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는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에 성행했던 풍속화의 한 양식으로
속세(俗世)를 주로 그린 일본식 목판화입니다.
가부키[歌舞伎] 배우의 연기모습과 일반 시민의 일상생활과 풍속, 일본과 중국의 시가(詩歌), 또는 고사(故事) 등을 제재로 강렬하고도 선명한 색채들을 즐겨 사용하면서 간단 명료한 선조(線條)를 운용하였습니다.
대량생산할 수 있는 판화형식을 취한 점에 특색이 있고, 회화감상의 감동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일어난 새로운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우키요에는 당시 서구미술의 도입과 우키요에 그림의 주된 소재가 되었던
기생들의 노골적인 춘화라든가 너무 서민적이고 도색적인 이미지 때문에
상당히 천대시 받으며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됩니다.
그도 그럴것이 우키요에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속내가 "호색적, 향락적”이라는
그런 우키요에가 다시 부활의 날개짓을 펼치게 되는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키요에를 퇴색하게 했던 서양미술에서 그 부활의 전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67년의 파리 박람회 때의 일입니다.
모네는 우연히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서 일본의 도자기 등의 특산품을 팔고 있던 매점을 들렸다가
주인이 도자기에서 풀러 쓰레기에 구겨 던져넣고 있는 포장지에 눈이 휘둥그레 집니다.
포장지의 색깔, 전혀 새로운 묘사에 숨이 막힌듯한 모네는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포장지가 바로 일본에서 값싸게 떠 돌아 다니던 우키요에였던 것이지요.
그 이후 이 동양의 야릇한 그림에 매료된 화가들이 앞다투어 이 그림을 수집하고
화가들은 이 그림을 모사하기 시작 합니다.
그 당시 가장 열렬한 이 우키요에의 수집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고흐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가 그 인물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고 가장 고무된 사람이 바로 고흐 였습니다.
그는 엄청나게 이 일본판화에 매료되며 그림의 소재로 쓰기도 하며
자기 작품의 배경에도 이 우키요에를 그려넣기도 한답니다.
그의 후원자중에 한 사람 이였던 탕귀라는 화상의 초상화를 보거나
귀를 자른 자화상의 뒷면등에 그의 우키요에 대한 집착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로트렉에게 까지 이어졌던 이 우키요에에 화가들이 몰입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적인 예로 고흐의 말에서 우린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일본 화가들의 선명한 이미지가 부럽습니다.
그들의 그림은 결코 지루하지 않고 조급하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숨쉬는 것처럼 단순하며, 자기 옷의 단추를 채우는 것 만큼이나 간단한
일 인양 아주 쉽게 선명한 윤곽선으로 대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전혀 우키요에가 소개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소개가 될뻔한 운명을 가지게 되긴 합니다.
바로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 통신사 들이 우키요에를 처음 맞딱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교적 관습이 지배적이였던 조선 통신사들의 눈에 비친 우키요에는
천박하고, 너무 도색적인 화풍이라 우키요에를 수준이하의 작품들이라며
천시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속세(俗世)를 주로 그린 일본식 목판화입니다.
가부키[歌舞伎] 배우의 연기모습과 일반 시민의 일상생활과 풍속, 일본과 중국의 시가(詩歌), 또는 고사(故事) 등을 제재로 강렬하고도 선명한 색채들을 즐겨 사용하면서 간단 명료한 선조(線條)를 운용하였습니다.
대량생산할 수 있는 판화형식을 취한 점에 특색이 있고, 회화감상의 감동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일어난 새로운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우키요에는 당시 서구미술의 도입과 우키요에 그림의 주된 소재가 되었던
기생들의 노골적인 춘화라든가 너무 서민적이고 도색적인 이미지 때문에
상당히 천대시 받으며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됩니다.
그도 그럴것이 우키요에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속내가 "호색적, 향락적”이라는
그런 우키요에가 다시 부활의 날개짓을 펼치게 되는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키요에를 퇴색하게 했던 서양미술에서 그 부활의 전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67년의 파리 박람회 때의 일입니다.
모네는 우연히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서 일본의 도자기 등의 특산품을 팔고 있던 매점을 들렸다가
주인이 도자기에서 풀러 쓰레기에 구겨 던져넣고 있는 포장지에 눈이 휘둥그레 집니다.
포장지의 색깔, 전혀 새로운 묘사에 숨이 막힌듯한 모네는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포장지가 바로 일본에서 값싸게 떠 돌아 다니던 우키요에였던 것이지요.
그 이후 이 동양의 야릇한 그림에 매료된 화가들이 앞다투어 이 그림을 수집하고
화가들은 이 그림을 모사하기 시작 합니다.
그 당시 가장 열렬한 이 우키요에의 수집가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고흐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가 그 인물이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고 가장 고무된 사람이 바로 고흐 였습니다.
그는 엄청나게 이 일본판화에 매료되며 그림의 소재로 쓰기도 하며
자기 작품의 배경에도 이 우키요에를 그려넣기도 한답니다.
그의 후원자중에 한 사람 이였던 탕귀라는 화상의 초상화를 보거나
귀를 자른 자화상의 뒷면등에 그의 우키요에 대한 집착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로트렉에게 까지 이어졌던 이 우키요에에 화가들이 몰입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적인 예로 고흐의 말에서 우린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일본 화가들의 선명한 이미지가 부럽습니다.
그들의 그림은 결코 지루하지 않고 조급하게 그려졌다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숨쉬는 것처럼 단순하며, 자기 옷의 단추를 채우는 것 만큼이나 간단한
일 인양 아주 쉽게 선명한 윤곽선으로 대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전혀 우키요에가 소개되지 않았을까요?
물론 소개가 될뻔한 운명을 가지게 되긴 합니다.
바로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 통신사 들이 우키요에를 처음 맞딱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교적 관습이 지배적이였던 조선 통신사들의 눈에 비친 우키요에는
천박하고, 너무 도색적인 화풍이라 우키요에를 수준이하의 작품들이라며
천시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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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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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만 작성시간 04.11.02 제가 알고 있기로는 판화가 브라크몽이 파리에서 일본판화를 발견한 것이 1856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판화의 선명한 색채와 과감한 단축법 구사, 대담한 구성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요. 특히 가츠시카 호쿠사이 와 같은 일본 화가겸 판화가의 작품이 유럽에서도 크게 이름을 날렸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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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만 작성시간 04.11.02 일본이 판화만이 아니고, 도자기로도 이미 유럽 시장에서 17세기말 부터 알려지기 시작했고 유럽 시장에서 중국 도자기와 한때 경쟁관계에 있기도 했지요. 조선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일본을 알고 보면 참 저력이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