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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후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간 은나라 사람들

작성자아이디|작성시간06.11.15|조회수666 목록 댓글 0

그럴듯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논리적인 허점이 적쟎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 글을 우리말로 옮긴 까닭은, 1) 중국의 고대 기후변화 및 지리변화에 대한 연구성과를 잘 정리했고, 2) 이와같은 변화가 우리나라에도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볼 만하며, 3) 게다가 다루는 지역이 우리나라 역사와 어떤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중국 고고학계 일각의 최신흐름도 볼 수 있고,  이런 연구가 요즘에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점도 한몫했다.   

 

뱀다리: 이글에서도 인용된 담기양의 옛 황하 물길에 대한 고증은 거의 전세계적으로 너도나도 인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그의 글을 보면 문헌자료를 통한 지명비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우리말로 소개해 보겠다). 과연 자연과학적으로 검증을 거친 연구성과가 있었는지 좀 궁금하다.

 

『中原文物』2006年 第1 pp.37~45. (河南博物院)

 

 

기후변화와 商人의 남하

氣候變遷與商人南下

 

 

張渭蓮

(河北師範大學, 河北 石家莊 050091)

 

 

요약: 자연과학연구의 성과는 지금부터 4000~3500년 전 기간에 지구의 기온은 뚜렷하게 내려갔음을 드러냈다. 기온이 떨어짐은 당시 인류의 생산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商人도 이런 기후변화가 일어난 시기에 살았었다. 그들의 활동지역이 남녁으로 옮겨 간 것은 그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제어: 氣候變遷, 下七垣文化,

 

 

 

19세기 말엽 殷墟 甲骨文의 발견과 20세기 23년대 殷墟의 발굴은 司馬遷의『史記』에 적혀있는 商 역사를 믿을 수 있는 역사로 바꿔 놓았다. 그 후 몇 십 년 동안, 학자들은 殷墟文化에 대한 연구를 벌이는 동시에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의 商文化를 찾기 시작했다. 20세기 50년대 이래, 二里崗文化는 殷墟文化의 전신, 즉 초기 商文化임이 확인되면서 商文化의 선행문화를 찾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 지금까지도 학계엔 商人의 기원문제를 두고 많은 異說이 있지만,1 요즘들어 부쩍 많은 학자가 北來說이 옳다는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 下七垣文化야말로 二里崗文化의 본바탕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받아들인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거기는 商人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남긴 문화 터라는 것이다. 下七垣文化는 주로 冀南 豫北땅에 분포하는데, 북에서 남으로 拒馬河부터 沁水까지, 동에서 서로 豫東 서녁부터 太行山 동쪽 기슭까지 이르는 드넓은 테두리 안에서 유적이 골고루 찾아졌다. 下七垣文化의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시간에 따라 바뀌어감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이 문화는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는 흐름을 보이고 있어 벌써 꽤 많은 학자가 이 점을 눈여겨 보고 있다.2 그렇지만 商人이 남쪽으로 내려간 까닭에 대하여 눈길을 주는 사람은 학계에서 아주 적다. 이 글은 바로 거기에 대한 풀이를 해보려는 바이다.

 

요사이 찾아낸 것으로서 下七垣文化에 속하는 유적은 주로 河北평야[平原]에 자리하고 있다. 관련 전문연구자에 따르면, 西周 이전의 黃河 아랫물 땅은 河北평야를 거쳐 渤海로 흘러 들어갔었다. 戰國시대에 둑을 쌓기 이전의 黃河 아랫물은 여러 차례 불어 넘쳐 물길이 바뀌곤 했었지만, 얼추 宿胥口로부터 북쪽을 향해 흘러가서, 浚縣, 內黃, 曲周, 巨鹿, 深縣, 蠡縣, 그리고 安新 일대를 지나갔었다.3 이런 까닭으로, 河北평야의 여러 물흐름은 黃河와 만나 天津 부근에서 渤海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그림 1> 이 밖에, 太行山의 산기슭 퇴적선상지[洪積扇狀地, 골짜기 어귀에서 하천에 의해 운반된 자갈, 모래 따위가 평지를 향하여 부채 모양으로 퇴적되어 이루어진 지형]옛 黃河와 만나는 곳은 수많은 크고 작은 호수로 이루어진 늪지대[湖泊帶]이다. 이 중에는 여러 책에 적혀있는 大陸澤, 滎澤, 澶澤, 黃澤, 雞澤, 泜澤, 皋澤, 海澤, 鳴澤, 大澤 등이 있고, 이들 늪[湖泊]은 다름아닌 太行山 및 燕山 산줄기 앞의 충적선상지가 고대『山經』의 河,『禹貢』의 河西, 그리고 북측의 자연 둑과 만나는 저지대로서, 太行山 및 燕山에서 솟아난 각 물줄기가 모여 고이면서 생긴 것이다.4

 

당시의 河北평야 동부는 강물이 오가고 있는데다 호수나 연못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결코 사람이 살아남기엔 알맞지 않았다. 오늘날 太行山부터 동쪽으로 드넓은 충적벌판과 바닷가 벌판의 흙은 하류로 운반된 뻘흙 혹은 소금끼 먹은 흙, 그리고 밀, 목화, 옥수수, 잡곡이 자라는 논바닥흙[水稻土]이라서 河北평야에서 가장 식량생산이 높은 지역이다.5 그러나 戰國시대 중기에 전면적으로 둑을 쌓기 전의 黃河 아랫물 땅은 걸핏하면 물이 불어 넘치고, 물길이 바뀌곤 해서 벌판에 수많은 호수와 늪을 남겼고, 때문에 당시 이 지역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살기엔 알맞지 않았었다.

 

河北평야 동부와는 달리 당시 平原 동부, 즉 太行山과 충적평야 사이는 낮은 산 구릉과 산기슭 퇴적선상[洪積扇] 벌판이었다. 이들 낮은 산 구릉과 산기슭 퇴적선상 벌판은 남북으로 늘어서는 모양으로 太行山脈 동쪽 기슭에 분포한다. 우연찮게도 요즘 발견된 新石器~商周時期의 유적은 주로 이 땅에 자리하고 있다 <그림 2>. 당시 넓디 넓은 河北북평야는 늪과 못이 빽빽하게 자리하는 저지대가 연이어 있는 상황이었고, 옛 사람은 단지 太行山 동쪽 기슭의 지세가 보다 높은 산기슭 퇴적벌판[洪積平原]에 가까이서 사는 편을 고를 따름이었다. 이 남북으로 길고 좁은 낮은 산 구릉과 산기슭 벌판을 가리켜 太行山走廊지역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요즘의 땅자리로 보면, 이 走廊 줄기는 북에서 남으론 燕山山脈부터 沁河 골짝 땅까지고, 서에서 동으론 綿延의 太行山부터 끝없이 넓은 華北 충적평야에 이어지는데, 남북으로 다니는 뭍에 난 길이다. 그러나 중전신세(8000~5560 BP) 때 이 走廊 줄기는 서쪽의 太行山부터 동쪽으로 黃河에 닿았고, 이 사이의 폭은 겨우 70~120 km 였다. 이로써 走廊이 어떠한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 더욱 더 뚜렷해 졌다.

