져보자.
(아래 글은 내가 1999년에 썼던 미완성 논문에서 부분만 가져온 것입니다)
@@@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삼국사기』는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가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사의 연대의 정확성이다.
초기기록 부분에 관해서는 불신론, 수정론, 인정론 등으로 열띤 공방이 있어왔지만, 정작 개개의 연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는 충분한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연대가 의문의 대상이 되는 첫째 이유는 동양사 연대편년의 기준이 되는 간지표시가 삼국사기에는 연표를 제외하고는 본문 기사에 없다는데 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등은 전해오는 기록을 중심으로 먼저 연표를 만들고, 이어서 중국의 사료를 해당 연대에 하나 하나 삽입하여 전래 기록의 부족함을 메꾸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사료와 삼국사기의 사료간의 동일연대 기사에 대한 비교는 박성봉의 연구가 있어왔다.
하지만, 보다 정확한 기록인 당대의 금석문과 비교해서 연대를 비교해보면 삼국사기의 연대에는 부분적인 오류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연대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조의 연대가 1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사기 연대의 착오가 단지 광개토대왕조에 국한되느냐에 있다. 본 논문은 삼국사기의 연대가 부분적으로 1년이 착오가 난 부분들을 찾아내어 그로 인해 생기는 각 기사들의 상관관계가 변함을 통해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부분적인 오류들을 지적해 보겠다.
1. 광개토대왕의 재위 연대에 대한 문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생몰연대에 관해 다음 기록이 있다.
二九等祚爲永樂太王………昊天不弔卅有九晏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
이 기록에서는 3가지의 연대를 추정해낼 수 있다.
첫째 광개토대왕의 즉위 연대
둘째 광개토대왕의 졸년 연대
셋째 무덤을 만든 연대
먼저 기준이 되는 것은 간지가 있는 연대가 무덤을 만든 연대는 갑인년. 그것은 서기 414년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는 광개토대왕의 즉위와 졸년에 관계가 없는 연대다.
즉위와 졸년의 기준은 영락 5년이 을미라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을미년은 서기 395년이다. 그럼으로 즉위년은 391년이다. 따라서 그의 출생연도는 391-18+1=374년이 된다.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이 391년이란 것은 이제는 상식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죽은 연대이다.
그가 39세에 죽었으므로, 391+(39-18-1)=412년이 된다.
그가 18세에 등극해 39세에 죽었으므로, 그의 재위연수는 분명 22년이며, 이것은 삼국사기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졸년은 희안하게도 413년으로 보고 있다. 이병도의 삼국사기를 비롯한 모든 번역본에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도대체 무엇이 금석문에 나와있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것일까.
가장 확실한 근거는 삼국사기 장수왕 원년에 장수왕이 동진에 자사 고익을 동진에 보내어 국서를 전하고 저백마를 선물하고, 진의 안제로부터 고구려왕낙랑군공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송서와 남서 기록에 413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장수왕 원년은 413년이 정확하다고 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죽은 연도와 재위년수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역사 연구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잘못된 연대 추론 방식이다.
고구려에서는 유월즉위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10월에 죽은 광개토대왕의 졸년은 곧 장수왕의 원년이 된다. 장수왕의 원년 또한 412년이 옳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고구려의 연대가 줄줄이 틀렸다는 말이 되는가.
여기서 앞서 이야기 한 바대로, 김부식이 먼저 왕들의 연표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중국의 기록을 맞추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즉, 김부식은 광개토대왕 이전부터 1년씩 줄줄이 연대를 뒤로 미루어 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대가 맞아 떨어지는 실제 맞아 떨어지는 연대가 생기게 된다. 지금부터 과제는 그 시점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먼저 장수왕의 즉위년이 412년으로 확정이 되면 현재까지 잘못 해석된 한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의 장례문제다. 광개토대왕은 412년 10월에 죽었는데, 비문은 414년 9월 29일에 세워졌다. 정확히 삼년상이 된다. 지금까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다음해에 비를 세웠다는 설은 잘못 된 것이다. 즉 기년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삼년상을 치뤘다는 것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서 고구려전에 다음의 기록을 보자.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낸다. 부모 및 남편의 상에는 모두 3년 복을 입고, 형제의 경우는 3개월간 입는다.
이 기록에서 고구려 말기까지 평민들도 3년상을 지냈는데, 하물며 왕이야 1년만에 지냈다고 볼 수는 없다.
