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라,가야토론방

고대 한일 관계사(2)- 한일 양 지대의 형편과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허구된 소위 미마나문제

작성자이정기|작성시간02.05.18|조회수170 목록 댓글 0
제 2 절 한일 양 지대의 형편과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허구된
소위 미마나(임나) 문제

가) 한국의 형편

기원 전 수 세기 경의 우리의 형편은 복잡했다. 고조선의 부(否)·준(準)의 왕조가 만(滿) 왕조에 의하여 교체된 것이 기원전 2세기 초였고, 이 때에 준왕은 쫓겨 남으로 가서 마한(馬韓)의 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마한을 오늘 우리 학계에서는 『삼국지』가 단편적으로나 그 자료를 전하는 진국(辰國)으로 보는 것이 대체로 정론이다. 이 마한=진국의 중심지 문제와 국가 기원 문제는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준왕의 남쪽에로의 이동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만큼 이로써 기원전 3세기에는 중·남부의 한국을 지배하는 노예 소유자 국가가 존재 했다고 보는 데서도 우리 학계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한=진국의 지배력은 강하지 못하였고, 이 국가의 중심지대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판도의 전체 지역이 이른 시기부터 동일한 역사 발전 수준에 있었겠는가 하는 데 대하여는 속단을 피하여야 할 문제가 있다고 본다. 기원전3∼2세기와 같은 이른 시기에 있어서는 같은 한국 내부에 있어서도 지역적 차이에 따라 발전 정도에 있어서 약간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헌 자료로 미루어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이른 시기에 있어서는 한국 내부의 서북 지방이 가장 먼저 발전하였고, 다음은 중·서부요, 동·남부는 발전이 보다 늦었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필자는 동·남부를 제외한 이 두 개의 선진 지대를 진국의 중심 지대로 비정한다.

진국=마한의 지배가 유지되던 시기에도 지방적 분산성은 강했다고 보여지는 한국 내부에서는 그 후 그 지배력이 약화됨에 따라 기원 전후 시기부터 독립 분산된 지방 소세력들의 보다 자율적인 발전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지방 소세력들은 『삼국지』에 이른바 <국(國)>들이며 우리가 말하는 <소국>들이다. <마한>에 50 여개, <진한(辰韓)>에 10 여개, <변진(弁辰)>에 10 여개 <국>이 있다고 『삼국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꼭 들어맞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이러한 형편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 시기 이 세력들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봉건 세력이었다고 규정한다. 처음에 백제, 신라, 가락(김해의 금관 가락국)도 이러한 <소국>들이었다. 앞으로 수 세기간 이 <소국>들은 정력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고, 이에 따라 한국 내에서는 정복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우리 한국 내에서의 대소 규모의 전쟁은 비단 기원 전후 시기부터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보다 선행한 시기 준왕의 남쪽에로의 이동과 그의 지배의 수립 및 그 체제의 약화 과정 등도 결코 평화적으로만 되었을 리는 없을진대는 대소규모의 전쟁을 수반하였을 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오늘 우리로서 『삼국사기』와 같은 문헌 자료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는 전쟁들은 기원 전후 시기부터서야 벌어진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전쟁은 그 빈도와 규모에서 그 전 시기에 비하여 잦고 컸다는 것도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기원전 수세기부터 우리 한국 내에는 그 사회 생산력의 상승적인 발전에 따라 전쟁이 많았으며, 기원 전후 시기 이래 역사무대로의 <소국>들의 활발한 진출과 함께 전쟁은 더 잦아지고 커졌다. 기원전 1세기 경부터 기원후 2세기 후반기까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3국이 국가로서 장성하였다 하더라도 기원후 시기까지도존재했던 한국 중·남부의 <소국>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3대 세력으로 종국적으로 통합된 것은 6세기의 일이었다.

6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이 세 나라에 속하지 않은 금관 가락국을 위시한 가락국(가야, 가라)들이 백제와 신라간에 개재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기원 전후 시기부터 수세기간을 우리는 3국 시기 초기로 말하지마는 이 시기는 동시에 아직 마한, 진한, 변진(변한)의 이른바 3한 시기의 존속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까지 서남 지역에 있는 마한 계통의 <소국>들과 동남 지역의 진한, 변한 계통 소국들이 저 3국에 의하여앞으로 정복, 병합당할 운명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것들과 병존하면서 투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국>들의 통합 과정을 『삼국사기』에서는 주로 정복 전쟁의 수행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마침내는 3국의 신라에 의한 통합도 전쟁에 의해서였다.

