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 무케길잔 작성시간11.06.24 17C 무렵 절[寺]에서 사무라이와 측근의 자녀들을 가르쳤는데, 이런 아이를 데라코[寺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에 절이 아닌 정식 학교를 지어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름은 그대로 남아 데라코를 가르치는 학교라는 뜻에서 데라코야[寺子屋]가 됐다고 합니다. 놀라운 건 한국 서당에서 남자 아이만 거의 수학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데라코야에는 여자 아이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에도 시대 때도 여성의 문해율이 전체 일본 여성의 20%나 됐다고 하는군요. 일본이 근대화하는 데는 데라코야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일본 여성들의 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성 평등 교육이 필요한 근거도 될 수도 있겠습니다.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시간11.06.24 조선은 특히 인조반정 이후 성리학의 절대화가 이루어지고 성리학이 지배계층의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됨으로써 죽어버립니다. 성리학은 과거시험과목이 되어 암기위주가 되고 정형화되고 지배계층에서 생각하고 있는 성리학 외에는 전부 이단으로 취급했으므로 발전의 여지가 없었다고 봅니다. 때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극히 좁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들은 늘 일본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통신사 파견의 목적 중 하나가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는 것이었지만 통신사는 돌아와서 그들이 번영하는 것은 서민착취의 결과라고 보고합니다. 성리학의 잣대로밖에 상대방을 평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리학 우위를 자랑합니다.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시간11.06.24 무케길잔님과 애도영원님은 정신적, 문화적 차이를 지적하셨습니다만, 저는 경제적, 물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古代 말기부터 사유재산을 인정하였으며 그 결과 대지주들이 탄생했습니다. 무사의 전신은 지주입니다. 大名은 대지주라는 뜻입니다. 일본의 역사에는 유난히 소송사건이 많은데 대부분 토지소유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원인도 히데요시가 大名들에게 나누어 줄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들은 大名이 지배하는 수백의 소국으로 나뉘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렸습니다. 발전이 늦으면 먹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사회였습니다. 자본주의사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미주가효 작성시간11.06.24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쟁이 시장경쟁력을 높여 경제를 성장시킨다(나아가 근대화를 촉진한다)는 주장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과연 어땠을까요?
근대 초기에 유럽 각 국의 경제발전이 국내에 수백, 수천개의 조그만 기업들이 약육강식의 극단적 생존경쟁을 하면서 아옹다옹하는 와중(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쟁시장)에 이루어졌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사실상의 독과점(독과점시장)을 전제로 발전했다고 보십니까?
후발 개도국이라는 독일과 일본의 19세기 비약적 발전이 기업간 치열한 경쟁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큼직큼직한 기업들이 덜 경쟁하면서 나타났을까요?
심지어 후후발 개도국이라는 -
답댓글 작성자 미주가효 작성시간11.06.24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시대의 비약적 경제성장이 설마하니 각 기업들이 약육강식의 무차별적 경쟁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진 않으시겠지요?
경제학계 내부에서조차 작은 단위들의 무수한 경쟁이 성장을 촉발시킨다는 주장과 큰 단위간의 덜한 경쟁이 성장을 촉발시킨다는 주장 간에 완전한 합의가 없는 상황입니다. 한 예로 '창조적 파괴' 등을 주장한 슘페터 같은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너무 작은 단위들간의 극단적 경쟁상황(완전경쟁시장)에서는 기업들이 하루하루 생존에 급급할 뿐 R&D 에 투자할 여력이 적어 성장이 크게 나타나기 어렵고, 오히려 독과점시장에서 큰 이윤을 남겨 먹는 기업이 있어야 그들이 새로운 투자를 할 여력이 많아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시간11.06.24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에서 대다수가 몰락하고 소수만이 살아남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지유신은 미쓰이 등 소수의 대자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에도시대의 다이묘들은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였습니다. 그들은 가을 추수를 담보로 대자본가로부터 거금을 빌렸습니다. 관리들의 봉급을 지불해야 하니까요. 대자본가도 설마 번이 망하지는 않겠지 하고 거금을 빌려주었습니다. 막부말기에는 대부분의 번들이 이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조슈번, 사쯔마번이 메이지유신을 주도합니다만 이들은 개혁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막부말기에 일본의 번들은 자동적으로 멸망하게 되어있었습니다.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시간11.06.24 번(지방의 소국)이 재정적자로 허덕이니까 백성들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번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인심은 흉흉해집니다. 다이묘들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천황파(사쯔마. 조슈번)에게 백기를 듭니다. 막부는 스스로 멸망했습니다.
하여튼 일본은 사유재산인정, 무한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원리를 일찍부터 도입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반면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사회로, 지금의 북한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정체된 사회였다고 봅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배경에는 그들의 산업발전과 자본축적이 있었다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미주가효 작성시간11.06.24 분열로 인한 무한경쟁상태가 반드시 성장과 번영을 가져온다면, 분열 사례가 잦았던 중국의 경우 분열시기에 통일시기보다 항상 더 번영했다는 결론이 나와야 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했을까요? <삼국지연의> 의 배경이 된 후한 말기의 분열 및 극단적 경쟁시대에 중국이 더 번영했을까요? 아니면 대제국 한, 당, 송(남송 포함), 원, 청 등의 시기에 더 번영했을까요? (오늘날 중국에서는 종종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기로 '당' 을 꼽습니다. 성당(盛唐) 이 북경 올림픽 구호에 등장할 정도입니다.)
