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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김용만 소장님께 제 2차 고당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질문드립니다.

작성자대막리지 연개소문|작성시간13.10.01|조회수831 목록 댓글 1

스크랩한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많은 것들을 읽다가 궁금해서 질문드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곳은 궁금중을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공부하는 곳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전 스크랩한 글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스크롤을 압박할 정도로 너무 많은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완벽한 해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제 질문이 버릇이 없거나 따지는 듯한 말투로 느껴지신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 글이 다음에서 검색되지 않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1. 김용만 소장님께서 역사 자료실에 올리신 2차 고구려 - 당 전쟁의 진행 과정과 의의 - 김용만 논문을 읽고 제 의견을 적어 봤습니다. 이건 스크랩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작성한 겁니다. 제 의견이 어떠긴가요? 궁금합니다.

 

전 제 2차 고당 전쟁 때 연개소문이 주력군을 요동에 배치하고 요동을 프랑스군이 독일군 막을려고 생각한 마지노선처럼 기대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2차 고수 전쟁 때가 그랬다고 봅니다. 주력군이 요동성에 다 가있으니깐 래호아의 4 만군이 평양성 60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군과 싸워서 대승을 거둡니다. 유인이었으면 거짓으로 패했다고 쓰지 대패라고 쓰지 않아쓸 겁니다. 래호아 스스로 평양성으로 오자 막을 군대가 없어서 일부러 성문을 열고 외성 안으로 유인해서 고건무가 수서에서는 500명 북사에서는 100명의 결사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이겼는대 만약에 래호아가 유인에 말려들지 않았더라면 고구려는 끝났을 겁니다. 그래서 고건무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평양성을 지킬 군대를 남기면 해결 되는 거였죠. 우문술 우중문이 오기전에 래호아를 무력화 시키려는 시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예 안왔어도 큰일이겟지만요. 을지문덕이 우문술 우중문을 유인하고 살수대첩 할 때 쓴 병력은 그 이후에 평양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온 병사들 같습니다. 요동에 배치되어 있는 주력군은 수 양제의 대군땜에 움직이지도 못하죠. 제 2차 고당 전쟁 때는 제 2차 고수 전쟁 때보다 평양성에 병력이 많았기에 그만큼 오래 버틴 겁니다. 당나라군이 평양성 안으로 들어온 적도 없고 고구려가 병사가 부족하여 일부러 성문을 열고 유인작전을 펼치지도 않았습니다. 요동의 있는 주력군도 후반에 평양으로 옵니다. 아무리 당나라가 은밀하게 배를 만들었다고 해도 백제 멸망 때 많은 배를 보여 주었는대 연개소문이 모를리가 없고 대비를 안 했을리가 없습니다. 제 2차 고당 전쟁 때 고구려 수군은 소정방이 백제 멸망시킬 때 항로 쪽에 있었을 겁니다. 백제 부흥군 지원도 해야하고 제 1차 고당 전쟁 때 고구려로 직접 온 당나라 수군이 별 활약도 못해서 다시 그쪽으로 침입 하지 않고 신라 국경 쪽에 내려서 당나라가 공격 올 확률이 더 높습니다. 당나라가 어디로 상륙할지는 빗나갔지만 나중에는 보급도 잘 끊었으므로 백제 멸망 뒤엔 수군 쪽에 많은 대비를 한거 같습니다. 고구려가 큰 흉년이 들었다면 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을겁니다. 수 양제가 제 2차 고수 전쟁 때 고구려가 해마다 흉년이 거듭 들어 집집마다 굶주리며라고 말했습니다. 즉 제 3차 고당 전쟁 떄 흉년이 들었다는 말은 과장입니다. 잠시 농사를 못짓는 다고 흉년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동원 병력보다 고구려 동원 병력이 훨씬 많은 것을 보면 증명이 됩니다. 청야 전술은 아주 좋은 전술입니다. 러시아도 나폴레옹 상대로 청야 전술을 써서 대승을 했죠. 반대로 병자호란때 조선은 청나라 상대로 청야 전술을 안썻죠 청나라는 침략 할때보다 끝났을 때가 군량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청야 전술을 안 썼으면 당나라군이 신나가 먹다가 평양성을 함락당하거나 고구려군이 대승을 했어도 퇴각할 때 당나라도 똑같이 청야 전술을 썼을 겁니다. 옮길 수 있는 것을 빼고 식량과 밭 논을 전부 불태우고 갔을 겁니다. 오스만 튀르크가 헝가리한테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도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서 아테네, 스파르타등을 비롯한 그리스 도시 국가의 국력이 소모되서 마케도니아한테 정복당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즉 아테네편 스파르타편으로 갈라져서 자기들끼리 싸웠기 때문에 그런 거죠. 즉 고구려의 경제적 피해는 멸망의 원인이 되기 힘듭니다. 연남생이 원인입니다. 오히려 수나라는 고구려 보다 훨씬 더 많은 경제적 피해와 국력 소모로 멸망하죠.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력 차이가 큰건 맞습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우리 보다 많을 뿐이지 무한정 쏟아저 나오는게 아닙니다. 국력 차이를 따진다면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어떻게 이겼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어떻게 페르시아를 통째로 집어 삼키고 인구 200만인 몽골이 50배나 많은 인구 1억의 남송을 어떻게 통째로 집어삼켰으며 인구 190만의 청나라가 79배나 많은 인구 1억 5천의 명나라를 어떻게 통째로 삼킬수 있는지 궁급합니다. 현재 한국48,955,203명 중국1,349,585,838의 차이27.5677712541배 보다 훨씬 많이 납니다. 고구려 600만 당 5000만 8.33333333333배로 현재보다 인구 차이가 더 적죠. 단순히 인구만 많다고 불리하다고 보는건 아니라고 봅니다.

 

2. 김용만 소장님께서 원사료 자료실에 올리신 일본서기 번역본입니다. 일본서기의 저 내용은 무슨 뜻일까요?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했다는게 고구려쪽인가요? 당나라쪽인가요?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의 주어가 (고려군의)가 맞나요? 아니면 당나라군인가요? 주어가 (고려군의)라면 고구려군은 당나라군이 불쌍해서 빼앗을 수 없었다는 건가요? 김춘추는 원래 백제 먼저 칠려고 한거 아닌가요? 제 2차 고당 전쟁은 2월 18일에 끝났는대 3월에 왜 일본에 구원요청을 하죠? 궁금합니다.

 

12월 高麗가 말하기를 “오직 12월에만 高麗國에서는 추위가 매우 심해 浿水가 얼어붙는다. 그러므로 唐의 군대가 雲車·衝輣으로 북과 징을 시끄럽게 치며 공격해 왔다. 高麗의 사졸들이 용감하고 씩씩하였으므로 다시 唐의 진지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의 요새만이 남았으므로 다시 밤에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唐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 안고 곡을 하였다. (고려군의)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빼앗을 수 없었으니,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釋 道顯은 ‘(金)春秋의 뜻으로 말하면 바로 高麗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으니 이 무렵 백제의 침입이 잦아 고통이 심했으므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 하였다.

3월 庚寅 초하루 癸巳 百濟王에게 布 300端을 주었다.