 

 

下七垣文化유적은 이 走廊 줄기에서 집중적으로 자리하는데, 바꾸어 말하면, 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商人은 몇 백 년 내려오도록 줄곧 太行山 동쪽 기슭의 走廊지역에 살아있었다. 走廊 지역의 기름진 흙은 商人이 농업생산을 발전시키는데 좋은 조건을 가져다 주었지만, 走廊 이동의 수많은 호수나 늪에 사는 물짐승 또한 商人에게 넉넉한 사냥감을 가져다 주었다. 走廊은 동서 양쪽으로 太行山과 黃河 및 연못•늪으로 가로막혀있어 어느 정도 商人의 활동공간을 붙들어 두었을지언정, 太行山과 黃河 같은 천연 울타리는 상대적으로 商人을 위해 한가지 꽉 막힌 공간과 안전한 지리적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이 곳에 사는 商人은 큰물의 덮침을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동서 양쪽에서 다른 부족이 쳐들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헌기록은 물론이고 고고학적 자료에도, 商人은 어떤 지역에 쭉 눌러있지 않았고 끊임없이 이주하고 있었다. 走廊지역의 독특한 땅모양으로 말미암아 商人의 동서 양쪽 방향 발전은 어느 정도 꼼짝할 수 없었고, 때문에 좁다란 走廊지대에서 망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商人 활동지역의 바뀌어감을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지만, 얼추 先商 중기 이후, 商人은 더 이상 북쪽으로 뻗어가지 않고 그 이주의 방향을 남쪽으로 골라잡았다. 어째서 商人은 이 무렵에 남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을까? 우리가 이에 잇닿아있는 자연과학 연구성과를 살펴본다면 그 남하와 기후변화 사이에 어떤 맞닿음 같은 점이 있음을 찾아낼 수 있다.

 

 

관련 전문연구자에 따르면, 8500~3000B.P.(before present) 중국은 홀로세[全新世] 기온극상기 혹은 기후최적기(climate optimum)에 있었다.6 그 중, 5000~3000B.P. 무렵은, 7200~6000B.P.의 고온기 절정 무렵 만큼 온난다습하진 않았지만, 기온의 굴곡은 비교적 완만하면서도 동시에 비교적 온난다습했었다. 이 점은 퇴적물의 꽃가루 (pollen)7, 토양 자화율(sediment magnetic susceptibility),8 얼음 코어 기록(ice core records)9, 고산지대 빙하의 진퇴(glacier fluctuation)와 설선(雪線)의 오르내림(snow cover variability),10 식생(植生, vegetation) 상태11, 옛 황하 물길[古河道]과 연못 따위의 생장흐름12, 그리고 호수 및 바다의 물높이 변화13, 등 여러 분야에서 골고루 시원하게 드러났다.

 

온나라의 기후변화에 발맞추어,5000~3000B.P.의 얼추 2000년 동안, 太行山 동쪽 기슭 河北평야의 날씨는 따뜻했고, 비도 넉넉히 내렸으며, 식물도 잘 우거졌다. 당시 평야에는 낙엽활엽 나무가 아주 잘 자라서 이 무렵의 숲 짜임새는 소나무 외에도 활엽수림이 높은 비율로 뒤덮여 있었다. 또 나무 종류도 굉장히 다양해서 상수리나무, 자작나무, 느릅나무, 뽕나무, 호두나무, 가죽나무, 피나무, 그리고 버드나무 따위가 있었다. 또한 따로 북아시아 열대에서 자라는 너도밤나무나 단풍나무 같은 나무 따위도 河北평야 남부까지 뻗어있었지만, 오늘날엔 江淮 일대 및 그 이남 지역에만 사는 물고사리의 당시 북방한계선은 河北평야 북부 끝자락까지였다. 관련 전문가의 계산에 의하면, 1월의 평균기온은 지금보다 3~5도 높았고 7월의 평균기온도 지금보다 1~2도 높았으며, 연평균 강우량은 지금보다 200 ml 더 많았다.14 날씨가 온난다습했기 때문에 강물은, 수량(水量)이 늘어났고, 유량(流量)은 비교적 일정했으며, 모래의 함유량이 적었다. 그래서 바다높이를 상승시켰으되 땅높이 경사도의 변화는 적어서 河北평야는 주로 굴곡성 강물과 소 멍에 모양 호수[, 하천이 활처럼 굴곡되는 부분의 양끝이 강물로부터 끊어지면서 형성된 반달 모양의 호수]가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당시엔 黃莊窪—七里海, 白洋澱—文安窪, 그리고 大陸澤—寧晉泊 3대 큰 물웅덩이[] 떼 및 그 사이의 수많은 연못•늪 저지대가 간헐적으로 연이어 있는 한 거대한 물웅덩이 그룹이 이루어져 있었다.15 어떤 학자는 당시 白洋澱지역의 기후변화를 연구해서 기후극상기 때 자라던 식물의 홀씨(胞子, spore) 산출비(%)가 전보다 크게 늘어난 점을 발견했다. 특히 온난다습을 좋아하는 물고사리 식물이 이 지역에서 가장 대량으로 번식했음이 드러났는데 그 산출비는 홀씨 총 수의 67.6 %에 달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할 때, 白洋澱지역의 기온은 오늘날보다 2~4도 높았으며 강우량도 200 ml 더 많았을 것이다.16 날씨가 따뜻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수량(水量)이 늘어나서 연못•늪의 면적이 넓어졌고, 그래서 온난다습을 좋아하는 대나무쥐(Rhizomyidae), 노루(Hydropotes inerm), 담비(Genus Martes), 물소(Bubalus arnee), 그리고 사불상(Elaphurus davidianus) 따위의 동물이 그 사이에서 살았다. 渤海灣 연안의 바다높이가 상승해서 옛 해안선은, 최고로 달했을 때, 해발 3~5m 부근의 無棣, 孟村, , 天津, 寶坻, 玉田, , 唐海, 樂亭 남부까지 이르렀었다.17 이런 점들은 河北평야의 기후가 온난다습했고, 호수와 늪이 교차했으며, 풀과 나무가 우거진 보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의 서술과 같이 5000~3000B.P. 기간의 기후는 여전히 비교적 온난다습했었지만, 어떤 학자는 연구결과에 의하면, 2000년 동안의 기후는 결코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인 말이지만, 4000B.P.의 기후는 변동이 완만한 부분안정기였으되 4000B.P. 전후는 재해가 많은 시기였다.18 이 재해는 기온이 가파르게 떨어진 것을 나타내는 것인데, 걸핏하면 가뭄과 큰물이 일어났고 반건조지대인 농업-목축업 교차지대의 북쪽경계를 위도상 거의 1도 만큼 남쪽으로 옮겨놓았다.19 이 커다란 기후변동은 이후의 기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아래와 같다.:

