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Re:한국사에서 조공의 문제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04.06.07|조회수604 목록 댓글 0
먼저 고구려게시판에 쓴 2213번 글(2003.23월 8일자)을 상당부분 수정 보완해서 쓴 것임을 밝힙니다.

먼저 조공이란 말은
***
종주국을 향해 제후국이 공물을 바치고 그 댓가로 책봉과 하사품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그 기원은 주나라의 봉건체제에서 기원한다. 그것이 훗날 동아시아세계로 확대되어 중원의 패자는 조공을 받고 주변국은 책봉을 받는 조공-책봉 체제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과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일반형태였다.
***

위에 내가 쓴 글은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조공의 정의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묻습니다. 과연 조공을 하는 나라에서도 스스로를 제후국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나온 것이 내번과 외번입니다.

내번이란 종주국으로 부터 직접 책봉을 받아서 제후국왕으로 임명된 나라이며, 주나라 시절에 연,노,제,한,위,진,초 등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천자의 곁에 자신의 자식 또는 부하를 보내는 숙위의 의미가 있었고, 때로는 천자의 부름에 응해서 수도로 가서 인사를 해야 합니다.

외번이란 국제질서에서 책봉을 받지만, 제후국의 일에 천자가 직접 간여하지 않는 나라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명과 조선의 관계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럼 고구려는 무엇일까요. 2번 외번일까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료해설방에도 내가 자료를 올려 두었지만, 연개소문 시절에 당나라 사신은 고구려 조정에 와서 엎드려 기어가서 절을 하는 포복배복의 예를 올립니다. 고구려가 당나라를 천자국이요 종주국으로 여겼다면 말도 안되는 엄청난 비례를 저지른 것이겠지요. 하지만 고구려가 당나라와 1대 1의 적국이라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럼 간덩이가 부은 연개소문 시절만 그랬냐고요.

아니요. 문자명왕 시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위의 사신이 오자 문자명왕은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북위가 고구려보다 상위의 국가라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반대로 북위는 고구려 사실을 어떻게 대우할까요. 당연히 외국 사신 가운데 최고의 대접을 해줍니다. 남제국이 왜 고구려를 남제와 똑같이 대접하냐고 따지지만, 북위는 말하기를 고구려가 힘이 세서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죽을 때 북위에서 사당을 짓고 슬퍼해주고 하는 일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요. 북위는 만리장성 이동 지역의 패권이 고구려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자신들이 어쩌지 못하는 나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 문제 양견과 당 고조 이연도 이점을 이야기합니다. 명분상으로 고구려를 번병이라고 칭하는 것이 실제와 다르니 고집하지 말자고 하지요. 그런데 신하들이 반대합니다. 현실이야 어떠하든 중화인의 명분구조에서는 중원의 패자가 천자이고, 변방은 제후이니 그 명분론을 폐기할 수는 없다. 즉 수와 당나라는 태양이고, 고구려는 태양 주위의 행성이니, 그 질서를 깨뜨릴 수는 없다면서 당고조를 설득합니다. 수문제는 현실적으로 고구려에게 패전한 마당에 굳이 글로서 수나라의 우위를 내세우는 것이 한낮 붓장난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붓장난이 오늘날 중국학자들에 의해 또다시 왜곡되고 있고, 이땅에 어느 멍청한 집단들에 의해서 고구려가 중원의 국가들에게 진짜 조공을 바친 것으로 오해하게끔 설명이 되곤 합니다.

고구려가 힘이 있는 만큼 위에서 말한 조공과 책봉 체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서에 기록된 것이 다 사실은 아니고, 그 기록된 것이 일방의 입장만이 반영된 것이라서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는 눈이 결여되어 있다면 오해할 수도 있겠지요.

중원의 거대한 한제국, 또 서위와 북위 등은 흉노와 돌궐 등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나는 북위가 고구려에 혹시 조공을 바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북위가 왜 고구려에 조공을 주는가? 예끼 이 사람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북위가 급한 상황 때문에 고구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북위는 실리적인 입장에서 고구려에 대한 우대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 경우 엄밀한 의미의 조공과는 물론 다릅니다.

