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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한원 고려기, 어느 시기의 고구려를 보여주는 것일까.

작성자돌부처|작성시간11.01.05|조회수388 목록 댓글 1

당나라 장초금의 한원에는 高麗記를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습니다.

高麗記는 찬자나 편찬연도 등이 전혀 알려진 것이 없고 오로지 한원에만 인용된 사서입니다.

高麗記의 편찬시기에 관해서는 영류왕 재위시 사신으로 왔던 직방낭중 진대덕에 의해 지리적 정보를 수집한 직후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좀 더 이른 시기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선 사료명을 봐서는 고구려 중기 이후에 편찬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는 6세기 중반이라고 생각합니다.

 

高麗記曰. 其國建官有九等. 其一曰吐捽. 比一品. 舊名大對盧.

 

고려기는 관등을 설명하면서 그 첫번째가 토졸이며 옛 이름은 대대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7세기 초에는 대대로라는 관명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려기의 내용에 오류가 없다면, 국상이 사라진 후에 대대로라는 관명이 사용되다가 6세기까지는 토졸로 변경한 후 7세기에는 다시 대대로로 복구했던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이 타당해 보이는 근거가 이어서 등장합니다.

 

次皂衣頭大兄. 比從三品.

 

다섯번째 관등(종3품)으로서 조의두대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조의두대형은 형계열이 분화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관등명으로서 고구려 말기에는 위두대형으로 명칭이 변하게 됩니다. 위두대형이 등장하는 시기는 마찬가지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장 이른 시기로 확인되는 것이 고질묘지명입니다. 고질의 증조 고전은 대략 평원왕 재위시에 위두대형에 등용되었던 인물입니다. 따라서 평원왕을 전후로 해서 조의두대형은 위두대형으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三年一[代]. 若稱職者. 或不相[袛]服. 皆勒兵相[攻]. 勝者爲之. 其王但閉宮自守. 不能制禦.

 

대대로는 3년에 한번 바꾸고 만약 토졸 자리를 일컫는 자가 있는데 서로에게 굽히지 않는다면, 둘다 병사를 가다듬어 서로를 쳐 이긴자가 토졸이 되며, 이때 그 왕은 단지 궁성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지킬 뿐 그들을 억눌러 다스리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정치형태는 왕권이 강했던 평원왕 이후로 볼 수 없으며, 왕권이 가장 약했던 안장왕 내지 양원왕 시기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위와 같은 근거를 토대로 고려기가 6세기 중반의 고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구체적으로는 환도성의 반란 직후 내지 평원왕의 즉위 직후라고 생각됩니다.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계기가 있는데 귀족세력의 마지막 반란이라고 할 수 있는 환도성의 반란이 그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환도성이 이 시기에 규모가 크다거나 전략상 요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의의를 보면 일반적인 모반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왕권에 대한 신권이 마지막 도전, 그리고 왕권이 신권을 압도하기 시작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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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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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역사정의남 | 작성시간 11.01.06 우리나라 역사서가 많이 소실되어, 그 당시를 알기가 너무 어렵네요~ 돌부처님! 고생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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