 

 

 

1. 식생(植生) 변화

 

북방에 있는 백두산[長白山] 孤山屯 마을의 단층에서 모은 홀씨 분석에서 드러난 것이지만, 4000B.P.부터 소나무과 가문비나무(Picea jezoensis)의 수량이 뚜렷하게 늘어났다. 식생이 느릅나무, 물푸레나무, 상수리나무, 호두나무 그리고 자작나무가 절대우세를 차지한 활엽수림으로부터 가문비나무 위주의 침엽/낙엽활엽수 혼합림대로 바뀐것이다.20 晉北 陽高지역의 王官屯 마을에도 또한 4000B.P.부터 큰키나무[喬木]의 꽃가루가 줄어들기 시작해고 한랭다습을 좋아하는 전나무(Abies fabri(Mast.) Craib) 꽃가루가 늘어나며 추워지고 있었다 <그림 3>.21 內蒙古 大山 調角海子 마을의 단층에선 잣나무(Pinus tablaeformis) 꽃가루의 농도가 지금부터 3900년 전 이후에 갑작스레 1개 수치 단위 이상 뚝 떨어지기 시작하고 한차례 사라졌던 전나무 꽃가루가 다시 나타났다. 3700~3500B.P.을 전후해서 이 지역의 식물밀도는 뚝 떨어지기 시작하고, 삼림환경은 초원 혹은 삼림/초원 환경으로 교체되었다 <그림 4>.22 二里頭 유적은, 4000B.P. 무렵, 총 홀씨 수량의 17.5%는 목본식물(木本植物, 줄기나 뿌리가 튼튼한 나무 같은 식물), 24.9%는 물에서 자라는 초본식물(草本植物, 나무가 아닌 나물 같은 풀 종류)이 차지하는데, 큰키나무로서 낙엽활엽수인 자작나무, 오리나무, 상수리나무, 그리고 뽕나무 위주이다. 비교적 온난다습한 환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3900~3650 B.P.부터 목본식물 중에서 활엽수가 갑작스레 줄어들고, 또한 소나무속(Pinus) 위주가 되며, 초본식물의 함량은 대대적으로 늘어난다. 기후가 한랭건조화 되고 있음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이다.23 杭嘉湖지역(장강 삼각주)의 경우, 4000 B.P.의 홀씨 조합 중엔 상록활엽수림의 참가시나무(Quercus salicina Bl.)와 멀구슬나무속(Melia)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니와, 측백나무과(Cupressaceae)는 늘어났으되 물에서 자라는 식물은 줄어들었다. 이후 4000~3600 B.P.는 소나무/활엽수 혼합림대 위주의 한랭기였다.24

 

 

2. 동물집단의 이동

 

따뜻한 날씨를 좋아하는 사불상(四不像, Elaphurus davidianus)을 예로 들어보겠다. 사불상은 산기슭, 벌판, 그리고 호수•늪 부근에서 많이 살며, 마지막 빙하기(LGM)의 한랭다습 단계에 출현했었다. 당시의 그 발자취는 북위 40° 이남의 太行山,, 동경 110° 이동으로서 남쪽의 大別山(호남성 淮河 일대) 및 江南구릉 기슭까지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서 골고루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기록과 14C 연대측정치에 의하면, 4000~3500 B.P. 동안의 기후가 추워지면서 사불상은 줄어들었다. 殷墟時代에 들어 기후가 따뜻하게 바뀌면서 사불상은 다시 대량으로 늘어났다.25

 

 

 

3. 바닷물높이의 오름과 해안선 변화

 

우리나라 동쪽 바닷물높이의 변화곡선을 보면 15,000~6000 B.P.에 바닷물 높이가 빠르게 올라간다. 이 뒤로 몇 차례의 큰 오르락내리락이 있는데, 이 중 4000B.P.를 전후해서 나타난 바닷물높이 변화곡선은 뚜렷하게 골짜기 바닥이 낮다(해수면이 낮다는 말).26 渤海灣 서쪽 연안에서 발견된 4개의 괜챦은 조개무지[貝殼堤]에서 시원하게 알 수 있지만, 해안선은 4.0ka B.P.이후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27 그 중에서 세 번째 조개무지는 巨葛莊을 중심에 두고 海河의 남북 양쪽에서 바닷가 쪽으로 뻗어가고 있다 <그림 5>. 이 조개무지의 폭은 100~200m이고 높이는 해발 3~4m로서 주위의 땅높이보다 0.5~2m 높은데,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붕긋 솟은 두둑 모양으로 나타나있다.28 14C연대측정에 따르면 그 연대는 3400±175 B.P..29 長江 삼각주 지역에는 여러 줄기의 둔덕[岡身]과 모래언덕[沙岡]이 분포한다. 예를 들어 吳淞江의 옛 물길 북쪽 기슭부터 동쪽으로 향하는 모두 다섯 줄기의 모래두둑(沙堤, 岡身라고도 칭함)이 있는데, 이 중 가장 동쪽에 있는 한 줄기가 만들어진 때는 4000~3000 B.P.. 이 밖에도, 4000 B.P. 이후의 조개무지 아래 바다와 접했던 뻘질 퇴적층은 표고 0.5~1.5m로서 바닷물 높이가 내려가면서 뭍 밖을 향해 솟구친 보기를 나타낸다.30

 

 

4. 호숫물높이의 변화

 