이 달 唐人과 新羅人이 高麗를 정벌했다. 高麗가 우리나라에 구원을 청했으므로 軍將을 보내 䟽留城에 웅거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唐人들이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으므로, 新羅가 서쪽 진지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3. 아래글의 내용처럼 김유신이 평양까지 오는 동안 고구려군이 왜 대응을 안했고 김유신이 12일 동안 평양에 있었다던데 어떻게 무사히 있을 수 있었고 김유신이 10,000명을 죽이고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엇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유신 열전 뿐만 아니라 김인문 묘비에도 10,000명을 죽였다고 나와있고 심지어 김인문 열전에는 10,000명을 죽이고 포로 5,000명도 나오는대 과장된 기록인가요? 당나라군보다 김유신 잡았으면 소정방까지 잡을 수 있는 기회 아니었나요? 소정방은 어째서 방효태가 전멸 한 걸 구경만 했나요? 자치통감 기록만 아니라면 소정방이 튄 담에 방효태가 전멸한 걸로 이해가 잘됩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배 타고 평양성으로 오고 김유신이 평양으로 온다는걸 몰랐나요? 첩자를 신라와 당에 심어 놓지 않았나요? 궁금합니다.

<자치통감>
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上之下龍朔二年(壬戌,公元六六二年)
2月 甲戌(14日),浿江道大總管任雅相薨於軍。雅相為將,未嘗奏親戚故吏從軍,皆移所司補
授,謂人曰 官無大小,皆國家公器,豈可苟便其私! 由是軍中賞罰皆平,人服其公。
戊寅(18일),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總管龐孝泰,與高麗戰於蛇水之上,軍敗,與其
子十三人皆戰死。蘇定方圍平壤久不下,會大雪,解圍而還。
 
위의 자치통감의 내용으로 보면 패강도행군 임아상이 2월 14일날 사망을 했으며, 방효태및 옥저도행군이 2월 18일날 궤멸을 한 것이다.
옥저도행군이 궤멸당하자 소정방의 평양도 행군이 대설로 인해 귀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김유신은 소정방에게 2월 6일날 군량을 전해주었는데 소정방은 18일 이후에 철군을 하였으니 12일간 이상 군량을 받고
머물러 있었고, 소정방이 철군함에 따라 양도와 병력 800명을 차출하여 귀환시키고 비로소 김유신 부대도 철군을 한것이니 
김유신의 택배부대는 군량을 전해주고서도 12일 이상 평양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김유신부대는 그곳에서 2차 고당전쟁을 강건너 불보듯 임아상 사망과 방효태의 사망까지 불구경하고 잇었다는 결론이 되며
이러한 대어들이 12일을 넘게 평양 부근에서 유유자작거리고 있었는데 적어도 고구려를 대표하는 대막리지라면 그 이름에 걸맞게
일개 총관급 행군 잔챙이 부대를 상대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대어들이 우글거리는 택배부대를 상대하고 공략하는게 전략상 올바른 것이다.
전투부대도 아닌 택배부대가 국토를 종단하여 보급품이나 싣고 느릿느릿 수도인 평양성 코앞에 까지 왔다면 이것은 고구려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는 우스광스런 몰골로써 치욕이며 수치 그 자체가 아닌가?
게다가 12일 이상을 평양성 인근에다 진을 치고 고당간의 쌈박질을 구경하고 있었다면
김유신 택배부대의 고당전쟁 관람기가 되는 것은 아닌지........... 

 

4. 김유신이 쌀 전해준거는 중국 측 기록에는 안나오고 우리 측 기록에만 나오는대 김유신 미화할려고 꾸며낸건가요? 궁금합니다.

 

5. 아래에 있는 2개의 글 처럼 35군이 최소 35만명 이상이 아니라 저렇게 적은 숫자인가요? 패강도 행군 유백영이 평양도 행군이라고 아래에 쓰여 있는대 유백영은 패강도 행군이 아니라 평양도 행군인가요? 패강도 행군 유백영, 조계숙은 각각 사료에서 680년, 663년까지 활동한 걸고 나오는대 패강도 행군은 전멸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돌아간걸까요? 궁금합니다.

 

2차고당전쟁의 당군의 수효는 1차고당전쟁과 달리 알기 쉽습니다.

다만 행군총관이 거느린 군사의 수와 번복되는 명령으로 인하여 확실치 못한것 뿐입니다.

2차고당전쟁에 군의 편제는 1차적으로는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이 차이가 있습니다.


신당서

660년 12월16일 
계필하력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정방 요동도행군대총관 
유백영 평양도행군대총관 

661년 1월 22일 
소사업 부여도행군총관 

661년 4월16일
임아상 패강도행군총관 
계필하력 요동도행군총관 
소정방 평양도행군총관 
소사업부여도행군총관 
정명진 누방도행군총관 
방효태 옥저도행군총관 

구당서 
661년 5월16일 
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 

자치통감 
660년 12월 16일 
계필하력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정방 요동도행군대총관
유백영 평양도해운대총관
정명진 누방도행군총관 

661년 1월 19일
소사업 부여도행군총관

661년 4월 16일
임아상 패강도행군총관
계필하력 요동도행군총관
소정방 평양도행군총관 
소사업 -부여도행군총관으로 명시하지는 않음-

신, 구당서와 자치통감을 종합하여 볼때에 편제가 수차 수정되었고 소사업이 추가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 평양도행군도총관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 
소사업 부여도행군대총관 
정명진 누방도행군총관
방효태 옥저도행군총관 

정명진과 방효태의 경우 661년 1월 하남 하북 회남의 67개주에서 모집한 병사 4만4천명을 평양과 누방행영 즉 평양도행군과 패강도행군쪽에 배치함으로서 누방군과 옥저군이 추가된것으로 보입니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을 기준으로 볼때 계필하력 소정방 임아상의 군대가 35군 즉 35행군이며 이외에 소사업이 이끈 회홀등의 유목병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육전에 따르면 병사5천인에 총관1인을 배치한다 하였는데 다만 유동적인 당군의 편제상 그대로 지켜진다기 보다는 이것이 
기준점이라 생각 됩니다. 

당육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35행군은 17만5천명입니다. 

그리고 누방도행군과 옥저도행군은 지휘관이 대총관이 아님에도 대총관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이점은 고수전쟁 당시의 수나라군 편제에서 좌12군 우12군이 1군마다 각기 다른 명칭을 가졌다는점과 

당평백제비에 나오는 총관들은 부대총관 총관 좌1군총관 우1군총관 부총관과 같은 기록으로 점을 고려하면 

방효태와 정명진은 이러한 총관들과 구별되 특별한 목적을 또는 이유로 구성된 부대라고 볼수있습니다.

당군의 구체적 수효를 따지자면 소정방의 백제원정군과 661년 1월에 67주에서 모집한 4만4천명 그리고 회홀등의 번병으로 구성됩니다.

소정방이 백제원정때에 이끈병력은 자치통감에 따르면 수륙군10만이며 삼국유사에는 약12만7천명이라고 나오지만 

당평백제비에는 소정방의 군대가 14도군 즉 14총관으로 5천씩 배정하면 7만명임으로 본글의 기준인 당육전을 5천인에 1총관을 기준으로 삼아 7만으로 보겠습니다.

