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제가 올린 글 중 주필산 전투 관련 부분입니다. 본문은 "삼국사기로 보는 고당전쟁"으로 검색해보세요ㅇㅅㅇ;;
<<<<당주가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 누살 고연수와 남부 누살 고혜진이 아군과 말갈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려 하였다. 당주가 시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연수에게 방책이 있다면 세 가지가 있다. 군사를 이끌고 직전하여 안시성과 연결하여 누를 만들고, 고산의 험한 곳에 의거하여 성중의 양식을 먹고 말갈병을 놓아 우리의 우마를 노략하면 이를쳐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돌아가려면 이료가 장애가 되어 앉아서 오군을 괴롭힐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오, 성중의 병을 빼어 밤에 함께 도망함은 중책이다. 지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움은 하책이다. 경들은 보라. 저들이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포로가 됨은 내 눈안에 있다"하였다.
이 때에 대로 고정의는 연로하고 사물에 익숙하여 연수에게 말하기를 "진왕(당주)은 안로 군웅을 제거하고, 밖으로는 융적을 정복하고, 홀로 서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에 출중한 사람이다.(*제가 가진 이병도 해석본에는 ~입니다,를 씁니다만 아마 고정의가 고연수보다 상급자였다는 말은 맞을 듯 하여 높임말은 바꿨습니다.) 우리로서 취할 계략은 군사를 멈추어 싸우지 않고 시일을 오래 끌면서 기병(奇兵)을 분견하여 그 양도를 끊는다면 양식이 떨어져 적은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곧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였으나 연수는 듣지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장 나아가니 안시성과 40리 거리에 있었다.
당주는 그가 머뭇거리고 오지 아니할까 두려워하여 대장군 아사나두이를 명하여 돌궐의 기병 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유도하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당군이 거짓 달아나므로 연수가 어울리기 쉽다하고 (당병이 패주함을 따라) 다투어 진격하여 안시성 동남 8리 되는 곳에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안시성이 떨어지면 평양이 위험합니다. 연개소문은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맡겨 북쪽으로 올려보냅니다. 물론 고연수와 고혜진의 등급이 욕살이므로 이 대군을 지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북부와 남부의 광역 지방관인 욕살이라면, 아마 5부 중 남, 북부의 군대의 상당수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고연수와 고혜진과 연개소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고정의가 진짜 그 군대의 총사령관일까요? 그건 모릅니다. 고정의가 등급이 높지만, 역사상 얼굴마담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고정의의 등급에 대해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대로, 신당서에는 대대로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연로한"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역사상 노익장을 발휘한 사람은 많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아마 고연수가 나이가 들어 실제 군사를 지휘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반대파 대신들을 살해했지만 완전히 정국을 쥐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15만 대군을 동원하려면 연개소문 개인 세력으로는 도무지 무리입니다. 당연히 반대파의 귀족들도 어떻게든 끌어 모아야 되는데, 이 와중에 고정의가 뽑히지 않았을까요?
고정의가 진짜 연개소문파인지 어쩐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명목상으로 반 연개소문파의 불만을 낮추기 위한 총사령관이고, 실권 보유자는 고연수와 고혜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모든 것은 추정일 뿐이고, 정말로 고정의가 사령관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고정의의 기록이 전혀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제 전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고정의가 평양을 떠나기 전에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충고를 주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챕터를 서술하면서 계속하겠습니다.
<<<<당주가 제장을 불러 계획을 물었다. 장손무기가 대답하기를"신이 들으니 적과 싸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사졸의 정을 살핀다고 합니다...이는 필승의 병입니다. 폐하께서...기계로 승리를 거두셨음은 모두 위로 성모를 품문하여 제장이 성산을 받들 뿐이었으니, 오늘 일은 폐하의 지휘를 바랍니다."하였다. 당주가 웃으며 말하기를 "제공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제공을 위하여 헤아려 보리라"하고 이에 무기 등과 더불어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고, 산천 형세의 복병할 수 있는 곳과 출입할 수 있는 곳을 살폈다.
