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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의 한화정책-문명태후의 치마폭과 효문제의 낙양천도

작성자갈매기의꿈|작성시간11.02.04|조회수1,228 목록 댓글 0

미천한 학부 2학년 1학기 학생때의 하찮은 발표자료였던 글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올려봅니다.

 

1. 시대개요

  후한 말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시작된 혼란상은 군웅할거(群雄割據)와 5호 16국 시대를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봉합되어 남북조(南北朝)의 정립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 역시 화북의 이민족 정권인 북조와 강남의 한족 정권인 남조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고 북조는 북막(北漠)1)의 유연(柔然)과 갈등을 빚었으며 남조는 남월(南越) 지역에서의 계속된 반란2)을 진압하느라 국력을 쏟고 있었다. 게다가 남조의 왕조들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 채 짧은 기간에 4개의 왕조가 바뀌는 등의 혼란상을 보였다.

  그래도 비교적 군웅할거와 5호 16국시기에 비해서는 많은 안정을 찾았으며 특히 북조의 정권인 북위(北魏)는 빠른 시기에 안정을 찾았다. 이는 유연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으로 유연의 세력약화에 성공했으며 고구려와의 혼인동맹3)을 통해 북변의 안정화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부분의 일이 북위의 중흥군주라고 칭해지는 효문제(孝文帝) 시기에 일어났으며 그는 이러한 안정된 외방의 사정을 이용하여 내정을 다진다. 그의 내정개혁은 기존의 무치(武治)에서 문치(文治)로의 이행이었으며 호풍(胡風)에서 한풍(漢風)으로의 개혁이었으며 이것을 후대 역사가들은 효문제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라고 부른다.

  이번 발표에서는 효문제의 한화정책의 시작점이 된 낙양(洛陽)천도의 원인과 그 이후에 벌어진 한화정책에 관련된 주요정책들을 알아보고 이러한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효문제의 기반세력들에 대해서 알아본다. 더불어 효문제가 한화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조성했던 문명태후(文明太后)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2. 효문제의 한화정책과 그 기반세력

2-1. 효문제의 주요정책

  효문제의 한화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책은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관제 개혁과 성족상정(姓族詳定)이다. 우선 관제개혁에 대해서는 태화 17년(493년), 19년(495년), 22~23년(498~499년) 3차에 걸쳐 시행되었다.4) 미야자끼 이찌사다(宮崎市定)의 견해를 인용하자면 현존 17년의 영(令)과 22~23년의 영의 두 가지 관품표를 비교해보면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1차 개혁에서의 많은 관품들이 대부분 한인 전통의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종래에 북위에서 시행되던 관품들을 발견 할 수 있는데 시어중산(侍御中散)과 중산(中散)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품들은 호인(胡人)귀족의 자제들을 위해서 만든 작위이다. 그러나 마지막 개혁인 3차 개혁에는 이러한 호인 고유의 관작은 사라지고 오직 한인 고유의 관작들만이 남아 있다.5) 또한 이 3차 개혁안에서는 관작의 청탁(淸濁)의 구별6)이 생겼으며 또한 유내(流內)와 유외(流外)의 구별을 세워 유내관을 9품으로 나누고 그 밑으로 유외관 9품을 두어 서민의 정계진출을 인정하면서 기존 사대부의 특권을 보호함으로써 국가체제 속에 귀족제가 의식적으로 이식되었음을 보여준다.7) 이러한 개혁은 종족주의라는 편협한 원리에서 귀족주의라는 더 보편적 원리로의 발전을 통해 제국을 보편 제국으로 탈피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간주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인출신의 귀족들만이 아닌 북인귀족들 역시 이러한 귀족제 아래에 완전히 편제되어야 했다. 성족상정은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 실시된 제도로 1) 태조(太祖) 도무제(道武帝) 이래로 특별한 공훈 등으로 최고의 관작을 받은 8성(性)들은 최고의 가문으로 설정하고 한족의 4성(性)8)과 동등한 대우로 탁관에 임용치 않는다. 2) 그 외에 호족 각 씨에 대해서는 부락대인(部落大人)의 후예인지 아닌지, 또 북위 건국 이래에 어떠한 관작을 얻었는지를 감안하여 높은 자를 성(性)으로 하고 낮은 자를 족(族)으로 한다. 이것이 성족상정의 요지로 한인의 귀족제에 북인을 대열하여 서열화한 것이다.9)

  이러한 정책들의 주 목적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종족주의라는 편협한 원리에서 귀족주의라는 보편적 원리로의 발전을 통해서 북위제국을 보편적 제국으로 발전시키고 내부적으로 호한 양자 간의 통합을 이뤄 천하통일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함이었으며 더 나아가 남조와의 융합이라는 면에서도 이러한 개혁을 실시했던 것이다.


2-2. 개혁의 기반세력.