삼국유사의 12만7천을 뒷받침하기에는 당평백제비나 자치통감, 태평어람과 불일치하고 태평어람과 자치통감의 기록보다는 
당평백제비의 14도 즉 14총관이더 신빙성이 있어보기이게 14총관으로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유인원에게 1만명을 주어 사비성에 남게하였고 백제군과의 전투등에서 생긴 손실이 존재하니 

소정방방의 백제원정군의 귀환규모는 6만내외의 병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4만4천명의 67주의 모집병력을 더하면 10만4천명입니다.

바다로서 백제로 갔던 소정방의 백제원정군이 

방효태의 병력은 책부원구에 따르면 방효태의 최후 기록은 이러한데 

又我將鄉里子弟五千餘人今並死盡豈一身自求生邪賊內薄攻之死者累萬箭如蝟毛遂與其子一十三人皆死之.

삼국사절요의 내용에서 향리자제 5천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와 격돌하여 수만이 죽었다는 오류가 있습니다.

기존의 해석의 경우 향리자제 5천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와 격돌하여 수만이 죽었다는 오류가 있습니다.
五千餘人今並死盡 이 부분 오천인금병사진 

오천명이 이제 모두 죽었는데 라기 보다는 오천명이 지금(오늘) 모두 죽기에 달하였는데 라고 봐야 될겁니다. 

이는 방효태가 거느리고 온 군을 책부원구는 영남수군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패한후 포위된 상황에서 오천이 죽었는지를 방효태가 헤아릴수 있을리 없으며 오천이 죽고 다른병력이 남아있는 상황이라면 포위를 뚫고 빠져나와 그들이라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 혼자 살수는 없다고 말하는것은 자신의 병력인 영남출신 5천이 이제 모두 죽게되었는데 자신만 달아날수는 없다고 말한것으로 봐야됩니다. 

수만이 죽었다로 쓰인 루만은 累萬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삼국사절요는 수만명이 죽었다고 표현하였는데 
수만이라는 數萬  표현 대신 루만을 쓴것은 루만의 단어로서 뜻인 굉장히 많이를 뜻한다로 봐야 됩니다. 

물론 제가 한자해석 능력이 거의없음으로 두가지 생각이 맞는지 안맞는지는 다른분들께서 봐주시기 바랍니다.

삼국사절요의 기존의 해석이 맞다하여도 방효태가 말하는 향리자체 5천이 모두 죽었다는 말은 군대가 다 죽어 혼자 살아남을 면목이 없다는말로 패전이후 그가 전사자를 제대로 헤아릴 여유가 없는 포위된상황임을 고려한다면 그가 이끈 병력은 5천이고 그들이 거의다 죽었다는 말이 됩니다. 

위의 내용에 대하여 정정합니다. 삼국사절요의 원문은 책부원구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것으로 삼국사절요의 해석이 아니라 기존의 원문해석의 문제로 정정합니다. 



즉 방효태의 병력은 5천이고 연개소문과 싸워 패한 후 포위되었으며 방효태는 자신만이 빠져나가는것을 거부하고 고구려군과 결사전을 벌여 방효태의 병력이 매우많이 죽고 자신도 화살에 고슴도치처럼 되었다는것이 됩니다.

방효태의 병력과 마찬가지로 정명진 역시 5천으로 본다 치면 

누방도행군과 옥저도행군 5천씩 1만명이며 그외에 33군은 유목병력으로 구성된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을 제외하면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과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3군으로 11군씩 가진다면 각 도행군은 5만5천의 병력이 됩니다.

특히 패강도행군과 평양도행군은 둘을 합치면 11만병력이며 여기에 별도의 군인 누방군과 옥저군을 합치면 12만명이 됩니다.

오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평양도행군과 패강도행군은 대략 이정도는 된다고 보입니다.

-쓰고보니 쓸데없는 추가글-
소정방의 백제원정군을 7만 10만 13만중 무엇으로 잡고 단순히 67주의 병력을 더하는것으로 따진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비성에 배치한 유인원과 1만병력을 제하고 백제에서의 손실을 1만으로 잡는다고 가정하여 2만을 제할경우 

14총관임을 고려하여 소정방군을 7만으로 잡을 경우 5만명 67주 4만4천명을 더하면 9만4천명이 됩니다. 이것을 A라 하고

10만으로 잡고 계산할시 귀환자 8만 67주 4만4천 12만4천명 이것을 B라 하고 

13만으로 잡고 계산할시 귀환자 11만 67주 4만4천명 15만4천명 이것을 C라 하고 

35군 17만5천명을 최대 정원이라 가정시 

A의 경우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8만1천명
B의 경우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5만1천명
C의 경우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2만1천명

다만 백제정벌이후 군을 재편하고 각 장군의 도행군을 바꾸는 일과 67주의 병력모집외에 있을수 있는 병력 보충이나 교대 ,가감

그리고 35군이라는 최종편제로 볼때에 단순히 백제원정군과 67주의 모집병력을 합친 후 35군 17만5천명을 정원으로 잡는

후자의 방식보다는 전자와 같은 
3개 중심 도행군이 11군을 거기에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에 의한 누방도행군과 옥저도행군 

이렇게 11군씩 3개도행군과 별동으로의 2개군이 더 타당하다고 보입니다. 
이는 35군을 5천으로 잡아 17만5천명을 정원으로 잡은 가정에서 35군 5천명이란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제원정군의 총관 수에 따라 14총관 7만으로 잡고 여기서 유인원군등을 제하고 67주군을 합쳐서 이를 패강도행군 평양도행군으로 볼 경우 10만4천으로 볼 수 도 있지만 이 역시 전자의 방식보다 근거가 뒤떨어지고 35군이라는 편제와 맞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무시해도 되는 쓸데없는 추가글-

결론적으로 2차고당전쟁의 당군은 35군 17만5천명과 여러 유목민기병이 더해진수로 구성은 아래와 같습니다.

패강도행군 5만5천 
평양도행군 5만5천 
요동도행군 5만5천 
방도행군 5천 
옥저도행군 5천
부여도행군 수미상


여기서 다시 2차고당전쟁의 전개를 말하는것은 아니지만 짚어보자면 회홀전에 따르면 회홀군은 2차고당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2차고당전쟁의 전투상 회홀이 전공이 세울수 있을법한 전투는 계필하력이 압록강이 얼자 강을 건너 연남생의 군대를 격파한것이며 기록으로 볼때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군대가 연남생의 군대에 막혀 도하하지 못하였고 계필하력이 도착한후 강이 얼자 공격하여 승리하였으니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군대는 소사업의 부여도행군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필하력의 군대가 늦게 도착한 것은 소사업의 군은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기병군단인데 반면하여 계필하력의 군대는 당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요동지역을 통과하는데 시일이 걸리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요동방어선의 경우 이미 1차고당전쟁과 그후의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인하여 사실상 그들을 저지할 방어능력을 상실한것으로 보이며 이는 자치통감 주석 기준으로 요수건너 무순시 서북쪽의 귀단수 전투와 요녕성 무순시 동쪽의 적봉진전투 그리고 요양시의 횡산전투를 통해 볼때 당은 요동으로 수차례 군대가 나아가 매번싸워 이겨 요동의 고구려군을 소모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당은 35군 약17만5천의 병력과 여러 번병(유목민)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한것으로 

당육전과 방효태의 발언 그리고 소정방의 백제원정군의 귀환수효와 67주의 4만4천명을 통해 알수 있다고 봅니다.

