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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스크랩] 주필산 전투의 미스테리 2

작성자vavamall|작성시간07.06.05|조회수315 목록 댓글 0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고연수가 고구려 지원군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다. 흔히 고구려 지원군의 지휘자를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으로 보고 있지만, 그들이 15만 대군의 총 지휘자일 수는 없다.

 

중국측 사서인 [책부원귀]에서는 고연수를 위두대형 이대부 후부군주로, 고혜진을 대형 전부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위두대형은 고구려 관등 중에 제 5위에 해당하며, 대형은 7위에 해당한다. 욕살은 지방장관으로 대개 위두대형이 맡았다.

 

현재 욕살로 확인되는 것은 책성과 오골성에 욕살이 있었음이 확인되는 데, 오골성의 욕살은 전시에 최대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같은 욕살인 고연수가 아무리 비상시에 특명을 받았다고 해도, 고구려군 전체의 절반 내지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15만이라는 대병력을 지휘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를 지휘하려면 위두대형보다 더 높은 태대사자, 주부, 태대형, 대대로가 직접 나서야 했을 것이다.

 

당군의 주요 지휘관인 장손무기는 정 1품의 재상이며, 이세적 역시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였다. 고구려에서도 대군을 동원한 만큼 당나라 장손무기 등과 맞먹은 정치적 비중과 관직을 가진 인물이 총사령관으로 나섰다고 봐야 한다.

 

이세민이 말했듯이 고구려도 주필산에서 당군을 막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 전쟁에 임했다. 그런 만큼 15만 대군의 총수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연개소문이 신임할 수 있는 2인자 내지는 최상위급 지휘관이 출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15만 고구려군을 지휘한 인물은 고연수가 아니라 경험 많은 대로 고정의였다.

 

고정의는 [신당서] <고려전>에는 대대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대로라면 고구려 최고의 관직 겸 관등이다. 당시 대대로는 고구려 최고 벼슬이기도 하지만, 연개소문의 최측근이 임명되는 자리였다. 물론 고정의가 대대로가 아닌 대로라고 하더라도, 대로는 고구려 국정을 총괄하는 회의체인 대로회의 구성원으로 최하 위두대형 이상이다.

 

경험 많은 대로이며, 고연수에게 계책을 세워준 것으로 볼 때 고연수보다 고정의가 상위 관직의 인물임에 분명하다. 또한 고정의는 안시성 주변에 와서 당군의 상황을 살핀 상태에서 고연수에게 작전을 일어주었으므로, 15만 대군과 함께 중앙에서 파견된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15만 고구려군의 총수는 바로 고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욕살인 고연수와 고혜진은 선봉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선봉장이기에 당군의 선봉부대와 싸웠던 것이고, 하룻밤에 30여 리를 진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만 대군이 모두 30여 리를 진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장비의 이동, 후속 보급로의 확보 등의 이유로 대군의 이동은 선봉대보다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 지원군의 본진은 안시성 주변 40리 떨어진 곳에서 조금은 천천히 당군과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왔다가, 선봉부대가 당군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23일 당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주필산 전투는 3일 만에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한 당나라 장수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신, 구당서] <양홍례열전>에는 당시 병부시랑이자 군대의 기밀을 책임지는 1급 군사참모였던 양홍례가 주필산 전투에서 기병과 보병 24개 군을 이끌고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장손무기, 이세적과는 다른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또한 전군대총관 유홍기도 주필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는데, 대총관이라면 이세적과 비견되는 장군인 만큼, 고구려 선봉부대를 격파한 전투가 아닌 고구려 주력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양홍례, 유홍기의 활약은 주필산 전투가 단 1회의 전투로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것은 고구려군이 고연수가 항복했다고 해서 붕괴되거나 궤멸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당문]에 따르면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은 이세적으로 하여금 장사귀를 비롯한 14명의 행군총관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서남면을 맡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26총관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고구려군의 배후를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북쪽 산에 올라가 전황을 살폈다고 한다.

