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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고구려의 백라관(百羅冠) 관련 고증에 관하여

작성자원한의 거리|작성시간15.02.18|조회수2,309 목록 댓글 20



KBS 사극 근초고왕에서 고증된 고구려의 백라관.

대체로 안악 3호분의 묘주도를 참고하였다.


1.

고구려 국왕의 복식에 대하여 중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왕(王)은 5채(采)로 된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로써 만든 관[冠]을 쓴다.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 

王服五采, 以白羅製冠, 革帶皆金釦

- 신당서 고려전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왕은 5색의 옷에 흰 비단으로 만든 관, 즉 백라관(百羅冠)을 착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 고대사를 다룬 사극이 몇차례 방영된 바 있었는데, 나름대로 고증에 신경쓰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왕이 백라관을 착용하고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엉터리 고증에 비하면 확실히 진일보한 수준이라고 할 만 하지만, 아쉬운 점은 과연 이러한 백라관의 고증이 얼마나 올바른 점인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기록에 전하는 백라관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나 관련 유물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그 형태를 파악하기가 무척 힘든 편입니다. 그저 신당서의 기록을 참고하여 흰 비단[白羅]으로 만든 관[冠]이라고 추측할 뿐 그 이상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오늘날에 백라관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참고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고구려 안악 3호분 묘주의 초상입니다.



안악 3호분의 묘주(墓主)의 모습을 그린 벽화.

일명 묘주도(墓主圖)라고도 한다.



KBS 사극 대왕의 꿈에서 고증된 백라관

근초고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안악 3호분의 벽화를 참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

이 안악 3호분의 묘주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꽤 오랜 세월 동안 논란이 이어져 왔는데, 고구려의 왕(고국원왕)이었다는 의견과 안악 3호분 묵서명에 이름이 남겨진 동수(冬壽)의 묘였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북한 측에서는 대체로 전자를, 남한 측에서는 후자를 지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사극 제작자들은 안악 3호분의 묘주가 고구려의 왕이었다는 주장을 수용해서 당시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흰 색의 관이 신당서의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 국왕이 쓰던 관, 즉 백라관으로 추정하여 묘주도를 근거로 하여 백라관을 고증하게 된 듯 합니다. 특히 여러 사극에 이러한 고증이 반영되어, 작중 묘사된 백라관들은 대체로 안악 3호분의 묘주도에 그려진 흰색 관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고증에는 조금 무리한 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실제 고구려왕인지, 혹은 동수인지 확실한 결론이 난 것도 아닐 뿐더러, 묘주가 쓰고 있는 흰색의 관은 반드시 왕이 착용했을법한 그런 관모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덕흥리 고분의 묘주(墓主) 진(鎭)의 모습을 그린 벽화.

그는 분명 고구려의 왕이 아니었으나,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흰색 관과 동일한 형태의 관을 쓰고 있다.


3.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서도 묘주인 진(鎭)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묘주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묘사된 진의 복장과 의상, 심지어 한 손에 부채를 든 포즈까지 안악 3호분의 묘주와 빼닮아 있습니다. 더욱이 머리에 쓰고 있는 흰색의 관의 경우에는 동일한 복색이라고 할 만 합니다. 안악 3호분의 피장자가 정말로 고구려의 왕이며, 그가 쓰고 있는 관이 정말로 고구려왕이 착용했다는 백라관이 맞다면 어째서 한낱 신료에 불과했던 진이 벽화에서 백라관을 쓰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흰색 관을 착용한 묘주의 모습을 묘사한 광경을 고구려 고분 뿐 아니라 중국의 고분벽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좌) 중국 요녕 조양원대자고분 앞방 오른벽 벽화 묘주도

(우) 중국 하북 안평 녹가장후한묘 중실남이실 남벽 벽화 묘주도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中




이 중국의 고분 벽화를 보더라도, 중국 고분의 묘주들도 안악 3호분에 묘사된 묘주도와 대단히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 구성을 볼 때, 묘주가 정좌를 한채 앉아 있는 포즈나 옷차림 등은 대단히 흡사하며, 특히 왼쪽에 보이는 중국 요녕성 조양시의 원대자고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흰색 관은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흰색 관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앞에서 소개한 4세기 중엽의 안악 3호분이나 5세기 초의 덕흥리 고분 등은 대체로 중국 고분 벽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묘주가 쓰고 있는 흰 관모도 실상은 고구려 고유의 백라관과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관모였던 것이 고구려에 전해졌거나 혹은 그 구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함께 그려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이에 대해서는 중국 무관(武冠)과 그 형태가 동일하여 안악 3호분의 관모를 통해서는 백라관의 모습을 유추할 수 없다는 이른바 '무관설'이 대두된바 있습니다. 한때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쓴 관모를 백라관을 비정하였던 '백라관설'과 팽팽히 대립하였으나 최근 남한 학계에서 안악 3호분을 동수묘로 단정짓는 견해가 늘어남에 따라 무관설이 보다 힘을 얻고 있는 추세입니다.



