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장의 사진이 말해주는 것.
호산산성 고구려 성벽. 성벽 바로 아래가 우물터이다. 옆의 사진은 단동시 관전현 호산향 호산촌 호산산성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을 때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다지 잘 찍은 것도 아니고, 다른 이에게 보여주려면 설명이 필요하기에 그리 감동적인 사진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대뜸 이렇게 읊었으니 설명을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이 사진의 배경인 호산산성은 압록강에 닿아 있는 호산(虎山)에 있다. 호산산성 맞은편 압록강 건너에 솟은 삼각산 위에는 의주의 유명한 통군정 정자가 있다. 또 호산산성에서 약간 서쪽에는 위화도가 있다. 호산산성 바로 앞에는 북한 소유의 섬이 있는데, 힘껏 뛰면 넘을 듯한 좁은 강폭만 건너면 곧장 국경을 넘을 수도 있을 정도다.
20세기 말에 일본이 대륙의 자원을 가져가기 위해 만든 철도 덕택에 발전하기 시작한 의주와 단동이 부상하기 전까지는 의주가 압록강 하구의 교통 중심이었다. 호산산성 일대도 과거에는 중요한 곳이었다. 호산산성 서쪽의 애하를 건너면 바로 애하첨고성이 있다. 이곳은 마시도(馬市島)라는 삼각주 위에 있는데, 마시도는 옛날 말이 거래되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애하첨고성에서 다시 약간 서북쪽에는 구련성이 있다. 구련성은 98년에 답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겨우 성벽 표시판만 있을 뿐, 성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애하첨고성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열방투어 박준석 사장의 안내로 애하첨고성을 방문해보니, 성벽은 전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다만 과수원 등으로 변한 땅에 수많은 고구려 시기 기와와 토기 조각들만이 보였다. 기와와 토기는 오랜 세월 변함이 없건만, 옛날 성(城)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곳에서는 지금도 농부들에게 1m 이상을 파지 못하게 한다는데, 전면 발굴이 시작되면 애하첨고성에서는 많은 유물이 나올 듯싶다. 애하첨고성에서는 안평락미앙(安平樂未央)이란 글자가 새겨진 와당이 나왔고, 또 안평성이란 문양이 새겨진 도기의 입부분이 발견된 바 있다. 그런데 이것을 토대로 이곳을 요동군 서안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고구려는 흔히 산성의 나라라고 하지만, 평지에도 성을 만든다. 고구려 첫 수도인 환인에는 현재 평지 도성으로 추정되는 하고성자성과 나합성이 있다. 나합성은 수몰 되어서 조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고구려 초기의 평지성이다. 두 번째 수도인 집안의 국내성도 마찬가지로 평지 도성이다. 평지성은 대체로 방어보다는 사람들의 거주나, 행정 관청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다. 즉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 만든다고 보면 좋겠다. 그렇다면 구련성과 애하첨고성이 평지에 있다는 것은 고구려 시대에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호산산성은 고구려 성의 특성상 평지성의 배후 방어성의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애하첨고성과 가까운 호산산성은 마치 국내성에 있어서 환도산성, 안학궁성에 있어서 대성산성과 같이 평지성의 짝인 산성의 기능을 담당했다고 보겠다. 게다가 호산산성은 압록강을 내려다보는 좋은 위치에 있다. 당시 고구려의 주요한 교통로로 활용된 압록강 방어와 교통로 통제를 위해서도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호산산성을 고구려 시대의 박작성(泊灼城)으로 보고 있다. 박작성은 이름 그대로 배들이 왕성하게 닿는 항구도시의 성이다. 박작성에 대한 『삼국사기』의 648년 9월 기록을 잠깐 살펴보자.
“당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 군사가 무너졌다. 배 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이 오골성, 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박작성은 호산산성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박작성은 당의 대군이 공격해왔으나, 함락시키지 못할 만큼 튼튼했으며, 고구려에서도 원군을 보내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한 성이었음이 분명하다. 667년 당나라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에, 압록강을 중요한 전략지로 언급을 하는 암호문을 자기들끼리 주고받았다. 이때 고구려 남생이 암호문을 빼앗아, 압록강의 험함을 지키는 전략을 구사하여,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압록강 방어는 확실히 중요했다.
박작성은 1998년 답사시에 비교적 높은 고구려 성벽과 함께 우물을 볼 수 있었다. 고구려 우물에서는 길이가 3.7m인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고구려 나무 배가 나오기도 했다. 우물은 직경이 4.4m, 우물 바닥은 지면으로 23m, 우물 깊이는 13m나 될 만큼 큰 우물이다. 호산에서 발견된 성벽은 대략 500m 정도로 전형적인 고구려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성안에서는 철촉, 철창, 철도끼 등의 무기와, 거울, 낫, 괭이와 같은 농기구도 발견되었다.
고구려 우물이 있던 곳은 이미 메워져 있었고, 고구려 우물이 있던 곳은 이미 메워져 있었고,
사람이 키보다 높던 성벽은 겨우 흔적만이 남았다.
그런데 2006년 마지막 날에 필자가 방문한 호산산성은 이미 고구려 성이 아니었다. 높이 146m, 동서 100m, 남북 500m 정도 되는 호산에는 느닷없이 명나라 장성의 동쪽 기점인 호산장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호산장성 기념박물관까지 들어섰다. 왜 이곳이 명나라 장성이란 말인가?
