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장은 여기에서 남북국시대를 장식했던 발해와 기타 동북방에 잔존했던 여러 세력들에 대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이들 나라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사료가 적기 때문에 이렇게 시대적인 구분없이 한군데에 모아서 서술함을 일단 밝히고자 한다.
우선 발해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자. 발해는 그 전해지는 사료도 별로 없거니와, 그나마 전해진 사료에도 제천행사 등 국가적인 의식에 대한 언급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유득공의 <발해고>를 봐도 마찬가지인데 발해의 정치, 경제, 사회, 인물 등에 대해 논한 중요한 조선시대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발해인의 제천행사에 대해서는 별반 다를바가 없다. 그나마 <신당서>에서 발해의 관제는 대개 중국과 같지만 나머지 풍습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전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처럼 원사료 자체에서 정보를 얻을 수가 없기에 발해시대 제천행사에 대해서는 후대 역사연구가들이 쓴 서적에서 정보를 얻고자 한다.
박시형의 <발해사>를 보면 그는 발해사람들 속에는 봉건사회에서 많이 볼수 있는 각종 신(귀신, 하느님, 조상신, 산천의 신 등)에 대한 신앙도 오랜 풍습으로서 일정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각종 신에 대한 제사의 풍습과 관련된 물건으로 생각되는 유적, 유물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으며 특히 말갈족 사이에서는 이 신에 대한 신앙이 매우 현저하였는바 그것은 후에 말갈족의 후예들이 세운 금나라의 무당(샤먼)과 관련된 풍습을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신에 대한 이런 신앙(미신)은 사회 발전을 억제하는 요인의 하나로 취급되었고 그로 인해 발해봉건 통치자들은 계급적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불교나 유교 등 외래 종교들을 적극 수용하였으며 훗날 이것이 심한 사대주의를 조장하여 발해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말갈에 대한 언급이다. 이 발언은 고구려 건국초부터 멸망 이후까지 단한번도 반란 한번 일으키지 않았던 말갈이 고구려적 제천행사 유풍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발해가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외래 종교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발해에서 고구려의 제천행사적 풍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럼 이번에는 서병국의 <발해 발해인>을 한번 보자. 그는 이 책에서 발해국이 속말말갈이나 고구려의 별종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들이 그들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세운 나라임이 틀림없다고 못박고 글을 써가기 시작한다. 그는 발해가 고구려, 말갈, 거란, 해족 등 다양한 민족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문화도 다양했다고 한다. 그리고 <발해국지장편>과 <위서> 물길전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발언을 한다.
- <북맹록(北盟錄)>을 보면 금나라에서는 여자무당을 살만(薩滿) 또는 산만(珊蠻)이라고 하는데 금나라와 발해국은 동족이므로 발해사람 역시 여자무당을 받들었다. 신에 대한 기도로부터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무당은 머리에 뾰족한 갓을 쓰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긴 치마를 입으며 북을 치면서 춤을 추는데 입으로는 알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병을 치료하였다. 만주의 요동 등 각지에는 이러한 풍속이 남아있다고 한다. 여자무당이 죽으면 나무 줄기에 구멍을 파서 시체를 그 속에 집어넣어 장례를 지낸다. 일반 사람들도 이런 풍속을 모방하고 있는데 이는 거란의 풍속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북방 샤먼이라는 존재와 그 의식에 대해서 추론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확보한다. 앞서 북방유목민이 직접 유입되어 형성된 신라에서 왕의 누이로 하여금 시조묘의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는 기록과 신라에서 남녀가 유별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신전(신궁)과 신녀의 존재에 대해서 추론했다. 그렇다면 혹시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이처럼 무당이 여자였을 가능성이 높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직 증빙 자료가 없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라고 하고 넘어가겠다.
다만 <구당서> 거란전과 해전 등을 보면 그들은 각각 4만 3천과 3만의 병사를 거느린 부족으로 징발이 있을시에는 모두 모여 의논하지만 수렵은 각 부족이 각자 하며, 수렵 실력이 좋고 양쪽은 모두 전쟁하기를 좋아한다고 적고 있다. 이를 통해서 봤을때 발해 내에 거란이나 해의 문화가 섞여 있었다면 군사적인 일을 가지고 부여나 고구려처럼 소발굽으로 점을 치는 등 모든 고위 귀족들이 모여 일종의 회의나 의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리고 거국적인 사냥대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발해에서도 분명히 북방민족 제부족들처럼 다양한 일정에 맞춰 다양한 사냥대회가 열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고자 한다.
특히 <수서> 거란전을 보면 거란인들은 무리를 합칠때는 나무 등으로 만든 징표인 부계(符契)를 쓴다는 기록이 나와 '니콜라예프카 성'에서 나온 청동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부절(符節)' 이 떠오른다. 부절이란 물건을 두 조각으로 나눠 두 사람이 따로 지니고 있다가 훗날 서로 맞추어 증거로 삼는 신표(信標)로서 전쟁터에 나가는 대장군에게 왕이 군대의 통수권을 임명하는 증거로 쓰이기도 했으며 또한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신분증으로도 쓰였던 물건이다.
