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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시대와 고구려

작성자귀거래사| 작성시간10.11.12| 조회수957|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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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정성일 작성시간10.11.12 동천왕이 미천왕으로 바뀌었습니다. 수정하세요.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1.13 얼른 고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서 조회하신 분들께 미안하군요.
  • 작성자 역사정의남 작성시간10.11.13 유유와 밀우장군은 그 당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규군이 패하여, 모두들 팔짱을 끼고 있을때 애국심 하나라 목숨을 건 구국투쟁역사는 길이길이 남았습니다!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1.13 그렇군요.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영웅은 유유와 밀우 아닌가 싶군요.
  • 작성자 정성일 작성시간10.11.13 관구검이 고구려로 쳐들어온 것은 244년과 246년 두 차례에 걸쳐져 있으며, 동천왕이 관구검의 군대에 쫓기어 남옥저로 달아난 일은 246년의 것입니다.
    밀우와 유유(요리사)의 덕택으로 동천왕이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나, 당시 환도성을 함락한 관구검이 저절로 물러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고구려가 멸망에서 구함을 당한 이유를 알 수 있죠.
    그것은 백제가 낙랑의 변두리를 쳐서 관구검이 후방이 침략당하여 보급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나게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시간10.11.13 그런데 백제의 좌장 진충이라는 인물을 찾아보았지만 백제의 진충은 시대적으로 후대의 인물이고, 당시 진충이라는 인물이 신라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계원의 아들이죠.
    그렇다면 백제가 신라를 끌어들여 당시의 조위 낙랑지역을 쳤다는 가설이 성립하여야 하는데 남당유고에 자료가 없어서 그 진위를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관구검이 침입시에 백제가 낙랑을 쳤다는 기록은 남당유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한 것입니다.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0.11.13 고구려초기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니까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이전의 백제.신라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삼한은 나오지만요. 2백년대 백제.신라의 역사는 안개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당유고라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그 성립이 최근의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남당유고는 그 기사의 원사료가 무엇인지가 밝혀지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2차적인 사료의 의미 밖에 없지 않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 낙랑 작성시간10.11.13 남당유고는 아직 진서라는 근거가 없으니 위서라고 보는 편이 합당합니다. 극소수의 일부 아마추어 분들을 제외하고 학계 연구자들은 화랑세기를 제외하고는(화랑세기 마저도 지금은 부정론쪽에 거의 완전히 기울어진 형국이지만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이러한 형국이니 독자연구의 범위를 벗어난 역사토론에서는 남당유고 언급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님이 남당유고를 토대로 이런저런 열린 가능성을 시사하시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요즘은 다소 최소한의 기본적인 틀을 넘으신 듯한 느낌도 듭니다. 덕흥리 벽화 무덤을 근초고왕의 것이라 주장하시는 것도 그렇구요...
  • 작성자 정성일 작성시간10.11.15 남당유고는 일본 궁내성 서릉고에서 남당 박창화 선생이 필사하여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저본을 확인할 수 없는 관계로 위서로 분류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타사서(삼국사기, 중국정사조선전, 일본서기)와 교차검증 또는 고고학적 유물과 비교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미추왕릉과 전내물왕릉과 황남대총(실성왕릉)의 피장자의 유전자를 추적하여 내물왕릉의 피장자와 미추왕릉의 피장자를 가려낼 수 있다면 남당유고의 진위여부의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만약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이 미추왕과 부녀사이가 성립한다면 그 증거가 되겠죠.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시간10.11.15 현재는 미추왕릉으로 전해지는 대릉은 미추왕의 사망시기와 고고학적으로 1세기 정도가 차이나는 관계로 미추왕릉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미추왕릉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남당유고가 진서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남대총의 남분의 피장자가 60세 전후 혹은 60대에 죽은 것이며 금동관이 출토되고, 북분의 피장자는 그 보다 20년후에 묻힌 것으로 보이며 여성이라고 하였는데, 탄소연대측정을 통하여 5세기 전반에 죽은 내물-실성-눌지 3분중에서 한 분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실성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부정론자들은 왕릉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함이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시간10.11.15 내물왕릉은 아직 조사발굴이 이루어져 있지 않는데, 미추왕의 외손자이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의 몰년이 284년이며, 내물왕의 재위기는 356-402(47년간)이다.
    내물왕의 어머니 나이와 출산가능 나이를 고려하여 내물왕은 최소70대에 돌아가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남당유고에는 내물왕이 돌아가실 때 나이가 53세이다.
    만약 나의 주장이 고고학적 발굴과 일치하였을 때 또 다시 이젠 내물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이 내물왕릉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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