(역시 태종의 계획)
아군은 말갈과 합병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였다. 당주가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안색이 있었다.--이 내용은 당서 시리즈에는 없고 삼국사기에만 있습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나라를 기울여서 왕사를 막으니 평양의 수비가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데 신에게 정졸 5,000명을 주시어 그 근본을 뒤엎으면 수십만의 무리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당주가 응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연수를 속여 이르기를 "나는 그대 나라의 강신이 왕을 시해한 고로 와서 문죄하는 것이요, 교전하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이곳에 들어와서 추속이 보급되지 않는 것 때문에 수성(數城)을 취하였으나 그대 나라가 신례를 닦으면 잃은 것을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하였다. 연수가 이를 믿고 다시는 방비를 하지 않았다. 당주가 밤에 문무신을 불러 일을 계획하였는데, 이세적에게 명하여 보기병 15,000명을 거느리고 서령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은 정병 11,000명을 거느리고 기병이 되어 산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찌르게 하고, 당주는 스스로 보기병 4,000명을 거느리고 고각을 끼고 기치를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당주게 제군에게 명하여 고각의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가서 분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해서 항복을 받는 천막을 조당 옆에 치게 하였다.>>>>
====>삼국사기로 보자면, 안시성 앞으로 몰려와 전투를 벌인쪽의 고구려군은 15만이 맞는 듯 합니다.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에서는 15만 대군이 40리에 걸쳐 당군을 역포위 했다고 했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저도 민족백서?d이 예전에 거론했던 문제제기가 맞다고 봅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고구려의 병력이 당을 포위했다기 보다는 진을 친 장면이라고 봅니다. 아울러 전당문에 기록된 행군총관의 수-장손무기가 24고 이세적이 14였던가요?-와 지위의 고하를 들어 장손무기의 군사가 이세적의 군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 설명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강력한 고구려군 등장!)
다음에 전투 진행과정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세적의 역할은 방어군입니다. 즉 포위망이 완성되기 까지 고구려의 공세를 버텨내야 한다는거지요.
(!!)
여기에 비해 장손무기와 도종의 군대는 우회 기동하여 적의 후미와 측면을 노린는 군대입니다. 어느쪽이 더 수가 많아야 한다면, 당연히 이세적군이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당태종도 4,000명 밖에 거느리지 않았는데 지휘로만 군사의 수를 파악하는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당군의 숫자가 여기에 보이는 3만명 남짓일리는 없습니다. 실제 당군에 기타 장군들도 여러 행군 총관을 거느리고 전투에 임하는데, 기본적으로 당군의 편제는 이정-당태종이 가장 신임하던 전략가-이 개발했다는 육화진입니다.
즉 중군이 있고, 그 중군을 남은 6군이 둘러싸고 보호하는 형태입니다. 거기에 이후 전황을 보니 당군은 기타 부대가 존재했다고 보는게 맞을 듯 합니다. 만약 당군이 육화진을 펴고, 한 부대가 이세적처럼 1만 5천 명이었다면 당군의 수는 약 9만명이 되고, 좀 더 적어서 1만 명이라고 하면 7만 명 정도 되니 실제 주필산 전투에 참가했던 당군은 이 정도 숫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날 밤에 유성이 연수의 군영에 떨어졌다. 아침에 연수 등은 홀로 이세적군이 적음을 보고 군사에게 명하여 싸우려 하였다. 당주는 무기편 군사의 먼지가 일어남을 보고, 고각을 불고 기치를 들게 하니, 제군이 북치고 고함지르며 일제히 나가는지라 연수등이 두려워서 군사를 나누어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그 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때에 뇌전이 있었다. 용문 사람 설인귀가 기복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진에 깊이 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맞서는 자가 없어 아군이 뒤흔들렸다. 대군이 이에 덮쳐 공격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져 사자가 3만여 명이었다. 