4.

더욱이 한가지 더 문제점이 있다면,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흰색 관모는 신당서에서 전하고 있는 기록과 비교해 볼 때 그 시기의 차이가 적지 않게 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안악 3호분에 남겨진 묵서명에 따르면 그 제작연대는 영화십삼년(永和十三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중국 동진(東晉)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에 해당됩니다. 즉 안악 3호분은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당서에서 전하고 있는 고구려의 정세는 고구려 말기인 7세기 경의 일로, 그 시기차이가 300여 년에 가깝게 차이가 납니다. 설령 안악 3호분의 피장자가 쓰고 있는 흰색 관이 당시에는 국왕이 착용하던 관이 아니었다가 훗날 고구려왕이 착용하던 백라관이 되었다 해도 그 것이 고구려 말기의 백라관과 그 모습이 얼마나 같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보더라도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를 토대로 하여 백라관의 모습을 유추해낸다는 것은 그리 올바른 복색 고증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사료됩니다.



5.

그렇다면 과연 백라관의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를 밝혀줄만한 특별한 단서가 전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당서에서 언급된 7세기 말, 고구려 국왕이 착용하였다던 백라관의 모습은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관모와는 달리, 고구려 고유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관모의 종류와 변천을 정리한 표.
정완진, 「고구려 백라관의 형태 비정」中
한편 표의 ⑨에서 보이는 인물에 대해서는 고구려 사신을 그린 것이라는 의견 외에 신라 사신을 그린 의견이 있다.

고구려의 관모는 이처럼 대체로 고깔형의 절풍·소골의 형태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나갔던 것을 여러 고분 벽화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왕이 착용했다던 백라관의 경우에도 이러한 고구려 고유의 관모 형태에서 크게 어긋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백라관은 흰 비단으로 만들어졌다는 특이점 외에도 금장식을 덧붙여 장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당서의 기사를 원문 그대로 옮기면 '王服五采, 以白羅製冠, 革帶皆金釦'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以白羅製冠, 革帶皆金釦' 부분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흰 비단으로 만든 관과 허리띠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당시 백라관의 형태 자체는 흰 비단으로 만든 백라관에 금테를 두른 장식을 덧붙였다는 점인데, 검은 비단으로 만든 오라관에 금화관식으로 장식했다는 백제왕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꽤 재미있지 않나 싶습니다.


※참고문헌
이경희, 「평양지역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묘주복식의 성격 」, 『한국고대사연구』56, 2009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정완진, 「고구려 백라관의 형태 비정」, 『동양학』 5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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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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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공실불 | 작성시간 18.11.06 원한의 거리 
    동진의 5대 황제 목제가 제정한 연호인 영화는 345년부터 제정되어 쓰기 시작한 연호라 고구려는 영화 연호를 제정되기 2년전인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된 터라 안악 3호분에 기록된 영화 13년의 표기는 전연의 침공과 관련성이 적지요 13년의 영화가 동진의 연호라면 전연의 침공 이후에 혼란이 수습되어 가는 상황이라 동진으로부터 연호받을때 정확성이 떨어지게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지요 게다가 동진은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라 고구려와 교역량이 작아서 고구려가 외교 교류가 적은 동진의 연호를 쓸리가 만무하지요 부친의 유해를 틀어쥔 전연의 연호도 안쓰는데 전연보다 약한 동진의 연호를 쓰겠습니까?
  • 작성자大欽茂 | 작성시간 15.02.18 고구려왕이 백라관을 착용했다는 것은 고구려왕이야 말로 진짜 황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자로 황(皇)자가 白+王의 조합으로 형성된 것이니 "흰모자를 쓴 왕"은 황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덕흥리 고분 벽화에 백라관을 쓴 인물은 진의 초상이 아니라 진이 섬겼던 고구려국왕을 그렸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 될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5.02.18 글쎄요. 한자의 등장 시기는 안악3호분이나 고구려 건국보다 수세기 앞의 일입니다. 황제란 용어를 사실상 창조해 낸 진시황의 재위 기간과 고구려 건국 시기는 한참 떨어져 있지요. 게다가 고구려가 진정한 황제를 위해 백라관을 썼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임금 황 자가 하얀 관을 쓴 임금이라면 왜 진작 중국의 황제들은 하얀 관을 쓰지 않은 걸까요? 그리고 한자의 기원은 대부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또 덕흥리 고분 묘주의 관은 백라관이 아닌 청라관이므로 덕흥리 고분의 초상은 고구려 왕이 아니라 유주자사 진의 초상이며, 5세기 고분 벽화에서 일반적으로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을 주인 자리에 그려놓는 예는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大欽茂 | 작성시간 15.02.21 조수아 북한에서는 고구원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더군요.
  • 답댓글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5.02.21 大欽茂 북한이 고국원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건 안악 3호분이지 덕흥리 고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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