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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도독부는 요서에서 조양으로 이동했다.

작성자카론| 작성시간14.08.11| 조회수1151|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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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2 잘 보았습니다.
    결국은 개인적인 추정이 단정으로 발전한 것이라 봅니다.

    <구당서/지리지> 영주상도둑부 기록에는,
    `수 시기에는 유성군이였고.....758 년 영주로 복위 즉 재차 정하였고, 예전에 통령하는 현은 1 개이고....유성(현), 한 시기의 현이며 요서군에 속했었다....서북쪽은 해와 접계하였고 북쪽은 거란과 경계하였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또,
    <요사/지리지> 중경도 흥중부 기록에는,
    `옛 고죽국 (지역이고) 한 시기의 유성현 땅이다. 모용황(일?)이 유성의 북쪽이며 용산의 남쪽 지역이 복덕의 땅이라 여겨 용성을 쌓고 궁묘를 축성하여 유성을 용성현이라 고치고 천도하여 화룡궁이라 했다. 모용수가 다시 거처하였고
  • 답댓글 작성자 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8.12 윗글은 영주가 요서(당산 동쪽)에서 조양으로 이동했다는 추론입니다. 삼수갑산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세통천(696년) 영주가 함락되고 1년여의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영주가 어디에 있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사서의 기록과 지리를 바탕으로 추론하여 조양지역을 살펴본 것이구요. 요서 지역에 영주가 있었다라고 한 부분은 이전 글에서 고구려의 국경관계를 통해 여러차례 보여드렸습니다. 이동에 대한 논리적 증명은 어느정도 해 드린 것 같은데요.
  • 답댓글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2 카론 
    추론이라니요? 단순한 추측을 증명이나 논리적이라 할 수 있나요?
    아래 댓글에서처럼 요.명.청 시기는 물론이고 전한.진.북위.수 시기의 지리지들이 늘비한데 영주가 어디라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니요?

    서국인들이 성의껏 사실대로 설명한 것을 어찌 우리 한국인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움추려들고 왜곡하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군요. 2000 여년간의 지리지 기록 후반부를 아직 검토하지 못했다면 또 명확한 이치 기록을 찾지 못했다면 영주가 요서에서 조양으로 이동됐다는 섣부른 추측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청의 조양부 조양현은 한시기의 요서군 유성현이며 북위 시기의 영주에 설치되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2 카론 
    하지만 왜놈이 설치한 만주국의 지도에서는 청의 조양과 똑같은 지명을 동쪽으로 1000 여리 옮겨 설치했는데 이뿐이 아닙니다. 조양.적봉은 청 시기 직예성 소속의 승덕부에서 독립.승격한 부.주인데 승덕.적봉까지도 가까이는 200 여리, 멀리는 2000 여리까지 옮겨졌습니다.

    <청사고/지리지>에서는 적봉에서 흘러오는 황하가 조양에서 흘러오는 대릉하와 만나 옛 용성을 지나 성경 의주로 흘러든다고 했습니다. 이 기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 지도를 펼쳐놓고는 저 기록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청 시기에는 적봉.조양.승덕을 경유하는 물길들은 한 시기 요서.요동군의 경계 지역을 흐르는 동일 수계였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8.12 삼수갑산 아래글 용성의 위치에 지도가 맞는지 확인 요청했습니다. 그 부분 답변 좀 부탁드려요. / 영주가 조양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는 누가 이어받았는지에 대해서 좀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본 글에 추가해서 올리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3 카론 
    님께서 추가한 글의 끝 부분에 `거란은 조양지역을 차지한 후 계속 영주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영주는 <요사/지리지>에 지금의 북경인 요 남경 석진부의 속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 조양은 송.요 시기의 지명이 아니고 청 시기에 처음 나타난 지명입니다.

    거란이 진(발해)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 내에 설치한 것이 동경 요양부이고 이후 성종 통화 25년(1007)에 축성하여 중경 대정부라 칭하였고 그곳의 한 시기 지명들은 요서군의 유성,도하,신안평,빈종,임유,교려현 등과 우북평군의 서무,토은,창성현 등 그리고 요동군의 무려현 등이였습니다. 즉 오리지널 영주의 속현명들입니다.