당주가 인귀를 그 용전을 바라보고 유격장군으로 삼았다. 연수 등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을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하므로, 당주가 제군에게 명하여 이를 포위케 하고 장손무기는 교량을 모두 거두어 그 귀로를 끊었다.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여 군문에 들어와 배복하고 명을 청하였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얼마일까요? 포로 36,800명에 전사자 30,000이라는데, 실제 구당서에는 10,000명, 신당서에는 20,000명의 전사자가 확인되므로 실제 고구려군의 전사자는 최초 기록인 구당서를 신뢰하여 10,000명 수준이 가장 신빙성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실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구당서의 기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연수가 이(세)적의 군사만 보고 출전하려 하였다. 태종은 멀리 무기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고각을 동시에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그 진영이 이미 어지러웠다. 이(세)적이 보병 1만명에게 장창을 들려 공격하니 연수의 무리들은 패전하였다. 무기가 군사를 놓아 그 후미를 치고 태종이 또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치자 적이 크게 무너져 참수가 만여급이나 되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의 "확인된 손실"이 46,800명...즉 5만명 가량의 고구려군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당시 전쟁에 무너져 달아난 병사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마 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다는 군사를 당군이 모조리 죽일 수는 없을겁니다. 아직 고연수의 주군이 진을 유지하고 있는데, 끝까지 추살하기 위해 진을 흩었다가는 역습당할 우려가 있으니까요. 이를 보면 고구려군의 전력 손실은 더더욱 늘어날 겁니다. 7~8만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거기에 고대던 중세던 15만 대군이 천상 전투병이었을리는 없습니다. 아마 이 중에는 상당한 수의 치중대나 기타 비전투원이 섞여 있었을테지요. 그렇다면 실제 전투 가능한 고구려 인원은 더 줄어들고, 선봉대로 적과 교전한 부대는 그 중에서도 강력한 정예였을테니 이렇게 되면 고연수는 고구려 전력의 최소 절반 이상을 말아먹었다는 소리가 됩니다. 단순히 고연수가 선봉장이라고 보기에는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봅니다. 물론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김부식씨도 이쪽 기록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나중에 태종이 병상에서 밥숟갈 놓은 뒤 평하면서 이런 내용을 적어 놓았습니다.

(...가 아니라)
[유공권의 소설에 말하기를 '주필산의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을 합친 군대가 40리에 뻗치었는데, 태종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 하였으며, 또 '6군은 고구려의 승리가 되어 거의 떨치지 못하였고, 염탐하는 자가 알리기를 영공(이세적)이 거느린 흑기(부대)가 포위되었다고 하니, 당주가 크게 두려워하였다'하였다. 비록 스스로 빠져 나왔으나 위험함이 저와 같았는데, 신구당서 및 사마공의 자치통감에는 이를 언급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위하여 휘피한 것이 아닌가.]
저도 이 이야기가 맞다고 봅니다. 일단 이세적의 부대가 제압된 것은, 위에서 보시다시피 고구려 군대의 주력이 들이치자 이세적군이 그 강력한 공세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밀려버린 것을 뜻합니다. 후에 말갈병 3,300명을 파묻어 죽이면서 감히 천자의 본진을 위협한 죄를 묻는데, 이는 적어도 이세적의 부대가 크게 위축되었거나 일부가 무너졌기 때문에 말갈이 우회기동 하여 중군을 위협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게 하다 봅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이날 고구려의 공세나 수준은 결코 약하지 않았던 듯 싶습니다. 여기에 거점군이 이 정도로 밀려버렸는데 남은 후위군의 우회기동과 중군 4,000명으로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아마 남은 당군의 후군이나, 육합진을 쳤다면 기타 군대가 동시에 고구려의 측면을 들이치자 고구려군이 무너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뒤를 잡히면 위험합니다.)
