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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Re:거란족에 관하여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04.09.01|조회수504 목록 댓글 0
거란족에 대한 질문사항인데요.
고구려시대에 거란족 또한 말갈족과 같이 일종의 고구려의 용병으로 활동했는지요.
활동을 했으면 그 시기는 언제쯤이며 참여 했던 전투중 대표적인 전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당시 거란족의 주거지가 요서지역 지금의 중국 요녕성 조양과 부신일대라고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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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족이 고구려의 용병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고구려가 거란족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광개토대왕의 비려 정벌을 그 깃점으로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거란족은 대체로 4세기 말에 과거 선비족이 거주하던 요서북부 일대에 등장하여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던 시점까지 고구려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었습니다.
요녕성 조양과 부신일대라는 것은 극히 적은 부분을 의미합니다. 주된 분포지는 송막지방, 요해지방, 요서북부 등이라 일컫어지는 대흥안령산맥 남쪽과 노합하, 시라무렌강 유역이고, 때에 따라서는 조양과 부신, 북진 부근으로 남하해오기도 합니다.

거란족이 고구려의 용병으로 활동해던 구체적인 사항을 살펴보면,
먼저 문자명왕 년간에 거란이 북위를 습격하여 그 백성들을 데려온 사건에 대해서 북위에서 봉의라는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에 항의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것은 고구려가 거란을 이용해 북위의 변방을 괴롭혔다는 사건으로, 즉 거란이 고구려의 용병으로 활용되었다는 사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례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삼국사기 영양왕 22년조에도 보이는(611년 수양제의 조서) 기록에는 고구려가 거란의 무리를 아울러 수나라의 연해 방수자들을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또한 남생이 666년 배반할 때에도 국내성에서 거란의 무리가 함께 행동했던 기록이 보입니다.

보다 자세한 거란족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3년에 집필한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350-375쪽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단, 님이 말한 대표적인 전투는 남아있는 기록의 대부분이 중원측의 기록인 만큼,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떤 전투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란과 고구려의 관계에 관해서도는 동아시아 역사토론장 1,2,3번 글로 고구려와 거란, 고려와 거란, 발해와 거란 관계를 써둔 바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1번 글을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좀 오래된 글이기는 하지만, 참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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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분들과 요사 공부를 위하여 사전에 준비했던 자료입니다. 논문이 아니고 단지 기본적인 기초지식의 점검을 위해 만든 토론용 자료일 뿐입니다. 따라서 나만의 핵심적인 연구성과들은 당연히 빠져있습니다. 하지만 거란족 문제는 우리 역사와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일정한 지식을 우리가 가져야만 합니다. 몇년 전에 썼던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遼史 공부를 위한 사전 준비 지식 1


2000. 6. 29일 작성


1. 고구려와 거란의 관계사
고구려에게 거란 지배는 대륙정책의 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고구려와의 최초의 만남
소수림왕 8년(378)에 처음 거란이 북쪽 변경지역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여기서 부락(部落)이란 농경보다는 유목 내지는 어업 및 수렵에 보다 의존도가 높은 생활을 하며 추장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단위집단으로 고구려 내부의 중심지역이 아닌 변경지대에서 주로 보이는 지역 단위다. 말갈부락, 양맥부락, 숙신부락 등이 그것이다. 이들을 공격하여 약탈해간 거란족 역시 부락단위로 생활하고 있었다.

2) 거란의 거주지의 중요성
거란족은 흉노와 오환, 선비족이 각기 유럽과 만리장성 이남으로 떠난 후 비어있는 서요하 중상류일대에 자리잡고 성장해온 유목민이다. 이들이 차지한 지역은 동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유연, 남으로는 북위가 자리하고 있어 각국의 이해가 교차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거란족을 지배하는 자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좌우할 수 있었다.

중원의 국가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 동쪽으로 고구려 주변의 물길, 실위, 해, 두막루 등 주변 소국과의 연대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게되고, 고구려가 유연 등 유목제국과 연대하여 중국을 위협할 고리를 끊게 된다. 반면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 중원지역 국가들의 동방진출을 막을 수 있어 동방지역의 패자로서 군림하는데 방해세력을 없게 할 수 있다. 또한 유목국가들에 대한 통제도 가능해져 유목세계를 지배한 유연이나 돌궐과의 관계에도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된다.

고구려 초기 선비족을 통제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일정한 진출을 모색해왔던 고구려는 모용선비족이 강력해지면서 사실상 이 지역진출을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용선비족이 만리장성 이남으로 내려가 중원국가를 자처하고, 거란족이 새롭게 등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면서부터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갖게 되었다.

