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영
우리 역사 최초의 여장군
우리 역사에는 여왕도 있었다. 또 여왕에 못지않게 권력을 휘두른 태후와 왕후, 궁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남자들보다 더 맹렬히 활약한 여장부도 많았다. 그러면 여성 장군도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 이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르면 가야시대에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여군부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야시대 고분에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의 여성 시신이 발굴됨에 따라 이를 근거로 여성 군사지휘관의 존재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추모성왕(鄒牟聖王:동명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중에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망명하여 새 나라를 세운 백제의 국모 소서노(召西努)도 여자의 몸으로 군사를 거느렸으며, 때로는 전투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규군 장수도 있었을까? 있었다. 고구려의 연수영(淵秀英) 장군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정규군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1천 500년 전 고대에 수군(해군) 최고지휘관이었다. 연수영은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의 최고집권자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친 누이동생이었다.
한국과 중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 해군기지가 있던 발해만의 비사성과 석성 등지에서 연수영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비석이 발굴되었다. 비록 금석문의 편린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이란 여성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연수영과 관련한 비사성 ․ 석성 ․ 청석관 등지에서 비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40년대에 이 지역 요녕성 개주 현장을 지낸 신광서라고 하며, 우리나라 학자로는 1997년에 한민족통일교육연구소 김금중 소장이 비석문 일부를 발굴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비석의 명문(銘文) 대부분이 중국 측에 의해 변조 또는 훼손되었다고 한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에 중국 측이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 동안 국내에선 연수영 관련 비문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청석관유적지의 유네스코 등록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한 것이다. 현지 전설이나 비문에 고구려와 당의 해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모셔놓은 곳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의 존재를 우리나라와 중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중국의 해군기지가 되었고, 비문 등도 중국정부에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중국의 야사인 <서곽잡록>과 <비망열기>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고 한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 또는 개수영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하지만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엄연한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중국의 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대표적인 역사서로 인정하는 <삼국사기>에도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은가. 사서의 기록보다 당대 고구려인들의 손으로 새겨진 비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누이로 태어난 천부의 여전사
연수영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그녀의 오빠 연개소문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연개소문에 관해서는 비교적 사료가 많이 남아 있다. 연개소문은 영양왕 18년(607년) 경에 태어났다. 그 아래로 남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있었으니 연수영은 61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남매의 조부는 동부대인 연자유(淵子遊)이고 부친은 연태조(淵太祚)로서 야금(冶金)에 뛰어나고 활을 잘 다루었다고 하니 이는 대대로 무장의 가문이란 뜻일 것이다. 집안이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만큼 연수영도 어려서부터 무술을 수련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영웅적 기상과 비범한 의기로 15세에 이미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그리고 부친 연태조가 죽자 동부대인의 직위를 계승했다. 그렇게 하여 국정에 참여하여 영류왕 14년(631년)부터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이 비뚤어진 나라를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은 영류왕 25년(642년) 9월이었다. 그가 혁명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영류왕과 측근 대신들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를 미리 알아낸 연개소문이 대신 180여 명을 수도 장안성 남쪽 교외에 열병식을 거행한다고 초청하여 모조리 죽여 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고, 그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 고보장(高寶藏)을 새 황제로 내세웠다. 그렇게 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연수영도 오라비가 주도한 이 혁명에 자신이 거느린 군사들을 이끌고 참여했을 것이다.
연개소문 일가가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기 좋아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혁명의 간접적 원인은 영류왕과 그의 측근 대신들이 당나라에 대해 굴욕적 저자세 외교정책을 펼쳐 연개소문을 비롯한 무장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유혈혁명 이후 석성도사로 부임
연수영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당대의 영걸 연개소문과 피를 나눈 누이동생이니만큼 체격이 당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래도 가냘프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수영이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요충인 석성도사(石城道使)로 부임한 것은 오빠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왕을 새 황제로 내세운 직후였다. 연수영이 중앙정계를 떠나 일선 지방관으로 내려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연수영이 도사로 있던 석성 소장루(梳妝樓)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 - 소장루는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연수영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연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령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연수영은 문예 군략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되었다. 연수영은 나라를 연 이래로 수군의 장수로는 다른 장수들을 능가해 가장 뛰어났다. 이곳 소장루는 날마다 군무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梳妝樓…相傳是盖蘇文爲其妹盖秀英所建 原樓閣不存 此爲復修 因她是女將 不與其他將領同住內城 獨
住此樓 盖秀英 文藝武略武藝超凡 爲守城主將 淵秀英開國過之超凡 他將爲水將 故此梳妝樓也是處理日
常軍務之要地) -
한편, 같은 석성 점장대의 비문에는 ‘太王一年 歲在癸卯九月 王以敎石城道使 淵秀英(태왕 1년〔보
장왕 1년〕 계묘년 9월 왕이 교서를 내려 연수영을 석성도사로 삼았다)’는 명문과 함께 이런 내용
도 있다.
