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기년 추정
지금 남당 유고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 ~ 탈해이사금까지의 기년을 살펴볼 수 없으므로 인하여 신라의 出自를 밝힐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어 부득이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古記 등의 기록으로 보충하였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잘못이라고 부정한 古記의 기록을 인정함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현재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다.
① A.D.25
≪삼국유사 新羅始祖 赫居世王 기사 발췌≫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 建虎元年 又云 建元三年等 皆誤〉 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B.C.69) 〈古本에는 建虎 元年(建武 元年, A.D.25년)이고, 建元(나라를 세운 임금이 연호를 칭함, 후한의 건원은 A.D.23년) 3년 등이라고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6부(六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② 임인년(A.D.42) 기사 모음
㉮ 고구려가 신라를 침범하다.
≪삼국유사 弩禮王 기사 발췌≫
建虎十八年 伐伊西國 滅之 是年高麗兵來侵
건호(建虎) 18년(A.D.42)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 탈해의 입국
≪삼국유사 脫解王 기사 발췌≫
脫解齒叱今〈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 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禮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南解王) 때〈古本에 임인(壬寅, A.D.42)년에 이르렀다는 것은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弩禮王)의 즉위 초보다 뒤의 일이니 제위를 양보하는 일을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혁거세왕(赫居世王) 때의 일이다. 그런 연유로 임인(壬寅)년이 아님을 알겠다.〉
㉰ 가락국의 건국
≪삼국유사 駕洛國記 기사 발췌≫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浴之日 所居北龜旨 〈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A.D.42) 3월 계욕일(禊浴, 부정을 씻는 목욕재계의 행사)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③ 탈해의 재입국(혁거세왕 39년)과 탈해의 원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머리기사 발췌≫
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 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幷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 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토해(吐解)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昔)이며, 왕비는 아효(阿孝)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은 여국(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金官)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赫居世) 39년이었다.
≪견해≫ 삼국사기에는 탈해의 입국시기인 혁거세왕 39년으로, 삼국유사에는 임인(壬寅)년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 기년으로 혁거세왕 39년은 임인(壬寅)년으로 B.C.19년이다. 또 삼국사기에는 탈해이사금 원년에 탈해의 나이가 62세라 하였는데 잘못이다. 탈해이사금 원년은 A.D.57년이므로 76세다.
탈해의 입국시기인 삼국사기의 혁거세왕 39년과, 삼국유사의 임인(壬寅)년이라는 기록은 모두 맞을 것이다. 다만 혁거세왕 39년은 임인(壬寅)년이 아니며, 가락국 수로왕과 다투었던 어른 탈해의 입국시기와 다파라국에서 태어난 어린 아기의 입국시기로 구별될 수 있다.
탈해라고 지칭된 한 사람은 임인(壬寅)년인 A.D.42년에 신라로 들어와서 2년 후인 A.D.44년에 가락국 수로왕과 다투었던 어른 탈해이고, 다른 분은 혁거세왕 39년에 다파라국에서 태어나 바다를 건너와 신라 제4대왕으로 즉위한 탈해일 것이다.
탈해왕을 세분하여 먼저 수로왕과 다투었던 탈해는 탈해이사금의 부친인 다파라군이며, 그가 수로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신라로 도망쳤으며 신라왕녀와의 사이에서 7년 만에 아들을 낳고 신라로 보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혁거세왕의 원년과 탈해이사금의 원년이 하나로 연결되어 다른 하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탈해의 출생년을 추적하자면 다파라군이 가락국 수로왕에게 패하여 신라로 도망친 해가 A.D.44년이고 다시 열도를 건너가 그로부터 7년 후가 탈해의 출생년일 것이다. 대략 A.D.51년쯤으로 추정하며 이 해가 혁거세왕 39년이다. 이를 근거로 혁거세왕 원년을 A.D.13년으로 추정하며, 혁거세왕 원년에 나이가 13세이니 혁거세왕의 출생년을 A.D.1년으로 추정한다.