3) 광개토대왕과 거란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 2년(392)에 거란을 쳐 남녀 500명 사로잡고, 고구려에서 잡혀갔던 1만명의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달래어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영락 5년(395)에 광개토대왕이 비려(裨麗)가 노략질을 그치지지 않으므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고 한다. 이때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소금강(鹽水)에 이르러 3개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와 말, 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 북풍(北豊-요양시 북쪽) 등으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비려는 거란 8부의 하나인 필혈부(匹絜部)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들의 위치는 소금강이 있는 지금의 서요하 중상류 지역이었다. 영(營)은 거란인의 가옥인 천막으로 구성된 소규모 마을을 의미한다. 이때 고구려에서 소와 말, 양 등을 무수히 빼앗았던 것은 거란 사회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 공격은 고구려의 주된 적국이었던 후연(後燕)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기에 광개토대왕은 요하 하류의 국경지대를 돌아보고 온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정벌 이후부터 거란은 고구려의 통제를 받게 된다.

4)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벌과 거란
거란족 정벌을 끝낸 고구려는 402년 5월 후연의 수도 용성에서 가까운 숙군성을 공격하여 일시 점령하였고, 404년에는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燕郡)을 공격하였으나 후연은 곧장 반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15년(405)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후연왕인 모용희는 다음해 2월에 느닷없이 거란을 공격한다.

그런데 거란을 공격하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음을 꺼리어 돌아가려 하다가 병사들을 중무장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런데 후연군은 무려 3천여리나 행군하여 말과 병사들이 피로하여 얼어죽는 자가 길에 즐비하였고,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하다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되돌아간다. 그리고는 17개월만인 407년 7월에 모용희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후연은 멸망한다.

왜 갑자기 후연에서는 거란을 공격했던 것일까. 당시 후연을 멸망시키려고 한 것은 고구려였고, 거란은 고구려에게 굴복하였으며, 역사무대에 등장한 지 얼마안된 세력에 불과했었는데 고구려의 침입을 눈앞에 두고 거란을 공격한 것은 단지 그들의 위협, 혹은 약탈을 방지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의 지시를 받아 후연을 괴롭힌 거란부터 먼저 꺽어 놓으려는 그들의 작전으로 볼 수 있다. 후연군대가 3천여리나 방황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거란 연합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후연이 거란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고, 그 공격에서 실패하여 국가가 멸망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5) 장수왕 시기의 거란
장수왕 시기에는 거란에 대해 보다 강도높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행사된다.
『위서』〈거란전(契丹傳)〉에
ꡒ479년 고구려는 유목제국인 유연과 함께 거란의 북쪽에 있는 지두우(地豆于)를 함께 분할 점령할 것을 모의하자, 거란은 고구려와 유연의 군사행동이 두려워, 그 막불가 물우(勿于)가 그 부락과 수레 3천대와 백성 만여명을 거느리고 가축을 몰아서, 북위에 소속되기를 구하며 백랑수의 동쪽에 이르렀다ꡓ는 기록이 있다.

『수서』〈거란전〉에
ꡒ후위때를 당하여 거란은 고구려에게 침략을 당해서 부락의 인구 만여명이 후위에 붙기를 원하여 백비하에 이르렀다ꡓ는 기록은 『위서』의 내용을 보충하여 준다.

고구려는 지두우 분할을 단지 모의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지두우를 분할함은 물론 거란을 공격하여 당시 거란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다. 당시 거란사회는 거란부를 중심으로 물우부 등 8개부족의 연맹체였는데,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연맹체가 완전히 붕괴된다.