그외 당육전의 총관관련 부분원문입니다.

五千人置總管一人,以折動充;一千人置子將一人,以果毅充;五百人置押官一人,以別將及鎮戎官充。)凡鎮皆有使一人,副使一人,萬人已上置司馬、倉曹·兵曹參軍各一人;五千人已上,減司馬。凡諸軍、鎮每五百人置押官一人,一千人置子總管一人,五千人置總管一人。凡諸軍、鎮使·副使已上皆四年一替,總管已上六年一替,押官隨兵交替。(副使、總管取折沖動已上官充,子將已上取果毅已上充。)

그외 참고사항? 
방효태가 싸운 사수는 지금의 합장강(합정강)

글을 쓰고나서 검토하여 보니 백제원정군은 14도 즉 14총관으로 5천명씩이면 7만명임으로 그에 대하여 추가적 수정과 
그에 따른 뻘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글입니다.

 

 

김유신의 부대는 2,000여 대의 수레에 쌀 4,000석과 벼 22,000여 석을 싣고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벼 22,000여 석이라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의 열기전에는 22,250석이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 당시 김유신이 수송한 군량의 수치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김유신이 수송한 군량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죠.


4,000석과 벼 22,250석을 합치면 26,250석이다.

 (孫繼民, 󰡔唐代行軍制度硏究󰡕 (北京: 文津出版社, 1995), p. 320. 에 의하면
1석은 150() 내외이며,22) 병사 1인당 하루에 쌀 기준으로 약 2승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쌀 4,000석×150승은 600,000승이며.

벼의 평균 도정수율24) 72%이므로, 22,250석×0.72는 쌀 16,020석 입니다.

(搗精收率 투입된 벼의 무게에 대한 도정된 백미의 백분율()이다

(도정된 백미의 무게/투입된 벼의 무게×100).

 

16,020석×150승은 2,403,000승이죠.

 

따라서 쌀과 벼를 모두 합산하면, 20,020석으로 약 3백만 승이 됩니다.

 

김유신의 부대는 약 20,000석에 달하는 쌀을 운반하였고.

이 군량은 15만명의 병사가 10일 정도 먹을 수 있으며,

5만명의 병사로 볼 경우 1달간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수송했던 곡물과 상태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단정짓기가 곤란하고,

기본적으로 과거의 수송량을 정확히 산출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도량형의 기준도 어느 정도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이러한 변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언급된 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 김유신의 수송 군량

구분

내용

합계

종류

4,000 +22,250

26,250(20,020)

*22,250 × 0.72(도정비율) = 16,020

무게

26,250석 × 30kg = 787,500kg

787.5

*1 : 150승 × 200g(1) = 30,000g(30kg)

분량

20,020석 × 150 = 3,003,000

1,501,500(1일분)

50,050(30일분)

*1 : 1 2승 소비

 

김유신 부대의 목표는 평양으로 군량 수송이며, 목적지는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소정방의 군영입니다.

 

한편으로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김용만 저 / 바다출판사) 168Page에서는 1석을 100승으로 계산하고 있으며191Page에서 정연식의 조선시대의 끼니-한국사연구 112 2001, page90~91을 인용하여 1인당 3승을 끼니로 하고 있다고 게산하고 있음.

 

하지만 조선시대의 것을 인용한 새로쓰는 연개소전의 내용을 따르지 않고 국방논문을 따르기로 함만일에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의 것을 따르면 1인당 쌀 소모량이 더욱 많아질 수 밖에 없죠

 

그렇다면 김유신이 보급해준 군량으로는 소정방의 휘하 당군들이 버틸 수 잇는 기간이 산출되기 때문에

당시 평양성을 공격하고 포위한 당군의 수를 대략 짐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도표에서 이미 계산된 것을 보는 바와 같이 군사 10만명일 경우는 15일을 버틸 수가 있고

군사 5만명일 경우는 30일을 버틸수 있는 량이 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준 것이 662 2 6일이고 자치통감에 의하면 패강도행군총관이 진중에서 사망한 날이 2 14, 옥저도행군이 궤멸하고 방효태가 전사한 날자가 2 18일이며, 이후 옥저도행군이 궤멸되자 소정방은 포위를 풀고 철군을 단행 662 3월 갑신일에 귀환.

여기에서 소정방이 김유신으로부터 군량을 받고 당나라에 귀환한 기간이 약 30일입니다.

그러면 김유신이 가져다준 군량은 5만명이 딱 30일동안 먹을 수 있는 군량입니다.

결국은 군량미를 전달한 2 6일부터 3월 초까지 소정방의 부대는 5만명 수준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두가지로 추론할 수 있는데

옥저도행군 방효태군은 궤멸당했고 패강도행군은 오리무중이며 평양도행군은 멀쩡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유백영과 조계숙의 소속이 변수인데

이들이 패강도행군의 임아상 휘하의 소속이라면 패강도 행군은 임아상이 죽었지만 대부분이 온전한 상태로 소정방의 평양도행군과 같이 무사히 철수를 하여 귀환을 한것이므로 두 부대를 합하여 귀환한 것이 약 5만명 정도라는 것이며

유백영과 조계숙이 평양도행군 소속이라면 패강도행군도 옥저도행군과 같이 궤멸되고 오직 소정방의 평양도행군만이 무사히 귀환한 상태이므로 평양도행군이 약 5만명의 군사수라는 것이 됩니다.

유백영과 조계숙은 663년이후 당나라에서 활동하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옥저도 행군은 5000여명이 사망을 하자 혹자가 유백영과 조계숙진영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하라고 권고를 하는 것으로 보아서 포위를 뚫고 탈출을 할려면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가 있어야 가능하므로 옥저도행군의 총 병사수가 5천명 수준이라는 주장에는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미 완벽하게 궤멸된 부대를 연개소문이 포위하고 육박해 들어갈 필요도 없는 그냥 사냥하는 수준이므로 삼국사절요의 기사로 봐서는 적어도 8~일만명 수준으로 보는게 적합하다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임아상의 패강도행군이 전멸한 상태로 소정방의 수륙군인 평양도행군의 군사수만 오만명의 수준이냐? 아니면 일부 피해를 입은 패강도행군과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이 합쳐진 숫자가 5만명이냐 하는 문제이며 소정방의 평양도 행군과 패강도 행군이 합쳐진 상태에서 오만명이라면 평양도 행군 소속이 3만명에서 4만명 수준이며 패강도행군이 1만명에서 2만명 수준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따라서 35군을 예로 들어서 15만명에서 20만명으로 잡았을 경우 이미 보급품이 바닥난 상태에서 김유신의 군량미를 받고 12일동안이나 머물수 있는 시간이 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10만명일 경우는 겨우 15일분이며 15만명일 경우는 11~12일분, 20만명일 경우는 7~8일분이기 때문에

10만명이 넘으면 군량을 받자마자 즉시에 돌아가도 당나라까지 도달하는 군량이 되질 않기 때문에

10만명을 초과한다는 것은 상식선으로도 답이 안나오는 것입니다.