또 탈해이사금의 원년은 62세가 되는 해인 A.D.112년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는 고구려사초의 백제의 남하 시기인 A.D.113년 3월의 기사와 일치한다. 남해차차웅과 유리이사금의 재위기간의 합과 14년 차이가 있으나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없다.
혹자는 수로(首露)왕을 청예(靑裔)왕과 같은 분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청예가 삼국사기에 처음 나타나는 시기는 파사이사금 즉위 23년으로 탈해가 죽고 없던 시기에 해당하여 청예(靑裔)와 탈해(脫解)가 다툴 수도 없다.
또는 남당유고에 청예(靑裔)왕의 어머니 정견(正見)이 죽은 해가 A.D.158년이고, 청예왕의 재위기간이 42년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건호(建虎) 18년(A.D.42)에 고구려(高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고 하였고, 남당유고 고구려사초에 삼국유사의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당시에 고구려 대무신왕이 남쪽의 신흥국가인 신라를 친 이유는 무엇이며, 재사(再思)공주의 아들 다루(多婁)왕자에게 군대를 지원하여 도운 일은 무슨 연유일까?
이에 앞서 고구려 대무신왕은 고구려를 괴롭혀 온 동부여를 공격하였는데 소서노의 구신인 백제계일파는 본래 동부여에서 출자하였으므로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대무신왕도 이에 맞서 그들의 비리를 들추어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는 등 강압정책을 폈으나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고구려가 백제계를 탄압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기사에도 있다.
그러던 중에 온조의 아들이자 재사(再思)공주의 소생(所生) 다루(多婁)왕자가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유리명왕의 적장자(嫡長子)인 도절태자가 세운 신라를 아예 제거하여 이이제이(以夷制夷)할 기회를 엿본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재사(再思)공주의 아들 다루(多婁)왕자가 혹시 신라에게 귀부할 것을 염려하여 백제계와 감정이 좋지 않던 낙랑계의 다파라군을 참군(參軍)으로 보낸 것이다. 백제계와 낙랑계가 원한이 있다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년 ~ 17년(B.C.11 ~ B.C.1) 기사에 의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남당유고 백제왕기에 의하면 소서노의 외손인 도절(都切)태자가 동부여에 볼모로 갔을 때와 소서노가 죽었을 때는 백제가 낙랑과의 전쟁이 치열하였던 시기가 일치한다.
고구려사초와 추모경에 의하면 유리명왕이 동부여에서 와서 유리를 태자로 정할 때 반대하였는데, 유리명왕이 국내성으로 천도를 한 후에 쌓인 원한이 있어 협부(陜夫)를 쫓아내었다고 한다. 아마도 협부가 유리명왕에게 쫓겨난 것을 정당화하는 기사인 듯 하다. 원한이 있는 자를 태보(太輔)라는 최고 직위까지 승차시킨 점과 원한이 쌓인 시점과 분풀이 하는 시점이 20여년 이상 차이가 나므로 허위 기사로 보인다.