어찌되었건,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용맹스럽게 싸웠지만 끝내 당군의 전술에 밀려 붕괴됩니다. 이 전투의 중요성에서는 당태종이 직접 하늘에 감사 드린것을 보면-물론 충분한 쇼맨십도 있었겠지만-, 실제 전황도 당군에게 위협적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날 패배는 고구려군에게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당주가 누살 이하의 관장(官長) 3,500명을 가려내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인 3,300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노획한 말이 5만필, 소가 5만두, 명광개가 만 벌, 기타 기계(器械-기는 갑주, 계는 창,극,궁,모등을 뜻한다고 합니다.)가 이와 비슷하였다. 당주가 머물렀던 산의 이름을 고쳐 주필산이라 하고, 고연수로써 홍려경을, 고혜진으로 사농경을 삼았다.>>>>
====>이 이야기에 대해 고구려군 3만 명이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고 하는데, 으음...전 조금 무리라고 봅니다. 운동장에서 애들 줄서는걸 보시면 완전히 안구에 쓰나미 카오습니다. 물론 군대를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학교 애들보다야 훨씬 더 빠릿빠릿하게 군기가 잡혀있을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휘관이 없이 병사들보고 알아서 줄서라고 해도 지휘관이 있는것 처럼 빨리 되지는 않겠죠? 적어도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수뇌부들이 사로잡힌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포위망이 뚫렸을 때 고구려군 3만명은 "하급 지휘관"들이 주도로 탈출했음을 뜻합니다. 아니, 하급 지휘관이 남아 있었을까요? 관장, 즉 군대의 지휘관으로 1/10입니다. 제가 알기로 현대에서도 소대가 30~50명인데, 거의 소대장까지 잡아들였다는 뜻이군요. 로마식으로 쳐도, 대대장이나 군단장은 물론 백인대장도 싸그리 잡혀갔다는 뜻입니다......저기요...이 상황에서 탈출이 가능합니까?
(가능하단거냐! 로젠 특전대!)
좀 더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하나 소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나카옹의 은하영웅전설에서 버밀리온 성계 전투 말입니다. 그 초반에 라인하르트가 포도주가 어쩌구 식탁보가 어쩌구 하는 그 안구에 쓰나미 밀려오는 말도 안되는 전술 말고, 양웬리가 포위했다가 풀어주는 것 말입니다. 물론 안쪽의 라인하르트와 바깥쪽의 뮐러 부대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서 우당탕 충돌 안습이 벌어졌다고 해도, 사병만 있는 고구려군이라고 나을게 있겠습니까-_-;; 고구려군이 스파르타군처럼 개개인이 전술적 사고를 이해하고 있는 군대도 아니고 말이지요. 여기에 관장 3,500명이면 수뇌부는 물론이고 장군, 무사, 기타 귀족들도 상당수가 잡혀갔다는 뜻이됩니다. 고대전에서 특히 이들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쓰러지면, 아래의 병사들의 전술적 능력이나 운용의 폭은 줄어들고, 그대로 부대 자체가 해체되는 일도 많습니다. 즉, 무사가 부족하면 군대를 편성하지 못하는겁니다. 삼국지 할 때 성에 병사 10만이 있는데 무력 50짜리 장군 둘만 딸랑 있을 때의 안습 상황을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_-
안그래도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고대의 무사나 장군들은 국가에 의한 관료로서 선발되는 숫자도 있었겠지만, 귀족들의 사병과, 거기에서 편성된, 즉 귀족과 사적인 충성관계로 이어진 무사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이런 무사와 장군들의 존재는 오히려 군대 내부에 반란의 씨앗이 되는겁니다.
아마 이들은 사표쓰거나 멀리 한직으로 좌천되었겠지요. 안그래도 고구려에는 정예 무사와 장군들의 수가 부족한 시기에, 그나마도 뺏어가고 남은 군대를 놓아주는 것은 사실상 전투 부대 구성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남은 군사가 평양성으로 가서 뭐라고 중얼거릴까요? "태종 ?O아 조낸 마음씨 좋다" "역시 대인배는 다른거삼"수준이겠죠? 태종이 여태껏 마음씨 좋은 척 왱알왱알해댄 것도 이런걸 위한겁니다. 만약 평양성이 고립되었을 때 이 부대가 들고 일어날지, 적어도 성 내부를 분열시킬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고구려에게 유리한 방향일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여기에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가 큰 타격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으면, 구당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국이 크게 놀라서 후황성 및 은성이 저절로 함락되니, 수백리에 인가의 연기가 끊겼다." 적어도, 함락되지 않은 성을 줏어먹었다고 뻥칠리는 없겠지요. 여기에 노획한 물품의 수도 단순히 선봉대로 보기에는 많습니다. 기계와 명광개는 그런다 쳐도, 선봉대가 느릿느릿 걸어오는 소 5만두를 끌고 한판 붙으러 올까요? 말 5만(구당서에는 3만)필은 어떨까요.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사실상 말갈군) 20만이 안습 되었을 때 얻은 마필이 3만 필이었다는걸 상기해 봅시다.