- 3년 을사〔645년〕 봄 3월, 당 매괴왕 이세민이 수륙 105만 병사로 요동지역을 침범했다. 비사성
의 성주 우소가… 묘도로 출병했다. 석성도사 연수영이 이르기를, 출병하여 가는 길이 역류가 일고
군선이 뒤집히니 출병은 옳지 않다. 또 묘도는 적지이며 적세가 강하니 출병은 불가하다. 그러나
우소부는 이에 따르지 않고 묘도로 병사를 보냈다. 결국 역풍이 불어 군선이 부서지고, 묘도에서
적을 만났다. 적장 장량은 기다렸다가 사방에서 공격해왔고, 형세가 매우 위급해져 대다수 군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연수영이 곧 수군을 이끌고 나가 구원을…
(三年乙巳春三月 唐埋魁王李世民 水陸一百五萬之兵 侵入遼東界 卑沙城之城主 于炤□ □□□□ 出兵
妙島 石城道使淵秀英之請爲 曰 行路出兵爲的中 逆流澐之軍船顚覆 出兵不可 又□□ 妙島之敵地 敵地
强勢 出兵不可 于炤夫不從强遣之 兵至妙島境 逆風軍船破 妙島相遇 敵將張亮俟四方合戰 形勢危急 兵
斬煞蕩盡也 淵秀英之 水軍救援出兵爲 □□□□) -
연수영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활약상도 주로 642년에서 651년의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가 당에 멸망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중국인의 손으로 쓰여 온전한 고구려의 역사가 남
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명문의 편린을 통해서나마 연수영이 문무의 재능이 탁월
하고, 지략이 출중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혁명 이후 중앙의 요직에 있지 않았
다는 점은 자신의 지분(持分)을 포기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혹시 연개소문 남매간에 무슨 내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다는 하늘이 내린 요새이니 이 바다를 누비는 장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수군 장수가
되었고, 당나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수영은 장산군도 지역에 여
러 성곽을 개축하고, 전선을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수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643년 무렵.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훨씬 증강하게 되었다.
동북아 정세와 연개소문 ․ 이세민의 대립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바꾸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당 태종 이세민(李
世民)은 아연 긴장했다.
여당전쟁에서 연수영은 어떤 활약을 했던가. 지금까지 발견되어 밝혀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 보장왕 1년(642년)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천 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 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그녀는 실권자 연개소문의 친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들의 신망을 받았다.
보장왕 4년(645년)에 마침내 당군이 쳐들어왔다. 전쟁이 터지자 연수영은 그해 6월에 당군의 수군기지인 창려도로 진격하여 적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 명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군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 장군 겸 모달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출전,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8천여 명의 적군을 죽였다.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군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천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연수영은 수군 군주로 승진했으며, 본진을 광록도 부근 대장산성도로 비정되는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중국 측 사서에 당군의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해전의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사가들이 자기들의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전에서 적장 설만철은 구사일생으로 달아났고, 전함 200여 척, 군사 1만 5천 이상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수영의 빛나는 연승 행진은 계속되었다. 창려와 성산 전투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2만여 명을 죽였으며, 대흠도와 광록도 전투에서도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고 적군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수군의 연전연패에 대노한 이세민은 설만철 ․ 구행엄 ․ 왕대도 ․ 강행본 등 수군 장수들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에 당군이 가시포와 노백성을 침공했지만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전선 80여 척과 군사 5천여 명을 잃고 퇴각했다. 비사성 발굴 비문에는 보장왕 4년(645년) 8월 15일에 벌어진 대장산도해전에서 당군은 1천여 척의 전함에 10만 대군을 동원하였으나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대패하여 총군세의 절반인 수백 척의 전함과 5만여 명의 별격을 잃는 참패를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수영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의 병력은 당군의 5분의 1에 불과한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달에 패전보고를 받은 당 태종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적보다 5배나 많은 군사로도 이기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하랴!”
그 이듬해인 보장왕 5년(646년)에는 봉래포해전이 있었다. 이 해전에서도 연수영은 대승을 거두었고, 그 전공으로 수군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또 해가 바뀐 647년 7월. 이세민은 우진달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연수영과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아리수(압록강)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적 응전에 퇴각했다.