통일국가가 형성되어 지방세력간의 무한경쟁이 사라지는 상황이 번영에 절대 불리한 게 아닙니다. -
답댓글 작성자 미주가효 작성시간11.06.24 기본적으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시장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데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독일 경제학자 리스트가 독일의 번영을 위해 분열된 독일 소국들의 경쟁을 주장한 게 아니라 독일 소국들을 묶어 경제적으로 시장통합을 하여 국가간 경쟁이 억제되는 것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제국들이 왜 EU 라는 통합을 하고, 유럽 소국들이 왜 EU 에 가입하지 못해 안달할까요? 더 큰 통합체에 가입함으로써 국가간 경쟁이 억제되는 것이 번영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미주가효 작성시간11.06.24 통일국가냐, 분열이냐/ 중앙집권이냐, 지방분권이냐는 경제적 번영과 산업발전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가 아닙니다. 양쪽 어떤 상황에서도 번영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통일국가 독일도 번영하지만, 통일되지 못하고 분열된 베네룩스 3국이나 스칸디나비아 3국 역시 번영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문화' 라고 봅니다. 상공업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 사회는 번영할 수 있고 상공업을 경시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 사회는 경제적으로 번영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이 문화는 정부의 정책기조에 의해서도 장기적으로 변화할 수 있겠지요.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시간11.06.24 에도말기에 자본가들은 공장제수공업에 자본을 투하하며 이 공장은 농촌지역에까지 확대됩니다. 시모노세키의 해전에서 서양연합함대에 참패를 당한 조슈번은 서양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영국과 화해하고 그들의 신식무기를 구매하여 무장합니다. 사쯔마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메이지유신 때 그들은 고액의 연봉을 주고 서양의 지식인을 교사로, 고문으로 초빙합니다. 또 유신으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과거 지배계급 무사들에게도 연봉을 지급하여 그들의 불만을 달랩니다. 난학을 통하여 그들은 이미 서양학문이나 의학 등에도 기초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울러져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시간11.06.25 선구자님의 지적대로 에도말기에 일본경제는 침체되어있었습니다. 그 결과 민중들은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역으로 대지주는 늘어나고 대자본가는 농촌지역까지 침투하여 공장을 짓습니다. 한편 대부분의 번들은 파산 일보직전으로 몰렸습니다. 민중들은 번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번주(다이묘)들은 더이상 버틸 힘이 없어 백기를 듭니다. 막부는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지주나 대자본가는 모두 유신파를 지지했으며 필요한 자금지원을 합니다. 그 후 이들은 정부로부터 갖가지 보호와 특혜를 받으며 산업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합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몇년 후에는 세계 5대 강국으로 부상합니다.
-
작성자 하늘의 나라 작성시간11.07.29 이야기를 조금 달리해서 조선이 어떻게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3가지를 반드시 짚고 싶은데.
우선
1. 죽일 놈의 [사대주의]
조선은 자신을 소중국이라 생각할 만큼 중국에 사대가 강한 나라였습니다. 또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란 의식이 있었고, 과거부터 너무도 폐쇄된 국가였기에 안목이 부족했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도 또한 100년에 걸쳐 근대화가 이루어진 서양에 비해, 고집만 부리다 현실을 깨달았고, 이후의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2. 명분론적 외교관
실리를 추구하지 못하고, 유교를 덕목으로 삼은 탓인지 너무도 명분에만 집착하였습니다.
예로 당시 조선의 입장에선 나름 최선의 길이기도 했던 -
답댓글 작성자 하늘의 나라 작성시간11.07.29 중립외교노선을 두고 과거 5만 군사를 내주고, 임진년 전쟁에 나라를 구해진 은인을 저버린다하여 신하들이 폐위시켰죠. 명이 기우니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한다라는 나름대로의 대안을 모색할 수도 있었는데 당시 주요 세력이었던 서인들은 이를 두고 오랑캐와의 타협이라며 무력 반정을 일으켰죠. 이 사건을 보더라도 나라의 주요 세력의 안목과 사고의 유연성의 한계가 절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라 여겨집니다.
3. 유교 국가의 한계
유교는 기본적으로 왕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를 기본으로 하죠. 물질이 아닌 정신을 표방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본래 아시아적 가치가 정신에 주를 두고 있긴 하지만요.
사실 유교쪽이 너무도 결정적 -
답댓글 작성자 하늘의 나라 작성시간11.07.29 인 것이 유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다 보면 사고의 유연성을 잃기 쉽상입니다. 도리와 덕목에만 치중하여 실리를 추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다소 이분법적 사고에 휘둘려지기 쉽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약간 옵션을 두어서
사실상 아시아 제1의 국가로써, 오히려 비슷한 국토와 항상 서로 견제를 해오던 중세 유럽과 달리, 홀로 대륙의 1인자였으며, 국가의 콧대가 너무도 높았기에 그에 따라 사고의 유연성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은 아니더라도 동서남북이 전부 사실상 오랑캐였죠.
이들 또한 유교에 찌든 사회였기에 개화의 필요성은 인정했을지 몰라도 사고가 유교에 붙잡혀 있었기에 이들의 개화는 반토막 -
답댓글 작성자 하늘의 나라 작성시간11.07.29 개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를 두고 싶은게 당시의 한중일 3국의 형세를 두고 청의 리홍장, 조선의 흥선대원군,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비교하는데, 일찍이 유럽 유학을 통해 세계 정세를 빠르게 터득하고, 다소 잔인하기까지한 이토의 기질이 당대 가장 빛을 바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원군은 다들 아실 것이고, 리홍장 같은 경우는 하직 당시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난 낡은 것을 고칠 줄 아나, 새것을 창안해내기엔 부족한 사람이었다.."
왜란 속에 이순신이란 불세출의 영웅이 나라를 구했듯 당시의 조선, 청에 난세의 영웅이 될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쉽내요. 그 하나로 모든게 뒤바뀌진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