북위 40°에 자리한 요즘의 계절풍지대에 맞물려있는 岱海, 淸海湖 등의 호수는 홀로세 기온극상기 이후부터 줄곧 호수 넓이는 컸지만, 4000 B.P.때가 되자 빠르게 쪼그라지기 시작했고 호숫물높이 또한 가파르게 쭉쭉 내려가 호수 넓이가 낮은 시기에 접어들었다.31 藏高原(중국 서남부) 서부에 자리한 班公湖의 호수 넓이와 호숫물 온도 또한 4000~3500 B.P.부터 뚜렷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32

 

 

5. 물난리와 가뭄을 불러온 강수량 분포의 불균형

 

4000 B.P. 이후 몇 백년은 홀로세 기온극상기가 끝나가는 시기였고, 이 시기 기후의 출렁거림은 굉장히 격렬했었다.33 이런 기후의 빈번한 출렁거림은 걸핏하면 여러가지 이상재해와 맞장구 쳤다. 기후의 극단적인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기온과 강수량의 변화율이 크게 늘어나서 큰물과 가뭄 따위의 여러 가지 재난이 다른 시기보다 높은 빈도로 나타났었다.34 어떤 학자는 5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의 우리나라 중원지역의 연간 강수량을 추정 계산해서 4000~3800 B.P. 기간이 크게 가물은 시기였음을 발견했는데, 이와 같은 가뭄이 줄곧 이어지다가 3600B.P.가 되서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 (그림 6).35 큰 가뭄은 자주 큰물을 가지고 왔다. 일반적으로, 비는 한랭기에 집중해서 내리기 때문에 대다수의 시간엔 비가 내리지 않거니와 연간 강수량의 변화율도 크고, 따라서 강물의 유량(流量) 변화율 또한 크므로 물난리가 쉽게 터진다. 반대로, 온난다습기엔 연간 강수량 변화율이 적었기 때문에 강물의 유량 변화율 또한 적었고, 그래서 물난리가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당시 華北평야에는 많은 물난리 기록이 있다. 어떤 학자는, 옛 黃河 물길의 모래톱 및 모래톱 안에 묻혀있는 초탄(草炭, peat moss), 목탄(木炭, wood charcoal), 그리고 맹그로브(漂木, mangrove), 또한 그 상층부의 이탄층(泥炭層, 습지식물이 제대로 썩지 못하고 쌓인 퇴적층) 등 옛 터에 남아있는 재료를 근거로, 3500 B.P.를 전후해서 華北평야는 홍수기에 있었다고 생각했다.36 또 어떤 학자는, 沱河(산서성 海河 지류) 崗南一黃壁莊 구간에서 고대 홍수를 조사한 뒤에, 3500 B.P.를 전후해서 한차례 큰 홍수가 있었음을 발견했는데 최고 유량(流量)25,500 m3/s에 달했다.37 이 한가지 변화는, 竺可楨이 20세기 70년대에 기후와 역사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한 중국의 근 5000년간 온도변화곡선으로 나타낸 사실과 딱 들어맞는다. 이는 4000~3500 B.P. 기간에 한차례 비교적 강력한 기온하강 과정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38 이 한차례 기온하강 과정은 우연챦게도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근동), 아메리카 그리고 인도 등지에서 동시 발생한 갑작스런 기후변화와 서로 대응된다.39 4000~3500 B.P.에 전세계적인 기온급강이 있었고, 당시 연평균 기온의 하강폭은 3도 이상까지 이를 가능성이 있다.40

 

우연의 일치로 역사문헌 또한 우리에게 똑 같은 소식을 들려주고 있다. 夏朝는 대략 서기전 21세기에 세워 졌는데,41 이는 마침 4000 B.P. 전후에 이상기후가 발생한 시기에 해당한다.상서,『묵자』,『논어』,『좌전』,『초사』,『산해경』그리고『여씨춘추』등 수많은 문헌기록에서 夏初에 큰물이 터졌고 大禹가 물을 다스렸다는 사건이 실려있다.42  예를 들면 이러하다.『상서·益稷』: “물이 넘쳐 하늘까지 차올라 출렁출렁 산을 감싸고 언덕을 오르니 아래로 백성들은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洪水滔天, 浩浩懷山襄陵, 下民昏墊].”『여씨춘추·先識覽·樂成』: “禹가 江을 터트려 물꼬를 트니 백성들도 기와와 자갈을 모아 (거들었다) [禹之決江水也, 民聚瓦礫].”『詩·商頌·長發』: “물이 넘쳐 끝도 없자 禹가 (하늘의 명으로) 土方(= 화하의 땅)에 내려와 자리잡았다 [洪水芒芒, 禹敷下土方].” 이 밖에 청동기 명문 중에도 大禹의 물다스림에 잇닿아있는 기록이 실려있는데,『●(=++)公盈』에 또렷하게 “하늘의 명을 받들어  禹가 土()에 자리잡고, 산을 따라 물줄기를 트게 했다 [天令()禹尊(), [=++]()山●[= , 土→]()]”라고 적혀있다.43 이로써 확실히 알 수 있지만, 大禹가 물을 다스린 일은 순전히 허구는 아니다. 이 홍수가 지속된 기간을 두고 여러 문헌에서 여러 풀이를 하고 있지만,14 夏初에 특히 엄청난 홍수가 있었다 함은 긍정할 만 하다. 이 뒤의 夏王인 少康 및 杼가 재위할 때에도 큰물이 터졌었다.『今本죽서기년』:少康 “11, 商侯인 冥이 河를 다스렸다 [十一年, 使商侯冥治河].45 杼 “13, 商侯 冥이 河에 빠져 죽었다 [十三年, 商侯冥死於河].『국어·魯語上』에도 이 일이 실려있다: “冥은 그 (물을) 다스리는 데 힘썼으나 물에 빠져 죽었다 [冥勤其官而水死].” 홍수 외에도 夏代에는 가뭄도 많이 일어났었다. 눈여겨 볼 가치가 있는 점은 이들 가뭄이 夏代 말년에 많이 집중하는 점이다.『古本죽서기년』: “胤甲는 즉위하고서 西河에서 살았는데 열 해()가 나란히 떴다 [胤甲卽位, 居西河, 十日幷出].”『今本죽서기년』: 帝癸 29년에 “세 해()가 나란히 떴다 [三日幷出].『묵자·非攻下』:“어느덧 夏王 桀 때가 돌아왔을 무렵에 하늘은 경고를 내리니, 날과 달이 때가 아닌데도 추위와 더위가 뒤섞이기까지 하여 오곡은 타들어 죽었으며, 귀신이 나라에서 곡을 하고, 두루미가 열흘 밤 넘게 울었다 [遝至乎夏王桀●(=+)有□命, 日月不時,寒暑雜至,五穀焦死,鬼呼國,鶴鳴十夕餘]”『국어·周語上』: “옛날에 伊와 洛이 다 마르자 夏는 망했다 [昔伊•洛竭而夏亡……].

