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 적으신 것중에 문제가 되는 것을 보겠습니다.
뭐 거의 마지막 글이 될 듯 합니다.
1.신당서 해석의 문제점.
님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동경요양부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으니, 평양도 요동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당서에 나와있는 이 기록에서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전혀없음. 그것은 님이 요동에 평양이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신당서를 제가 보지 않아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자치통감에 나와있는 안동도호부의 이동경로를 적어보겠습니다.
<안동도호부의 이동경로>
총장원년(668년∼773년 :6년간 존속):평양성
⇒상원원년(674년∼676년 :3년간 존속):요동군
⇒의봉이년(677년∼713년:37년간 존속):신성
⇒개원이년(714년∼742년:29년간 존속):평주
⇒천보이연(743년):요서
님의 말씀대로 신성에 대한 설명이 따로 있다면 요수를 건너 500리라는 표현은 요동군을 가르키는 것 밖에는 다른 해석은 불가능 합니다. 특히 안동도호부는 한나라 양평성이라고 한 데에 있어 한나라의 양평성이 고구려의 요동성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요동성지역이 안동도호부의 치소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입니다.
2.요사자체의 문제점.
님이 근거로 제시한 요사를 보겠습니다.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漢末公孫度所據,傳子康;孫淵,自稱燕王,建元紹漢,魏滅之.晉陷高麗,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爲平州牧居之.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唐高宗平高麗,於此置安東都護府;後爲渤海大氏所有...忽汗州爲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太祖建國,攻渤海,拔忽汗城.
다시 해석: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한말 공손도가 이곳에서 웅거했다.
손자 공손연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건원이라 하여 한을 이었으나 위에게 멸했다.
[晉陷高麗(해석불능) 유정님처럼 해석해서는 안됨. 님은 진이 고려를 공격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였으나. 여기서의 陷은 능동사가 아닌 피동사이므로 진이 고려에게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되나 이것또한 기록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할수 없고 만약 진이 쳤다는 뜻으로 하기 위해서는 攻나 拔를 써야 함. 그렇기 때문에 문구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판단] 후에 모용수에게 귀속되었다. 아들 모용보는 구려왕안으로써 평주목으로 하고 다스리게 하였다.[거주했다라고 한다면 당시의 수도도 또한 요동방면으로 생각해봐야겠지만, 당시의 정황을 사서를 참고하여 본다면 居자를 거주하다가 하닌 다스리다로 해석해야 함]
원위태무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왕이 거주하는 곳인 평양성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본래 요동경이다. 당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후에 발해대씨가 여기에 있었는데... 홀한주는 옛 평양성며. 중원현덕부라고 부른다.
요사의 내용은 동경요양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평양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술한 것이 아닙니다. 즉, 맨 아래 나와있는 홀한주도 동경요양부와 연관을 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홀한주는 제2송화강이 흐르는 지역으로써 동모산이 있는 곳이며 중경현덕부가 있는 곳입니다.
동경요양부를 설명하면서 뜬금없이 중경현덕부가 나왔다는 것은 당시 편찬자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아니라고도 할 수는 없겠죠.
어쨌든 어느정도의 사실성에 입각하여 편찬했으니까요.
요사의 이 문장은 장수왕의 평양이 요양이라는 근거로 많이 사용되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미 님은 밑에서 장수왕의 평양은 현 평양으로 보고 있다라고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서로 근거를 대십니까?
그럼 이제 밑에서 님이 근거로 대신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광개토태왕이 평주목으로 임명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서의 오기로 보에도 힘듭니다.
우선 중국사서편찬자들은 고구려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습니다. 발기의 문제도 그러하고 동천왕의 이름인 우위거를 놔두고 위궁이라 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지 않나,엄연히 살아있는 태조대왕이 죽었다고 하는 실수도 당대에는 벌어집니다.
(후한서 고구려전 요광은 상소를 궁(태조대왕)이 죽었으니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한다.<121년 4월> 그러나 그해 가을에도 태조대왕은 군사를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한다.)