이 부절에는 '좌효위장군 섭리계(左驍衛將軍 攝理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성을 지키던 '섭리계'라는 장수가 자신의 것과 중앙에서 황제가 보낸 사자(使者)가 가져온 부절을 맞춰봄으로써 사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 부절이 중국 문화에서만 볼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동북방 문명권 전체적으로 봤을때 흔히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이처럼 거란이나 해족, 고구려에게 철을 받아 썼다는 북쪽의 거란인 실위 등등 발해 시대때에도 분명 고구려의 유풍이 남기는 남았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발해의 제천행사의 전부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발해는 당시 백제나 신라에 비해 중국 문화가 더 많이 유입되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특히 많은 세력을 형성했던 말갈(물길)의 문화를 많이 수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로 인해 고구려의 문화를 전래받는데 있어 오히려 백제나 신라보다 미흡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았나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알게됐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후계자가 발해라는 사실에 대못을 하나 박는 의견일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중국측이 발해의 제천행사에 대해 따로 논하지 않았고, 또한 자세하게 기록하지도 않은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1. 전국가적인 제천행사가 없었다.
2. 제천행사가 중국의 그것과 비슷했다.
3. 제천행사가 변방민족의 그것과 같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늘날 고구려의 후계이며 북조 정권의 대를 잇는 발해에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제천행사의 흔적이 별로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열려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유민이 당나라 각지로 이주했거나 타국으로 망명했거나 그대로 남아 발해 건국에 공을 세웠듯이, 발해가 멸망하고 그 유민이 요 각지로 이주했거나 타국으로 망명했거나 그대로 남아 요 건국에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요가 멸망하고 그 유민이 금 각지로 이주했거나 타국으로 망명했거나 그 자리에 남아 금 건국에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본다면 오히려 거란족과 여진족, 이후 등장하는 만주족에게서 우리민족 고유의 제천행사 유풍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주인장의 학식이 여기까지가 한계인지라 발해에 대해서는 이런 가능성만 열어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 다음은 중국문헌이 기록하고 있는 각종 동북방 세력들에 대해 언급해보도록 하자.
3세기대 문헌인 <삼국지>와 그 후에 쓰여졌지만 앞시기를 기록한 <후한서>를 보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가 유일한 정권이 아니며 그에 부용하는 세력이 여럿 있음을 적고 있다.
그 중 첫번째가 '읍루(
婁)'다. 옛 숙신씨의 나라라는 이들을 두고 <후한서>는 군장이 없고 부락마다 대인이란 존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부여에게 오래전부터 복속되어 있는 세력으로 이즈음 반란을 일으켜 부여가 처치곤란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이 부여는 잔치와 제사에 모두 조두라는 그릇을 사용하나 오직 읍루에만 없고 법속도 가장 기강이 없다는 기록이다. 이것이 무엇을 반증하는 것이겠는가? 읍루에도 제천행사가 있긴 했지만 다만 조두라는 그릇을 사용한다거나, 정형화된 예식이 없거나 혹은 빈약했다는 소리가 된다. <삼국지> 역시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후 중국문헌의 말갈전 등을 참고해도 말갈의 제천행사적 유풍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이 읍루를 두고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족' 등 다음과 같은 계보로 이해하고 있다. 이 문제는 좀더 재고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로 말미암아 이 세력 역시 기원전부터 아주 오래도록 이름과 혈통이 바뀌면서 존속했는데 그들 스스로 고유로 전래되는 제천행사의 풍습은 남아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본다. 그리고 정말 말갈이라는 무리가 고구려가 존속한 기간 내내 그 역사를 같이한 민족이라면 고구려의 제천행사가 어떤 형태로든지 말갈을 통해서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인장은 금나라의 여자무당에 대한 존재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관련 근거가 부족하기에 이 정도로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 다음은 '동옥저(東沃沮)'다. 북으로 읍루와 부여, 남으로 예맥과 접하고 있다는 동옥저는 남북으로 천리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긴 국가였다. <후한서> 그들이 왕이 없고 우두머리인 장수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읍루와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고 보여진다. 다만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고구려가 오래전부터 동옥저의 대인을 사자로 삼아서 감독하고 다스렸다고 한다. <삼국지>는 이에 덧붙여 북옥저가 5천 가호이며 대군왕이 없고 각 촌락에 통솔자가 있으며 언어는 고구려와 비슷하나 약간의 차이가 난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 음식과 거치, 의복과 예절은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동옥저는 역시 단군조선 시대에 옥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가 동쪽으로 이동해서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울러 '북옥저'나 '남옥저'라고 불리는 무리가 있는데 이는 동옥저의 남북 무리들을 그렇게 지칭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들 역시 고구려에 오래전부터 신속해 있었던 터라, 고구려의 문화와 비슷했을 것이며 동옥저의 대인은 매년 고구려의 동맹제때 도읍지로 찾아갔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맥포, 어류, 소금, 해산물, 미녀 등을 바쳤을 가능성이 높으니 이렇게 본다면 제천행사가 비공식적인 외교의 장(場)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은 '예(穢)'다. 