 

商初때도 변함없이 가뭄이 많았고, 때문에 商 湯이 가뭄에서 벗어나려고 비 내리기를 빌었다는 옛 이야기가『묵자』,『순자』,『시자』,『여씨춘추』,『상서』,『사기』,『설원』,『한시외전』,『회남자』등 문헌에서 골고루 그물처럼 엮여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여씨춘추·大覽』:“商에 가뭄이 들었음에도 湯은 伊尹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래서) 湯은 伊尹와의 약속을 다 치루었지만 가뭄의 피해를 벗어날 순 없었다  [商涸旱, 湯猶發師以信伊尹之盟. 湯……盡行伊尹之盟, 不避旱殃].”『순자·富國』: “돌아가신 禹는 10년 동안 물난리를 겪었고, 湯는 7년 동안 가뭄을 겪었다 …… [故禹十年水, 湯七年旱……]”『장자·秋水篇』:“湯 때 8년 중 7년이 가물었다 [湯之時, 八年七旱].”『呂氏春秋·順民篇』: “옛적에 湯이 夏을 꺽고 천하를 바로잡았지만 하늘은 큰 가뭄을 내려 5년 동안 수확이 없었다. 그래서 湯은 桑林에서 온몸으로 빌었다 [昔者湯克夏而正天下, 天大旱, 五年不收. 湯乃以身禱於桑林].”『묵자·七患』: “殷書 가로되 湯 때 5년을 가물었다 [殷書曰: 湯五年旱]

 

이런 기록으로부터 夏代의 가뭄과 물난리는 매우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夏桀 때 伊河와 洛河가 말랐었다는 일과 湯 때 여러 해에 걸친 큰 가뭄이 있었다는 일은 夏末~商初에 중원지역은 많은 기후재해에 처해있던 시기였음을 나타낸다.47

 

앞에서 말했듯이, 4000 B.P. 이래 북방지구 전역의 기온이 느닷없이 뚝 떨어지면서 강수량이 줄어들었고, 이런 기후 바뀜은 생태환경을 굉장히 바꾸어 놓았다.48 기온과 강수량의 급락과 가뭄 및 홍수 재해의 빈번한 발생은 농업이 몸에 배인 채 살아가는 商人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관련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商人의 주요 농작물은 조[]인데 이것은 기온에 지극히 민감하다.49 기온이 3도 하락하게 되면 농업재배 상한선이 낮아지고, 유효 적산온도(생육에 필요한 일정량의 온도)와 유효 무상기간(마지막 서리진 날부터 첫 서리가 내린 날까지 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도 함께 떨어져서, 때문에 농작물의 정상적인 성장을 보증할 수 없게 된다.50 더욱이 강수량의 급작스런 감소 또한 마찬가지로 농업생산에 극도로 불리한 영향을 끼친다.51 이전 홀로세 기온극상기 때는 농업의 북방한계선이 지금의 長城地帶까지 달했었다.52 그러나 이윽고 기온하강 사건을 겪은 뒤로, 원래 농업이 성행했던 지역 사람들은 목축업으로 전환하든지53 아니면 계속 농업생산에 종사할 수 있는 남쪽으로 이주했었다.54 딱 許倬雲 선생이 한 말과 같다.: “북녁땅의 식물생장기간은 본디부터 짧았고, 한랭건조에 놓인 塞外가 끝까지 변화에 버틸 수 있는 테두리는 극히 보잘 것 없었다. 기후의 일대 전환은 북쪽 끝자락에서 훨씬 더해서 고달픔이 훨씬 더했다. 그래서 일파만파의 강대한 추진력이 생겼다.”55

 

기후변화와 북방민족의 잇달은 남하에 따라서 북방과 중원을 잇는 走廊지역에 살던 商人은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았다. 商人이 자리잡고 있던 走廊 중북부의 환경이 더 이상 살아남기에 알맞지 않게 되었을 때, 남쪽 이주는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당시 商人의 남녁은 夏人이 살고 있었는데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군사력이 모두 商人보다 많이 앞서 있었다. 商人은 남하하면서 선진 夏文化에 접촉했고, 때문에 대단히 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만약 商人이 최초로 남하한 사건은 단지 생존의 압력에 쫓긴 것이라면, 맨 처음 夏와의 만남을 비롯한 夏와의 국교는 중원지역의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에서 나온 셈이 될 터이고, 그렇다면 그 후 商人의 거동은 본래 속셈과 완전히 상반되는 일종의 매우 탐욕스런 정복과정으로 변질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로부터 미루어 보아 商人이 남하하게 된 것은 좁고 기다란 太行山走廊의 지리적 위치와 기후의 한랭건조화에 직접적인 잇닿음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商人의 남하를 촉진시킨 여러 요인(factor) 중에서 자연환경이 몹시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기후변화는 商人에게 닥쳐온 거대한 생존의 압력인 동시에 商人 자신의 발전을 위한 아주 좋은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商人은 남쪽 이주를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보다 선진적이었던 夏文化와 접촉했고, 하여 商人 자신을 자극해서 고유한 민족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신 中國科學院 植物究所 孔昭宸선생, 河北師範大學 資源•環境科學學院의 許海선생, 李月從 여사께 감사 드린다.)

 

 

1.        주된 견해로 아래 6섯 가지가 있다:

a. 東北說 傅斯年(「夷夏東西說」,『慶祝蔡元培先生六十五歲論文集』下冊, 1935)、金景芳(「商文化起源於我國東北說」,『中華文史論叢』第7, 上海古籍出版社, 1978)、幹志耿(「先商起源於幽燕說」,『歷史究』1985年第5期;「先商起源於幽燕說的再考察」,『民族究』1987年第1)、藺新建(「先商文化探源」,『北方文物』1985年第2) 등이 대표적  

b.  河北說 丁山(「商周史料考證」, 中華書局, 1988)、鄒衡(「試論夏文化」,『夏商周考古學論文集』, 文物出版社, 1980)、李伯謙(「先商文化探索」,『慶祝蘇秉琦考古五十五年論文集』, 文物出版社, 1989)이 대표적.