협부(陜夫)는 낙랑왕 시길(柴吉)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추모경에 의하면 그는 추모왕의 용양군으로 총애를 받았는데 소서노(召西奴)가 그를 미워했다고 하였다. 또 낙랑왕 시길(柴吉)은 딸 작씨(鵲氏)를 추모왕에게 시집보냈는데, 작씨는 추모왕의 아들 작(鵲)태자를 낳았는데 이 분이 곧 다파라국의 시조로 추정된다. 작(鵲)태자는 A.D.2년에 유리명왕과 아이후의 소생인 현(玄)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
고구려사초에 의하면 낙랑은 시길(柴吉)로부터 최리(崔理)가 멸망할 때까지 4대가 왕을 지냈다고 하나 3대왕의 이름이 사라졌다. 사라진 3대왕이 협부계인 다파라군인 듯 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남당유고 고구려사초(략), 본기신편열전 등 모든 사서에서 도절태자가 동부여에서 돌아왔을 때 도절태자가 죽었다고 하였다. 또 도절태자가 고구려로 돌아오던 해에 비류(沸流)가 고구려에서 죽었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도절태자는 다른 왕자와는 달리 장례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비류(沸流)가 죽은 이후인 A.D.3년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천도(遷都)를 하였으며, 그해 겨울에 유리명왕이 협부(陜夫)를 내치니 그가 곧 바다를 건너 남한(南韓, 삼국사기) 혹은 신라(新羅, 남당유고) 혹은 다파라국(환단고기)으로 갔다고 하였다. 협부(陜夫)가 간 곳이 사서마다 다르나 권등성경(權藤成卿)의 팔린통빙고(八隣通聘攷)에는 남한(南韓)을 아(我, 왜)라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화(神話)의 형식으로 기록하였으나 요약하면
소사노오(素戔鳴尊)가 고천원(高天原)에서 축출된 후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찾아가 용서를 빌자 천조대신이 소사노오를 용서하였다고 하고,
이에 일신(日神) 또한 스사노오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바야흐로 알게 되어 이에 일신이 낳은 3여신을 축자주로 내려 보냈다. 그런 까닭에 가르쳐 말하기를 “너희 3신은 마땅히 살만한 땅에 내려 백성들을 가르쳐서 천손(天孫)을 받들고 돕도록 하며, 천손을 위하여 제사지내라.”고 하였다. (於是 日神方知 素戔嗚尊固無惡意 乃以日神所生三女神 令降於筑紫洲 因敎之 曰 “汝三神 宜降居道中 奉助天孫 而爲天孫所祭也”)
아마도 협부는 유리명왕에게 내쳐짐을 당하였을 때 먼저 신라에 와서 도절태자에게 사죄하였는데, 도절태자는 협부가 죄가 없다하여 용서하였던 것 같다. 혹은 협부는 죽임을 당하고, 작(鵲)태자가 용서를 받은 듯 하다.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를 추정함에 애매함이 있다.
여기에 도절태자는 일본서기의 천조대신(天照大神)으로 신라사초의 천신(天神)이고, 백제 온조왕이 일본서기의 일신(日神)이라 추정된다.
일본서기의 기록과 고사기(古事記)의 기록이 상이함은 있으나 고사기에는 고천원(高天原)에는 최초에 3신이 있었는데, 3신이 부부신을 낳았으며, 부부신이 스사노오(須佐之男)를 낳고 그 중에서 어머니 신이 먼저 죽었다고 하였다. 이 부분은 백제왕기의 백제의 건국 3신인 우태, 소서노, 추모왕과, 이들이 낳은 부부신은 유리왕과 아이후를, 아이후가 먼저 죽은 점도 같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스사노오를 부부신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자신의 조상신을 높이기 위해 변개(變改)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만약 스사노오가 작(鵲)태자라면 촌수로는 비록 유리왕의 아우이나 작태자는 추모왕이 죽은 해에 태어났고 어머니 작씨가 다시 유리왕의 후궁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리왕이 아들로 삼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일본서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그런 연유로 일신(日神)은 스사노오(素戔嗚尊)가 본래부터 깨끗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바야흐로 알게 되어 곧 스사노오의 여섯 남자(六男, 신라의 6부 촌장으로 추정)를 골라 뽑아 일신의 아들로 삼아 천원(天原, 신라로 추정)을 다스리게 하였다. 