당대에도 그러한데, 동시대가 아닌 시대에서 남의 나라 인물들의 이름을 정확히 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이 다르다는 것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근거가 희박합니다. 뿐만 아니라 양서에는 안-고련-운-안의 계보가 나오고 북사에는 분명히 안이 요동군을 경략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문자명왕이나 안장왕을 광개토태왕으로 잘못 기재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이 平州牧 遼東帶方二國王이라는 작위를 임명받은 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없으나 중국사서에는 있는 예는 백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동진에게 작위를 임명받은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진서 제기 간문제에는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라 하여 작위수여가 나옵니다. 물론 여기서의 餘句라는 인물이 근초고왕이냐 아니냐 라는 문제도 있겠지만 당시 시대가 근초고왕이었고 동진과 통교한 시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근초고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용보가 광개토태왕에게 내려주었다는 平州牧 遼東帶方二國王에 문제될 소지는 적다고 봅니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세웠다는 기록.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즉, 평양이 요동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편찬자는 정확한 지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사는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나라때 만들어진 것으로 삼국사기보다도 100년이나 후에 편찬된 것입니다. 연대도 삼국사기보다 늦고 자기나라의 것이 아닌 남의 나라의 수도에 대해 그렇게 정확한 정보와 자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안동도호부가 평양에서는 6년이라는 짧은 존속기간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요동지역에서는 4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있었기 때문에 당시 편찬자로서 안동도호부가 원래 요동에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요사자체를 보면 역시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냄새가 풍깁니다.
물론 역사서를 만들 때 전대의 역사서를 참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요사의 지금 이 내용은 다른 사서 몇 개를 합쳐놓은 듯한 인상이 느껴집니다.
1. 공손도가 요동지방에서 웅거하였다는 것 ⇒ 삼국지
2. 모용보가 구려왕 안에게 평주목을 내려주었다는 것 ⇒ 양서
3. 태무제때 사신이 평양에 갔다는 것 ⇒ 위서
4. 당나라가 평양을 점령하고 안동도호부를 세웠다는 것 ⇒ 신구당서
시대가 다른 이 사서들을 참고한 것이 역력히 보입니다.
그리고 이 것으로 인해 왜 편찬자가 동경요양부를 거론하면서 평양성에 대해 기록했는지도 이해할수 있게 합니다.
이 분명히 태무제때 사신이 평양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 편찬자는 요사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서에는 당나라가 평양을 점령하고 거기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다는 기록도 보았기 때문에 그 기록에 맞춰 요사 동경요양부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기록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존속해 있던 기간은 6년 뿐입니다.
그 후 요동군과 신성을 거치면서 40년이 넘게 요동지방에 안동도호부는 있게 됩니다.
그렇게됨으로써 요사의 편찬자로 하여금 원래부터 요동지방에 안동도호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오해의 소지는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안동도호부는 평양에 세웠으니 평양이 요동지방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것이고, 위서의 기록에서는 위의 사신이 평양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때의 평양도 안동도호부가 있었던 평양이라고 생각을 하고 기록했을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물론 이 것은 편찬자가 제 3자이며 제 3의 국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부정확하다는 근거에서 추측한 것일뿐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사의 이 기록은 장수왕의 평양성이 요동지방에 있었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는 사용할 수는 있으나 유정님처럼 문자명왕대에 옮겨갔다는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3.장수왕대의 북위와 외교
장수왕대의 외교에 대해 북위에 대해 저자세였으나 문자명왕때와 안장왕때에 이르러서는 북위와의 긴장상태가 이루워졌다고 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만의 기록을 봐서는 북위에 대한 조공이 문자명왕때도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營平二州諸軍事라는 직책 그것도 북위가 준 것이 아닌 남조에서 준 것을 근거로 영평주를 직접다스렸다고 하거나 북위와의 전쟁상태가 조성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장수왕때에 북위보다 우세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북연왕 풍홍구출사건, 물길, 백제가 북위에게 고구려에 대해 침략을 부탁하지만 거절한 사건
정혼사건(삼국사기와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북위가 먼저 정혼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나와있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먼저 정혼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정확히는 김용만선생님이 님의 글을 읽고 답변할 때 거론할 것임.)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죽었을때의 북위 황제의 행동.