c.  晉南說 李民(「關於商族的起源」,『鄭州大學學報』1984年第1)陳昌遠(「商族起源地望發微」,『歷史究』1987年第1)、鄭傑祥(『夏史初探』, 中州古籍出版社, 1988)이 대표적  

d.  東方說 王國維(「說亳」、「說商」,『觀堂集林』卷十二)、徐中舒(「殷人服象及象之南遷」,『歷史語言究所集刊』第二本第一分;「殷商史究中的幾個問題」,『四川大學學報』1979年第2)、王玉哲(「商族的來源地望試探」,『歷史究』1984年第1) 등이 대표적  

e.  東南說 衛聚賢主此說(「殷人自江浙遷徙於河南」,『江蘇究』3卷第56, 1937)  

f.   陝西說 顧頡剛(「殷人自西徂東說」,『甲骨文與殷商史』第3, 上海古籍出版社, 1991)、荊三林(「試論殷商源流」,『鄭州大學學報』1986年第2)、李民(『夏商周三族源流探索』, 河南人民出版社, 1998) 등이 이 설을 견지

2.        鄒衡:「試論夏文化」,『夏商周考古學論文集』, 文物出版社, 1980年;沈勇:「商源淺析」,『文物春秋』1990年第3期;朱民:「商族遷徙試論」,『中國社會歷史評論』第2, 天津古籍出版社, 1999  

3.        譚其驤:「西漢以前的黃河下遊河道」,『歷史地理』創刊號, 上海人民出版社, 1981  

4.       鄒逸麟:「歷史時期華北大平原湖沼變遷述略」,『歷史地理』第5, 25~39, 上海人民出版社, 1987  

5.        吳忱:「華北平原四萬年來自然環境演變」, 136, 中國科學技術出版社, 1992  

6.        施雅風等:「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的基本特征」,『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年;施雅風等:「中國全新世大暖期的氣候波動與重要事件」,『中國科學』B1992年第12期;計宏祥:「中國全新世大暖期哺乳動物與氣候波動」,『海洋地質與第四紀地質』1996年第1期;何元慶等:「冰芯與其他記錄所揭示的中國全新世大暖期變化特征」,『冰川凍土』2003年第1  

7.        周昆叔:「塑造現今地質地理環境的劃時代事件——2500年來氣候變涼幹及其影響」,『環境考古究』第1, 科學出版社, 1991  

8.       토양 자화율의 고저도 마찬가지로 기후변화를 나타낸다 자화율 값이 높다는 말은 온난다습한 기후가 일정량 커졌을 때 식물밀도가 보다 커져서 토양과의 자기적 상호작용이 커진 상태다. 반대로 자화율 값이 낮다는 말은 습도가 보다 낮고 식생분포가 드문 한랭기후 상태를 가리킨다. 동시에, 높은 자화율 기록은 풍력이 약한 상태를 가리키므로 온화한 기후를 나타내고, 낮은 자화율은 풍력이 강한 상태와 한랭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甘肅東巴謝、蘭州 九州台、陝西 林 三道溝 등지의 黃土 단층 분석에 대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5kaBP~3kaBP 시기의 자화율이 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安芷生等:「最近2萬年中國古環境變遷的初步究』,『黃土、第四紀地質、全球變化』第2, 1990年;Chen FahuLi Jijun, Zhang Wenxin, 1991, Loess stratigraphy of the Lanzhou Proile and its Comparison With deep sea sediment and ice core recordGeo Journal, 24(2), pp201-209;高玉等:「全新世大暖期的中國沙漠』,『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  

9.        산소 동위원소의 기록도 기후변동을 가리킬 수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물리연구소의 Dansgaard[丹斯加德]는 그린랜드의 빙하를 연구해서 기온이 높았을 때 18-O 동위원소가 증가함을 발견했는데 기온이 1℃ 증가할 때 마다 δ(18-O)‰는 0.69‰ 증가한다 (참조: 竺可楨:「中國近五千年來氣候變遷的初步究」,『考古學報』1972年第1) 고산지대의 빙하를 뚫어 얼음 코어를 분석하면 δ(18-O) 변화가 고온 곡선을 보임을 알 수 있다 얼음 코어의 기록을 보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고, 믿을 만한 자료를 줄 수 있는 얼음 코어는 敦德 얼음 코어와 古里雅 얼음 코어다. 그 중 藏高原 서북변의 古里雅 얼음 코어 분석에서 전지구상의 기후변화흐름과 일치하는 결과를 드러냈다. 이는 이 지역이 홀로세 때 전지구성 대기환류를 받고 있었다는 말인데 즉 서풍 환류의 영향과 관련이 있다. 敦德지역은 藏高原 동북변에 자리해서 우리나라 특유의 계절풍 기후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그 산소 동위원소 분석결과에 따르면 5kaBP~3kaBP의 대략 2000년 사이의 기후는 전부 비교적 온난한 경향을 띠고 있다(何元慶等:「冰芯與其他記錄所提示的中國全新世大暖期變化特征』,『冰川凍土』2003年第1)

10.     고산지대 빙하와 설선의 오르내림은 기후변화와 밀접하게 잇닿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한 지역이 어떤 시기에 기후가 따뜻한 단계에 있었다면 설선이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기후가 추워지게 되면 설선은 곧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빙하의 변화도 이와 발걸음을 같이 한다. 티벳고원[西藏高原]의 홀로세 빙하와 설선의 변하곡선에 따르면, 5ka BP~3ka BP 기간에 빙하의 길이와 설선의 오름이 다 이 시기가 비교적 따뜻한 기후환경에 있음을 드러내었다(李吉均等:『西藏冰川』, 科學出版社, 1986) 竺可楨는 우리나라의 근 5000년 동안의 기온 오르내림과 노르웨이의 설선 높낮이 변화를 비교해서, 이 둘의 변화가 얼추 발걸음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竺可楨:「中國近五千年來氣候變遷的初步究』,『考古學報』1972年第1)

11.     홀씨에 기록된 것은 대량의 식생 변화로서 기후의 온난-한랭, 건조-다습 변화를 말해준다. 현재의 자료로 미루어보아, 동부지역의 기온극상기 도래와 결속 시간은 서부지역 보다 조금 늦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5ka BP~3ka BP 기잔 중에 중국 동부지역은 온난지대 활엽수림 위주였고, 또한 아열대 활엽수림종과 水生類 식물도 분포하고 있어 일종의 온난다습한 기후를 나타낸다 (施雅風等:「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的基本特征』,『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