곧 일신이 낳은 3여신으로 위원중국(葦原中國)의 우사도(宇佐嶋, 嶋은 섬이라는 뜻이며 우산도로 추측된다. 일본의 佐島)에 내려 살게 하였다. 지금 해북도(海北道, 일본에서 한반도로 오려면 북로와 남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사할린을 거쳐 연안을 따라 북진하거나 블라디보스토크나 성진 방향 직항로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 중에 있으며, 도주귀(道主貴)라 부른다. 이는 축자(筑紫, 축자를 구주라고 하므로 해북도와 어긋난다.)의 수소군(水沼君) 등 여러 신이 이것이다. (故日神方知素戔嗚尊 元有赤心 便取其六男 以爲日神之子 使治天原 即以日神所生三女神者 使降居于葦原中國之宇佐嶋矣 今在海北道中 號曰道主貴 此筑紫水沼君等祭神是也 (神代 上 第6段 1書3))
이때 스사노오는 아들 아다케루노가미(五十猛神)를 데리고 신라국에 도착하여 내려 소시모리(曾尸茂梨, 소의 머리라는 뜻으로 牛頭, 백제와 낙랑이 다투었던 곳의 지명이며 나중에는 백제와 신라가 다투던 땅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8년 기사참조)라는 곳에 있었다. 이에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며,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건너 출운국(出雲國) 파천(簸川) 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峯)으로 갔다. (是時 素戔嗚尊 帥其子五十猛神 降到於新羅國 居曾尸茂梨之處 乃興言曰 此地吾不欲居 遂以埴土作舟 乘之東渡 到出雲國簸川上所在 鳥上之峯 (神代 上 第8段 一書4))
어떤 사서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천치언(天稚彦)에게 타일러서 말하기를 “풍성한 위원중국은 내 아이가 왕이 될 땅이다.”라고 하였다. (一書曰 天照大神勅天稚彦 曰 豐葦原中國 是吾兒可王之地也”).
살펴보면 진무(神武)이후의 기록인 2세 수정천황(綏靖天皇), 3세 안녕천황(安寧天皇), 4세 의덕천황(懿德天皇), 5세 효소천황(孝昭天皇), 6세 효안천황(孝安天皇), 7세 효령천황(孝靈天皇), 8세 효원천황(孝元天皇), 9세 개화천황(開化天皇)의 기록에는 왜왕의 즉위와 사망 및 간단한 기록만이 있으므로, 어느 시기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의 후손이 왜(倭)로 건너가 정권이 교체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위의 기사로 일본의 적통(嫡統)은 진무(神武)가 아니라 천조대신(天照大神)일 것이다.
어떤 사서에는 스사노오가 말하기를 “한향(韓鄕)의 섬에 금은이 있다. 만약 나의 아이들이 다스리는 나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보물을 소유하게 하지 않는다면 아름답지 않는 일이다.”라고 하였다.(一書曰 素戔鳴尊曰 韓鄕之嶋 是有金銀 若使吾兒所御之國 不有浮寶者 未是佳也(日本書紀 卷一 第8段 一書5))
이글은 위의 우사도(宇佐嶋)를 말함이다. 일본의 사도(佐島)는 16세기까지 골드러쉬가 있었던 곳이다. 신라가 황금의 나라라는 것은 아마도 여기의 금을 공물로 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일본국 11세 수인(垂仁)천황 2년의 기사에는 연오랑(延烏郞)의 기사가, 3년 기사에는 천일창(天日槍)의 기사가 있는데 순서가 바뀌어 있다. 천일창은 연오랑보다 3~4세대(世代) 이전의 인물이다. 수인(垂仁)천황은 신라 아달라이사금 재위시의 인물이며 왜여왕 비미호(卑彌乎)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혹은 일본서기가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조작한 것이라면 연오랑(延烏郞)은 수인(垂仁)천황, 세오녀(細烏女)는 비미호(卑彌乎)일 것이다. 남당유고에는 연오랑(延烏郞)의 출신이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다파라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만 있다.
또 연오랑이 다파라국의 왕이 된 시기는 아달라이사금 4년(A.D.216, 남당유고 기준)인데, 연오랑이 다파라국의 왕이 된 이후인 A.D.219년 2월 그믐(壬子, 양4.2), A.D.221년 6월 그믐(戊辰, 양8.5), A.D.222년 11월 그믐(庚申, 양223.1.19)에 일식이 연속적으로 한반도 지역에 나타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세오녀가 짠 세초(細綃, 고운 비단)라는 기사가 수인(垂仁)천황기에는 적견(赤絹, 붉은 비단)으로 약간의 문구 차이만 있을 뿐이다.