등을 봐야지 무조건 사서에 조공했다고 하여 조공을 했구나 라고 하는 것은 앞뒤 상황을 보지 못하고 무조건 사서를 믿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님은 미국이 한국에게 경제권을 빼앗겼다 라든가, 하는 기록을 남기고 나서 몇 백년 후에 그 기록만 보고 당시 미국과 한국의 국력은 생각하지 않는채 미국이 한국에게 경제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실 겁니까?
그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한국보다 강대국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 입니다.
철저한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이 국제사회입니다.
고구려가 분명 북위와 비교해도 뒤지는 국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록에 조공을 바쳤다라고 나온다고 진짜로 믿으십니까?
그리고 효창연간(525∼528)에 고구려군이 북위의 영토인 조양을 공격하여 平州司馬諮議參軍 이었던 한기의 아버지인 한상을 잡아갔다는 묘지명을 보아 그 전까지의 고구려의 영토는 조양을 넘지 못하며 그것은 營平二州諸軍事라는 작위가 단순한 명목상의 작위이지 실질적인 작위였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4.원사문제
아직까지도 원사문제에 대해 거론을 하시는군요.
요동의 평양은 아직까지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수도로 볼 수 없습니다.
문헌자료만 봐서도 그렇습니다.
拔平壤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님이 말씀하신대로 문자명왕때에 옮겼다는 근거는 제가 용산문제와 남쪽바다 순수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근거가 희박한 문제이고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고국원왕~ 장수왕때까지 졸본에 가지 않은 기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가지 못했다고 했으나 장수왕때 갔을 것이라는 것은 제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왕때 천도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천도를 할 만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뭐 거의 마지막 글이 될 듯 합니다.
1.신당서 해석의 문제점.
님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동경요양부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으니, 평양도 요동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당서에 나와있는 이 기록에서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전혀없음. 그것은 님이 요동에 평양이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신당서를 제가 보지 않아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자치통감에 나와있는 안동도호부의 이동경로를 적어보겠습니다.
<안동도호부의 이동경로>
총장원년(668년∼773년 :6년간 존속):평양성
⇒상원원년(674년∼676년 :3년간 존속):요동군
⇒의봉이년(677년∼713년:37년간 존속):신성
⇒개원이년(714년∼742년:29년간 존속):평주
⇒천보이연(743년):요서
님의 말씀대로 신성에 대한 설명이 따로 있다면 요수를 건너 500리라는 표현은 요동군을 가르키는 것 밖에는 다른 해석은 불가능 합니다. 특히 안동도호부는 한나라 양평성이라고 한 데에 있어 한나라의 양평성이 고구려의 요동성이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요동성지역이 안동도호부의 치소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입니다.
2.요사자체의 문제점.
님이 근거로 제시한 요사를 보겠습니다.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漢末公孫度所據,傳子康;孫淵,自稱燕王,建元紹漢,魏滅之.晉陷高麗,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爲平州牧居之.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唐高宗平高麗,於此置安東都護府;後爲渤海大氏所有...忽汗州爲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太祖建國,攻渤海,拔忽汗城.
다시 해석: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한말 공손도가 이곳에서 웅거했다.
손자 공손연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건원이라 하여 한을 이었으나 위에게 멸했다.