12.     지하에 매장된 물줄기(水文河道, hydrogeological riverway)도 마찬가지로 기후와 환경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黃河, , 漳河, 그리고 沱河 등의 옛 물길을 파서 단층분석을 연구했는데, 깊이가 지하 8~20m에 이르는, 草炭이 포함된 粉砂(silt-clay)의 회색一회흑색 뻘층을 찾아냈다. 그 홀씨 조합은 소나무, 상수리나무, 느릅나무, 그리고 백양나무 위주의 침엽/활엽혼합수림 초원임이 드러났으며, 또한 대량의 물/늪에서 생장하는 아열대 식물의 홀씨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온난다습한 기후에 놓여 있던 中全新世(mid-holocene) 古河道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시기는 古河道는 성장하지 못했으되 古湖沼가 성장하는 제1古湖沼성장기에 속한다. 기후가 온난다습해서 강물의 유량은 크게 된 채로 일정량을 유지한데다 모래함유량은 적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해수면은 줄곧 높았서 지표면의 경사도는 깍여가고 있었고, 이런 까닭에 강 흐름은 안정하고 물길은 구불구불해서 수많은 牛湖를 만들었다. , 전체적으로 평원은 주로 호수와 늪이 쌓여가고 있었다(吳忱:「華北平原古河道的形成究』,『中國科學』(B)1991年第2) 그런데 그 중에서 白洋澱은 당시에 가장 컸던 호수의 하나였다. 古白洋澱의 흑색 호수퇴적층은 全新世(holocene) 중기에 있었음을 가리키는데, 이 호수지대는 太行山 산 앞에서 막혀 사방에 흩어져 촘촘히 자리했었다. 오늘날 保定市가 있는 곳의 북//남부는 古白洋澱으로 둘러싸인 반도였다. 옛 호수지대의 남쪽 경계는 望都로부터 동쪽으로 蠡縣을 지나서 동쪽으로 구부러져 任丘 동쪽 너머까지 이른다. 북쪽 경계는 南拒馬河와 南易水 물줄기 이남에 있었다 (周昆叔:「環境考古問題』,『環境考古究』第1, 科學出版社)

13.     내륙호수 물높이와 동부 바닷물높이의 변화는 기호변화를 잘 보여준다. 기후가 추워지면 호수면과 해수면은 내려가고, 기후가 따뜻하게 돌아서면 호수면과 해수면은 높이 올라간다 5ka BP~3ka BP의 근 2000년 안에서, 內蒙古 涼城에 자리한 岱海와 海湖 그리고 티벳[西藏] 서부에 자리한 班公湖 등 3개의 호수는 모두 비교적 높은 물높이를 가지고 있었다(王蘇民:「末次冰期以來岱海環境變化與古氣候』,『第四紀究』1990年第3期;「全新世氣候變化的湖泊記錄』,『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 해수면의 변화도 이와 비슷한 데, 5ka BP 이전의 해수면은 오늘날 표고보다 높았고, 그 뒤로 전체적으로 줄어들어 갔으되 이 동안 여러 차례 반등하곤 해서 遼寧 연안, 渤海灣 서안, 그리고 蘇北 등지에 전후해서 지금 해안선의 조개무지를 높이 쌓았다 (趙松齡、趙然濤:「中國第四紀海平面變化究的發展』,『中國海平面變化』, 海洋出版社, 1986)

14.     周昆叔:「中國北方河穀平原區三萬年來植被史梗,『第一次全國14C學術會議文集』, 科學出版社, 1984年;吳忱:『華北平原四萬年來自然環境演變』, 107, 中國科學技術出版社, 1992  

15.     吳忱、許海:「從衛星圖像看海河平原窪澱的形成與演變」,『黃淮海平原水域動態演變遙感分析』, 科學出版社, 1988  

16.   海:「白洋澱地區全新世以來植被演替和氣候變化初探」,『植物生態學與地植物學學報』1988年第12卷第2  

17.     吳忱:『華北平原四萬年來自然環境演變』, 113~114, 中國科學技術出版社, 1992  

18.     施雅風等:「中國全新世大暖期的氣候波動與重要事件」,『中國科學』B1992年第12期;吳文祥、劉東生:「4000a B.P. 前後降溫事件與中華文明的誕生』,『第四紀究』2001年第5  

19.     施少華:「中國全新世高溫期中的氣候突變事件及其對人類的影響」,『海洋地質與第四紀地質』1993年第13卷第4期;張丕遠:『中國歷史氣候變化』, 山東科學技術出版社, 431, 1996年;王巍:「公元前2000年前後我國大範圍文化變化原因探討」,『考古』2004年第1  

20.     劉金陵:「長白山區孤山屯沼澤地13000年以來的植物和氣候變化」,『古生物學報』1989年第4  

21.   孔昭宸等:「中國北方全新世大暖期植物群的古氣候波動」,『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  

22.     張蘭生等:「我國北方農牧交錯帶的環境演變」,『地學前緣』19974  

23.     宋豫秦等:「河南偃師市二裏頭遺址的環境信息」,『考古』2002年第12  

24.   洪雪晴:「全新世低溫事件及海面波動」,『中國近海及沿海地區第四紀進程與事件』, 海洋出版社, 1989  

25.     黎興國:「從我國四不像鹿化石的時間分布看全新世氣候變化特點」,『第一次全國[14]C學術會議文集』, 186~194, 地質出版社, 1984  

26.     趙叔松、趙希濤:「中國第四紀海平面變化究的進展」,『中國海平面變化』, 海洋出版社, 1986  

27.   等:「十五萬年來渤海西、南岸平原海岸線變遷」,『中國海平面變化』, 海洋出版社, 1986  

28.     趙希濤:「渤海灣西岸全新世海岸線變遷」,『華北斷塊區的形成與發展』, 科學出版社, 1985  

29.     中國科學院貴陽地球化學究所:「天然放射性年代測定報告之二」,『地球化學』1974年第1  

30.   徐馨:「中國東部全新世自然環境演變」,『貴州地質』1989年第3  

31.     王蘇民等:「全新世氣候變化的湖泊記錄」』,『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年;王蘇民等:「內蒙古岱海湖泊環境變化與東南季風弱關系』,『中國科學』(B)1991年第7期;陳發虎等:「海湖南岸全新世黃土剖面、氣候信息及湖面升降探討」,『地理科學』1991年第1  

32.     王富葆:「藏高原全新世氣候及環境基本特征」,『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  

33.   施雅風等:「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的基本特征」,『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年;孔昭宸等:「中國北方全新世大暖期植物群的古氣候波動』,『中國全新世大暖期氣候與環境』, 海洋出版社, 1992年;張蘭生等:「我國北方農牧交錯帶的環境演變」,『地學前緣』1997年第4期;方修琦:「從農業氣候條件看我國北方原始農業的衰落與農牧交錯帶的形成』,『自然資源學報』1999年第3  

