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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광개토태왕 비문의 신묘년조 논란

작성자자이수|작성시간13.07.25|조회수428 목록 댓글 0

신묘년조 논란은 영락 6년(396년) 기사에 실린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시작된 논란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런나 신묘년(391년)이래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이 부분의 내용은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후에 이 기사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4세기 후반 진구 황후(신공황후)의 한반도 남부지역 정벌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활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진다.

 

이후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기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등장하였다. 한학자이며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정인보는 위 기사의 주어를 "倭"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신묘년 이래 왜가 도래하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을 치고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주어가 <왜>인 것을 억지로 <고구려>로 집어넣어 해석이 부자연스럽게 된다. 억지 해석이 되는 부분이다.

 

나아가 이후 재일 한국인 사학자 이진희가 비문 자체가 조작되었음을 주장하였고, 이형구는 비석 자체를 검토한 바, '倭'라는 글자는 '後'를 조작한 것으로, '來渡海破'라는 글자는 '不貢因破'를 조작한 것으로 주장하여, 비문을 "신묘년 이래 (백제와 신라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백잔과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비문에 있는 글로 보아 당시 396년도 까지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없다.

 

재야사학박영규는 비문조작설은 부정하면서, 두 가지의 비문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은 백제 공격을 위한 광개토왕의 정당화작업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민족주의 역사가들에 의한 해석은, 광개토왕이 본거지인 요동 지방에서 백제의 도성이 있는 한강 지역을 바로 공략하기 위해 수군을 동원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 또한 억지 해석되는부분이다.

 

김병기는 '渡海破(도해파)' 부분이 정상적 비문과 다르며, 획의 부분을 따졌을 때, 원래 글자는 '入貢于(입공우)'라고 주장했고,

 

중국의 경철화(耿鐵華)는 '來渡海破'의 海에서, 부수인 삼수변(氵)이 종선 밖의 부분에 위치 있음을 통해 '海'가 아니라 라고 주장했다.

 

한 연구가는 "원본의 渡每波(도매파)가 탁본하는 과정에서 渡海破(도해파)로 잘못 전달되고 百殘(□□□)羅에서 망실된 세글자를 倭,侵,新 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백제신라, 예전에 이들은 속민인 연유로 조공을 해왔었다. 그러나 가 신묘년 이래 매번(每) 물결(波)을 건너와(渡),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그래서 영락6년 병신년 왕이 몸소 대(大)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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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海(해)의 해석 오류로 인한 결과가 아닌간 생각됩니다.

이 시기에 바다는 <한해> 또는 <대해> 로 표기되며 그냥 <해> 라고 했을 때는 江이나 河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일본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이 海의 잘못해석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비문에 있는 海는 每의 오독으로 보이며 (파:격파하다 : 동사)는 波(파:물결 파 : 명사)의 오독으로 보입니다. 그래야 문장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아마도 일본인이 海와 每 가 비슷하여  일본인에게 유리한 海로 오독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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