[晉陷高麗(해석불능) 유정님처럼 해석해서는 안됨. 님은 진이 고려를 공격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였으나. 여기서의 陷은 능동사가 아닌 피동사이므로 진이 고려에게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되나 이것또한 기록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할수 없고 만약 진이 쳤다는 뜻으로 하기 위해서는 攻나 拔를 써야 함. 그렇기 때문에 문구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판단] 후에 모용수에게 귀속되었다. 아들 모용보는 구려왕안으로써 평주목으로 하고 다스리게 하였다.[거주했다라고 한다면 당시의 수도도 또한 요동방면으로 생각해봐야겠지만, 당시의 정황을 사서를 참고하여 본다면 居자를 거주하다가 하닌 다스리다로 해석해야 함]
원위태무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왕이 거주하는 곳인 평양성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본래 요동경이다. 당고종이 고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후에 발해대씨가 여기에 있었는데... 홀한주는 옛 평양성며. 중원현덕부라고 부른다.
요사의 내용은 동경요양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평양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술한 것이 아닙니다. 즉, 맨 아래 나와있는 홀한주도 동경요양부와 연관을 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홀한주는 제2송화강이 흐르는 지역으로써 동모산이 있는 곳이며 중경현덕부가 있는 곳입니다.
동경요양부를 설명하면서 뜬금없이 중경현덕부가 나왔다는 것은 당시 편찬자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아니라고도 할 수는 없겠죠.
어쨌든 어느정도의 사실성에 입각하여 편찬했으니까요.
요사의 이 문장은 장수왕의 평양이 요양이라는 근거로 많이 사용되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미 님은 밑에서 장수왕의 평양은 현 평양으로 보고 있다라고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서로 근거를 대십니까?
그럼 이제 밑에서 님이 근거로 대신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광개토태왕이 평주목으로 임명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서의 오기로 보에도 힘듭니다.
우선 중국사서편찬자들은 고구려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습니다. 발기의 문제도 그러하고 동천왕의 이름인 우위거를 놔두고 위궁이라 하여 자신들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지 않나,엄연히 살아있는 태조대왕이 죽었다고 하는 실수도 당대에는 벌어집니다.
(후한서 고구려전 요광은 상소를 궁(태조대왕)이 죽었으니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한다.<121년 4월> 그러나 그해 가을에도 태조대왕은 군사를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한다.)
당대에도 그러한데, 동시대가 아닌 시대에서 남의 나라 인물들의 이름을 정확히 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이 다르다는 것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근거가 희박합니다. 뿐만 아니라 양서에는 안-고련-운-안의 계보가 나오고 북사에는 분명히 안이 요동군을 경략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문자명왕이나 안장왕을 광개토태왕으로 잘못 기재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이 平州牧 遼東帶方二國王이라는 작위를 임명받은 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없으나 중국사서에는 있는 예는 백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동진에게 작위를 임명받은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진서 제기 간문제에는 진동장군 영낙랑태수라 하여 작위수여가 나옵니다. 물론 여기서의 餘句라는 인물이 근초고왕이냐 아니냐 라는 문제도 있겠지만 당시 시대가 근초고왕이었고 동진과 통교한 시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근초고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용보가 광개토태왕에게 내려주었다는 平州牧 遼東帶方二國王에 문제될 소지는 적다고 봅니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세웠다는 기록.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 즉, 평양이 요동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편찬자는 정확한 지리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사는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나라때 만들어진 것으로 삼국사기보다도 100년이나 후에 편찬된 것입니다. 연대도 삼국사기보다 늦고 자기나라의 것이 아닌 남의 나라의 수도에 대해 그렇게 정확한 정보와 자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안동도호부가 평양에서는 6년이라는 짧은 존속기간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요동지역에서는 4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있었기 때문에 당시 편찬자로서 안동도호부가 원래 요동에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요사자체를 보면 역시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냄새가 풍깁니다.
물론 역사서를 만들 때 전대의 역사서를 참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요사의 지금 이 내용은 다른 사서 몇 개를 합쳐놓은 듯한 인상이 느껴집니다.
1. 공손도가 요동지방에서 웅거하였다는 것 ⇒ 삼국지
2. 모용보가 구려왕 안에게 평주목을 내려주었다는 것 ⇒ 양서
3. 태무제때 사신이 평양에 갔다는 것 ⇒ 위서
4. 당나라가 평양을 점령하고 안동도호부를 세웠다는 것 ⇒ 신구당서
시대가 다른 이 사서들을 참고한 것이 역력히 보입니다.