만일에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의 계산법으로 병사 1인당 3승을 먹고 1석이 100승이라고 하면 20,020석은 668.000명이 하루를 먹는 량이므로 66,800명 병사가 10일동안 먹는 량으로 이는 5만명이 겨우 14일치 먹는 량으로 계산됩니다. 이 또한 답이 안나오는 더 악조건이라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의 계산법은 우선 제외합니다만 위의 국방논문 게산법으로 5만명일 경우는 30일을 먹을 수 있는 량이 되므로 대략 전사자들을 포함하여 평양성을 공격한 3개도행군의 군사수는 대략 6~7만선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사료 됩니다물론 이는 군량미를 이용한 역산법의 추론일 뿐입니다.

 

추가로 따라서 삼국사절요에서 4월에 35을 편성한 행군부대가 7월에 들어서 35 수륙군으로 바뀌어 35 35道가 같느냐 다르냐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애매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러 출전부대를 편성하고서도 출정시에는 상황에 따라 대폭 바뀌는 경우도 생기므로 마치 수학공식처럼 요지부동으로 편성되면 무조건 전부 다 출전한다는 법칙도 없습니다

 

<참조문헌>

[국방논문]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각종 논문(論文) / 군사관련

[출처] 국방대학교.한국안보문제연구소.국방연구 2012 9. 55권 제3, pp.97-122
[
저자] 이상훈.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전임연구원
경북대학교 강사.

  

6. 사수(보통강)가 제 3개 중에 어떤 것인가요? 왼쪽만 사수(보통강)인가요? 오른쪽만 사수(보통강)인가요? 아니면 양쪽다 사수(보통강)인가요? 궁금합니다.

 

평양성 본문 이미지 1

고구려 평양성

살수대첩과 고구려 귀

 

7. 백(촌)강 전투때 고구려는 도와주지 않고 무엇을 했나요? 궁급합니다.

 

8. 아래 삼국사기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궁금합니다.

 

9년(서기650)가을 7월, 서리가 내리고 우박이 떨어져서 곡식을 해쳤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렸다.

 

13년(서기 654)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령(馬嶺)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가 끝이 없으므로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15년(서기 656)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18년(서기 659)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이들을 포획하려다 놓치고 말았다.

 

19년(서기 660)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네이버 지식인에 이런 답변도 있내요.

 

이 답변은 tantalous님의 질문인 "어째서 고구려는 백제를 돕지 않았을까요?"라는 질문에 제가 답한 내용입니다. 그때 제 것이 베스트답변으로 채택 되었습니다. 미리 그때 제가 쓴 글을 인용하여 답변드린다고 우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랫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이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 예외입니다. 이 기록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바로 저죠... 바로 백제와 똑같은 은유적 표현이 쓰였기 때문입니다.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18년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 먹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했다.(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19년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 핏빛으로 변했다.(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 凡三日.)

보장왕 14년... 이때 백제와 고구려는 함께 연합하여 신라를 쳤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당시에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는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죠. 그들의 적은 신라였고, 그들의 후방에는 왜라는 존재가 도와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부의 반란이죠. 그것도 작은 규모가 아닌 엄청난 규모의 반란 말입니다.

저는 19년의 기록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백제는 660년 6월 대대적인 신라와 당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모든 군대를 집결합니다. 그런데 이때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 백제구원군을 위해 모은 군사가 평양으로 집결하였을때... 이때 다수의 군사들이 반연개소문파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크게 싸울 준비를 미리 갖춰놓고 고구려 도성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큰 전투 벌어지는데 이 전투가 3일을 갔죠. 고구려로서는 가장 심장부를 한번에 강타당하고 자국의 군사가 서로 싸우게 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죠.

과대해석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십시오.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연개소문은 죽고 없으며(이에 대해서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저도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삼국사기의 666년이라는 기록과 일본서기의 664년이라는 기록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연개소문이 죽지 않았더라도 사실 반란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실권은 그리 딱 정해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를 전 '남생의 난', 즉 남생과 남건, 남산의 권력투쟁의 한 부분으로 봅니다. 저는 이때 남생이 이겼고, 실권을 남생이 모두 장악하였다고 봅니다. 남생은 당시 백제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그리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남생의 곁에는 친당파와 친나파가 몰리기 시작하였죠. 그로서도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만, 그것으로 인하여 이 남생도 당나라에 마음이 끌리게 됩니다. 결국 고구려의 멸망의 단계는 여기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결론적으로 당시 고구려에 반란이 일어났고, 이 반란의 승자인 연남생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제를 도와주지 않음으로서 백제는 결국 멸망당했다고 봅니다. 물론 제 생각이 틀릴 가능성도 큽니다.

사실 이것은 제 의견입니다. 학계에서는 단순히 당시 고구려가 잦은 당과의 전쟁으로 기력이 쇠해졌기에 백제를 구원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사실 학계에서는 보장왕 19년조 7월자의 기록을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고 저 기록엔 왠지 모를 뉘앙스가 풍기기에... 이렇게 답변을 드립니다.

물론 제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아직 삼국사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제가 구당서 동이전을 살펴봤는데 그에 대한 글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조만간 일본서기를 구할 수 있으니 그때 한번 뒤져볼 생각입니다. 만약 쓸만한 기사가 나오면 답변을 수정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9. 위 글 처럼 고구려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백제 멸망할때 연개소문이 도와주지 못했나요? 조금도 도와준 기록이 없네요. 도와줘도 멸망한 다음에 도와주고요. 나당연합군이 백제 땅에 올때까지 몰랐나요? 첩자를 신라와 당에 심어 놓지 않았나요? 궁금합니다.

 

10. 연개소문이 병에 걸린 증상이 사료에 나와있나요? 아니면 병사가 추측인가요? 궁금합니다.

 

11. 연남생의 배반만 아니었으면 당나라가 침략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시간이 흐른 뒤 당나라가 침략 했을까요? 궁금합니다.

 

12. 제 3차 고당 전쟁 때 신성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고구려가 이겼을 까요? 궁금합니다.

 

13. 영류왕의 평가를 왜 수정하셨는지요? 당나라가 신라 침입 하지 말라는 말 들은 결과가 김유신이 낭비성을 빼앗은 것이고 고수 전쟁 피해 때문에 돌궐을 두려워 했다면 제 3차 제 4차 고수 전쟁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삼국사기에 고창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 했다고 하는대 당나라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태자를 보낸 것은 상당히 굴욕적인 일 아닌가요? 아직 신라도 태자를 안보냈고 게다가 보낼 때 세자라고 한걸 보니 당나라를 두려워 한거 같고 고려도 원나라에 세자를 보내면서 자주성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영류왕이 당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으면 진대덕이 염탐하는대 어떻게 전혀 알지 못하고 수비하는 관리가 어떻게 비단을 받고 안내를 할 수 있죠? 영양왕이 수나라 사신한테 했던 거랑 정 반대인대요? 궁금합니다.

  

14. 제 1차 고당 전쟁 때 안시성이 연개소문고 싸웠다는 거는 연개소문이 퍼트린 유언비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궁금합니다.