또 11세 수인(垂仁)천황 88년 기사에는 천일창(天日槍)의 증손(曾孫) 청언(淸彦)과 고손(高孫) 전도간수(田道間守)가 등장한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천일창의 계보를 살펴보면 天日槍(麻多烏) - 但馬諸助 - 但馬日楢杵 - 淸彦 - 田道間守이다. 그러므로 천일창이 도래한 시기는 연오랑보다 3~4세대(世代)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14대 중애천황이 죽고 신공(神功)황후 섭정 원년기사에는 신라왕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왜왕에게 죽은 신라왕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내해이사금의 아들 우로(于老)가 왜의 사신에게 죽었다고 하였다.
남당유고에는 신라왕자 우로(于老)가 죽은 해가 A.D.331년이라 하였는데, 이 해가 중애천황이 죽은 신공황후 섭정 원년이며 응신(応神)이 태어난 해 일 것이다.
신공(神功)황후 섭정 원년기사에는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 파사이사금)은 곧 미질기지파진간지(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하여 금은으로 능라(綾羅, 비단)와 겸견(縑絹, 비단)을 채색하여,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으로 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신라왕이 항상 80척의 배로 일본국에 조공을 바치는데, 그것은 이런 연유다.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是以新羅王 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 其是之緣也).
신공황후 섭정 기사에 신라 파사매금(波沙寐錦, 파사이사금)이 80척의 배에 비단과 관군을 실고 왔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년의 잘못이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파사이사금 10년(A.D.135)기사를 살펴보면 다파라왕이 죽어 다파라여주가 후계자가 없으므로 남편을 삼을 사람을 보내주기를 청하니 신라에서는 삼니금(彡尼今)과 100척의 배를 치장하여 보냈다고 하였다. 뒤에 삼니금(彡尼今)으로 지칭되는 인물이 유리이사금의 아들인 후복(厚福)태자임을 알려주는 기사가 있는데 후복은 당시 파사이사금의 태자인 덕공(德公)과 동복형제이므로, 천일창이 신라왕자로써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왔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부합함이 있다. 또 연오랑의 기사와는 81년의 차이이므로 연오랑과 3~4세(世) 이전의 인물이라는 점도 부합함이 있다.
다만, 일본서기에는 천일창이 변두리의 새로운 땅을 개척하여 왕이 되었다고 하나, 남당유고에서는 다파라국의 신왕으로 등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 다르다.
남당유고 기림이사금 5년(A.D.368,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3년)에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이 왜태자에게 시집을 가서 삼자(三子)를 낳았으며, 삼자(三子)는 왜왕녀와 사이에 보미(宝美)를 낳았다. 고구려사초를 보면 A.D.403 ~404년 사이의 왜왕은 인덕(仁德)이다.
요약하면 왜왕 응신(応神)의 출생은 A.D.331년, 왜왕 인덕(仁德)은 출생은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이 왜(倭)로 시집간 A.D.368년 이후가 될 것이다. 인덕의 딸 보미(宝美)는 A.D.404년 출생이다. 남당유고에는 보미(宝美)가 다파라국 왕녀라고 하였으니 왜국(倭國)의 전신(前身)이 다파라국은 아닐까?