일본 열도에로 우리의 주민들이 대량으로, 계통적으로 진출했던 초기 한일 관계 시기는 대체로 이와 같이 대소 규모의 전쟁이 계속되던 시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전쟁들이 주민의 일본 열토에로의 이주를 가져오게 한 원인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의 환난을 피하기 위하여 그 곳으로 우리 사람들이 많이 도망쳐 나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를 비속화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전쟁 피난민들이 그와 같이 많이, 또한 오랜 기간에 걸쳐 바다를 이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그와 같이 많은 전쟁을 생산케 한 바로 그 정력적 요인들의 작용이 저러한 이주를 생산케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사회적 생간력의 급속한 발전과 인구의 증가, 사회 계급적 관계에서의 급속한 변화와 영토에 대한 강력한 요구의 발생 등과 같은 제 요인이 저러한 빈번한 전쟁들과 활발한 이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시대의 영웅적 기상을 만들어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漢)족 세력이 침습해 오므로 해서 우리의 주민들이 밀려서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다고 보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한 세력의 동방 진출은 일찍이 기원전 3세기 초 연(燕)나라의 요동(遼東)군 설치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요동군은 오늘의 요하 동쪽에 있었다고 볼 근거가 없으며, 그 존속기간도 극히 짧았다. 그러므로 한국 내부에까지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다. 이 때에 고조선이 실지(失地) 천리(『삼국지』에는 2천리)해서 드디어 나라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인구의 대량 이동을 가져올 만한 영향이 한국 남부에까지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초 만 왕조의 성립과 준왕의 남쪽에로의 이동은 한국 내에 일정한 파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후 약 1세기를 지나 기원전 1세기 초에 있었던 한 무제(武帝) 군대의 만 왕조 정복과 낙랑군을 위시한 4군의 설치는 고조선 주민들과 그 남쪽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4군 중에서 다른 군들은 유명무실한 것이었으나 낙랑군만은 한 나라가 망한 후에도 우여곡절을 겪다가 기원후 4세기 초에 고구려에 의하여 복멸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더욱이 그 마지막 시기에는 그 이남 지역에 대방(帶方)군까지 설치한 일이 있었다. 낙랑·대방 등의 군은 요동군과 함께 이 곳 주민들을 탄압 지배하기 위하여 군·현 제도를 수립하였고, 그 지배 체제 내에 토착 귀족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한족 군·현의 출현이 우리 주민들의 일본 열도에로의 이주의 주되는 요인으로 될 수 있는가? 설사 오늘 우리나라의 서북부 봉건 중국의 침략세력이 들어 박혔었다고 치더라도 그 남방 주민들의 일본 열도 진출의 원인으로 될 수 없다. 한의 군·현의 설치로 말미암아 우리 주민들은 살던 자리를 비우고 떠나간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침략자에 반대하여 간결히 투쟁하였던 것이 역사의 진면모였다. 남쪽의 진국=마한 뿐만 아니라 국가 형성에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한의 침략 세력을 포위하고 압착해 들어간 역사적 과정이 한 침략 이후 전개 되었다. 우리의 3국, 그 중에서도 고구려, 백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침략 세력의 구축을 위한 성과적 투쟁이 또한 그 국가로의 형성 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졌었다.

과거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 세력의 동방 침략이 마치 이 곳 주민들에게 문명에로의 길을 열어준 것처럼 떠들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많은 학자들은 침략자가 피침략자에게 문명을 선물하였다는 황당한 논리에 매달려 있다. 물론 당시에, 특히 기원전 시기 아시아의 동방에서 선진 문화를 가진 것은 중국=한족이었으며, 그 문화와 우리 것과의 교류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의 침략에 의하여 그러한 교류는 오히려 길이 막히게 되었으며, 반침략 투쟁에 의하여 모든 부분에서 우리의 독자적 발전은 더욱 왕성하게 되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논리적 귀결이다. 우리 역사의 경우 침략을 당하기 훨씬 이전부터 독자적인 자기의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고구려·백제·신라의 초기 유적 유물들이 한나라 것들과는 전연 면목을 달리 한다는 사실에도 주의를 돌려야 할 것이다.

나) 일본 열도 내의 형편

초기 한일 관계 역사가 포괄하는 시기의 한반도 내 나라들에 관하여는 한국, 중구국의 사서들이 대체로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같은 책에서 한국의 나라라고 하는 것들 중에 우리 문헌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몇 개 있고, <고나> <구다라> <시라기> <미마나>라고 부른 나라들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任那)로 일본 고문헌들에서 한자표기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되겠는지는 앞으로 따져 보아야 할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임나>라는 말은 우리 자료에는 극히 드물게 밖에는 나오지 않지마는 일본고문헌에는 아주 많이 나오는 점도 다르다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열도 내의 <나라>들에 대한 서술은 일본 고문헌과 중국 사서들의 서술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기보다 아주 영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앞 절에서 말한 바도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늦어도 기원 전후 시기에 백여 <국>이 있었다고 하는 한서 지리지 본문에는 그 나라 이름들이 보이지 않으나 그 편찬 시기보다 몇 세기도 떨어지지 않은 시기[위진(魏晉)] 사람이 본문을 달아놓은 주석에 <여묵(如墨)> <위면(委面)>등 왜 땅의 나라 이름을 든 것이 보이고, 이에 대하여 일본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고증해 놓은 것이 있으나 아직 그 정체는 규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여묵>도 한 개 <소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면 북 큐슈에 있었던 <소국>이었을 것이고, <위면>에 대하여는 따로이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므로 더 따지지 않겠다.

