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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중원고구려비는 광개토왕에 의하여 세워졌다

작성자귀거래사|작성시간11.07.11|조회수464 목록 댓글 0

중원고구려비는 광개토왕에 의하여 세워졌다

 

중원고구려비는 5세기에 충주에 세워진 고구려의 石碑로, 前面과 左面만도 약 400자의 銘文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었지만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되었던 탓으로 마멸이 심해 판독할 수 없는 문자가 많고 더욱이 後面과 右面에는 문자가 새겨져있었는지조차 확인 불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비문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기술한 것으로, 고구려의 왕은 고려태왕으로 표기한 반면 신라의 왕은 신라매금, 동이매금으로 표기되어있으며, 두 왕이 如兄如弟의 상하관계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구려는 매금 즉 신라왕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있다. 의복은 매금 뿐만 아니라 매금의 토지 내(신라국내)의 衆人(호족)에게도 지급되었으며 그들은 고구려의 군영 앞에서 무릎을 꿇는 예를 하고 이를 받아갔다. 12월 23일에는 동이매금(신라왕)과 그 신하가 우벌성(울산?)의 고구려의 관리(大使者, 主簿)를 방문했다. 또 고구려의 군관(幢主)은 신라의 토지 내에서 모병을 하고 있다. 신라는 '國'이 아니라 '土'라고 표기되어있다.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비문은 당시 신라가 고구려에 완전히 예속되어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이 고구려비의 건립연대를 비문에 나오는 日干支와 干支年을 기준으로 하여 알아내려고 하였다. 일간지는 十二月二十三日甲寅, 간지년은 □酉□으로 되어있다. 5세기를 중심으로 전자에 해당되는 해는 449년, 480년, 506년 등이며 후자는 辛酉年이라고 보면 421년 또는 481년 등이 이에 해당된다. 변태섭은 이 두 가지 간지를 조합하여 건립연대를 481년이라고 하였고 武田幸男은 중원지역(충주)이 고구려에 병합되는 것은 475년의 한성함락 이후라는 점을 들어 변태섭의 설을 지지했다. 이에 대하여 임창순과 김정배는 5세기 중엽에 양국 간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12월23일 갑인’을 449년이라고 했다. 한편 木下礼仁은 日干支를 ‘十二月日甲寅’이라고 보고 이것을 403년에 비정한 뒤 辛酉年 421년과 조합하여 비가 421년에 건립되었다고 상정하였다. 이처럼 建碑가 5세기 장수왕 대라는 것에는 공통되지만 실 연대는 학자에 따라 421년부터 481년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있다.

 

그런데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자 신라와 백제는 이에 공동대처하기 위하여 서로 화친을 맺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있다.

 

눌지왕 17년(433)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므로 이에 따랐다. 18년 2월에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오고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으므로, 10월에 왕은 황금과 명주로 백제에 보답하였다.

 

이것은 433년에 신라가 고구려의 통제와 간섭 하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눌지왕 34년(450)에는 고구려의 邊將이 悉直(삼척)에서 신라군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양국 간의 군사충돌이 눈에 띄게 되었고 소지왕 3년(481)에는 동해안에서 고구려-신라의 충돌이 빚어져 백제. 가야. 말갈도 끼어든 전투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5세기 중엽에 고구려-신라는 군사적 대립관계에 놓이는데 이러한 상황은 비문 건립시의 如兄如弟의 관계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중원고구려비는 433년 이전에 건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는 ‘十二月二十三日甲寅’에 해당하는 해는 없다. 그래서 木下礼仁은 이를 ‘十二月二十日甲寅’의 403년으로 간주하고 建碑의 해를 이 403년과 가장 가까운 신유년인 421년(장수왕 9년)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비문의 □酉□를 과연 辛酉年이라고 간주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酉’ 字 하나만 확인되는데다 그 ‘酉’ 字도 확실치 않다고 한다. 설사 그것이 ‘酉’ 字라고해도 □酉□을 辛酉年이라고 볼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비문의 일간지와 간지년을 단서로 건비의 해를 추정하려고 한 것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일본학자 木村誠은 <中原高句麗碑立碑年次의 재검토>에서 비문에 나오는 ‘太子’에 주목하여 장수왕 대에는 삼국사기에 太子 책립 기사가 없으므로 이 비는 장수왕 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문자명왕의 즉위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文咨明王(一云明治好王), 諱羅雲, 長壽王之孫。父王子古鄒大加助多。助多早死, 長壽王養於宮中, 以爲大孫。長壽王在位七十九年薨, 繼立。

 

문자명왕(재위 492~519)은 장수왕의 손자로, 부친 古鄒大加 助多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궁중에서 양육되어 太孫으로 책봉되었으며 이윽고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는 것이다. 장수왕의 아들 조다는 일찍 죽었다고 하므로 그가 생전에 태자로 책봉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삼국사기는 그를 왕자라고 했을 뿐 태자라고 칭하지 않았는데 조다가 태자였다면 삼국사기에도 당연히 태자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장수왕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태자 책립기사는 없다. 장수왕은 다른 아들이 없었던지 아니면 있었더라도 왕위의 장자계승원칙을 지켜 왕자를 책립하지 않고 손자를 책립했던 것 아닐까? 하여튼 장수왕 대에는 太孫은 있었어도 太子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문의 태자를 고구려의 태자로 보는 한 비문에 기록된 내용을 장수왕 대의 사실로 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建碑 연도도 장수왕 대는 제외하여야 한다는 것이 木村誠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다음의 문자명왕 대에는 433년 이래의 고구려-신라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어 양국 사이에 자주 격전이 벌어진다. 문자명왕 대에 비가 세워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의 前代인 광개토왕 대에 건립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 시기는 400년의 신라구원 이후로 한정된다. 그때 이후 신라가 완전히 고구려의 예속 하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문의 상황은 광개토왕릉비에 서술된 신라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며, 매금. 奴客 등의 용어, 고모루성의 이름까지 광개토왕릉비와 동일하다. 신라가 고구려에 완전히 예속되어 내정까지 간섭받고 있던 시기는 그때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를 참고로 하여 建碑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면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18년 4월에 왕자 巨連을 태자로 세웠다. 7월에 나라 동쪽의 독산 등에 여섯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을 옮겼다. 8월 왕이 남쪽을 巡行하였다.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8년)