거란과 지두우에 이웃한 고막해(庫莫奚)족이 480년 갑자기 북위 영역내로 들어와 지두우의 약탈이 두렵다고 북위에게 호소하였다는 기록이 『위서』〈고막해전〉에 있다. 고구려와 유연의 군사행동은 지두우족이 원주지를 떠나 이웃한 고막해 지역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고막해가 북위쪽으로 도망간 것이다. 고구려와 유연은 두 나라 사이에 있던 지두우, 거란, 고막해 등에 대한 일대 작전을 펼쳐 세력판도를 확정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6) 문자왕 시절의 물길의 발흥과 거란 지배 재강화
그런데 고구려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온 물길(勿吉)이 475년과 478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물길은 고구려의 변경 10여부락을 격파하는 힘을 키웠는데, 대담하게도 백제와 북위와 연결지어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북위에 제안하였다. 물길이 남쪽의 백제와 연합한다는 것이 실현불가능할 일로 여겨지고, 『위서』의 기록이라서 북위의 희망을 담은 내용일 수는 있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안보에 대단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물길의 사신이 북위에 이르는 경로는 강을 따라 몰래 고구려의 농경지대를 크게 우회하여 거란의 서쪽 국경을 타고 대릉하 중류의 조양지방에 이르는 길이었다. 고구려는 이 길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지두우 분할 작전을 유연과 함께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길이 쉽게 약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길은 거란 8부중 유연과 고구려에 속하지 않고 약해진 몇몇 세력들을 비롯해 주변의 작은 소국들을 규합하였던 것 같다. 485년과 486년 물길은 북위에게 주변의 여러 소국들의 대표한 사절단을 보낸다. 물길의 득세는 고구려의 보다 적극적인 북방 경영의 필요성을 가져왔다. 고구려는 494년 북부여를 완전히 병합한다. 문자명왕 13년(504)에서 16년(507)사이에 고구려는 물길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물길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거란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강화했다. 그것은 거란이 북위와 물길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유연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라이벌인 북위의 동방진출을 억제하고 동방사회에서 안정적인 고구려만의 천하(天下)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 입구가 되는 거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위서』〈봉의전(封懿傳)〉에는 ꡒ고구려 문자명왕이 병(病)을 핑계로 사신으로 간 봉궤를 만나주려고 하지 않다가 겨우 만나주었다. 이에 앞서 거란이 북위 변방의 백성 60여명을 약탈하였고 또 고구려의 호위하에 북위의 변방 백성을 약탈하여 동쪽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봉궤가 그러한 일에 대해서 항의하자, 고구려 문자명왕이 거란이 노략해간 재물과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ꡓ는 기록이 있다. 480년 이후로 고구려의 거란 지배는 보다 확고해져서 거란병을 이용해 고구려가 북위의 변경을 수시로 공격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북위에서는 거란의 종주국인 고구려에 항의사절을 보낸 것이다.

7) 돌궐의 발흥과 거란 쟁탈전
520년대에 오면 북위가 약해지면서, 고구려는 동방지역에서 더욱 번영을 누린다. 하지만, 550년대에 오면 고구려의 우방이었던 유연이 돌궐(突厥)에게 멸망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된다. 남쪽의 신라와 백제 연합군의 공격까지 받는 고구려는 결국 신라와 밀약을 통해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내주는 대신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도록 하여 남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서둘러 북쪽 국경에 대한 대비를 한다. 특히 거란족에 대한 지배권을 놓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다. 553년 북위를 계승한 북제(北齊)는 대규모 군대로 거란을 공격한다. 북제는 554년 이후 돌궐의 침입을 우려 자신의 방어에 치중함으로써 고구려에 더 이상의 위협은 되지 않았지만, 고구려로서는 거란지배권을 놓고 돌궐과 대결해야 했다.

『수서』〈거란전〉에는 “거란족이 돌궐의 핍박을 받자 만여가구가 고구려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후 거란의 한 개 부족(別部)인 출복부(出伏部) 등이 고구려를 배반해서 수(隋)나라에 붙게되자, 이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과 정면대결을 벌였는데, 말갈족과 연합해서 그들을 크게 물리치기도 했다. 그래서 거란족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가졌던 것이다. 물론 거란족 가운데 일부는 과거 유연에 속했던 것처럼 돌궐에 속하기도 했다. 돌궐은 토둔(土屯)이란 관리를 두어 그들을 통솔했었다.

8) 수와의 거란 쟁탈전
도리어 문제는 수(隋)가 등장한 6세기 후반이었다. 고구려를 배신한 출복부가 수의 세력권에 든 것을 비롯해서 590년대 말에는 4천여 가구의 거란족이 돌궐을 배신해 수에 붙었던 것이다. 이때는 거란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 돌궐, 수가 치열한 경쟁을 벌린 셈이다. 고구려는 거란족 세력을 이용해 599년에는 수나라 요서지방의 해안기지를 공격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중에는 적절히 거란족을 활용해서 요서지역에서의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요서지역에서 1차로 막아 저들이 장기전을 치룰 힘을 상실하게 했다. 612년 전쟁에서 수나라가 보급로를 지키던 별동대 30만 5천을 뽑아 평양을 공격하게 했지만, 이들이 살수에서 대패한 것은 군량이 보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공격을 하다가 스스로 자멸한 면이 많았다. 결국 살수대첩도 크게 보면 고구려가 거란을 지배하며 요서지역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신당서(新唐書)』〈남생전(南生傳)〉에는 남생이 동생인 남건과의 권력다툼에서 패해 국내성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말갈과 거란의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 말기까지 거란족의 일부를 지속적으로 통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각해볼 문제
1. 『삼국사기』보장왕 13년 10월조에
ꡒ왕이 장수 안고를 시켜 군사를 내어 말갈병과 함께 거란을 쳤다. 거란의 송막도독 이돌가가 이를 막아 아군을 신성에서 크게 물리쳤다.ꡓ는 기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2. 고구려와 발해의 대외 관계의 지위상의 차이 문제를 거란 문제와 함께 생각해보자.
3. 유목사회인 거란족을 고구려는 어떤 식으로 지배했을까.