이 『한서』의 백여 <국>과 관련이 있는 <나라>로 많이 말하는 것이 <왜노국(倭奴國)>이다. 이 <나라>에 관련되는 사실로서 일찍이 18세기에 북 큐슈 시가(志賀) 섬에서 금으로 만든 도장이 나와 오늘까지 전해 오는 것이 있다. 그 문면에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이 도장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한으로부터 <위노국왕>으로 책봉 받았던 자였음을 알 수 있다. ‘委’를 <倭>의 약자로 보고 <왜노국>, 즉 삼국지에 나오는 30여 개 <소국>들 중의 하나이며 북 큐슈의 북안에 있었다고 하는 <노국(奴國)>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본 학계에서는 가장 유력한 것 같다.

이리하여 『후한서』동이 열전에 실린 기원 26년에 해당하는 건무 중원(建武 中元: 중국 연호) 2년 “왜노국이 공물을 바치고 조하였다…(倭奴國奉貢朝賀…)”라고 한 <왜노국>과 기원 108년에 해당하는 영초(영초) 원년에 “왜국 왕 수승 등이 생구(노예) 160인을 바치면서 조현할 것을 원하였다.(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願請見)”이라고 한 <왜국 왕>이 바로 금인의 주인공이며 동시에 『삼국지』의 <노국>의 지배자가 일찍이 한나라와 통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에도 <왜노국>과 <왜국>이 있고 또 <대왜왕(大倭王)>등의 표현이 있어 문제가 좀 복잡하게 제기된다.

일본 학계에서 가장 유력하다고 한 견해는 금인의 <한위노국왕>을 “한의 왜의 노국”으로 읽는다. 그러나 그렇게 읽지 않고 <한>의 <倭奴國>으로 읽어, <倭奴>는 일본말로 <이도>로 읽을 수 있으니 『삼국지』의 <노국>이 아니라 <이도국(伊都國)>이라는 견해도 있다.

중국 당나라 때(9세기)에 편찬된 『통전(通典)』에 “왜면토지왕수승(倭面土地王帥升)”이라고 나오는 것이 있는데, 일본에 있는 오랜 판본(北宋판)에는 ‘地’자가 빠져 “倭面土王”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앞에 쓴 『한서』지리지 주의 <위면>의 ‘면’과 통하는 것만도 사실이다. 수승이라는 왕의 이름이 같은 기원 108년에 한과 통한 것은 따라서 이 <면토국>이라고 보고, ‘面’의 고자는 ‘回’이므로 <面土>는 <回土>로 되고 <回土>는 일본말로 읽으면 <에도>로 될 수 있으니 또한 <이도>로 보아 금인의 주인공도, 기원 10년의 <왜노국>도 『삼국지』의 <노국>의 왕이었던 것이 아니라 『삼국지』의 <이도국>이며, 그것은 노국의 서쪽 북 큐슈 연안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현재도 <노국>의 소재지로 비정되는 나가 군의 서쪽에 이도군이라는 곳이 있다.

왜의 <노국>도 <이도국>과 함께 『삼국지』에 보이는 <소국>들의 이름이므로 구태어 금인의 <委奴>와 『후한서』의 <倭奴>를 <에도>로 읽어서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볼 필요가 없고, 순조롭게 왜의 노(奴) <국>으로 읽어야 한다는 논자들의 의견이 옳은 것 같다. 요컨대 기원 전후 시기 이후 2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땅의 소국들의 형편은 결국 북 큐슈 외에는 잘 모르며, 그 곳의 <소국>들은 중국과조 교통을 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한 논자의 견해를 소개하자.

《한대(漢代)의 일본에는 이러한 나라들이 각지에 있어서 1세기 중엽에는 하까다(博多: 북 큐슈의 호꾸오까 현)만 연안의 노국 왕이 조공해서 광무제로부터 국왕의 권리를 보증받았다. 2세기 초에는 노국과는 다른 면토국의 왕이 160인이나 생구를 바친 것이다. 사신을 보내는 나라의 이름이 변할 리 없다.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도 일단 독립하고 있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이노우에》