34.     施雅風等:「中國氣候和海面變化及其趨勢和影響的初步究」,『地球科學進展』1991年第4期;施少華等:「中原地區全新世以來的環境變化』,『地理學報』1992年第47卷第2  

35.     王部等:「近五千餘年來我國中原地區氣候在年降水量方面的變遷」,『中國科學』(B)1987年第1  

36.   吳忱:「古河道與古水文—兼談海河平原古洪水」,『華北平原古河道究論文集』, 中國科學技術出版社, 1991年;殷春敏等:「全新世華北平原古洪水」,『北京師範大學學報』(自然科學版)2001年第2  

37.     詹道江等:「崗南、黃壁莊水庫古洪水究報告」, 轉引自吳忱等『華北地區全新世初期環境變化分析』,『地理與地理信息科學』2003年第2  

38.     이런 온도하강 사건을 승인한 주요 학자는 이러한다: 徐馨:「中國東部全新世自然環境演變」,『貴州地質』1989年第3期;徐馨等:『全新世環境』, 貴州人民出版社, 1990年;張蘭生等:「我國北方農牧交錯帶的環境演變」,『地學前緣』1997年第4期;施少華:「中國全新世高溫期中的氣候突變事件及其對人類的影響」,『海洋地質與第四紀地質』1993年第4期;方修琦:「40003500aB.P. 我國的環境突變事件究」,『地學前緣』1997年第4期;方修琦等:「降溫事件:4.3kaBP岱海老虎山文化中斷的可能原因」,『人文地理』1998年第1期;方修琦:「從農業氣候條件看我國北方原始農業的衰落與農牧交錯帶的形成」,『自然資源學報』1999年第3期;許海等:「粉分析定量重建燕山地區5000年來的氣候變化」,『地理科學』2004年第3  

39.     許靖華:「太陽、氣候、饑荒與民族大遷移」,『中國科學』(D)1998年第4  

40.   施少華:「中國全新世高溫期中的氣候突變事件及其對人類的影響」,『海洋地質與第四紀地質』1993年第4  

41.     斷代工程에 의하면 서기전 2070년이 夏代가 시작한 해다. 참조 夏商周斷代工程專家組:『夏商周斷代工程19962000年階段成果報告』(簡本), 82  

42.     孫淼:『夏商史稿』, 159~164, 文物出版社, 1987  

43.   李學勤:「論●[=“號”+“巾”+“火”]及其重要意義」,『中國歷史文物』2002年第6  

44.     홍수의 지속기간를 두고 문헌 마다 5년, 7년, 10년, 13년 등 여러 설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管子·山權數』:“禹五年水。”『墨子·七患』引『夏書』:“禹七年水。”『荀子·富國篇』:“……禹十年水。”『莊子·秋水篇』:“禹之時, 十年九潦。”『山海經』注引『屍子』說:“禹……疏河決江十年不窺其家。”『史記·夏本紀』:“禹……居外十三年, 過家門不敢入。”『史記·河渠書』引『夏書』:“禹抑洪水十三年, 過家不入門。”詳見孫淼:『夏商史稿』, 161~162, 文物出版社, 1987  

45.     『今本竹書紀年』引自方詩銘、王修齡『古本竹書紀年輯證』一書收錄之王國維『今本竹書紀年疏證』, 188~290, 上海古籍出版社, 1981 下文中凡引『今本竹書紀年』者均出自此書  

46.     『通鑒外紀』卷2  

47.   夏代의 생태 환경에 대해서는, 王星光『生態環境變遷與夏代的興起探索』(科學出版社, 2004)란 한 책에 많은 연구가 실려있어 참고가 된다.

48.   이 지역의 기후변화은 소재지의 지리적 위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한랭→온난 변화를 예로 들면 이러한다: 기후가 한랭에서 온난으로 돌아서게 되는 시기는 남방에선 일찍 시작되었고 북방에선 다소 늦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온난에서 한랭으로 돌아서는 시기는 북방에서 빨리 시작되었고 남방은 늦게 시작되었다. 走廊지역을 예로 든다면, 그 남북은 겨우 서로 700km 떨어져 있지만 기후변화는 상호간에 100~300년이나 차이가 날 수 있다. 참조 吳忱:『華北平原四萬年來自然環境的演變』, 161, 中國科學技術出版社, 1992

49.     張家誠는,『中國氣候總論』에서, 기온과 식량생산량의 관계를 두고 “온도변화 1℃ 만큼의 온도변화는 얼추 1성숙도[熟級] 만큼의 변화에 해당한다. 농업생산 경험에 근거하면, 성숙도가 1만큼 변할 때마다 생산량은 약 10% 만큼 변한다고 했다. 또한, 연평균 온도 1℃ 만큼의 상승 혹은 하강은 식량생산을 10% 만큼 증가 혹은 감소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350, 氣象出版社, 1991)  

50.     方修琦等:「降溫事件:43kaBP岱海老虎山文化中斷的可能原因』,『人文地理』1998年第1  

51.   “강우량이 100ml 변할 때, 1ml 강우량을 1畝 당 1kg 생산량에 상당한다고 치고 계산하면, 畝당 생산량의 변화는 50kg까지 달할 수 있다.(張家誠:『中國氣候總論』, 350, 氣象出版社, 1991)

52.     林澐:「夏至戰國中國北方長城地帶遊牧文化帶的形成過程」,『燕京學報』新14, 20035  

53.     朱開溝文化 같은 것이 가장 전형적인 예증이라 하겠다. 3.7ka BP에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할 무렵, 朱開溝文化는 농업문화에서 목축업문화로 자리바꿈하기 시작했다. 3.5ka BP 이후부터 목축업문화는 농업분화로부터 분리되어 나왔고, 결국 유목문화로 변화, 발전했다 (張蘭生等:「我國北方農牧交錯帶的環境演變』,『地學前緣』1997年第4)  

54.     王明珂:「鄂爾多斯及其鄰近地區專化遊牧業的起源」,『中央究院歷史語言究所集刊』第652, 19946月;吳文祥、劉東生:「4000aBP.前後降溫事件與中華文明的誕生』,『第四紀究』2001年第5  

55.     許倬雲:「漢末至南北朝氣候與民族移動的初步考察」,『許倬雲自選集』, 上海育出版社, 2002 許倬雲 선생이 토론하는 시대는 여기에서 다루는 시대와 다르지만, 漢말~南北朝 시기와 夏代는 똑같이 기후의 일대 전환기에 놓여 있었고, 따라서 서로를 뒷받침하는데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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