 

15. 삼국사기에 있는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중지 유언을 자치통감을 옮겨 적고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은 기록도 중국 기록을 김부식이 옮겨 적었다고 하던가요? 우리 측 사료로 기록한거 아닌가요? 궁금합니다.

 

16. 아래에 있는 2개 글처럼 제 2차 고수전쟁 때 총 병력 3,401,400명은 과장된 기록인가요? 물론 3,401,400명은 수나라 전체 인구의 7.39274777833%이고 15.3%는 7,039,523.268000001명 이므로 계산 잘못 된거네요. 수나라가 가 아니라 당나라가 기록해서 과장된 기록인가요? 궁금합니다.

 

 오늘 채팅방에서 유수님, 토코아님과 함께 신나게 수양제의 제 1차 고구려 침공 때의 병력수에 대해서 논의해 보았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수 煬帝(시호조차도 폭군에 어울리네요)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서 정규병을 백만명 이상 동원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삼국사기>>도 나오고 <<수서>>에서도 나오지요. 저는 중국사니 <<수서>>를 사료로 들겠습니다.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隋書>>卷4, <帝紀>4, 81쪽.)
 
 즉, 총 병력이 113만 3천 8백명, 양제는 2백만이라고 하였고 식량을 나르는 자가 배였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壬午,诏左十二军出镂方、长岑、溟海、盖马、建安、南苏、辽东、玄菟、扶余、朝鲜、沃沮、乐浪等道,右十二军出黏蝉、含资、浑弥、临屯、候城、提奚、蹋顿、肃慎、碣石、东、带方、襄平等道,骆驿引途,总集平壤,崐凡一百一十三万三千八百人,号二百万,其馈运者倍之."(<<자치통감>>卷181, 隋紀5, 大業8年 正月 任午條.)
 
 라고 되어 있어 좌군 12군, 우군 12군을 합하여 총 24군이 113만 3천 8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다 천자가 친히 거느리는 6군까지 더하면 어마어마한 숫자가되지요.  그런데 이것을 그냥 그대로 믿어버리게 되면 좀 말이 안되는 일이 일어나지요. 수서를 그대로 믿으면 병력과 식량 나르는 자를 다 합쳐버리면 300만이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근데 당시 수의 인구는
 
 "大凡郡一百九十,縣一千二百五十五,戶八百九十萬七千五百四十六,[四]縣一千二百五十五戶八百九十萬七千五百四十六 按:據本志各郡分列的縣數和戶數統計縣一千二百五十二,戶九百零七萬五千七百九十一。口四千六百一萬九千九百五十六 ."(<<隋書>>卷29, <地理>上, 808쪽.)
 
 군은 190, 현은 1355, 호는 8백9십만 7천5백4십6(그러나 지리지에 실린 현과 호구수를 다 더하면 현은 1252 호구는 9백7만 오천7백9십1명이 됩니다) 인구는 4천6백만 9천9백5십6명입니다. 1호당 약 5.1명이므로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여기다가 남녀의 비율까지 계산해야지 좀 더 현실적인 통계를 알 수 있는데 丁수를 알 수 없네요.) 약 3백만이라고 한다면 약 15.3%가 제 1차 고구려 전쟁 때 동원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시 전쟁이 벌어지면 전쟁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많은 부담을 하였다는 것을 보면 산동, 하북, 하남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서 당나라 때 이세민이 벌인 고구려침공은 당시에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정규군 113만명, 군량운송꾼 200만명은 너무나도 과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수서>>를 보면
 
眾軍將發,帝御臨朔宮,親授節度。每軍,大將、亞將各一人。騎兵四十隊。隊百人置一纛。十隊為團,團有偏將一人。第一團,皆青絲連明光甲、鐵具裝、青纓拂,建狻猊旗。第二團,絳絲連朱犀甲、獸文具裝、赤纓拂,建貔貅旗。第三團,白絲連明光甲、鐵具裝、素纓拂,建辟邪旗。第四團,烏絲連玄犀甲、獸文具裝、建纓拂,[六]建纓拂 對照其他各團所用器物的顏色,第四團用烏絲連玄犀甲,疑此處「建纓拂」當作「緇纓拂」。建六駁旗。前部鼓吹一部,大鼓、小鼓及鼙、長鳴、中鳴等各十八具,掆鼓、金鉦各二具。後部鐃吹一部,鐃二面,歌簫及笳各四具,節鼓一面,吳吹篳篥、橫笛各四具,大角十八具。又步卒八十隊,分為四團。團有偏將一人。第一團,每隊給青隼盪幡一。第二團,每隊黃隼盪幡一。第三團,每隊白隼盪幡一。第四團,每隊蒼隼盪幡一。長槊楯弩及甲毦等,各稱兵數。受降使者一人,給二馬軺車一乘,白獸幡及節各一,騎吏三人,車輻白從十二人。承詔慰撫,不受大將制。戰陣則為監軍。(<<수서>>卷8, <禮儀>3, 親征, 160~161쪽.)
 
 라고 되어 있습니다. 軍의 편성은 기병 40대, 보병 80대로 이루어져 있고 앞 뒤로 군악대, 맨 뒤로는 수항사, 초거, 기사 3인로 되어있고 수레에 25인이 따르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이 외에도
 
"軍將發,候大角一通,步卒第一團出營東門,東向陣。第二團出營南門,南向陣。第三團出營西門,西向陣。第四團出營北門,北向陣。陣四面團營,然後諸團嚴駕立。大角三通,則鐃鼓俱振,騎第一團引行。隊間相去各十五步。次第二團,次前部鼓吹,次弓矢一隊,合二百騎。建蹲獸旗,瓟槊二張,大將在其下。次誕馬二十匹,次大角,次後部鐃,次第三團,次第四團,次受降使者。次及輜重戎車散兵等,亦有四團。第一輜重出,收東面陣,分為兩道,夾以行。第二輜重出,收南面陣,夾以行。第三輜重出,收西面陣,夾以行。第四輜重出,收北面陣,夾以行。亞將領五百騎,建騰豹旗,殿軍後。至營,則第一團騎陣於東面,第二團騎陣於南面,鼓吹翊大將居中,駐馬南向。第三團騎陣於西面,第四團騎陣於北面,合為方陣。四團外向,步卒翊輜重入於陣內,以次安營。營定,四面陣者,引騎入營。亞將率驍騎遊弈督察。其安營之制,以車外布,間設馬槍,次施兵幕,內安雜畜。事畢,大將、亞將等,各就牙帳。其馬步隊與軍中散兵,交為兩番,五日而代."(。(<<수서>>卷8, <禮儀>3, 親征, 161쪽.)
 