연수영은 즉각 보복공격을 가해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비(軍備)가 바닥나는 바람에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남을 시기하고 모략하는 부류의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연수영의 등에 비수를 박은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녀의 둘째 오라비 연정토였다. 648년 7월. 연정토 일당의 참소로 연수영은 낙마하여 머나먼 부여성으로 유배를 당했다. 그녀의 수군 원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연정토였다. 연정토는 수군 총사령관이 되자마자 군공을 탐내 그해 9월에 당의 수군기지인 신성도 협량곡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들의 군권 다툼에 노한 연개소문이 마침내 앞에 나섰다. 연개소문은 연정토를 파면하여 옥에 가두고 그의 주변에 기생하던 자들에게 철퇴를 가했다. 일설에는 연정토를 아예 죽여 버리려고 했으나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두려워한 보장왕이 애원하다시피 사정하는 바람에 목숨은 살려주고, 그 대신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던 상승장군 연수영을 다시 등용하여 수군 군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하게 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예외 없이 내우외환 때문이다.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제쳐둔 채 집안싸움이나 하는 나라는 망하다는 진리를 역사는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내우외환은 망국의 지름길
보장왕 8년(649년) 4월에 마침내 이세민이 죽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에게 설욕하지 못한 것을 필생의 한으로 여겨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30만 대군으로 고구려원정을 꾀하다가 죽었다. 그 뒤를 이은 당 고종은 보장왕 14년(655년)에 정명진(程明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또다시 고구려를 치게 했으나 실패했다. 또 보장왕 17년과 그 다음해에도 정명진과 설인귀(薛仁貴) 등을 보냈으나 역시 패퇴했다.
보장왕 19년(660년)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 이듬해 9월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남생(男生)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아리수를 지키게 하니 당군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했다. 보장왕 21년(662년)에 당군은 정월부터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머리끝까지 분노한 연개소문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사수싸움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까지 패퇴시켰다.
연개소문은 보장왕 23년(664년) 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58세쯤 되었을 것이다.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를 세습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겨우 3년도 안되어 세 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보장왕 27년(668년).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정토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 등이 죽을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려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동명성왕이 개국한 대제국 고구려는 천년도 못되어 무상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일세의 여걸 연수영의 최후에 관해서는 전해주는 사료가 없다. 야사와 전설에 따르면 연정토에 이어 큰오빠 연개소문과도 불화했다고 하며, 656년 제2차 여당전쟁 때 당군과 싸워 제해권을 상실하자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냈다고도 한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새로운 사료가 나오고 좀 더 깊은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덧붙인다. 중국의 역사왜곡과 날조는 단순히 역사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자(孔子) 이래 남의 나라는 낮추고 자기 나라는 높이는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자신들의 역사도 왜곡해온 중국이지만, 이웃 나라의 역사까지 날조하다 못해 이제는 아예 강탈하려는 것은 총성 없는 전쟁과 마찬가지이다.
이 전쟁이 무력전과 다른 것은 선전포고가 없고, 그 무기가 역사라는 학문이며, 군사는 관변 사학자와 공무원이란 점 등이다. 그러나 그 상층부에는 중국정부가 도사리고 있으니 이를 어찌 중국의 일개 연구기관이나 ‘지방정권’의 소행으로 덮어둘 수 있겠는가.
중국이 5년간 우리 돈으로 무려 3조 원의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동북공정을 추진한 목적이 뭘까. 첫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동북지방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운동을 예방하려는 것으로 추측된다. 만주에 사는 조선족의 뇌리 속에는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 발해의 후손이란 유전인자가 각인되어 있지 않은가. 둘째는 김일성 3대 세습정권이 붕괴되면 북한에 연고권을 주장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아예 지방정권이나 괴뢰정부를 세우려는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정부가 동북공정이니 서남공정이니 또는 단대공정이니 하며 중국사 정비에 열을 내는 이유는 결국 소수민족들의 봉기로 중국이 다시 남북조시대나 5호16국시대처럼 분열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리와 순리를 거역하면 개인이든 국가든 결말이 좋을 수가 없다. 현재의 중국영토에 있었던 나라가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그 역사가 모두 중국사의 일부분이란 중국 일부 학자의 궤변 망언은 역사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준 이하의 망발에 불과하다.
과연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던 지방정권’이었을까. 고구려의 역사는 서기전 37년 건국부터 668년 망국까지 28왕 705년을 유지했다. 그 동안 중국 땅에는 후한부터 당까지 무려 33개 나라가 저마다 제국을 자처했는데, 200년 이상 지탱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가장 오래 간 나라가 196년을 유지한 후한이요, 그 다음이 103년인 동진이다. 심지어는 왕이 1명뿐인 남북조시대의 동위나, 겨우 7년 만에 망한 후량 같은 하루살이 제국도 수두룩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다는 삼국시대도 위 ․ 오 ․ 촉 3국의 임금이 모두 11명에 60년도 가지 못했다. 또 신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도 20대 290년을 이어갔을 뿐이다. 또 동진 이후 중국을 재통일하고 고구려를 치다가 망한 수나라는 겨우 3대 38년 만에 망했다.