 

광개토왕이 18년(409) 8월에 남쪽을 순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고구려비가 내륙의 중원지역(충주)에 세워진 이유를 말해주는 것 아닐까? 태자로 책립된 왕자 거련을 비문에 나오는 태자와 동일인이라고 보는 것도 문제가 없다. 독산성 등 여섯 성은 ‘동쪽’에 쌓았다고 되어있지만 신라왕을 ‘동이매금’이라고 칭하고 충주를 ‘守天東來’라고 한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성들은 백제.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충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 왜.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축조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비문의 첫머리에 '五月中'이라고 있어 삼국사기의 8월 순행기사와 맞지 않지만 五月中은 왕의 순행월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만일 왕의 순행일이라면 반드시 날짜까지 기록했을 터이다. 삼국사기의 誤記일 수도 있다. 또 비문의 太子共은 태자 거련과 다르지만 太子共의 共은 이름이 아니라 ‘함께’라는 부사라고 본다. 광개토왕은 409년 충주에 순행하여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국경지대의 상황을 점검한 뒤 귀경하였던 것이다. 비문에 12월 23일이라는 날짜가 나오므로 중원고구려비는 그 순행 이듬해인 410년경에 세워졌다고 보아야 하며, 그 下限은 왕의 몰년인 412년이다. 그러므로 중원고구려비야말로 광개토왕에 의하여 세워진 진짜 광개토왕의 비로, 장수왕에 의하여 414년에 세워진 集安 광개토왕릉비의 원형이라고 할 것이다.

 

장수왕(거련)은 491년에 98세로 사거하므로 그의 生年은 394년이다. 따라서 장수왕은 16세에 태자로 책립된 것이다. 그는 부친의 눈부신 정복활동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409년 광개토왕의 남쪽 순행에는 그도 따라 갔을 가능성이 크다. 4월에 태자로 책봉된 그는 5월에 충주에 내려가 부왕의 南行을 준비했던 것 아닐까? 장수왕은 중원의 고구려비 건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왕 사후 즉위한 그가 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를 건립할 생각을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국내성에 중원고구려비보다 더 크고 훌륭하게 부왕의 顯彰碑를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원고구려비와 광개토왕릉비가 모양이 흡사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본다. 장수왕은 광개토왕릉비 건립에 중원고구려비 건립당시의 기술자들을 동원했을 것이다.

 

비문에 나오는 蓋盧를 백제의 蓋鹵王이라고 간주하고 이 비가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된 475년 이후에 건립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고구려-신라 관계를 서술한 이 비문에 백제의 개로왕이 등장할 여지는 거의 없다. 더욱이 당시 신라는 멸망직전의 백제에 원군 1만 명을 급파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백제를 도와 고구려군을 물리친 신라가 그 이후 고구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또 당시 고구려군의 한성함락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때 충주가 고구려령이 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충주지역이 고구려령으로 되는 것은 396년의 백제공격 때였다. 그것은 광개토왕릉비에 고모루성이 그때 고구려가 빼앗은 58성 중 하나로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중원고구려비에 고모루성의 守事(성주)가 나오므로 고모루성은 충주 인근인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404년 왜군은 불의에 대방계를 침입했으나 고구려군의 반격에 괴멸되었으며 수많은 병사가 참살당하는 참패 끝에 물러났다. 407년 광개토왕은 步騎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적을 참살 탕진하고 갑주 1만여 점과 수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으며 귀환 길에 사구성, 누성 등 6성을 깨뜨렸으나 비문에 결자가 많아 이 상대국이 어딘지 확실하지 않다. 나는 이것을 왜국이라고 본다. 광개토왕은 404년 왜의 ‘不軌侵入’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공격을 한 것이다. 왕은 이 기회에 배후의 위협세력인 백제. 왜를 완전 제압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본다.

 

409년 광개토왕이 충주를 순행한 것은 2년 전의 戰果와 그 이후의 현지상황을 확인함과 동시에 신라매금(실성이사금)의 복속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400년의 신라구원 시에도 신라매금(내물이사금)이 고구려로 광개토왕을 예방하고 구원에 대한 사의를 표한 것으로 되어있다. 중원고구려비는 왕의 현지방문을 기념하고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으로, 왕의 남부경영을 총결산하는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권임을 강조함으로써 다시는 고구려나 신라를 넘보지 말라는 백제, 왜에 대한 왕의 강력한 경고이기도 했었다고 본다.

 

고구려군관이 신라 영내에 주둔하면서 신라인을 모병했다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뜻도 되지만 고구려가 신라군 육성을 지원했다는 측면도 있다. 400년 이후 고구려군관은 신라군의 고문역을 맡았던 것이라고 본다. 광개토왕은 신라를 백제. 왜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가 다시는 불의에 백제. 왜로부터 배후를 공격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신라는 이와 같은 고구려의 전략과 그 비호 속에 착착 국력을 키울 수 있었으며, 그 결과 433년까지는 백제에 버금가는 실력의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신라가 고구려에 등을 돌리고 과거의 적 백제와 손을 잡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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