대개의 경우 중원의 왕조들은 유목부족과의 관계에서 형식상은 조공과 책봉이지만, 실제로는 중원의 나라들이 불리한 조건에서 물건을 주는 관계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중원인들은 유목의 몇몇 제국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작은 부족들과의 관계는 조공과 책봉관계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책봉을 받은 유목의 작은 부족집단들은 책봉을 받으면서 중원왕조를 공격하지 않겠다거나, 아니면 저들의 필요시 용병으로 활동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많은 물건을 받습니다. 이 비용은 중원경제에 심각한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고구려 역시 후한과의 관계에서 이런 모습들이 보입니다. 책구루에서 맺어진 조공책봉관계가 그것인데, 후한은 고구려를 하구려에서 고구려로, 고구려후에서 고구려왕으로 올린다는 등등해서 고구려의 위상을 높여주느니 운운하지만, 실제로는 책구루에 물건을 갖다놓고 고구려가 제발 가져가 달라고 합니다. 고구려는 교만해져서 책구루에 갖다 놓은 물건을 갖고 가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가 이런 정도의 물건에 만족하지 않고서, 더 많은 것을 후한에 요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고구려와 후한사이에 있었는데, 이것이 과연 조공-책봉관계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고구려 역시 조공을 실제로 하기도 했습니다. 즉 전연이 342년 고구려를 공격하여 미천왕의 시신과 주태후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고국원왕이 이를 돌려받고자 막대한 세금을 바친 것은 분명 조공입니다.하지만 이 조공은 목적을 위한 전략적 조공이지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상하의 질서가 분명하니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조선시대 조공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고구려는 주태후를 돌려받은 이후에는 전연에 조공하지 않고, 전진이 전연을 총공격할 때는 역시 군사를 내어 전연을 멸망시키는데 힘을 씁니다. 그리고 전연에서 도망쳐온 자들을 잡아서 전진에 보내기도 하지요. 고구려는 전연에 대한 아주 깊은 복수심이 있었고, 이들에 대한 존경심도 없었고, 따라서 시대가 변하면 양국관계도 변하는 것이지요.

국제관계의 기본은 힘입니다. 고구려는 자신의 힘을 믿었고, 힘이 강해지자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했습니다. 그런만큼 조공이란 문제에 있어서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 역사에서 조공이란 의미가 또 문제가 된 시기는 고려시기입니다.
특히 고려전기와 고려중기, 고려말기의 조공의 의미가 매우 다릅니다.
고려전기의 것은 더 세분해서 볼 수가 있기도 합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교역이 필요없을 정도로 한때 예성강에서의 해상무역이 왕성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송나라가 꾸준히 고구려를 설득해서 요나라와 싸워달라고 했지만, 고려는 거부했습니다. 조선과는 다른 시대였지요. 고려는 송나라에 조공할 생각도 없었고, 단지 그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외교적 형식에서 조공의 틀의 형식을 맞추었을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송나라의 속국관계를 거론할만큼의 진정한 의미의 조공은 전혀 없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고려는 내부적으로 연호도 사용하고, 황제란 칭호도 사용하고(제왕운기에 보면 금나라황제와 고려황제 두 칭호가 다 보이니다.) 제국에 걸맞는 격식과 예의를 주장했지요.

그런데 원나라의 침략을 받으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었지요. 고구려는 진정한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그때의 조공은 오히려 내속의 관계와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을만큼, 고려의 자주성은 상실된 시기였습니다. 당시 조공은 어쩔 수 없는 힘의 차이를 직접 경험하여 패전을 한 고려에게 강요된 결과였습니다.

문제는 역시 조선인데, 조선은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경험을 두려웠습니다.
따라서 활 한대 쏴보지 않고, 대국인 명나라에게 알아서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청나라에게는 한번 호되게 당한 하였기에 조공을 계속 바칠 수 밖에 엇었습니다. 조선의 조공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조공의 무역이 상당한 이익도 주지만, 조공-책봉 체제의 편입됨으로써 조선이 안보문제에 상당한 부담을 던 것도 주목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마치 오늘날과 같이 말입니다.

약소국의 정치이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약소국은 강대국 옆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또 장차 목표를 강대국에 기생하는 국가로 존재할 것인지, 아니면 강대국을 능가하는 대국을 목표로 할 것인지 등등. 강대국은 그 나름의 생존의 논리와 정치의 목표 설정이 나름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사에서 조공의 진정한 개시는 나는 고려-원 관계로 봅니다. 그 이전에 후기신라와 당관계 등도 조공-책봉체제에 해당되지만, 조선과는 역시 달랐지요.

조공은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경제적 측면, 외교적 안보 군사적 측면, 문화적 측면 등등. 이 가운데 국제정치의 서열적 측면만을 부각시켜 조공을 바치면 마치 제국의 똘마니가 조공을 바치는 국가라서 단정만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속국논쟁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른 변화와 추이의 차이 등을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한국사학계에서 보는 조공문제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는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업급해보도록 하지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