* 천일창의 기사로 추정되는 신라사초 기사모음
파사이사금 10년 기사
十年 九月 多波那君薨而無嗣 其妃請奉彡尼今爲夫 惠后許之 命水路大師 裝船百艘 而送之
10년(A.D.135) 다파나(多波那)군이 죽었는데 후계자가 없었다. 그 비(妃)가 삼니금(彡尼今)을 받들어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혜후(惠后)가 삼니금을 남편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다. 수로대사(水路大師)에게 백 척의 배를 치장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비교≫ 일본서기 신공(神功)황후 섭정 원년기사 발췌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是以新羅王 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 其是之緣也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 파사이사금)은 곧 미질기지파진간지(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하여 금은으로 능라(綾羅, 비단)와 겸견(縑絹, 비단)을 채색하여,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으로 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신라왕이 항상 80척의 배로 일본국에 조공을 바치는데, 그것은 이런 연유다.
지마이사금 10년 기사
十年 正月 翌宗伊飡 狗日稟主 昕連水路 洪刀京路 玉權西路 莫兮北路 逸聖南路 雄宣護城 林權爵阿飡
10년(A.D.168) 정월 익종(翌宗)을 이찬, 구일(狗日)을 품주, 흔련(昕連)을 수로, 홍도(洪刀)를 경로, 옥권(玉權)을 서로, 막혜(莫兮)를 북로, 일성(逸聖)을 남로, 웅선(雄宣)을 호성, 임권(林權)에게 아찬의 작위를 내렸다.
二月 築大甑山城 以屛旨爲城主 汗門之子也
2월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 병지(屛旨)를 성주로 삼았는데, 한문(汗門)의 아들이다.
四月 野人加乙五古等 以爲厚福太子之命 奪我船舶 昕連縛獻至 未幾野人大至 皆爲昕連所敗
4월 야인(野人) 가을오고(加乙五古) 등이 후복태자(厚福太子)의 명이라 하여, 우리의 선박을 빼앗았다. 흔련(昕連)이 (가을오고 등을) 결박하여 바치러 이르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야인들이 크게 이르렀다. (야인들) 모두는 흔련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0년 기사
10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대증산성을 쌓았다.
4월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七月 逸聖京路 洪刀南路 先是 上酷愛逸聖 至是譴出 旋入
7월 일성(逸聖)을 경로로, 홍도(洪刀)를 남로로 삼았다. 이전에 왕이 일성을 매우 총애하였는데, 이때에 꾸짖으러 나갔다가, (물을 돌아, 회전하여) 돌아왔다.
≪견해≫ 일성이사금이 어디로 가서 꾸짖고 왔는지 구체적인 명시가 없으나 위의 4월의 기사와 연관된다고 판단된다. 아마도 다파라(倭)에 가서 교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박을 제공한 듯 하다.
지마이사금 13년 기사
十三年 三月 野人遣使 請和 許之
13년(A.D.171) 야인(野人)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五月 大井東門外 有貧民屋 陷爲池 芙蕖自生 命立芙蕖祠 以禳之
대정(大井) 동문 밖에 빈민의 집이 있었는데 무너져 연못이 되었다. 연꽃이 스스로 피어났다. 부거사(芙蕖祠)를 세우도록 하고, 푸닥거리 하였다(혹은 제사를 지냈다).
≪비교≫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12년 기사
12년 3월 왜국과 강화하였다.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 금성 동쪽 민가가 내려 앉아 연못이 되었고, 그 곳에 연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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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聖君 光海君 작성시간 10.04.05 전부터 궁금헸던건데 남당유고를 어떻게 하면 볼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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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04.06 남당유고는 본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터넷상으로 공개되던 자료로 2009년 1월엔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지금은 원문출력 형식으로 공개되고 있습니다.(1장당 50원)
물론 그 이전에 자료로 받아놓은 것이 있어서 저의 카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만, 자료의 용량상 일부는 나누어 올려놓았습니다.
혹시 원본파일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카페에 글을 올리시거나 메일주소를 알려주세요.
저의 카페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cafe.daum.net/sijeong7101
제가 남당유고를 연구한지가 3년이 되었음에도 원본의 1/10정도를 해석된 듯 합니다.
저의 주해본도 올려져 있으나 단지 남당유고를 접하는 참고용정도로 사용하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聖君 光海君 작성시간 10.04.06 지금 가입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