<<<<당주가 백암성을 항복받자 이세적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맹이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불복하므로 막리지가 이를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맡겼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만일 불의에 나아가 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대가 먼저 건안을 치는 것이 좋겠다. 건안이 함락되면 안시는 내 복중에 있는 것이니 이는 병법상 이른바 '성에는 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것이다"하자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은 남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으며, 우리의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를 넘어 건안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인이 우리 양도를 끊으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안시가 함락되면 북을 울리며 진군하여 건안을 취할 것입니다"하였다. 당주가 이르되 "그대를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책략을 쓰지 않으리요. 내일을 그리치지 말라"하였다. 세적이 드디어 안시를 쳤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당주의 기치를 바라보고 곧 성 위에 올라서 북치고 소리지르니 당주가 노하였다. 세적이 청하기를 성이 함락되는 날에는 남자는 모두 구덩이에 넣어 죽이자고 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공격하기를 오래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당주에게 청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이미 몸을 대국에 맡겼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안시성 사람들은 그 집을 돌보고 아끼어 스스로 싸우니 갑자기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고구려의 10여만 명의 군세를 바라보기만 하고 궤패하여 나라 사람의 담이 꺾이었는데, 오골성의 누살은 늙어서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사를 여기에 옮겨 아침에 이르면 저녁에는 이길 것입니다. 그 나머지 통로에 있는 소성은 당의 군세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분궤할 것이니 연후에 그 자량을 거두고 고행하여 나가면 평양은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반드시 평양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도 또한 말하기를 "장량의 군사가 사성(비사성)에 있으니 이를 부르면 2일 이면 올 것입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틈타서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수를 넘어 평양을 직취함은 이 거사에 있습니다"하였다. 당주가 이를 따르려하자, 홀로 장손무기가 이르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과 다르니 위험을 무릅쓰고 향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이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니 만일 오골성을 취한 후에 장구하여 나아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하니 당주가 중지하였다.>>>>
====>여기서 고연수가 당에게 공격을 감행한 이유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연수씨, 눈 떠보니 애프터인데, 이미 그 전에 상황을 다 알고도 잠자리에 들었단 뜻입니까(...) 즉 고연수는 고구려가 주필산에서 지면 어떤꼴 나는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무리하면서까지 교전에 나선 것일까요? 단순한 공명심 때문에? 그러나 위에서 보시면 아시다시피, 당태종은 상,중,하책 운운하면서 이미 고구려군이 하책으로 나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상책을 되짚어 봅시다. 즉 안시성과 성 밖의 고구려군이 협동하여 적을 막고, 양도를 끊는다. 이게 왜 상책입니까? 이거 고구려가 항상 해오던거 아닙니까? 고연수도 이 항상 해오던 것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겁니다. 고구려에서도 장군이나 무사급 정도면 30년 전 고수 전쟁에서 어떻게 이겼는지 다 가르쳤을테니까요. 그런데도 이 조건을 마다하고 고연수는 싸움을 겁니다. 하나 더 짐작할만한 건덕지가 있는데, 바로 안시성이 반 연개소문의 대표 중 한 명이었다는 겁니다.