    사실 요 5 경 중 중경을 마지막에 설치했으니
  • 답댓글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3 카론 지금의 북경에 설치된 남경 석진부의 속주로 기록되어 있는 영주는 상경.동경.서경보다는 남경에 가장 가까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의 영주가 님의 추측처럼 지금의 조양이라면 지금의 북경 보다는 지금의 란하 동쪽에 있다는 동경에 편입되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결국 남경 석진부에 속해 있던 영주 지역에 후일 성종이 중경 대정부,흥정부와 그외 속주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한 시기 요서군 유성현 지역인 북위 이후의 영주는 요 시기에 영주에서 중경 흥중부로 개칭되었고 명 시기에 다시 영주위로, 청 시기에 이르러서야 승덕부로, 얼마후 조양부로 분할된 것이니 모두 같은 곳이란 이야기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8.13 삼수갑산 만세통천이후 거란에게 여러차례 대패를 당한 후유증으로 당의 군세가 많이 약화됩니다. 그래서 돌궐의 지원을 받은 해족, 거란과 안시-건안-남소-목저-창암 지역을 경계로 대치를 하면서 소소한 국경 분쟁이 벌어집니다. 722년에 해족에게 점령 당하고, 732년에 해족이 당에게 패해 부족들이 유주로 옮기는 등의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데요. 그 이후 사건은 기록에 없으니 그냥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라고 가정을 하겠습니다. / 남경 석진부는 당이 멸망하고(907년) 후당이 멸망한(936년) 이후에 거란이 획득한 땅입니다. 영주가 석진부 속주라면 원래부터 북경 쪽에 있었을까요? 답은 옮겨왔거나 원래 거란 영토에 있었거나,,,
  • 답댓글 작성자 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8.13 삼수갑산 거란은 2개의 행정체계를 고수했습니다. 한쪽은 중국쪽 행정 체계를 유지하고, 다른 한쪽은 만주 체계룰 따릅니다. 그러면서 복장과 말은 자신의 것을 강화시키죠. 2개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거란 시대의 행정구역을 잘 따져봐야 하는데요. 이 일을 하기 전에 5대 10국 시절 후당이 하북의 유인공(연)을 병합하고, 후량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획득한 연운16주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거란이 후진을 도와 후당을 멸망시키고 댓가로 받은 곳이 연운 16주이기 때문에 이 부분만 잘 검토되면 영주 위치가 좀더 정확해 질 것입니다. 유幽,계薊,탁涿,단檀,순順,영瀛,막莫,신新,규媯,유儒,무武,울蔚 (산서-운환응삭)
  • 답댓글 작성자 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8.13 삼수갑산 혹시 연운16주 정리된 자료좀 있으시면 공유좀 부탁드립니다. 영주가 북경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연운 16주에 대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수,당시대의 유주총관부의 8주와 이름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요서 지역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다시 처음부터 정리를 하자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옛 지명으로만 말씀을 주시면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림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만 중국 현재 지명을 함께 적어주시면 삼수갑산님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 그리고 생각하고 계시는 돌궐과 해족과 영주의 위치좀 찍어주시겠습니까?
  • 답댓글 작성자 파사 작성시간14.08.14 카론 삼수갑산: 오늘 다음 싸이트의 아이디 정리를 하면서 삼수갑산 닉네임을 버리고 파사란 닉네임으로 다시 가입했으니 양해바랍니다.

    한 시기의 요서군 유성현, 전연의 용성현, 북위의 영주 지역은 항상 지금의 북경에 치소를 둔 유주 관할이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요에서도 남경에 속하게 한 것인데 후에 성종이 영주 지역에 중경을 설치하면서 남경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절대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보는 현대지도의 축척은 1:550만이고 모용선비부터 해.거란까지의 거주지역은 그 지도에 표시된 하북성의 고북구-승덕-반가구수고-흥륭 내 지역입니다. 새글의 지도에 용성.영주.조양 위치를 표시하였으니 참조하십시요
  •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2 후에 풍발에게 멸망당하고 원위가 취하여 요서군을 두었으며 수 시기에는 고보녕을 평정하고 영주를 설치했다. 양제가 주를 폐하고 유성군을 설치하였으며 당 무덕(618~625) 초 영주총관부라 고치고 후에 도독부라 하였으며 만세통천(696) 중에 이만영에게 함락되었고 신룡(705~706) 초 도독부를 유주 지역으로 옮겼다가(곧 교치) 개원 4 년(716) 다시 유성을 설치하고 8 년(720) 서쪽 어양(어양군 소속, 역시 교치)으로 옮겼다가 10 년(722)에 유성으로 돌아왔다. 후에 해가 점거하고 (거란) 태조가 해를 평정하여 연 지역의 포로들과 함께 성을 쌓게 하려고 한지방에게 명하여 땅을 택하게 하고 또 유성을 수리케 하여 완결지었다. ...
  •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2 중희 10 년(?) 흥중부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원사>.<명사>와 <청사고>를 볼까요?
    <원/지> 대녕로 상에는 본래 해의 거처 또는 부락이고 당 초기에는 영주에 속하였다. 요는 중경 대정부로 삼았고 흥중부와 의.서.흥...화 등 10 주와 대정.용산 등 7 현을 통령하였고라 씌여 있고,
    <명/지> 북평행도지휘사사 영주중둔위 설명에는 원 시기의 용산현 땅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청/지>에는 직예성 소속의 조양부에서,
    명 시기의 영주위 땅이며...건륭 43 년(1779) 조양현을 설치하고 광서30 년(1904)년 개간한 땅에 수확이 많아 부로 승격하였으며 건창을 예속시켰다라 설명하고 건창현의 설명에서는 명 시기 영주폐위
  • 작성자 삼수갑산 작성시간14.08.12 댓글 횟수를 초과하게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카페지기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영주폐위) 땅이며 ...동쪽에는 포고도산이 있는데 한 시기의 백랑산이며 백랑수가 발원하는데 지금의 대릉하이다...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와 같이 한 시기의 요서군 유성현 지역은 청 시기까지 약 2100 여년 동안 유성.영주.조양으로 명칭이 바뀌였지만 그 위치는 동일하였고 청 시기의 대릉하 또한 지금의 대릉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동.현토.낙랑군 지역 역시 당연히 변동이 없었으니 현대의 지도에 표시된 지명만을 근거로 서국의 정사 지리지 기록을 재단하는 우를 범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리 고증만으로 세월을 다 보낼 것입니다.
  • 작성자 김준수 작성시간14.09.11 카론님과 삼수갑산님의 논의가 이 카페를 풍성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김용만 선생님은 아닙니다만 운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두 분께서 댓글 정리를 해달라고 요청해야 하는데 중간에서 자르기도 실례인 것 같아 일단은 기다렸습니다. 두 분께서 논의가 대략 끝나신 것 같아 댓글 정리를 부탁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 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9.21 댓글 정리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본글에 추가로 올리면 되나요?
  • 답댓글 작성자 김준수 작성시간14.09.28 네. 쓰셨던 댓글을 모두 모아 본글에 추가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여 본글이 많다 싶으시면 별도의 글로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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