1998년 7월에 1998년 7월에 서길수 교수님이 찍은 호산산성의 고구려 성벽과 우물. 고구려연구24집에서 인용. 이렇게 멋진 우물과 성벽이 훼손된 것이다. 2006년 8월 고구려연구회 주최 학술모임에서 명나라가 압록강 이북을 다 차지하였는가? 라는 주제로 강원대 남의현 박사의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그때도 호산산성 문제가 거론되었었다. 명나라의 장성은 지금의 산해관이 끝이다. 그리고 요동에는 변장(邊墻)이 있었을 뿐이다. 중국의 왜곡이 너무 심하다는 연구자들의 비판이 쏟아져 나왔었다. 호산에는 고구려 산성 외에는 봉화대 하나뿐이다. 게다가 봉화대는 명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딱히 말하기도 어렵다.
‘중국 명 만리장성 동단기점’이라고 쓴 간판이 보이는 기념관. 고구려 우물 바로 옆에 세웠다. 설령 명나라의 봉화대라고 하더라도, 만리장성이 이곳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다. 아무리 명나라가 인구가 많다고 하지만, 장성을 만드는 것은 여지간한 노동력이 소요되는 것이 아닌 만큼, 분명한 정치, 군사, 경제적 목적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호산산성 정상까지 올라가서 분명 눈으로 확인한 것이지만, 최근 중국인들이 엉터리로 만든 장성 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더 먼 지역은 도무지 장성을 연결할만한 아무런 흔적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명나라 장성이 이곳이라면, 조선과 명의 국경이 이곳까지 였다는 주장이 성립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안다. 명나라는 1368년 건국된 후, 1400년경 요양까지 왔고, 1481년에 사신 정동이란 자를 보내, 개주에 봉황산에 새로운 진(鎭)을 세우기로 했다고 조선에 통보해왔다. 즉 현재의 단동 북쪽에 있는 봉성시가 명나라의 국경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선의 국경 압록강 사이의 공간은 중립지대였다. 이 중립지대의 관리권은 실제로 조선이 장악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요양에서 조선에 이르는 지역을 봉수와 척후로써 연락하고 있었을 뿐이다. 호산산성이 명나라의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라고 하더라도, 만리장성의 시발점도 아니고, 국경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국이 명나라 장성을 이곳까지 연장시켜 선전을 하는 것은 만주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 즉 동북공정의 현실적인 적용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있지도 않은 만리장성의 시작이라고 선전하고, 명나라 만리장성 시발지임을 강조하는 박물관을, 그것도 고구려의 우물터 바로 옆에다가 세워둔 곳이었다. 반면 고구려의 우물은 아예 덮어버렸다. 고구려 유물 가운데 단 한 점 밖에 없는 배가 출토된 매우 중요한 우물이 있는 곳이고, 고구려의 압록강 방어에 중요 거점이자, 해양방어성이었던 박작성 터를 의도적으로 지우고 있었다.
만약 중국이 고구려를 진정으로 계승하고자 했다면, 절대로 이렇게 고구려의 역사 유적을 방치하고, 있지도 않은 명나라 장성을 엉터리로 세워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역사 계승의식의 발로가 아니다.
한 장의 사진을 다시 보니, 엉터리로 만들어진 명나라 성벽이 마치 승자의 모습처럼 고구려 성벽을 짓누르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중국에게는 고구려가 아니라, 명나라 장성이 소중하기에 고구려 유적이 훼손되든 말든 관심이 없는 것이다. 고구려를 진정으로 계승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가 유적을 관리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사는 어떻게 평가해야 공정한 것인가. 고구려 박작성 유적이 중요한가, 명나라 봉수대의 유적이 중요한가. 한중 역사학자들이 정말 진지하게, 과거 역사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소중한지를 이야기할 때가 와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왜곡이란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물론, 진정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을 낮추고 그 반대로 행하는 것도 왜곡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 현재의 관심사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고구려의 중요한 유적이 홀대받고 엉터리 명나라 장성이 위세를 과시하는 현재의 모습은 정말 씁쓸하기도 하다.
아무리 역사가 현재의 관심사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라고 해도, 과거의 역사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지금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2004년 충신의 대명사인 송나라 악비와 역적의 대명사 진회에 대한 재평가에 대한 문제가 중국 사회를 진동한 적이 있다. 악비는 송나라 사람으로 금나라와 싸웠으니, 한족의 영웅은 될지언정, 중화민족의 충신은 아니라는 중국 사회과학원 마대정(동북공정의 실질적 지휘자)의 주장에 대해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악비는 영원히 충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식을 갖고 있는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중국에 많다면, 호산산성에서와 같은 너저분한 역사 왜곡 행위는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 박물관 앞에 차를 세우고, 고구려 우물과 산성을 보고 돌아 나올 때 가슴이 너무도 답답했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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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淸風溪 작성시간 07.01.19 가슴이 울컥합니다...냉정한 가슴으로 다만 지금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겠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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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비사인 작성시간 07.01.19 언듯보니 우물이 공주 공산성의 연지와 매우 닮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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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드래곤 작성시간 07.01.20 수고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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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밸틴 작성시간 07.01.20 나쁜 놈들, 참 이상합니다. 자기네 진짜 장성은 보수도 않고 가짜를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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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百濟 牟大王 작성시간 07.01.22 짱깨들. 문화대혁명이라는 세계사상초유의 개짓거리로 자기네 역사유적도 반이상을 날려버린 놈들입니다. '오랑캐'인 고구려의 흔적따위가 저들 눈에 보이기나 하겠습니까? ㅎㅎ 가소로운 동북공정. 단지 힘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