친 연개소문파 장군과 반 연개소문파 성주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뭐, 아예 협력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습니다만...어떻게든 불협화음이 날건 분명합니다. 혹시 누가 자기편 진영으로 초청 해서 전형적인 스토리대로 스각~이라거나, 하다못해 전투가 끝난 후 잡아 족친다거나,
(즉, 애니가 끝나고 토사구팽 당한다거나)
하다못해 성 안의 반대파와 고연수 군대 내부의 반 연개소문파와 커넥션이 형성된다거나...안시성주가 물론 당태종과 끝까지 싸워 고구려를 지켜낸 영웅입니다만, 실제 영웅 중에서 그렇게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 헌신적이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괜히 이순신장군이 존경 받는게 아닙니다. 실제 상당수의 영웅은 충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입니다. 고연수가 안시성주에게 등을 믿고 맏기기 어려울겁니다. 나아가, 군 내부의 반발도 잠재워야 합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가 어째서 알프 아르슬란이 유리한 평화조건을 제시했음에도 강공을 선택했는지 생각해봅시다. 하다 못해 밑에서 헨리씨가 게클렝의 조언을 무시하고 흑태자에게 개돌한 이유도 생각해 봅시다. 아마 군 내부의 반대파는 시간을 오래 끌수록 껄끄러운 존재입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탈주자가 생기거나...오래 갈수록 고구려로서도 이들의 존재는 부담스러워집니다.
고연수는 이것을 막기 위해 적과 강공을 선택했다고 보여집니다. 단순히 유인작전에 걸린 것도 있겠지만, 이 뿐만은 아니고 위의 생각이 주요 이유가 아니었던가 싶군요.
P.S 수정& 더 추가합니다.
1. 고정의가 대대로라고 기록된 것은 신당서이고,-당서 시리즈엔 고정의란 이름 자체가 안나옵니다. 그냥 늙은 대로라고만 하지요-, 나머지 기록에는 대로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고정의란 이름이 나온 삼국사기에서 고정의를 대로로 하는 것으로 보아, 고정의는 대로가 맞는듯 합니다.
그렇다면 대로가 뭘까요?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후기 고구려에는 대로라는 명칭이 없고, 대대로라는 명칭만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백제 개로왕이 패하고 잡혀 죽임을 당할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이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고구려의 대로인 제우와 재증걸루, 고이만년이 쳐들어왔다,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군 장수로 참전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대로인 재우, 재증걸루, 고이만년이 쳐들어왔다, 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여기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백제 출신이었다가 초기 정쟁 때문에 고구려로 망명한 장수들입니다. 아마 이들이 고구려의 원정군 사령관인 제우와 같은 등급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으므로, 사실 대로는 다른 관직 등급을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유사한 예로 신라에 대등과 상대등이 있습니다. 대등은 신라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 참석하는 고위 귀족들이고, 상대등은 그 귀족회의의 최고 의장이지요. 여기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대대로는 귀족 회의를 주관하여 국정을 총괄하는데, 그렇다면 대로들은 그 귀족 회의체의 구성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두대형 이상이 귀족회의로 참가하니, 이들이 "대로"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고정의는 고연수와 같은 등급 위두대형인 "대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중국 사서에는 고정의란 이름 자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을지문덕 같이 최고 사령관 이름만 간간히 등장하지요. 그렇다면, 이 대군을 이끈 장군은 고연수와 고혜진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을 듯 합니다.