라 하는 것과 같이 치중을 담당하는 병거를 다루는 징발된 비정규병사들(즉, 수송대)이 4團이 있고 이들은 보병과 기병들에 끼어서 행군하고 있습니다. 수양제가 친정할 때의 저 모습을 만약 1군의 편성이라고 본다면 치중을 담당하는 부대가 4團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군악대, 수레에 따르는 25인, 기사 3인등을 제외하면 1군의 편성은 기병 4團(10대=1團), 보병 4團(20대=1團), 치중 4團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임용한 선생님의 의견을 받들어 보병이나 기병의 1대를 100명으로 볼 것이므로(임용한, <<전쟁과 역사>>삼국편, 서울:혜안, 2001, 140쪽.)   24군의 총 전투병력을 28만 8천명으로 보겠습니다. 그러면 남은 치중병은 96단이 되므로 치중병의 1단은 약 8854명이 됩니다. 즉, 치중병만 85만명이나 되어서 28만 8천명을 먹이기 위해 굳이 200만명을 따로 동원할 필요가 없게되는 것이지요(물론 수송을 위한 차중병이 85만명이나 되는 것도 말이 안되므로 전투병과 치중대를 1:!로 본다면 전투병+치중대는 57만 6천명으로 나머지 부대는 중간보급기지 및 이를 지키는 경비부대 그리고 병참부대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겠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113만명의 배를 군량운송으로만 동원했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또한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 倍之라는 것은 그냥 위징이나 사마광, 혹은 김부식이가 양제를 폄하하기 위해 넣은 것일까요?
<<자치통감>>에는 저 倍之에 대한 것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기사가 있습니다.
 

夏,四月,庚 午,车驾至涿郡之临朔宫,文武从官九品以上,并令给宅安置。先是,诏总征天下兵,无问远近,俱会于涿。又发江淮以南水手一万人,弩手三万人,岭南排镩手三万人,于是四远奔赴如流。五月,敕河南、淮南、江南造戎车五万乘送高 阳,供载衣甲幔幕,令兵士自挽之,发河南、北民夫以供军须。秋,七月,发江、淮以南民夫及船运黎阳及洛口诸仓米至涿郡,舳舻相次千余里,载兵甲及攻取之具,往还在道常数十万人,填咽于道,昼夜不绝,死者相枕,臭秽盈路,天下骚动.(."(<<자치통감>>卷181, 隋紀5, 대복7년 2월 임오조.)

 
 간단하게 압축하면 약간 똘아기기질이 있는 수양제가 '문무관원 9품이상'을 다 탁군에 모아두어서 집을 주고 편하게 지내라고 명하였는데 그 전에 "모든 정벌하려 가는 군사들을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도 않고 묻지고 않고 탁군에 모아두었다. 또 강회이남에서 수부 1만명, 노병 3만명, 排镩手 3만명을 모집하였는데(發은 자치통감에서 자발적으로 군사들이 모집하였다고 할 때 쓰입니다.) 이에 사방에서 물결같이 달려왔고 5월에는 하남과 회남, 강남에 융거 5만승을 만들어 고양으로 보낸 후 거기에다 옷과 갑옷, 막사같은 것을 싣고 병사들이 스스로 '끌고오게' 하였으며 하남과 하북에서 민부를 모집하여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는 강남과 화남의 민부 및 배를 모집하여 계양 및 낙구의 여러 창고의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게 하였는데 뱃길이 천리이고 병장기와 갑옷 및 공성기를 가지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항상 수십만인이어서 (그들이) 길에 가득하였고 주야로 끊이지 않아 죽은 자들이 서로 배게를 베었고 악취와 부패한 것이 길에 가득하였으니 천하가 소동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고구려를 치기 이전에 꾸준히 양제의 베이스캠프인 탁군에 여러 가지 병장기 및 물자, 군량, 병사들을 모으게 명령하였고 거기에 동원된 것으 수십만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帝自去岁谋讨高丽,诏山东置府,令养马以供军役。又发民夫运米,积于泸河、怀远二镇,车牛往者皆不返,士卒死亡过半,耕稼失时,田畴多荒。加之饥馑,谷价踊贵,东北边尤甚,斗米直数百钱。所运米或粗恶,令民籴 而偿之。又发鹿车夫六十余万,二人共推米三石,道途险远,不足充糇粮,至 镇,无可输,皆惧罪亡命。重以官吏贪残,因缘侵渔,百姓困穷,财力俱竭,安居则不胜冻馁,死期交急,剽掠则犹得延生,于是始相聚为群盗。(<<자치통감>>卷181, 수기5, 대복7년 4월조.)
 
 라고 해서 대복6년부터 계속해서 민부들을 징발하여 쌀을 운반하고 나중에 가면 무려 鹿軍夫 60여만을 모집하여서 2사람이 쌀 3석을 함꼐 밀게하고 3석이 부족하면 쿨하게 보충하게 해버립니다. 즉, 비록 약 200만의 인부에는 모자르지만 꾸순히 민부를 모집하여 군량을 운송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잇지요.
 이를 보면 군량을 운송하는 애들이 倍之라는 것이 비록 엄청난 과장은 있지만 허구를 기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들이 전쟁 당시에도 동원되었는지는 의문이지요. 아마 전쟁 준비 때 동원된 저런 민부들을 위징, 장손무기가 과장을 해서 倍之라고 하였고 이것을 사마광이나 김부식이 별 의심없이 받아들인 듯 합니다.

 

또 다른 글입니다. 이건 김용만소장님께서 얼마전에 올리신 답변에 다른 분이 반박한 글입니다.

 

김용만 선생님께서 주신 글을 보면서 상대방측 논리가 빠져 있는 것 같아 글 드립니다.

 

상대방이 주장하는 논리에는 수나라 군 편제에 대한 내용을 들어 있습니다. 

본 내용은 삼국사기의 내용 중 해당 사항만 편집하여 설명을 드리는 것이므로 원문을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 군대 : 황제어영군+황제호위군 6군+좌우 24군 [총 30군 + 알파(황제어영군)]

 

每軍, 大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置一纛. 十隊爲團, 團有偏將一人, 又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有偏將一人

 

每軍 : 모든 군이란 뜻이므로 30개 군은 모두 같은 편제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군 편제

 

1. 지휘관 : 사령관(장군) 1명 / 부사령령(아장) 1명 / 부대장(편장) 8명

2. 기병 : 4명의 편장이 각각 10대(隊)씩 통솔 (1대(隊)당 100명) -> 기병은 40대 * 100명 = 총 4000명  

3. 보병 : 4명의 편장이 각각 20대(隊)씩 통솔 (1대(隊)당 100명) -> 보병은 80대 * 100명 = 총 8000명

4. 군 병력 수 : 기병 4000 + 보병 8000명 = 총 12,000명

 

해석할 때

기병은 1대당 100인으로 명시가 되어 있으나, 보병의 경우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병은 1대가 100인 이상이며,  1군의 정원도 더 많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쓸때 기준이 같으면 생략이 가능합니다. 반면 기준이 다르면 수치를 명기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앞에서 1대가 100인으로 되어 있으므로 뒤쪽은 생략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나라의 군 편제는 12,000명입니다.

 

참고로

이 숫자가 생각보다 적다고 생각하시거나 전투력이 약하다고 생각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수나라 군은 기병의 비율이 무려 33%나 되기 때문입니다. 

기병은 평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투의 갑 입니다.

전 세계 군사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 중 하나가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칸나에 전투입니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은 병력 5만(기병 1만)과 바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87,200명(기병 7200명)이 붙었는데...

불과 3천의 기병의 차이로 로마군은 대패를 당해 7만명이 죽습니다. 

로마군은 당시 최강의 중보병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병싸움에 패배하여 포위되어 전멸을 당한 것입니다.  