백제의 경우 왕의 장례를 보여주는 것은 무령왕릉 지석이 있다. 무녕왕은 계유년이 523년 5월 7일에 죽었다. 안장일은 을사년인 525년 8월 12일로 만 2년 3개월 여의 간격이 있는 삼년상을 치렀다. 왕비의 경우는 병오년인 526년에 12월에 죽었고, 삼년상을 치르고 기유년인 529년 2월 1일에 대묘로 옮겨 정식 장례를 했다.
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3년상을 치룬 것이다.
2. 광개토대왕 즉위시 신라와 백제의 연대 착오.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이 391년이 됨에 따라 생기는 삼국사기의 착오는 타국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고구려와 타국과의 관련사를 비교해보자. 신라의 경우만을 살펴보자.
삼국사기에 의하면 내물이사금 37년은 서기 392년이 된다. 이해에 신라는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에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고구려본기」에도 고국양왕 9년 봄에 신라사신과 볼모로 실성이 왔다는 같은 기록이 있고 연대도 역시 392년이 된다. 고국양왕은 그해 5월에 죽었으며, 광개토대왕이 그해에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의 연대는 『비문』에서 확인하였듯이 1년이 늦으므로, 고국양왕 9년은 392년이 아니라, 391년인 것이다.
즉, 신라에서 볼모를 보낸 것은 『비문』에 기록된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인 391년에 고구려에 온 것이다. 즉, 『삼국사기』「신라본기」내물이사금조 연대도 1년이 늦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연대 잘못은 『삼국유사』〈내물왕과 김제상조〉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에는 제17대 나밀왕(那密王-내물이사금) 36년을 경인(庚寅)년 즉 390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내물이사금 36년은 서기 391년이 된다. 즉, 삼국유사의 연대가 오히려 비문의 실제 연대와 같은 것이다. 내물왕 37년은 392년이 아니라, 391년이라는 것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에 갔던 실성이 돌아온 내물이사금 46년은 401년이 아니라, 400년이 된다. 고구려군이 신라로 군대를 보내 적들을 몰아낸 바로 그해인 영락 10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실성이사금이 왕이 되는 것은 402년이 아니라, 401년이 된다.
구 분, 내물36년, 내물37년, 광개토대왕즉위, 실성 즉위, 착오문제
광개토대왕릉비문, ......, ........, 391년 (신묘), ........, 없음
내물왕과 김제상조, 390년 (경인),........, ........., ........, 없음
삼국유사 연표, ........, ........, 392년 (임진), 402년 (임인), 1년 늦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391년 (신묘), 392년 (임진), .........., 내물 47년,1년 늦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고국원왕 9년, 고국원왕 9년(392), .........., 1년 늦음
실제 연대, 390년 (경인), 391년 (신묘), 391년 (신묘), 402년→401년, .........
『삼국사기』의 연대 잘못을 학계에서는 고국원왕의 재위기간이 9년이 아닌 8년이라고 해결을 해왔고, 광개토대왕의 연대를 1년을 늘이는 것으로만 해결했다. 하지만, 내물왕의 연대도 잘못된 것이다.
『삼국유사』「연표」의 잘못은 일연스님이 별도의 연대를 고증하기 보다는 『삼국사기』를 참조해 연표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된다. 반면, 〈내물왕과 김제상조〉는 『삼국사기』〈박제상열전〉과 다른 전승이나 기록을 참조해 만들었기 때문에, 연대가 실제와 같은 연대가 나온 것 같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삼국사기』의 다른 시기의 연대가 이와 같이 실제 연대와 차이가 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기록 자체의 신빙성을 놓고 다투는 초기기록 부분을 예외로 한다면 아직까지는 특별히 밝혀진바가 없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으로 『삼국유사』〈내물왕과 김제상조〉와「연표」의 연대가 다른 것에 대한 문제에서 「연표」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삼국유사』「연표」의 대본이 된 『삼국사기』의 기록도 고국원왕의 연대만이 아니라, 내물왕의 연대도 문제가 됨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결국 고구려는 신라를 단지 구원하여 백제, 가야, 왜를 물리친 것만이 아니라, 이 기회에 신라 정권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400년 7월 고구려는 군대를 신라영토내로 진입시킬때에 고구려에서 볼모 생활을 했던 실성을 함께 데리고 간 것이다. 고구려는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왜구를 몰아내는 신라구원작전이 종결된 401년 2월 년 신라의 내물이사금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정권을 세우고자, 실성을 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 이 외에도 삼국사기에서 연대가 1년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문자명왕의 사망연대 착오 등 여러 개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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