유사한 예로 계백같은 경우도 직위는 달솔이지만, 충상, 상영등 좌평이 이끄는 부대까지 자기가 통솔해서 전투에 나선 경우도 있습니다. 고연수와 고정의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불확실한데도 고정의가 대대로라는 기록 하나로 그가 총사령관이었다고 미는 것도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2. 주필산 전투에서 기록되지 않은 당의 다른 부대에 대해서, 당의 육화진 중에서 방어 대형으로 안행진이 있습니다. 즉 ^모양이나 이 역자로 3부대를 전방에, 남은 3부대를 후방에 배치하는 진형입니다. 물론 일부는 중군을 호위하기 위해 빼두었던지, 다른 용도로 활용했을 수 도 있지만, 위와 같은 부대 배치라면 육화진의 7군 중 남은 부대가 사실은 이세적의 통솔 하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활약했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3. 행군총관입니다만...이세적군 1만 5천을 본 고연수는 위에서 보시다시피, "수가 적다"고 보고 공격합니다. 이 말은, 김용만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겨우 3만인 고연수군이 14만의 이세적군을 "수가 적다"고 보고 정면으로 들이박았다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연출됩니다-_-;;
유인작전이라고는 해도, 유인작전은 위에서 보시다시피 고연수군을 지구전에서 단기전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지, 직접 전장으로 유인한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세적이 맡은 역할은 거점 방어. 칸나이에서는 강력한 로마군의 공세를 막아야 하는 갈리아군을 한니발이 직접 맡았고, 가우가멜라에서는 파르메니오가 맡았던 작전으로 가장 희생이 크고 고전해야 하는 부대입니다. 당태종 자신은 주필산에서 전군을 지휘해야 했고, 그 부대를 맡기에는 위험하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군"에 맡겨야합니다. 태종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장군이 누구일까요?
바로 이정과 이세적입니다.
일단 능력으로 이정이 낫습니다만, 그는 병에 걸려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부대를 맡아야 하는 자는 이세적입니다. 거점 방어를 맡아야 하니 일종의 매복군인 장손무기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맡는 것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세적의 흑기가 포위되었다는 것도, 여기서 이루어진 전투라고 보구요. 그만큼 고구려군의 공세는 거세 이세적의 방어군을 밀어 붙였지만, 결국 무너트리는데는 실패한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4. 고연수군의 수는 위에서 추측한대로, "최소 6만"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아무래도 김용만 교수의 주장처럼, 고구려군 일부가 포위망을 뚫자 남은 고구려군이 달아났다는 부분은 억지가 크다고 봅니다. 수뇌부가 궤멸된 군대가-적어도 고연수, 고혜진등은 전부 잡혔습니다-어떻게 그렇게 절묘하게 달아날 수 있는지도 의심이 가구요. 춘추시대부터 대군이 하루에 움직이는 거리는 1사, 즉 30리 내외입니다. 고연수군도 30리를 움직였으니 큰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물론 고연수군이 고구려군의 전군은 아니었을겁니다만-어떤 군대든 본진을 지키거나 하는 역할의, 예비대는 남겨두니까요- 고구려의 전투병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10만이라고 쳐도, 고연수가 말아먹은 최소 병력이 6만입니다.
더군다나 적을 공격할 부대였으니 선봉에는 강력한 정예들이 집중 배치되어 있었겠지요.
이 부대를 말아먹었으니...사실 주력군이 소멸했다고 봐도 별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5. 왕군악건은 제가 당서 열전을 구할 수 없어서 제대로 뭐라고 반박하기 어렵습니다만...왕군악이 어떤 군대와, 어느 정도의 군대를 이끌고, 어떻게 싸웠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고 압니다. 일부 군대를 이끌고 위에서 이야기한 고구려군 후위와 싸웠을 수도 있고, 혹은 기습 당했을 수도 있지요. 당서 열전이 원래부터 오류로 악명 높은만큼 날짜에 어떤 착오가 있을지도 모릅니다.--물론 이런 반론 자체가 좀 억지스럽다는것은 압니다만, 왕군악의 개인의 죽음이 고구려군의 패배를 무마시킨다고 보기엔 근거가 약하다고 봅니다.
6. 연개소문의 책임을 그 아들들에게만 떠맡기는 것도 억지스럽지요.
연개소문의 정치에 어떤 개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들들 밑으로 계파가 줄서기를 한 것으로 보아 그건 전형적인, 사적 권력 강화에 치중한 독재자의 아들들 모습입니다. 현상 말고 좀 더 깊숙히 들여다보면, 줄서기가 이루어졌으니 아들들끼리의 내분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기도 했구요. 연개소문은 여기에서도 책임을 져야 할겁니다. 건전한 통치 체제는 미루어놓고, 아들들 밑으로 줄서기가 이루어질 때까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어쩌면 사적 권력 기반을 위해 더 장려했을지도 모릅니다-것을 아들들 책임으로만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최고 지도자가 어떻게든 조정을 했어야 합니다.