이 견해는 『삼국지』의 <노국>, 금인의 <위노국>, 『후한서』의 <왜노국>을 같은 것으로 보고 『후한서』의 “왜국 왕 수승”의 <왜국>은 이와 별개의 <소국>으로, 즉 <면토국>으로 보는 것이다. 이 논자는, 노국은 2세기에 종전의 <소국>범위를 벗어난 <노국 연합체>라고 할 만한 세력으로 되었다는 설을 소개하고 이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이 연합의 유대는 미약하였고 각기 소국은 독립해서 왕을 가지고 서로 의지해서 연합을 만들었고… 이 <북 큐슈 연합>에서는 구성 제국의 교체에 의하여 대표국도 교체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른바 원시적 민주제를 상정(想定)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겠는가?”라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 연합체 내에는 <노국>과 <이도국> 그리고 『삼국지』에 나오는 북 큐슈의 <말로국(末盧國)> 같은 <소국>들이 망라되었을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근거를 잘 알 수 없으나 필자로서는 후세의 일본 열도 내에서 일어난 국가 세력들의 경우로 미루어, 그리고 우리 고구려·신라의 국가 형성 초기의 실례로 미루어 타당한 입론이라고 생각한다. 이 노국 연합체의 발전 단계가 아직 원시 사회에 머물러 있었겠는지 혹은 벌써 선진한 이 곳 이 나라만은 계급 사회로 들어 섰겠는지는 앞으로 더 검토해 볼 문제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일본의 새로운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기원 2세기 경까지의 정치사는 대체로 이상과 같은 정도 밖에는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요약해서 말하면, 일본 역사의 첫 <나라> 첫 <왕조>라고 할만한 것은 이 노국 연합체였고, 이 연합체는 기원 초 후한과 교통하면서 조공을 한 사실 밖에는 모르는 것이다.

다음의 3세기 전반기 비미호 여왕국과 이 노국 연합체와의 계승 관계도 잘 알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 사서의 일본 관계 서술은 이 시기는 공백기인 것이다. 다만 『삼국지』와 『후한서』에 비미호 여왕국의 내력을 말해 주는 한 마디의 글발이 있어서, 이로써 일본 학자들은 저 첫 <나라>와 계통을 대 공백기를 조금이라도 메워 보려고 힘써 왔다.

그것은 먼저 『삼국지』의 「위서」왜인 전에 이 여왕국의 내력을 서술하면서 “이 나라도 본래 남자로써 왕을 삼아 왔으나 70∼80년을 지나 왜국에는 난리가 나서 서로 공격 정벌하여 해를 거듭하고서야 함께 어떤 여자를 내세워 왕을 삼으니 이름을 비미호라고 불렀다.(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名曰卑彌呼)”라고 한 것과, 『후한서』 동이 열전에 “환제, 영제 연간에 왜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서 몇 해를 두고 임금이 없다가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비미호라고 하고…(桓靈間 倭國大亂 歷年無主 有一女子 名曰卑彌呼)”라고 한 것은 같은 사실을 두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후한의 환제, 영제 연간이란 2세기 후반이므로 <노국(왜국)>이 108년에 후한에 조공을 바치던 때로부터 70∼80년간 대란의 계속 상태에 있다가 3세기 전반기에 비미호 여왕국의 성립으로써 혼란은 일단 수습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 말한 논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노국 연합체는 후한의 쇠퇴와 함께 빛을 잃고 수년간 큰 난리가 계속되다가 야마대(耶馬台)국의 비미호를 맹주로 하는‘보다 큰 연합’을 형성하였다.

비미호 여왕국은 역사상 두 번째 왕조이며, 그것은 <소왕국>들의 연합체였다. 바로 『삼국지』의 동이 열전에 비교적 상세한 서술을 가지고 있는 이 비미호 왕국은 <왜인>의 30 여 개 <국>중의 하나인 <야마대>국인 동시에 그 연합 하의 다른 <소왕국>들도 지배 통제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그 지배를 받는다는 <소왕국>들도 한쪽으로는 중국과 뿔뿔히 교통하는 반(半)독립 상태에 있었다. <구노국(狗奴國)>은 이 <연합>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야마대>와 전쟁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연합체도 오늘 일본의 진보적인 사가들은 아직 과학적 의미에서 국가는 못 되는 그 직전 단계의 군사 민주주의 단계 쯤으로 규정하는 것 같다.
이 여왕국은 238년에 대방군에 사신을 보내었고, 군을 통하여 다시 당시의 위(魏)나라 수도 낙양(洛陽)에 간 일이 있었으며, 2년 후에 대방군 태수는 답사를 <야마대>로 파견한 일이 있었다. 앞서 쓴 <구노국>도 이 <야마대 국>과 싸우기 위하여 대방군에 구원병을 청한 일이 있었다.

