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가 입관할 당시의 팔기병 수는 만주팔기가 320명의 좌령(佐領) 하에 9만 6천명이었고 몽고팔기가 131명의 좌령 하에 3만 9천 6백명, 그리고 한인팔기가 171명의 좌령 하에 5만 1천 3백명으로 도합 18만 6천 6백명이었습니다.
입관이후의 팔기병은 평소에는 일반적인 경찰업무에 종사하다가 반청활동 및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즉시 진압활동에 나섰습니다. 팔기군은 북경에 주둔하는 금려팔기병(琴旅八旗兵)과 지방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병(駐防八旗兵)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금려팔기병 같은 경우 낭위(郎衛)와 시위(侍衛)로 조직되어 수도방위를 담당했습니다. 보위궁연(保衛宮延)이라고도 불리는 낭위는 팔기중에도 가장 세력이 강하던 상삼기인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의 기인 자제 가운데서 선출되어 황제의 궁성인 자금성 각 문의 호위를 담당했으며,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이 통솔했습니다. 시위는 경사(京師)인 북경의 외문 일곱 곳과 내문 아홉 곳의 수비를 담당하는 병위(兵衛)와 보군총령(步軍總領)이 통솔했습니다. 금려팔기병은 한인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만주팔기병과 몽고팔기병 가운데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군대였습니다.
주방팔기병은 지방에 배치한 팔기병으로써 입관 초기에는 전략 요충지에만 배치했지만 중원 통일 이후에는 전략적 요충지 + 총독과 순무를 감시하기 위해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팔기병을 주둔시켰습니다. 강희연간에는 중원의 9곳, 건륭연간에는 20곳의 주방에 4만 5천~5만의 팔기병의 파견하였습니다. 이들 주방은 직예, 산서, 섬서, 감숙성의 만리장성 선상에 절강, 복건, 광동성의 동남연해선과 대운하 선상에 그리고 강소, 안휘, 호북, 사천성의 양자강 선상에 배치되었습니다. 그 중 북경과 그 부근에는 약 1만 명의 기병들이 주둔했는데 이를 기보(畿輔)주방 혹은 직예주방이라 불렀습니다. 이밖에 동북지역에 3천 6백명, 신강지역에 1만 2천~1만 5천의 팔기병이 주둔하였습니다.
중원 정복전쟁 기간 동안 각 주방의 북경의 효기영(驍騎營) 내의 본기(本旗)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경사팔기도총(京師八旗都總)이 직접 지휘하는 총사령부 성격의 효기영은 방대한 규모의 후방부대로서 필요할 때마다 각 지역의 주방에 병사들을 파견하여 지원했습니다. 정복전쟁이 끝난 이후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주방이 점차 영구적인 지방병영으로 정착되면서 효기영의 기능은 많이 약화되었지만 경사팔기도총아문(京師八旗都總衙門)이 여전히 정부와 팔기 사이를 매개하고 각 주방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하는 대본영의 위치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방병을 북경의 본기가 일률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팔기 지휘관의 인사권은 황제와 중앙행정기관에 있었습니다. 순치 초기에 군사선발 기준이 통일되면서 원칙적으로 각 주방의 방어직(防禦職)보다 상위의 관원들은 병부에서 몇 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면 모두 황제가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고위지휘관인 장군과 부도총(副都總)만 황제가 임명하고 기타 관원의 인사권은 모두 병부에 위임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고위지휘관의 후보자를 선정하는 과정은 병부가 후보자에 대한 자료를 본기와 군기처에 보내면 두 곳의 대신들이 다시 후보자를 선정하여 황제에게 올리는 식으로 복잡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임명과정은 주방과 중앙정부 사이의 직접적인 연계를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각 주방에는 중앙정부의 육부를 본뜬 행정부서를 두어 중앙의 각부와 연계하도록 하였습니다. 주방의 업무는 중앙의 관련부서에 시한을 엄수하여 상세히 보고되었는데, 점차 그 과정이 형식적이고 번거로워져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밖에도 각 주방은 반드시 해당지역의 지방장관인 총독, 순무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주방의 독무의 감독 하에 물자를 지급받고 있었으므로 독무에게는 주방의 사무파악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독무는 서로 협동하여 주방의 군사활동 전체를 감시하였고 군사적 물자는 총독, 비군사적 물자는 순무의 책임하에 지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방은 중앙과 지방관으로부터 세밀한 부분까지 엄밀한 감시와 견제를 받으면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주방의 관리들이 황제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각 주방의 군사조직은 그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선 성도(省都) 혹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의 주방에는 3천 명 이상의 병사를 장군이 통솔하였고 다음으로 중간규모의 주방은 1천 명에서 3천 명 사이의 병사를 부도총이, 외곽지역이나 교통요지의 주방은 1천 명 이하의 병사를 성수위(城守尉)가 통솔하였습니다. 또한 이들 부도통과 성수위는 부근에 있는 규모가 큰 주방을 통솔하고 있는 장군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각 주방의 그 규모에 따라 매개의 기를 2~7개의 갑라(甲喇)로 구분했고, 군사적인 기능에 EK라서 보병, 기병 화기병, 수사 등으로 구분했으나 주력은 기병이었습니다.
*출처: 임계순 지음 ‘청사’
ps .. 군자노숙님이 드라마에서 보셨다던 팔기 지휘관들만의 회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팔기군의 주요 회의에는 반드시 황제가 참석했고 누르하치를 시작해서 역대 청황제들은 팔기군을 좀더 효율적인 군사조직화하는 동시에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항상 조직을 다듬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