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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上世 고구려왕계(4) - 남무의 世系 上의 위치

작성자귀거래사|작성시간12.02.12|조회수252 목록 댓글 1

上世 고구려왕계(4) - 남무의 世系 上의 위치

 

 

上述한 바와 같이 男武는 그 前後의 왕들의 世系 上, 참으로 이상한 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이런 왕이 백고(신대왕)와 연우(산상왕) 사이에 재위한 것처럼 되어 있을까? 여기서 먼저 고찰해야 할 것은 남무가 실재의 인물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구려왕가의 계보는 시조 이하 數代의 동안, 공상의 인물로 장식되어있다. 5세기 초의 광개토왕碑의 머리글에 보이는 계보와 魏書에 기록되어있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어쨌든 광개토왕 치세의 전후, 즉 이미 한자로 기록을 할 줄 알게 된 그 시대의 고구려인이 스스로 이런 계보를 만들었으며, 당시 그들 사이에 어느 정도 확실하게 전해진 실재의 왕과, 건국설화의 주인공으로서 神異的인 주몽(추모)을 연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고구려본기의 계보는 원래는 이런 것의 하나였으며, 그것이 해동고기 같은 古記錄의 중개에 의해 김부식에게 이용되게끔 後代에 전해졌을 것이다. 과연 그렇다고 한다면 이 왕들의 계보를 전한 舊記의 하나인 이른바 第一史料에는 慕本王(위서의 莫來) 이하의 부분은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나는 앞서 고구려본기의 남무 및 그 이후 어느 부분의 世系가 지금 말한 것 같이 고구려 고유의 것임에 대하여, 궁. 수성. 백고의 3代는 훨씬 늦은 시대에 海東古記의 撰者가 후한서. 삼국지 및 위서의 글에서 얻은 지식에 의하여 추가한 것이리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目下의 문제와 결부시켜 고찰해보면, 본래 모본왕은 남무를 직후의 왕으로 하여 연우 이하의 世系에 접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남무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면, 그는 이 옛 형태의 世系에 있어서는 그 앞에 모본왕, 그 뒤에 연우를 둔 왕이었으며, 공상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왕들과, 역사상 확실하게 존재했던 왕들 사이의 경계에 서 있었던 왕이었을 것이다.

 

그랬는데 해동고기의 撰者는 漢史의 기재에 의하여 自國의 上代에 궁. 수성. 백고라고 하는 3代의 왕이 있었음을 알고, 이들 3왕에게 각각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칭호를 부여하고 이들을 옛 계보 속에 편입하였으며, 궁의 世代 순위를 모본왕의 다음에 배치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하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魏書의 글을 참고한 결과인 것 같다. 위서에 의하면 莫來의 자손이 相傳하여 宮에 이르렀다고 하는 막연한 것으로, 그 간의 代數와 왕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고 있으므로,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처리하고, 莫來에 비정할 수 있는 慕本王을 바로 宮에 접속시켰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해동고기에 의해 고구려 고유의 世系에 위와 같이 조작이 가해짐에 이르러, 남무는 모본왕에서 떨어져 백고 직후의 왕으로 되었으며, 우리들의 눈에는 역사상의 인물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남무에게 고국천왕이라는 칭호가 부여된 것도 그 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고의 뒤를 이은 왕은 이이모에 해당하는 백고의 둘째아들 연우였으며, 그 사이에 존재했던 왕이 없었다는 것은 漢史의 기재에 의해 의심의 여지가 없으므로, 해동고기 撰者가 삽입한 3왕은 바로 연우에 접속되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나는 남무의 世系 上의 위치를 궁의 직전, 모본왕의 직후로 옮겨, 이를 공상의 왕인 모본왕 및 그 이전의 諸王의 중간에 넣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한 차례 世系의 밖으로 내쫓겼던 남무는 마침내 그 설 자리를 얻게 되어 스스로 만족해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해동고기 撰者는 고구려 所傳의 본래의 世系 속의 1왕 남무가 시조 주몽 이하의 空想의 왕들 가운데 마지막 왕이었음을 알지 못하고 실재의 왕인 漢史의 백고를 그 앞에 배치했던 것이다. 남무를 백고의 둘째아들이라고 함과 동시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째아들을 만들어 남무를 이이모에 억지로 비정하고, 다시 위궁을 연우의 별명이라고 한 것은 그 결과인 것이다. 즉 이렇게 매우 무리한 比定을 감행한 것은 삼국지에 나오지 않는 남무의 在位를 인정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또는 고구려본기의 남무 말년 조에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魏人來投의 사건을 서술하고 그 조 아래에「是漢獻帝建安二年」이라고 하고 있는데, 본문 속에 年代를 집어넣는 필법은 그 예가 드물다. 생각건대 이것은 고구려본기의 편자 김부식이 해동고기의 紀年에 의거했음을 특별히 나타낸 것일 것이다.