비미호 여왕국의 중심지인 <야마대>가 북 큐슈에 있었는가 또는 나라현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인 야마도 지방이었는가 하는 일본 역사 학계의 묵어 내려오는 논쟁은 아직 결속되지 않았다. 일부 논자들도 말하는 바와 같이 3세기 전반기라고 하는 이른 시기에 비미호 여왕국과 같은 선진 지대가 존재했을 근거를 나라 현 지방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비미호 여왕국이 오늘의 야마도에 근거지를 두고 멀리 북 큐슈의 <소국>들까지 통제했다고 생각하기도 매우 곤란하다. 3세기 전반기만이 아니라 그 후 까지도 큐슈 섬, 그 중에도 한국과 가까운 북 큐슈가 일본 열도 내에서 가장 선진한 지역이었음은 앞으로 보게 될 바와 같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북 큐슈에 <야마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지』에 의하면 비미호가 죽은 후에 남자가 왕이 되었으나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했으므로 다시 비미호의 <종녀(宗女: 13세)>를 왕으로 앉히여 혼란을 수습되었다고 한다. 3세기 전반기 비미호가 죽은 후 그 후반기에 속하는 일본 관계 서술은 이것이 거의 전부이다. 3세기 후반기부터 중국 사서들의 일본 관계 서술은 다시 거의 공백기이며 4세기와 5세기 초까지는 완전히 공백기이다.

5세기 초 중국의 나라들에 조공한 왜 왕의 왕조는 그 첫 왕인 찬(讚)으로부터 이 세기 후반기의 왕 무(武)에 이르는 5대 왕의 이름과 그들의 중국에 조공한 사실들과 함께 약간의 다른 사실들을 남기고 있다. 이 왜 왕들의 왕조는 많은 일본 학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오늘의 야마도(나라현)을 중심으로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왕조가 야마도에 자리를 잡았다면 북 큐슈의 비미호 여왕국과 어떠한 연관이 있었겠는가? 이 연계를 노국 연합체―비미호 여왕국 정도라도 밝힐 만한 자료를 세나라의 사서들은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5세기 초에 야마도 지방에서도 국가가 발생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야마도 지방과 그 부근에 있는 큰 무덤 떼의 연대를 이보다 약 한 세기 앞선 것으로 비정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3세기 말 내지 4세기 초부터 야마도 지방에는 큰 세력이 대두했음을 말하고 있다. 북 큐슈의 야마대 여왕국이 4세기 초를 전후해서 동쪽으로 옮아가서 야마도에 자리잡았다고 입론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나 근거는 들출 만한 것도 못 된다.

3세기의 비미호 여왕국과 야마도의 왜 왕 찬―무의 왕조간의 연계를 이어보자는 이 입론은 졀국 잘 이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이을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4세기 경부터 야마도에서도 별개의 국가 세력이 움트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북 큐슈로부터 4세기 초가 아니라 이보다 나중 시기에 어떤 큰 힘이 야마도(기내 야마도)에 작용하여 정복 전쟁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북 큐슈가 이로써 비어 버리고 야마도 세력 하나가 일본 열도 서부에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했다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지방 세력들의 분산성을 극복한다는 문제는 일본 역사에서 아직 앞으로의 큰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북 큐슈 세력은 비미호의 후예 세력이며, 오늘의 야마도에는 4세기부터 찬―무 왕조의 선행세력과 찬―무 왕조가 존재하였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이 찬의 왕조성립에 전후하여 일본 열도 내에 비로소 과학적 의미에서 국가가 발생한 것으로 일본 학자들은 입론하는 모양이나 비미호 여왕국이 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수긍할 수 없고, 5세기 야마도 국가를 노예 소유자적인 국가라고 규정하는 점도 찬성할 수 없다.

4세기나 5세기를 놓고 볼 때에 일본 열도 내에서 국가로 된 세력은 야마도나 북 큐슈 밖에는 없었다고 볼 근거도 없다. 북 큐슈에서 야마도에 이르는 서부 일본 일대가 당시 일본 역사에서는 보다 선진적인 지대였고, 그 서단과 동단에 각각 국가 세력이 있었다고 본다면 그 중간 넓은 지대에도 비슷한 국가 세력이 발생 발전하였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 논리는 이 시기의 큰 무덤 떼들의 집중 지역들이 그 정당함을 현실적으로 안받침한다.
그 중간에도 큰 무덤 떼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문헌들이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야마도 국가에 관한 서술만을 『일본서기』가 남기고 있다고 해서 북 큐슈에는 그것과 대등한 세력이 없었던 것으로 치는 것과 같은 속단일 것이다.