기병은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최강의 공격 유닛이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 봐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침략을 당하면 속절없이 물러서야 했던 이유가 바로 기병의 차이 때문입니다. 

평원에서는 아무리 보병 수가 많아도 기병을 당할 수가 없으니까요. 

또한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도 바로 기병의 비율입니다.

수나라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했던 여세를 바탕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군 편제가 고구려에 와서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고구려가 높은 성벽을 이용해 공성전을 펼치면서 기병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2차 고구려 수 전쟁에서 수나라가 요동지역에서 빼앗은 성은 단 1개 뿐입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수나라의 군 편제가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즉, 보병 8천으로는 공성전을 펼치기에는 그 수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동성을 제외한 다른 성들은 대부분 산 중턱에 위치해 있습니다.

 

참고로, 수나라의 대군이 요동성을 둘러싸서 공격을 했다라는 생각을 하시면 안됩니다.

수나라 각 군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서 고구려의 여러 성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타격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을 유추해 낼 수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 삼천포로 빠졌군요.

다시 수나라 총 병사수로 돌아와 말씀드리면...

수나라의 군은 정원이 12,000명입니다. 여기에 30군을 곱하면 36만명이 나옵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논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 내용 외에도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수나라가 동원한 병사수가 총 113만명이라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논리를 펼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113만이란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론을 펼칠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일단 수나라 군 편제를 고려한다면 이런 수치가 나온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서양의 경우 기병 1기에 딸려 있는 식솔들이 꽤 많습니다. 

기병은 귀족이나 재력가들이기 때문에 호종하는 사람들이 꽤 됩니다. 

로마시대에는 기병 1기에 노예 2~3명을 더 계산해야 하고... 

중세시대에는 기사 1명에는 호위병사와 마부등 10여명이 하나의 파티로 뭉쳐 다녔습니다.    

하지만 수나라의 경우 기병들은 귀족이 아닙니다.

부대별로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추가한다고 해도 77만명을 채우려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보급과 관련된 병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방에서 전방으로 지속적으로 보급을 보내는 개념은 근대에 정착된 개념입니다.  

기관총의 등장으로 돌격전 대신 참호전으로 전쟁 양상이 바뀌면서 보급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수송 자체가 쉽지 않아서 들고 간 식량과 현지 조달한 식량으로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짐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대규모 원정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18세기에 마차에 서스펜션이라는 스프링이 장착되면서 수송 분야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서스펜션이 개발되기 전에는 내구성 때문에 마차에 무거운 것을 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면... 

길을 가다가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마차 바퀴 축이 부러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서스펜션은 무게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무거운 화물을 실고도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것입니다. 

덕분에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까지 원정을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본국에서 보급을 해 준다는 개념은 없었기 때문에 짐을 엄청 들고 갑니다. 

  

만약 실제 전투 기간이 몇 년씩 계속 되었다면 보급과 수송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 2차 고구려 수 전쟁은 후방에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77만명을 채우려면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려한 것이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졌던 네번의 전쟁에 투입된 수나라 병사의 총 수입니다. 

얼핏 계산해 보면 대략100만이 넘기 때문에 

중국측 사서에 있던 이런 내용을 보고 삼국사기에서 기록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기록이 워낙 없다보니 이 정도 추측은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사를 살펴보면 병사수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근세 이후의 전쟁을 보면 수천으로도 수만 명을 학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는 왜 어디서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 후의 국제 정세의 변화등을 살펴보는 것이 역사를 보는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병참학 관련으로 약간 부연 설명을 드립니다.

보불전쟁 전에는 50만 대군 이상을 동원할 수가 없었다는 내용이 좀...

보불전쟁은 1870년~1871년에 나폴레옹 3세때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보다 앞선 나폴레옹 1세때 프랑스가 러시아를 공격할 때 60만을 동원 했거든요. 

나폴레옹 전쟁을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상대방이 말하려고 했던 핵심은 아마 서스펜션에 대한 내용일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스펜션은 마차의 진동을 흡수해주는 스프링으로 장거리 운송이 가능하게 해 준 놈입니다.

18세기에 영국에서 개발되었구요.

이 기술이 마차에 장착되면서 나폴레옹이 러시아까지 약 2500km나 되는 거리를 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도 대포 250문을 끌고요.

대포 1문당 말 16필이 끌었다나 어쨌다나...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아무튼 서스펜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17. 아래 삼국사기 내용을 보면 제 3차 고수 전쟁 때 수나라 군사가 많았다고 했는데 제 2차 고수 전쟁 때보다 많은 건가요? 정확한 군사 수는 몇 명인가요? 그리고 양현감이 반역을 안일으켰다면 고구려가 질 수도 있었나요? 궁금합니다.

 

그러나 때마침 수나라에서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양제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양현감의 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때 수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부터 양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쳐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대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자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대는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였다. 다만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午時)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수나라의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병사를 내어 추적해 갔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십 리에서 9십 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의 군대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18. 연개소문이 김춘추한테 죽령을 돌려달라고 했는대 그러면 신라한테도 큰 타격 아닌가요? 아예 첨부터 백제랑 손 잡을려고 마음 먹은건가요? 그랬으면 김춘추의 목을 베었어야 하지 않나요? 연개소문이 고수 전쟁 때 신라가 500여리를 뺏었다는대 아무리 눈씻고 찾아봐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연)개소문 열전에만 있고 삼국사기의 다른 모든 곳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건가요? 궁금합니다.

 

19. 삼국사기가 구삼국사와 기타 다른 사료들을 참조해서 만들었는대 구삼국사에서 을지문덕 열전과 온달 열전이 많을 수가 있나요? 오히려 삼국사기가 더 많아야 정상 아닌가요? 궁금합니다.

 

20. 김유신 행록의 상당 부분이 과장되어서 일부만 기록해서 김유신 열전이 만들어졌는대 김유신을 미화한다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궁금합니다.

 

21. 소정방이 김유신한테 죽은거 같지는 않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유신한테 죽었다는 기록이 잘못 됬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궁금합니다.

 

22. 매천야록과 청장관전서에서 고구려 책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신뢰할만한 기록인가요? 신뢰할만한 기록이면 왜 다른 사료에는 안 나와 있죠? 궁금합니다.

 

23. 아래 글을 보면 청나라 사신 목극동이 청나라한테 유리하게 할려고 대충 조사하고 토문강(쑹화강)을 두만강으로 착각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는대 조선 조정도 청나라 사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합니다. 청나라가 조선에 유리하게 국경을 설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도는 우리 땅이 아닌거 같은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궁금합니다.

 

http://blog.naver.com/cms1530/10068932122

 

24. 사학자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거 보다 전문적인 자료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하나요? 사학자도 선후배 관계, 대학 동창, 인맥이 중요하나요? 궁금합니다.

 

25. 김용만 소장님은 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요? 이단아로 평가받나요? 아니면 대단한 학자로 평가 받나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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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明治好太王 | 작성시간 13.10.20 2차 고당전쟁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논문 쓰고 있는 것이 있는데, 마무리 단계로 질문해주신 것에 대해 모두 답변이 될 내용들이 있습니다. 완성되는 대로 바로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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