동예(東穢)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맥(貊)과는 다른 종족으로 보이며 <삼국지>에는 2만 가호라고 했다. 아울러 대군장이 없으며 후와 읍군, 삼로 등이 하호를 다스리고 연로한 자들은 자기들이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했다 한다. 그들은 산천을 소중히 여겨 산천마다 각각 부의 경계가 있어 서로 간섭하거나 들어가지 않았으며 별자리를 볼줄 알아 그 해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예측하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고 했으며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섬겨 제사지내기도 했다 한다. <후한서>에는 이들이 제기로 변두라는 것을 사용했으며 변은 과일이나 포를 담을 수 있는 대로 엮은 그릇이고, 두는 식혜나 김치 등을 담을 수 있는 나무로 만든 그릇이라 하였다. 여기에도 역시 사당을 지어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예의 존재에 대해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듯 싶다. 예 혹은 동예는 오래전부터 고구려에 신속해서 어느정도 자치권을 부여받은 세력이었고, 그 노인들이 스스로 고구려와 동족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면 3세기로부터 수백년 이전에 이미 양측이 동질감을 느껴왔다는 소리가 될수 밖에 없다. 다만, 지역적인 특성때문에 제기 사용에 있어 조두가 아닌 변두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재료상의 차이 정도만 있을뿐, 그 모양이나 용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특히 동예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존재하는데 이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확인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거행했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사당까지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풍습이 있는 것으로 봐서 민족 고유의 신앙이 꽤 오래도록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인장은 이 예라는 존재 역시 단군조선 붕괴 이후 동으로 이주해온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특이하게도 이 예가 어떤 특정한 기술이나 무엇인가를 보유한 특수한 집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안 그렇다면 3세기대 고구려가 평양 일대를 실력으로 확보하고 국력을 떨칠 시기에 예라는 존재가 독자적인 제천행사를 거행하며 존재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예가 광개토호태왕비문의 '한예(韓穢)'라는 명칭으로도 등장해 예의 일부가 고구려에, 나머지 일부는 백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들이 특수한 제례 집단이나, 제철이나 주조 등의 기술을 가진 기술 집단, 고유한 상업 노하우를 갖고 있던 상인 집단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천은 예의 역사를 아는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세기 무렵, 노태돈이 말하는 부체제의 소멸과 함께 국중대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고구려의 동맹제, 하지만 그런 강력한 중앙집권형 제국인 고구려에 속한 예가 무천이라는 독자적인 제천행사를 10월에, 동맹이 거행되던 그때에 거행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라는 집단의 특수성에 대해서 한번 언급해보지 않을 수 없다. 주인장은 일단, 이 무천이 부여-고구려의 계통을 잇는 우리민족 고유의 제천행사라고 생각하지만 사냥대회나 제가회의 등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거국적인 음주가무만 보여 이 역시 백제와 신라의 경우처럼 변질된 것이 아닐까 생각은 해본다.
덧붙여 우리가 언급해야 할 부분이 바로 '맥(貊)'이라는 존재인데, 예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삼국사기>에는 맥국이 등장하며 중국문헌은 3세기 고구려를 논하면서 그 나라안에 강을 따라 사는 소수맥(小水貊)이 있는데 거기서 맥궁이라는 좋은 활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맥은 3세기대 중국측이 인식하지 못 했으며 <삼국사기>에도 역시 3세기때까지 오지 못 하고 1세기대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로 말미암아 맥이라는 존재 역시 예처럼 고구려에 일부가, 일부는 다른 나라에 정복 혹은 융합의 형태로 스며들었으며 예처럼 독자적인 제천행사나 지위를 얻지는 못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렇기에 3세기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는 나라로 표현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주목할 부분은 맥이 소수맥이라는 명궁(名弓)을 만드는 기술자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예라는 집단은 어떤 존재이길래 독자적인 세력을 고구려와 백제에서 누렸다는 말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까지 우리는 살펴봤다. 그리고 동북방 문명권 일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나라들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계통의 제천행사 풍습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3세기 이전의 문헌 기록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정은 불가하지만 3세기 이후부터라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 짝이 없다. 특히 발해에 대해 고증할만한 사료가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헌 사료상의 한계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만큼은 크게 열어두고자 한다. 그럼 이제 대미(大尾)를 장식할 고려시대로 넘어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