5세기 찬―무 왕조에 대한 서술이 있은 이후 6세기 한 세기 동안 중국 사서들은 일본에 관하여 전하는 것이 없다가 앞에서 쓴 비와 같이, 7세기에 야마도를 중심의 일본과의 관계 기사가 나타난다. 중국 사서들에 6세기가 공백이라고 해서 야마도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 것처럼 북 큐슈의 나라도, 그 밖의 일본 열도 내에 있을 수 있는 나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야마도 국가는 『일본서기』가 말하는 대로의 그러한 역사적 노정을 걷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서기』에는 이 시기에 이르도록, 특히 왕위 계승 서술에 허위가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5∼6세기의 <천황>집안의 계보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전제하고 검토해야 할 것이다. 우선 찬―무 왕조의 계보와 『일본서기』의 천황가(家)의 계보도 맞출 수가 없다. 왜 왕 찬(讚: 일본 말로는 산)의 음을 취하여 16대 천황이라고 하는 인덕(仁德)의 일본식 이름 <오―사사기>의 <사사기>와 결부 시켜 양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입론도 있다. 우선 『일본서기』의 기년을 약 100년 끌어내리고 <산>과 <사사기>가 같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더 나아가 중국 사서들의 찬―무 왕조는 신빙할 만하고 『일본서기』의 서술은 그대로 믿지 못할 것으로 치는 일본 학자들 가운데 찬―무의 왕조는 한국 계통의 정복 왕조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찬>이라는 음을 신라의 제 2대왕 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의 <차차웅>과 결부시켜 이렇게 추측한다고 한다.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에 의한 정복 왕조로서 야마도 왕조를 보자는 입론은 이 밖에도 또 있다. 요컨대 4세기 이해 야마도 중심의 국가 통치자, 즉 야마도 왕조는 6세기에 이르도록 교체가 있었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있으며, 거기에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이 참가하고 있었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는 긍정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야마도의 지배자가 유일한 천황가가 아니었다고까지는 말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야마도에 나라가 나타나자 다른 지방의 나라들은 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즉 야마도 왕조가 처음부터 일본의 유일한 지배자는 아니었다고 입론하는 사람이 없음을 우리로 볼 때에 오히려 기이한 감을 갖게 한다. 야마도 왕조에서 4세기 이래 왕조 교체가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하는 것도 문제다. 야마도의 국가 세력도 <노국>연합체나 비미호 여왕국과 같은 연합체적인 성격이 없었다고 결코 못할 것이다. 비록 그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연합체적인 성격은 <소국>들의 분산성을 청산하지 못했던 만큼 극복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국 연합체>에서 있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그다지 빈번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다지 원활하지는 못한 것이었더라도 야마도 정권에 참가한 대호족(소왕국의 우두머리)들의 왕위 교체도 제기될 수 있는 문제다.

다) 전후 일본 유일 왕조가 체계의 붕괴와 고고학적 시대 구분의 도입

8·15 해방 전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나라를 지배하고 이웃 나라들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던 시기에 국내외 주민들에 대한 지배와 억압의 가장 흉악한 도구로서 이용되던 하나가 이른바 만세 일계의 황실론 이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하여 일본이라는 나라는 특수한 나라로서, 개벽이래 오늘의 천황가가 계속 통치해 왔으니 앞으로도 영원 무궁토록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비할 바 없는 ‘훌륭한 국체(國體)’이며 일본 주민들의 ‘행복’의 근원이라고 선전하였다. 이 선전의 그늘에서, 유일 왕조 지배의 간판 하에서 일본 군국주의는 자기 나라 주민을 무지몽매에 몰아 놓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에게도 천추에 용서 못할 천 가지 만 가지 죄악을 감행하였다. 이 유일 왕조 체계는 아무 데도 그 전거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일본서기』에 조작되어 들어있는 천황가의 계보 그대로도 아니며, 그것에 다시 날조를 가한 계보를 가지고 그렇게 떠들었던 것이다.

날조에 날조를 거듭한 가소로운 유일 왕조 체계는 8·15후 일본 사회계와 역사 학계의 진보적인 인사들의 노력과 투쟁의 결과로서 통례로 역사 서술에서만은 자취를 감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뿌리 채 청산되지는 않았다. 일종의 야마도 중심주의라고 할 집요한 편견을 일본학자들의 자기 나라 역사 서술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표현일 것이다. 일본 역사의 여명이 한 곳에서만 텄다고 볼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일본 서부 여러 곳에서 어두움을 헤치고 문명의 서광이 비쳐난 증거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학자들의 관심은 야마도 한 곳에만 쏠리는 것이 일쑤다. 그러나 아무튼 저주로운 유일 왕조 체계가 역사 서술에서 공식적으로 튼소리를 치지 못하게 된 것만 해도 좋은 일이다.

무너진 유일 왕조 체계에 대신하여 현재 일본의 많은 역사가들이 택한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한일 관계사가 포괄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대체로 기원전 3∼2세기 경부터 기원후 7세기 중엽까지의 약 천년간을 상기한 일본 역사가들은 야요이(彌生)시대, 고분(古墳)시대, 아스카(飛鳥)시대 등으로 구분한다. 야요이 시대는 대체로 기원 3세기 까지의 원시 사회 말기요, 고분 시대는 3세기 말 또는 4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 내지 말엽까지를 포괄하며, 아스카 시대란 6세기 말에서 대체로 7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다. 그러므로 아스카 시대는 고분시대에 중첩되어 들어가 있는 그 말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의 세 시대가 포괄하는 시기들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리 말하기도 하고, 아스카 시대라는 것은 고분 시대에 겹쳐 놓을 뿐만 아니라 그 포괄 내용도 모호한 점이 적지 않다.

