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마립간 2년(418): 왕의 동생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말을 잘하는 사람을 구하여 가서 두 아우를 맞이해 올 것을 생각하고 있던 바,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
),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세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물었다.
“나의 동생 두 사람이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가 되어 여러 해가 되었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의 정이라서 그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소. 제발 살아서 돌아오게 하여야겠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세 사람이 똑같이 대답하였다.
“신들은 삽량주간 제상이 성격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세 신하의 말을 하며 가 주기를 청하였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오나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사신의 예로써 고구려에 들어가 왕에게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는 성실과 신의뿐이라고 합니다. 만일 볼모를 서로 보낸다면 오패(五覇)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참으로 말세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나 되니, 우리 임금이 형제가 어려움을 서로 돕는 뜻으로서, 오랜 회포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은혜로이 돌려보내 주신다면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정도와 같아서 별 손해가 없으며, 우리 임금은 대왕을 덕스럽게 생각함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 점을 유념해 주소서!”
고구려 왕은 “좋다”고 하고,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귀국하자, 대왕이 기뻐하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내가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팔과 같이 하였는데, 지금 단지 한 쪽 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다.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은 비록 열등한 재목이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내 명을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큰 나라요, 왕 역시 어진 임금이므로 신이 한 마디의 말로 깨우치게 할 수 있었지만, 왜인의 경우는 입과 혀로 달랠 수는 없으니 마땅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청컨대 나라를 배반한 죄로 논하여, 저들로 하여금 이 소식을 듣도록 하소서!”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율포(栗浦)에 다다라 배를 띄워 왜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듣고 포구로 달려가서 배를 바라다보며 대성통곡하면서 “잘 다녀오시오.” 하였다. 제상이 돌아다보며 “내가 명을 받아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다시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고는 곧바로 왜국으로 들어가서 마치 배반하여 온 자와 같이 하였으나 왜왕이 의심하였다.
백제인으로서 전에 왜에 들어간 자가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왕의 나라를 도모하려고 한다고 참소하였으므로,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케 하였다.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巡邏軍)을 포로하고 죽였으므로, 왜왕은 이에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기었다.]
장수태왕 12년(424):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왕은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위로하였다.
눌지 마립간 8년(424): 봄 2월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장수태왕 15년(427):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비유왕 7년(433): 가을 7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눌지마립간 17년(433):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비유왕 8년(434): 봄 2월에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에 신라가 질 좋은 금[良金]과 명주(明珠)로써 답례하였다.
눌지마립간 18년(434): 봄 2월에 백제 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에 왕이 황금과 야광주[明珠]를 백제에 예물로 보내 보답하였다.
장수태왕 38년(450): 신라사람들이 변경의 장수를 습격해서 죽였다. 왕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눌지마립간 34년(450): 가을 7월에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성(何瑟羅城) 성주 삼직(三直)이 군사를 내어 불의에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 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내가 대왕과 우호를 닦은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군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죽이니 이는 어찌 의리있는 일이겠는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물러갔다.
장수태왕 39년(451): 연수 원년 3월 중에 태왕이 명하여 은 3근 6량을 사용하여 합우를 만들었다.
연수 원년 3월 중에 태왕이 명하여 합우를 만드는데 은 3근이 들어갔다.(서봉총 유물)
장수태왕 42년(454):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눌지마립간 38년(454):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눌지마립간 39년(45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웅략천황 8년(463): 봄 2월. 身狹村主靑과 檜외民使博德을 吳나라에 사신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 [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라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어떤 책에서는 都久斯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을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王이 膳臣斑鳩[斑鳩는 우리말로 伊柯屢俄라 한다], 吉備臣小梨, 難波吉士赤目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膳臣 등이 아직 軍營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膳臣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 하였다. 膳臣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軍中에 令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地道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膳臣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라는 것은 高麗와 新羅를 말한다]. 膳臣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매우 약한데 매우 강한 나라와 부닥쳤다. 官軍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른 사람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아마 이번 전쟁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어찌 天朝를 배반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장수태왕 56년(468): 봄 2월에 왕은 말갈(靺鞨)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았다.
자비마립간 11년(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이하(泥河)를 이천(泥川)이라고도 하였다.>
장수태왕 57년(469): 가을 8월에 백제군이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 왔다.
개로왕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였고,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大柵]을 설치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자비 마립간17년(474): 일모성(一牟城), 사시성(沙尸城), 광석성(廣石城), 답달성(沓達城), 구례성(仇禮城), 좌라성(坐羅城) 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連)[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 왕 경(慶)[개로왕]이 아들 문주(文周)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구원하였으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경(慶)[개로왕] 역시 살해당하였다.
장수태왕 63년(475):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개로왕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四道]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
]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였다. 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
)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
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
)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
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
)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하였었다.
웅략천황 20년(476): 겨울 高麗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은 日本國의 官家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百濟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 겨울 狛의 大軍이 와서 大城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문주왕 2년(476):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의 백성[民戶]들을 이주시켰다. 3월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장수태왕 66년(478): 백제의 연신(燕信)이 항복해 왔다.
소지마립간 2년(480): 11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소지마립간 3년(481):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 이하(尼河)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을 목베었다.
동성왕 4년(482): 봄 정월에 진로(眞老)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兵馬事]를 아울러 맡게 하였다. 가을 9월에 말갈(靺鞨)이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300여 집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에 눈이 크게 내려 한 길[一丈] 남짓이나 쌓였다.
동성왕 6년(484): 봄 2월에 왕은 남제(南齊)의 태조[祖]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을 책봉(冊封)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복속[內附]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가을 7월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약사(若思)는 서해 바다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소지마립간 7년(485): 5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동성왕 7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장수태왕 77년(489):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고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소지마립간 11년(489): 가을 9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갑자기 쳐들어와 과현(戈峴)에 이르렀고, 겨울 10월에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