7. 당군의 안시성 공격은 7월달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제 원래 글에서 따서 읽어주세요-_-;;;
하지만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건, 안시성이 식량이 부족해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럼 당군은 도대체 언제 방어선을 폈냐는겁니다. 성을 포위하고 방어진을 편다는건 그만큼 전선이 늘어진다는 뜻이고, 후방공격에 취약해진다는 뜻입니다.
드 게클렝은 극히 일부의 군사들로도 렌을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괴롭힐대로 괴롭혔고, 고려군의 성채를 포위한 여진족은 척준경이 일부 군대를 이끌고 후방에서 강습 돌파를 행할 때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무너지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성의 보급선을 끊고 포위해야 하는 공성전은 후방에 적이 있는 상황에서 펼치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겁니다. 3개월 동안이나 진행되고, 토산까지 쌓아 올리는 수준에서 그 공격이 후방에 12만 대군을 두고 이루어진 것일까요.
더군다나 깃발 40리는 위에서 보시다시피, 전투 전 고구려군의 포진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말 고구려군이 포위 공격을 했다면, 30만 대군이 3만을 잡느라 포위하는 적도 보지 못하고, 반격할만한 예비대도 남겨두지 않고 일부 군대만 몰아 붙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김용만 교수는 사료만 보고 이면을 보지 않기에 오류가 발생한다고 하셨습니다만...저는 반대로 김용만 교수께서 지나치게 사료를 뛰어넘는 비약을 하셨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일개 재수생이 훨씬 깊게 연구하신 교수님의 주장에 이런 태클을 건다는게 좀 어불성설이란것은 알지만...어떻게든 사료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연구도 그 사료에서 시작되어야 하구요. 이를 넘는 주장은 추정은 될지언정 사실은 되지 못합니다. 크베사님께서 전에 음모론 이야기하시면서 그러셨지요. 개별 사실을 끼워 맞춰서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면 다음 카페는 공산주의 카페가 된다고... 김용만 교수님의 주필산 전투도 그런 맥락이라고 봅니다. 사료에서 말하지 않는 부분을 찾는 것은 좋지만, 그 점에서 교수님의 주장은 지나치게 비약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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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카이사르씨 작성시간 07.06.05 ㅍㅎㅎ 저런 짤방섞인 개념글은 게볼상 밖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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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밀리터리 나그네 작성시간 07.06.05 너무 중국사서만.. 100% 믿고 이것을 진실로 보지 말라는..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의 김용만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글쓴이에게.. 그리고 선봉에 정예가 집중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죠.. 정예병일수 있지만.. 엄연히 본진이 이끄는 병력이 더 정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최고 머리는 잘라졌을지 몰라도 단위별 지휘관들의 지휘체계가 있다면.. 혼란은 있을지 몰라도 그런대로 지휘를 할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구려의 병서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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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단인 작성시간 07.06.05 짤방이 참,,크흐흐 저런 식으로 글 쓰는 것도 꽤 재미있군요. 논리도 탄탄한 편이고,,그런데 결정적인 부분에서 주필산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들이 꽤 눈에 띄는 듯 합니다. 주필산 전투는 고연수 등이 잡히는 며칠간만의 전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한달 가까이 안시성 주변에서 벌어졌고 전당문 기사를 든 것에서 장손무기나 이세적이 이끈 총관 수와 고연수를 사로잡은 때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반박글을 쓰고 싶지만 기말고사와 밀린 레포트로 인한 압박으로 쉬이 그러질 못하겠군요. 예전에 카페에 이것 관련해서 쓴 글이 있는데 그걸 참고하시면 될겁니다. 어디 글인지는,,저도 어디에 처박혀있는지를 몰라서,,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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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麗輝 작성시간 07.06.05 사료는 그대로 믿기 전에 먼저 사료 비판을 통해서 검증을 받아야만 하지요. 무조건 사료만 믿어서도 안 되는디...쩝...암튼...재밌네요...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