야요이 문화는 서부 일본 일대에서 이른바 야요이 식 토기를 반출하는 문화 종태로서 일본의 신석기 시대의 첫 단계인 승문(繩文)문화의 다음 단계이자 동시에 신석기 시대로서는 마지막 단계로 규정한다. 야요이 시대에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를 포괄시키는 만큼 앞서 본 노국 연합체라던가 비미호 여왕국까지도 이 시기에 포괄되며, 신석기 시대라고 해도 청동동기 철기 까지도 나오므로 내용은 극히 복잡하다. 이 시기는 <금석 병용기(金石 倂用期)>라고도 하며 뒤에 말할 바와 같이, 이 안에서 다시 상당히 세분된 소시기들을 설정한다. 그러나 서부 일본만 해도 상당히 넓은 지역이며, 여러 가지로 복잡한 요소가 작용한 장구한 시기를 원시 시대로 몰아 처리하는 데서 무리가 많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이 시기는 우리 고고학자들의 방법으로 한다면 청동기 시대 말 내지는 철기 시대로 될 것 같다.

야요이 문화로부터 고분 문화로에의 이행에서 많은 일본 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 질적 변화 문제다. 양작간의 계승 관계를 말하면서도 고분 문화는 3세기 말 또는 4세기 초에 돌연히 야마도 지방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야마도 지방에 가장 먼저 대규모의 무덤 떼가 충현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분 시대의 하대(下代)로 내려올수록 그 분포는 서부 일본의 범위를 점점 더 벗어나 마침내는 전 일본열도를 포괄하게 되지마는, 이 시대 초기에는 고분들이 서부 일본에 국한되며 그것은 야마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대체로 일본 학자들이 <기내(畿內)>라고 하는 야마도 지방과 그 이북·이서]와 북 큐슈 그리고 양 지대의 중간인 기비[吉備: 오까야마(岡山) 현과 그 부근]지방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서부 일본의 무덤 떼의 3대 집중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고분 시대 초기 3대 무덤 떼중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기내 야마도 무덤 떼가 그 이후 시기 것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가장 완전한 체계를 가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초기 것들을 비교할 때 3대 무덤 떼들은 규모나 내용에서 기비나 북 큐슈 것과 기내 야마도 것은 우열(優劣)에 차이가 그리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분 문화는 기내 야마도에서 발생하여 점차 서쪽으로 퍼졌고 후기에 이르러서부터는 다시 동쪽으로도 퍼져 나간 것으로, 즉 문명의 서광이 야마도에서 비쳐 나서 서쪽으로, 동쪽으로 퍼졌다고 하는 것이 절대 다수 일본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선행하는 시기에는 문화의 모든 힘이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작용하던 것이 돌연히 기내 야마도에 고분 문화가 발생한 때 부터는 작용 방향도 갑자시 거꾸로 되어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본 역사가들이 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는 부정확한 말로 될 우려가 없지 않으나 필자가 아는 한의 모든 일본 사람들의 글발에서 느껴지는 근본 취지는 이상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몰론 이런 취지에서 말하는 학자들도 개별적인 현상, 개별적인 유적 유물에 관한 문제를 설명할 때에는 역시 서쪽으로부터, 한국으로부터의 문화의 힘이 계속 작용했다는 것을 많이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처음부터, 즉 3세기 말 내지는 4세기 초부터 <기내>가 고분들의 중심으로, 즉 <기내>가 문화와 정치의 중심으로 되어 사방에 그 힘을 미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의 근저는 앞에서 쓴 바와 같이 이 때부터 기내 야마도가 일본 열도의 중심으로 되었다는 전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전제를 유적 유물이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준다기보다는, 필자가 보기에는 일본 학자들이 처음부터 이런 전제를 가지고 유적 유물을 설명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고분 시대초기에 관한 연대론에도 문제는 많은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일본 학자들이 3세기 말 4세기 초로 잡는 데는 나오는 거울(한국 거울과 중국 거울, 그리고 또 그 모제품들)의 연대가 주된 척도로 되고 있다. 이런 거울을 당시에 일본에서 신물(神物)로 삼아 각종 굿을 하는 데서와 그밖의 의식에서 사용하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무덤에 묻었다는 것이요, 이 일정한 기간이란는 신축성이 많은 기간과 한(漢) 및 위,진나라들과의 상거 연대가 주로 고분문화의 연대 측정의 기준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필자는 3세기 말 4세기 초라는 고분 시기 시작 연대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학자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그리 확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선 말해 줄 뿐이다.