  효문제 치세 초기에 그의 기반세력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즉위 이전부터 강력하게 통치력을 행사했던 문명태후의 세력이 그녀의 사후 효문제의 친정기간에도 존속했으며 당시 북위의 도읍지였던 평성(平城)은 북인세력이 강력했던 곳으로 한화정책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었다. 효문제는 이러한 세력의 불균형을 제어하기 위해 두 개의 방책을 강구했다.

  우선 낙양으로의 천도다. 효문제는 평성에 대해서 ‘용무(用武)의 땅이라 문치를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10) 낙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이 낙양 천도에는 후술하겠지만 가장 큰 목적은 문명태후의 잔존세력의 기반을 흔들면서 효문제 자신의 독자세력을 구축하는 목적을 가진 천도였다. 그리고 낙양은 고대에서부터 장안(長安)과 더불어 한족의 중심지로 한화정책을 시행하는데 더없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천도로 한인들을 포섭한 효문제는 북인귀족을 제어하기 위한 현실적인 세력을 맞이한다. 그 세력은 바로 문소황후(文昭皇后)로 대표되는 고구려 계통의 세력이었다. 북위와 고구려의 혼인논의는 기록상 흐지부지 결렬된 것으로 나타나나 여러 정황상으로 보아 고구려와의 혼인논의는 합의 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서 고구려 계 고(高)씨 세력이 북위로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11)

  물론 문소황후의 친척들이 북위의 정권을 장악한 것은 문헌상으로 효문제 다음 황제인 선무제(宣武帝) 시절부터 인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효문제 시절 탁발(拓拔) 씨 계열의 태자를 폐위시키고 선무제가 태자로 내정된 점, 효문제가 고구려 사절을 우대한 점, 그리고 고구려 장수왕이 붕어(崩御)한 이후 효문제가 유래가 없는 파격적인 대우로 애도를 하며 추증을 했다는 점12)에서 효문제 치세기 역시도 고구려 계 세력이 강했으며 그들이 효문제의 기반세력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문명태후의 치마폭과 효문제의 낙양천도.

3-1. 여인들의 시대.

  유목민족들의 특생 중 하나는 여권(女權)이 정주민들보다 더 강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남녀 권력의 상관관계는 경제력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하는데 목축을 하는 유목민들에게서 그 주업에서의 생산성이 남자에 비해서 전혀 떨어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가정 내에서의 권한 역시 남성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유목민족의 시대인 5호 16국과 북조, 그 전통을 이은 수‧당의 정치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강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13)

  이 시기에는 상하 일부일처가 유행했으며 북주(北周) 시대에는 다황후(多皇后)라는 독특한 제도가 시행되기도 했으며 남조에서 포로로 잡혀온 안지추(顔之推)의 기록을 보면 부인들이 그 가문의 일을 좌지우지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여걸들이 국가권력을 쥐고 그것을 휘둘렀다.

  여기서는 수많은 여걸들의 치세 중에서 효문제의 한화정책과 맞물리는 문명태후의 치세와 효문제가 낙양천도를 단행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3-2. 문명태후.

  북연(北燕)의 왕족 출신인 풍(馮)씨인 그녀는 유연 정벌 과정에서 일족이 몰살 당하는 참변을 겪으면서 죄인의 신분으로 입궁하였다. 그러한 그녀가 죄인의 신분으로 어찌 황후의 자리에 올랐는가는 불문명하나, 문성제 즉위 이후에 고모인 풍좌소의(馮左昭儀)의 배려로 귀인으로 지위가 올랐으며 문성제의 보모인 소황후(昭皇后)에 권력욕에 의해서 황후의 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14)

  문명태후는 문성제가 붕어하자 남편을 따라 불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했는데 어떤 이는 태후의 후대의 치세와 연결하여 일종의 정치적 show라고 하였다.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태후로 승격되었고 어린 헌문제를 대신해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을혼이 권력을 이용해 전횡을 부리자 정변을 통해 그를 주살하고 정권을 잡았다.15)

  그녀의 1차 집정은 단기간에 끝이 난다. 이유는 효문제의 출생으로 인해서 그의 양육을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문명태후의 모습으로 인해서 효문제가 헌문제의 아들이 아닌 문명태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된다. 어찌됐든 권력의 전면에서는 물러났지만 문명태후는 권력의 배후에서 정계를 장악했다. 그리고 471년 헌문제의 퇴위로 인하여 효문제가 즉위하자 그녀는 권력의 표면에 다시 등장하였고 476년 헌문제가 의문사 한 이후로 490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북위 권력의 정상에서 그 어떤 권력의 누수도 허락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권모술수를 통한 권력 장악을 한 것이 아니었다. 문명태후의 ‘임조전정(臨朝專政)’의 기간 동안 북위에서는 균전제(均田制)와 삼장제(三長制)와 같은 개혁들이 추진되었다. 이렇듯 문명태후는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3-3. 낙양천도와 맺음말.