앞으로의 과제
1. 거란사회에 미친 고구려의 영향을 요사에서 찾아보자.

** 참고자료 : 요태조 - 성은 야율, 이름은 아보기

거란족은 요하 상류인 황수: 서납목윤하
거란추장 기선한(奇善汗)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어 후에 8부의 시조가 되었다.
당이 건국하자, 거란은 추장 손오조가 당에 內附하고 말았다. 당 태종이 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잡아 귀부시키자, 거란추장 曲據도 무리를 이끌고와서 내부했다. 당조는 곡거의 땅에 현주를 설치하고, 곡거를 현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영주 도독부에 예속시켰다.
얼마 후, 거란추장 窟哥가 당에 귀부하자, 당나라는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굴가를 송막도독에 임명하고 이씨 성을 주었다. 이에 거란의 별부추장들이 속속 당나라에 귀부하고, 당은 그들을 모두 자사에 임명하고, 종전대로 그 지역을 통솔하게 했다.
해족 또한 당에 귀부하였고, 당은 해부 땅에 요락부를 설치하고, 해의 추장 가도를 도독으로 임명했다.

측천무후 때 이굴가의 자손인 이진충이 송막도독이 되었고, 손오조늬 손자 만영은 귀성주자사가 되었다. 손만영은 이진충의 처형으로 영주도독 조문홰의 차별대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진충은 무상가한, 손만영을 장군으로 삼아 대항했다. 이진충이 죽고, 손만영이 거란군 지위함. 이때 이진충이 병으로 죽고 손만영이 거란군 지휘하였다. 돌궐가한 묵철이 당에 협조하여 손만영을 격파함.
여러차례 당의 공격과 거란족과 작전을 해오던 해족이 반란을 일으켜 손만영이 패배하였다.
이후, 당 현종 시절에 거란을 어양 등지를 공격하였고, 이에 당은 기미정책을 펼쳐 거란의 대추장 이실활을 송막군왕으로 삼았다. 이후 사고, 울간, 토간 등이 게속 송막왕이 되는 등 당에 간접적인 복속을 하며 지냈다.

안사의 난이후 당이 약화되자, 거란은 위구르(회홀)에게 의탁하다가 당에 의탁하는 등 점차 세력을 성장시켰다. 당 말엽에는 북쪽은 실위(흑룡강일대), 동쪽은 고려, 서쪽은 내몽고동부의 해국, 남쪽은 영주에 이르렀다.

8부족은 단이개부, 을실활부, 실활부, 약니부, 빈몰부, 내회계부, 집해부, 해온부 였다.

아보기의 세계
섭랄 -필탑 - 해란 - 노이소 - 살랄달 - 이덕실 - 색륵달 - 아보기로 이어짐

아보기는 약니부에 속했으며, 872년에 태어났다. 아보기의 조상들은 거란 대추장의 보좌관이었다.
이덕실에 대해서는 농사일을 가르치고 목축을 잘하여서 나라는 더욱 더 부유하였다.
색륵달은 처음으로 鐵冶를 하였다고 했다. 그의 집안의 대대로 거란의 권력을 잡았고, 아보기는 어린 시절에 거란왕의 호종관이 되었다.
아보기는 29세때 901년 거란왕 요련이 왕위에 오를 때 주변의 족속을 토벌하여 큰 권력을 가졌다. 33세때 우월(재상에 해당)이 되어 군국대사를 총괄하였다.
36세에 아보기는 거란왕 요련의 유명으로 왕이 되었다.
8부 대추장은 규정상 임기가 3년이고, 임기만료 후 반드시 다시 선거를 했다. 8부가 그의 연맹대추장직을 파면하였다가 별도로 아보기를 선임하여 천황왕으로 삼았다. 아보기는 외국 정벌과 당과의 관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911년 천황왕이 몸소 서부해(奚)를 정벌하였고, 동부해도 평정하였다.
거란 건국을 907년 그가 천황왕에 즉위한 해로 잡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916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아보기는 3년씩 연임을 하고 정권을 내놓지 않아 8부의 전통을 깼다. 그것은 중국인 투항자의 영향도 크다. 아보기는 한족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세력이 날로 커졌기 때문이다. 아보기는 자리를 내놓으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8부의 대인들을 초대하였다가 모두 죽이고, 대거란왕이 되었다.


---> 이 당시 글을 쓸 때에는 650년대 고구려와 거란 관계에 관해서, 의도적으로 쓰지를 않았습니다. 연개소문책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 글이 빠져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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