 

이리하여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남무는 靈帝 광화2년(179)부터 이 해까지 19년간 재위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삼국지의 文面에서 엿볼 수 있는 백고의 말년은 공손탁이 요동에 웅거하고 있던 건안 초년이므로, 해동고기의 撰者는 역사상 전혀 무의의한 남무의 치세를 백고의 치세 안에 끼워 넣어 그만큼 백고의 재위연대를 단축케 했던 것이다. 공손탁이 요동에 웅거함에 이르러, 백고가 공손탁을 도와 富山의 적을 쳤다고 하는 삼국지의 기사는 고구려본기에 採錄되었으며, 이를 靈帝 중평6년(189), 공손탁이 처음으로 요동태수가 된 때부터 20년 전에 해당하는 백고 5년(서169)에 연계하고 있다. 이것도 동일한 관계에서 비롯된 김부식 또는 해동고기 撰者의 조작으로, 올바른 연대와는 관계없이, 단지 王名만 앞뒤를 맞게 했음에 틀림없다.

 

 

이상을 요약하면, 고구려본기에 의해 오늘날 전해진 고구려 王系의 上世에 속하는 부분 가운데 고구려인 자신이 알고 있던 실재의 왕 가운데 最古의 왕은 삼국지의 이이모에 해당하는 제10대 연우(산상왕)였으며 이른바 제9대의 남무(고국천왕)는 시조 주몽 내지 제5대 모본왕과 함께 확실한 世系에서는 밖으로 驅逐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칭호를 갖는 제6대 宮, 제7대 遂成, 제8대 伯固는 후세의 고구려인 사이에 있어서는 그 이름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丸都時代의 고구려인은 沸流水時代의 왕들의 이름을 전연 알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宮 등 3왕 및 그 이전의 諸王에 관한 고구려본기의 모든 기술은 그것이 언제 어떻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漢史의 기사를 취해 그대로 올바른 年代에 배치한 부분 외에는 어떤 것도 신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宮 등 3왕의 혈연관계가 祖孫이 아니라 兄弟였다고 하는 것, 宮이 양위 후 19년간 더 살았으며 수성과 同年에 죽었다고 하는 것, 宮의 치세 말년이 漢史의 기재에 비하여 25년이나 뒤에 배치되고 수성의 在位年數도 적어도 십 수 년 길고, 따라서 백고의 치세가 그만큼 단축되어 약 6, 70년 정도이어야 할 것이 겨우 15년으로 되어 있는 것 등은 모두 확실한 근거가 있는 所傳이 아니라 漢史의 기사를 참고하면서 그렇지 않은 듯이 보이게 하려고 한 해동고기 撰者의 조작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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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ooklee | 작성시간 12.02.14 "환도시대의 고구려인은 비류수시대의 왕들의 이름을 전연 알지 못햇던 것이다" 음 이대목에서는 웃음을 넘어 분노마저...역사학자냐? 그냥 소설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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