고구려가 ‘속국’으로 있는 705년 동안 중국에선 33개 나라의 흥망이 무상했으니,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본국’이 어찌 있단 말인가. 사실(史實)이 이러함에도 중국은 입만 열면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궤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이 이처럼 역사왜곡․날조와 탈취에 집착하는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중국사를 돌이켜볼 때 중국의 다수민족이란 한족(漢族)의 역사는 별 볼일 없었기 때문이다. 한족이 세운 나라는 진과 한, 그리고 동진 이후 송과 명 정도에 불과했다. 수나라 양씨와 당나라 이씨는 원래 조상이 선비족 탁발씨(拓拔氏), 오늘의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요는 거란족, 금은 여진족, 원은 몽골족, 오늘의 중국 판도를 이룩한 청은 여진족… 그러니까 성세를 자랑하던 중국사의 대부분을 화하족(한족)이 동이 ․ 서융 ․ 남만 ․ 북적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오랑캐’의 역사였다.
중국이 자기 땅에 있던 나라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라고 강변하는데 우리라고 해서 중국사는 고조선사에서 비롯됐다고 당당히 주장하지 못할 것도 없다. 비파형 청동검으로 대표되는 고조선의 발해만 요하문명이야 말로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선 문명이 아닌가.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요하에서 은허의 갑골문보다 오래된 갑골문도 출토됐다고 하지 않은가.
중국 측이 청석관에 이어 비사성과 석성과 오고성 등 다른 연수영 관련 유적지를 잇달아 유네스코
에 등록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결국 동북공정의 또 다른 형태인 해양공정을 위해서다. 중국이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데 이어, 연수영의 사적인 청석관을 일방적으
로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또 다른 유적지들을 등록하려는 시도는 한중 역사전쟁에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다. 그 와중에 우리 고대사 최초의 여걸이며, 고구려 최초의 여장(女將)인
연수영은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중국 변방 소수민족 조선족’ 사람이 될 위기에 빠졌다.
중국이 연개소문이나 연수영을 고구려의 인물로 인정하여 그들의 숨결과 자취가 서린 유적을 유
네스코에 등록할 것으로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중국 땅에 있으니 연개소문도 연수영도
‘중국 변방 지방정권 고려’의 인물로 만들려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손자,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의 경우 우리가 그의 묘지석 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함
에도 불구하고 그가 <삼국사기>와 <당서> 등에 나온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반면 연
수영이나 고원부나 고량 같은 사람은 비석이 나오고 그 존재가 새롭게 알려져도 정사에 나오지 않
는다는 이유로 실존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 학계의 한심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중국학자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원래 비문에 없던 내용을 날조하여 유네스코에 등록해도
좋다는 말인가. 이를테면 설인귀가 연개소문을 패퇴시켰다든지, 연수영의 동생 연수진을 죽이고,
그 긴박한 전쟁 중에도 시체를 묻어주었단 허튼소리도 모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야 하는가 말이
다.
그리고 유네스코 등록 작업을 위해 고구려 최고의 수군 요충이던 비사성도 박작성처럼 중국식 성
벽으로 개조 중이라고 한다. 일부는 이미 유네스코에 등재됐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비사성의 유래
소개에 이어, ‘고려의 해군 장군 연수영이 645년 8월 15일에서 29일까지 약 보름간 장산군도에서
대 해전을 벌여 당군을 이겼다’는 내용이라고 전한다. 당군은 10만 명 또는 7만 8,000명으로 묘
사했고, 고구려 수군은 1만 8,000명에서 2만 5,000명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한편, 장해도의 석성
(성산산성)도 현재 유네스코 등록 절차를 밟고 있는데, 성벽은 이미 등록이 완료됐다고 전한다.
중국학자들이 무슨 까닭에 이처럼 고구려의 대승과 당군의 참패를 인정하고 나올까.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인들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기에 이런 기술(記述)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하는 해양공정의 정체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증주의의 탈을 쓰고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탈취 기도에 여전히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또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이제 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
나야 한다느니, 한국사 중국사 구분 말고 요동사로 하자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
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일부 사학자가 여전히 강단에서 활개 치는 사실도 참으로 개탄스럽
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황원갑 지음 <한국사 여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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