  490년 문명태후의 죽음으로 효문제는 친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기반세력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문명태후의 죽음 이후에도 태후가 심어놓은 세력들은 아직도 건재하여 효문제의 친정을 어렵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낙양천도를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낙양천도의 원인에 대해서는 4가지 설이 제시되어 있다. 우선 한화정책의 실행을 위해서는 북인귀족 세력이 강하고 북인의 풍습이 강한 평성은 적지가 아니며 한족문화의 중심지인 낙양이 적격이며, 둘째로는 고구려 장수왕의 사례와 비슷하게 도읍을 남쪽으로 옮김으로 해서 남조에 대한 강력한 압력이 된다는 것, 세 번째로는 폭발적 인구 증가로 인해서 평성은 더 이상의 도읍으로의 기능을 하기에는 경제력이 고갈되어 버렸다는 점, 마지막으로 문명태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정치적 의미이다. 어떠한 면에서 보면 위의 세 가지 이유 모두 네 번째의 원인에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효문제의 한화정책과 낙양천도, 그리고 그 강력한 원인인 문명태후의 영향력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효문제의 낙양천도와 한화정책은 단순히 한족의 앞선 문화를 체화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권력의 줄다리기와 국가체제의 일원적 발전, 그리고 보편적 원리로의 수렴이라는 다양한 원인이 존재했다. 그리고 또한 문명태후의 사례를 통해서 4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유목전통의 제국들에서 두드러지는 여성권력의 강력함을 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 단행본

김병준 외 4명 저.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박한제. <<박한제 교수의 중국 역사기행 3 :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 파주: 사계절, 2003.

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서울: 이산, 2002.

 

※ 논문

김성희. <北魏 文明太后의 時代>. <<위진수당사연구>> 7, 2001.

박정기. <5~6세기 高句麗와 北魏 관계의 추이>. <<지역과 역사>> 19. 부산: 부경역사연구소, 2006.

최진렬. <북위의 종족정책>. <<위진수당사연구>> 10, 2003.

다니가와 미치오 저, 전영섭 역. <탁발(拓拔)국가의 전개와 귀족제의 재편>. <<세미나 위진남북조史>>. 서울: 서경, 2005.


1) ‘북쪽의 사막’이라는 의미로 몽골지역의 고비사막을 의미하며 넓은 의미로는 북방 이민족의 터전을 말하기도 한다.

 

2) 당시 남조의 간접적 군현지배를 받던 남월(현재의 베트남)에서는 도(ĐỖ, 杜)씨 정권의 안정기 제외하고는 참(Cham)족의 럼 업(Lâm Ấp, 林邑)의 침략과 각지의 독립운동으로 인해서 조용할 날이 없었다.


3)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나 헌문제(獻文帝) 시기의 1차 혼인논의는 고구려의 미온적 대응에 의해서 흐지부지 되었고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그 후 효문제(孝文帝) 시기의 2차 혼인논의는 기록상 태상황 헌문제의 붕어(崩御)로 흐지부지 되었다고 하지만 문소황후(文昭皇后)의 성씨가 고(高)씨라는 점과 그녀의 일가가 북위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을 들어 이 혼인이 성사되었으며 이후 북위의 고구려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볼 때 혼인동맹이 성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김병준 외 4명 저, <<아틀라스 중국사>> (파주: 사계절, 2007), p. 58.


5) 다니가와 미치오 저, 전영섭 역, <탁발(拓拔)국가의 전개와 귀족제의 재편>, <<세미나 위진남북조史>> (2005. 2): p. 284


6) 청관과 탁관의 구별은 동일 관품의 관직이지만 명족의 자제를 위한 직책과 비명족 출신자를 위한 직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다니가와 미치오 저, 전영섭 역, pp. 284-285.


8) 이 한족의 4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상당히 분분한데 범양(范陽)의 노(盧)씨, 청하(淸河)의 최(崔)씨, 형양(滎陽)d의 정(鄭)씨, 태원(太原)의 왕(王)씨를 의미한다고도 하며 여기에 농서(隴西) 이(李)씨 혹은 조군(趙郡)의 이씨를 포함하여 5성이라고 하는 설도 있는데 이는 아직 확정된 결론이 없으며 다만 여러 가문이 4성이라는 지위의 실재적 내용을 이루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다니가와 미치오 저, 전영섭 역, pp. 287-288.


9) 김병준 외 4명 저, pp. 58-59.


10) 김병준 외 4명 저, p. 58.


11) 이에 관련한 내용으로는 박정기, <5~6세기 高句麗와 北魏 관계의 추이>, <<지역과 역사>> 19 (2006), 111쪽 이하 참조.


12) 박정기, pp. 119~120.


13) 박한제, <<박한제 교수의 중국 역사기행 3 :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 (파주: 사계절, 2003), p. 102


14) 金 聖 熙, <北魏 文明太后의 時代>, <<魏晉隨唐史硏究>> 7 (2001), pp. 28-29.


15) 을혼과 문명태후 모두 소황후의 야욕에 의해서 정계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문명태후는 을혼을 주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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