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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안학궁에 대한 의문!

작성자카론|작성시간13.03.15|조회수1,242 목록 댓글 12

 

 

평양 지역에 그림을 보면 좀 충격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안학궁 터가 있는 지역이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안학궁하면 당나라 수도보다 더 크다고 소문난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이 허허벌판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혹시나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붉은색 선이 대성산성과 장안성입니다. 방효태가 사수지역에서 전멸했다면 당나라 군의 주 진격로는 그림과 같이 대성산성쪽이었을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장안성(=평양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학궁은 과연 무사했을까요? 1 지역은 전투가 벌어졌을 예상지입니다. 장안성 안에 안학궁이 있었다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덩그러니 밖에 놓여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멘붕이 왔습니다. 제 3차 고구려-당 전쟁도를 그려보면서 평양을 현 요양성 인근이 아닌가 의심을 한 이유도 안학궁의 위치 때문입니다.

 

궁이 파괴되었다면 왕이 과연 이곳에 있었을까?  

 

제 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현 평양 지역을 소정방이 공격하였다는 근거로 신라의 군량배달 사건이 매우 크게 작용합니다. 저도 댓글로 수군에 대해 논하면서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은 하고 있지만 솔직하게 80% 가량은 그 내용을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3차 고구려-당 전쟁에서의 고구려 수도만큼은 현 평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로 말씀을 드리는 건지 전달이 되었을 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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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3.18 고구려 멸망과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의 기록을 보면 평양성 북문, 평양성 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의 명칭은 장안성입니다. 장안성 = 평양성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평양이라는 의미가 뭘까 찾아보았습니다. 언어학적으로 평양은 삐양이고, 삐는 산크리스트어로 '번화하다'라는 내용이 있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양 동황성, 평양 평양성, 평양 장안성. 이런 형태로 생각해보니 평양성과 장안성은 같은 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2차 고당전쟁때는 평양 장안성에서 전투가 있었고, 제3차 고당전쟁때는 평양 평양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 답댓글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3.03.18 '장안'은 당나라 수도와 이름이 같고, 평양이 지명으로서 그 유래가 훨씬 유구합니다. 사람들 입에는 당연히 장안보다는 평양이 잘 붙습니다. 백제가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라 고쳤다 해서 우리가 성왕 이후의 백제를 남부여라 부르지 않고 백제라고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조선은 한양을 한성이라고 고쳤지만 사람들은 한양이라고 더 많이 불렀습니다. 언어학적으로 산스크리트어와 연관시키려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자신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역사를 공부하면 이런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지요.
  • 답댓글 작성자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3.19 삼국사기에는 평양성과 장안성이 나옵니다. 성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 있기에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조수아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말했던 평양이라는 곳이 한곳이 아닌 여러곳이라면, 역사책에 기록된 구체적인 지명, 즉 평양성과 장안성이 함께 존재한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합니다. 고구려는 여러번 천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선입견이 아닌 상식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요?
  • 답댓글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3.03.19 글쎄요. 님 말씀대로 3차 고당전쟁 때 다른 곳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그 까닭이 분명해야 합니다. 남건이 끝까지 싸우고자 하고, 보장왕과 남산은 항복하는 그 장소는 고구려 수도 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장안성이 곧 평양성이라는 것은 평양성 출토 성벽 유물들이 증명합니다. 장안성은 양원왕 8년(552년)에 쌓기 시작하여 평원왕 28년(586년) 완공, 도읍을 옮깁니다. 평양성 출토 성벽에 새겨진 글들이 이 시기에 공사가 누구의 책임 하에, 어떤 방향으로 진행됐는지 말해줍니다. 장안성이 현 평양성이며, 이곳이 고구려 멸망까지 수도가 아니었음을 부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3.03.19 "제3차 고당전쟁때는 평양 평양성에서 전투가 있었다면..."이라는 말은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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