그리고 이 것으로 인해 왜 편찬자가 동경요양부를 거론하면서 평양성에 대해 기록했는지도 이해할수 있게 합니다.
이 분명히 태무제때 사신이 평양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 편찬자는 요사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서에는 당나라가 평양을 점령하고 거기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다는 기록도 보았기 때문에 그 기록에 맞춰 요사 동경요양부에 대한 설명을 할 때 기록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현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존속해 있던 기간은 6년 뿐입니다.
그 후 요동군과 신성을 거치면서 40년이 넘게 요동지방에 안동도호부는 있게 됩니다.
그렇게됨으로써 요사의 편찬자로 하여금 원래부터 요동지방에 안동도호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오해의 소지는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안동도호부는 평양에 세웠으니 평양이 요동지방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것이고, 위서의 기록에서는 위의 사신이 평양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때의 평양도 안동도호부가 있었던 평양이라고 생각을 하고 기록했을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물론 이 것은 편찬자가 제 3자이며 제 3의 국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부정확하다는 근거에서 추측한 것일뿐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사의 이 기록은 장수왕의 평양성이 요동지방에 있었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는 사용할 수는 있으나 유정님처럼 문자명왕대에 옮겨갔다는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3.장수왕대의 북위와 외교
장수왕대의 외교에 대해 북위에 대해 저자세였으나 문자명왕때와 안장왕때에 이르러서는 북위와의 긴장상태가 이루워졌다고 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만의 기록을 봐서는 북위에 대한 조공이 문자명왕때도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營平二州諸軍事라는 직책 그것도 북위가 준 것이 아닌 남조에서 준 것을 근거로 영평주를 직접다스렸다고 하거나 북위와의 전쟁상태가 조성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장수왕때에 북위보다 우세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북연왕 풍홍구출사건, 물길, 백제가 북위에게 고구려에 대해 침략을 부탁하지만 거절한 사건
정혼사건(삼국사기와 위서 고구려전에서는 북위가 먼저 정혼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나와있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먼저 정혼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정확히는 김용만선생님이 님의 글을 읽고 답변할 때 거론할 것임.)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죽었을때의 북위 황제의 행동.
등을 봐야지 무조건 사서에 조공했다고 하여 조공을 했구나 라고 하는 것은 앞뒤 상황을 보지 못하고 무조건 사서를 믿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님은 미국이 한국에게 경제권을 빼앗겼다 라든가, 하는 기록을 남기고 나서 몇 백년 후에 그 기록만 보고 당시 미국과 한국의 국력은 생각하지 않는채 미국이 한국에게 경제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실 겁니까?
그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한국보다 강대국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 입니다.
철저한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이 국제사회입니다.
고구려가 분명 북위와 비교해도 뒤지는 국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록에 조공을 바쳤다라고 나온다고 진짜로 믿으십니까?
그리고 효창연간(525∼528)에 고구려군이 북위의 영토인 조양을 공격하여 平州司馬諮議參軍 이었던 한기의 아버지인 한상을 잡아갔다는 묘지명을 보아 그 전까지의 고구려의 영토는 조양을 넘지 못하며 그것은 營平二州諸軍事라는 작위가 단순한 명목상의 작위이지 실질적인 작위였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4.원사문제
아직까지도 원사문제에 대해 거론을 하시는군요.
요동의 평양은 아직까지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수도로 볼 수 없습니다.
문헌자료만 봐서도 그렇습니다.
拔平壤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님이 말씀하신대로 문자명왕때에 옮겼다는 근거는 제가 용산문제와 남쪽바다 순수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근거가 희박한 문제이고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고국원왕~ 장수왕때까지 졸본에 가지 않은 기사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가지 못했다고 했으나 장수왕때 갔을 것이라는 것은 제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왕때 천도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천도를 할 만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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