 

장손무기가 이세적보다 더 상위의 관등을 가졌고, 이세민에 버금가는 권력자였음을 감안하면, 이세적이 1만 5천, 장손무기가 1만 명을 거느렸다는 기록보다는 장손무기가 이세적의 두 배에 해당하는 총관을 거느렸다는 [전당문]의 기록이 사실에 더 부합하는 것이다.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거느린 40명의 행군총관의 숫자라든가, 양홍례가 지휘한 24개 군의 병력을 고려한다면,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당군은 대략 30만 명에 이른다. 물론 당군의 전체 병력은 이보다 많다. 그런데 이러한 당의 대군이 안시성 북쪽에 도착해 6월 21~23일까지 고구려군과 대결을 한 이후, 7월 5일 안시성 동쪽 고개로 이동할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유홍기, 양홍례 등이 전투를 한 날짜도 기록에 없다. 때문에 7월 내내 아무런 전투 기록도 없다. 당군은 주필산 일대에 머물면서 건안성 공격 등 다른 대안을 찾기도 하지만, 결국 안시성 공격 외에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8월 10일 안시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면서 뒤늦게 안시성 공격에 나서게 된다.

 

당군은 1차 주필산 전투 이후 무려 50일 동안이나 주필산 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이 진군하지 못했던 것은 고구려 지원군 본진이 당군을 이곳에 몰아넣고 포위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주필산 부근에서 펼쳐진 고구려군과 당군의 지루한 대결을 2차 주필산 전투라고 할 수 있다. 2차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군이 원하던 작전, 즉 고정의가 말한 지구전이며, 연개소문이 의도했던 작전의 결과였다.

 

고연수는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 패배한 것이지, 고구려군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고구려군의 기본 작전을 고연수가 펼친 평원대회전이라고 본 일부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견해이다.

 

기록의 이면을 파헤치려는 노력이 없이 단지 몇몇 알려진 사료에 의해서만 사실을 재구성하다보니, 전황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내려진 성급한 결론일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연개소문이 평원대회전 전술을 새로 도입하고자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고연수도 연개소문의 지시를 받고 당군과 싸웠다가 대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의 축조 주연이 아니며, 단지 마무리에만 참여했을 뿐이다.

 

또한 평원대회전 전술과 천리장성 축조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고연수군이 당군과 싸운 것은 적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든 것일 뿐, 연개소문으로부터 직접 작전지시를 받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고연수는 고정의의 작전지시를 받는 자로, 15만 대군의 총사령관이 아니다. 고연수가 포로로 잡혔다고 해서, 고구려군이 와해된 것은 아니다.

 

주필산 이후의 전투상황도 연개소문은 청야수성 작전, 첩보전, 보급로 차단작전, 적을 사지에 몰아넣으며 지구전을 펼쳤지, 무모하게 숫적으로 훨씬 우세인 당군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펼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연개소문은 주필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주필산 전투 당시 고구려군의 지휘관은 고정의였다. 혹자들은 연개소문이 군사적으로 전혀 무능하다고 비난하지만,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662년 2월, 임아상 휘하의 당군을 격파하고 사수 전투에서 방효태가 이끌던 수만의 당군을 전멸시키고 대승을 거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주필산 전투에서는 그토록 무능하고 어리석었던 연개소문이 갑자기 병법을 깨우쳐 천재가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주필산 전투 당시의 연개소문과 사수 전투 당시의 연개소문은 서로 다른 사람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당군은 7월 13일 전사자의 시체에 표식을 하도록 하고, 이들을 일부 군대가 먼저 퇴각할 때 함께 가지고 가 귀환하도록 조치했다. 이것은 당군이 주필산에 머물 때 전투가 많이 생겨서 전사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군의 포위 공세가 심했음을 뜻한다.

 

당군은 1차 주필산 전투 이후 고구려의 후황성과 은성 두 곳을 함락시켰다. 기록에는 성 안에 있는 고구려군이 스스로 빠져 달아났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투를 통해 함락시켰을 것이다. 후황성과 은성이 천산산맥을 넘는 길목에 위치한 성이라고 할지라도, 당군이 이를 토대로 고구려 내지로 진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군이 안시성을 피해 천산산맥을 넘어 수암쪽으로 진군했을 수도 있지만, 수암 지역에는 노성구산성 등 둘레가 2~3킬로미터 남짓한 약 20개의 고구려 성들이 있다.

 

도리어 당군은 곳곳에 포진한 고구려 성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활로를 뚫지 못하고, 요동성에서 안시성에 이르는 좁은 공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주필산 전투를 당군이 고구려에서 거둔 대표적인 승리라고 하지만, 고구려의 장군 2명을 포로로 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당군은 시간과 군량을 소모하면서도 고구려군을 격파시키지 못했고, 전략적 목표인 고구려 내지로 진격하지도 못했다.

 

당군은 분명히 전략적으로 실패했다. 반면 고구려군은 당군을 포위 압박해 적의 힘을 소모시켰으며, 전장을 요동으로 한정시키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바다출판사>에서 나온 [새로 쓰는 연개소문 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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