아스카 시대라는 개념은 미술사의 시대 구분에서 볼 만한 미술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시기를 이른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야마도 왕정이 아스카라는 곳(나라 현)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시기는 야마도 왕정에서 새로운 시책들이 취해지고 불교 예술의 발전도 보게 된다. 이 시기는 미술사상으로 뿐만 아니라 왕정을 중심으로 놓고 보아도 선생시기에 비하여 분명 구분되는 점들을 많이 가지는 만큼 정치사적인 면에서도 특징 있는 시기로 잡을 수 있다. 다만 고분 시대 말기와 중첨되므로 이해에 혼란을 동반할 수 있다. 이 아스카 시기에 이르르면 일본 문화의 뚜렷한 중심으로 야마도(기내 야마도) 지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야마도 지방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타 지방에 군림한다. 동시에 야마도 왕정은 한국과 여전히 활발한 연계를 가지며 거기서 선진적인 것들을 부단히 그리고 정력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차차 수, 당의 중국 나라들과도 접촉하게 된다. 총체적으로 보아 이 시기는 야마도의 권위가 일본 열도 내에서 확립되었던 시기이며 야마도가 일본을 대표하게 된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시기 야마도의 왕정에서는 후에도 말하겠지마는, 한국 계통, 백제 계통 귀족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문화의 거의 영역에서 한국으로부터의 기술자, 예술인들의 활동이 압도적이었다. 아스카 문화라고 하는 이 시기 문화 유물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인 성격이 선행한 고분 시대 초기나 중기보터도 결코 못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현재 일본 역사 서술에 도입되어 있는 야요이 시대 → 고분 시대(아시카 시대 포함)의 시대 구분법에는 일반사를 서술하기에는 불합리한 점과 무리한 점들이 없지 않으나 이 체계 자체는 고고학적으로 연구된 성과들로써 안받침되어 상당히 세련된 면을 가지고 있다.

라) 소위 미마나 문제

일본 열도 내의 형편은 아스카 시대에 이르러서야 뚜렷이 한 개의 정치적 중심체를 형성하면서 움직이게 됨을 본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지방에 분산된 호족(豪族)들이 어느 정도나 그 아스카의 중심체에 복속했겠는지는 앞으로 보아야 할 문제다. 이 중심체의 지방 세력들에 대한 통제 기관이며 지방 주민들에 대한 착취의 흡반인 <미야께>라고 하는 것이 기비 지방에나 북 큐슈 지방까지 뻗게 된 것은 이 시기보다 약간 선행하는 6세기 전반기쁜부터로 보인다. 『일본서기』와 같은 일본의 고문헌들에서는 <미마나>에 두었다는 <미야께>와, 야마도 왕정이 자기의 세력을 부식하기 위하여 일본 열도 내 지방들에 설치한 <미야께>를 구별하여 한자 표기를 달리 한다. 즉 전자는 대체로 <관가(官家)>로 표기하고 후자는 <둔창(屯倉)>등으로 표기한다. <미야께>와 관련된 성씨(姓氏)를 표기할 때는 삼택(三宅)등의 또 다른 한자를 쓴다. <관가=미야께>와 <둔창=미야께>와의 구별되는 점이라는 것을 꽤 까다롭게 주석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으나 아무튼 이해하기 어려운 억설로 보인다. <미야께>는 일본말의 <미야께>일 따름이며, 여기에 그러한 한자를 구별해서 붙인 가장 오랜 문헌은 <미야께>가 다 없어지고 만 8세기 전반기 이후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인 것이다. 이 두 책이 전해 내려온 경위로 보아 워낙 8세기 초 편찬 당시의 『일본서기』에도 과연 <관가>와 <둔창>을 그렇게 갈라 썼겠는지도 의문이다. 거기서 워낙 그렇게 갈라 썼더라도 그것의 존재 당시에 그렇게 썼다고 볼 근거로는 되지 못할 것이다. <미야께>를 처음부터 여러 가지 한자로 저러한 구별 없이 표기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다라시>라는 말 토막이 들어가는 <천황>의 이름이 7세기에 이르도록 열 개도 넘는데 한자 표기는 ‘足’으로도 ‘帶’로도 되어 있어 그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 ‘足’과 ‘帶’가 서로 다를 것이 없는 <다라시>인 것처럼 <관가>나 <둔창>이 서로 다를 것이 없는 같은 <미야께>이며, <관가=미야께>를 한국의 <미마나>에다가만 붙인 것은 후세 역사 위조자들의 소행일 따름일 것이다.

위조의 기본 문제는 <미야께>가 일본 열도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의 나라들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데 있다. 한국에 있었다고 하는 <미야께>는 『일본서기』에는 워낙 <신공황후>의 <신라정토>가 있었다고 하는 해인 기원 200년부터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미마나>라고 하는 가락국에가 아니라 시라기=신라, 구다라=백제, 고마=고구려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필자는 전게한 졸고에서 <미마나>를 포함한 <미야께> 설치국들을 한국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의 글로 미루어 일본 열도(서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연대 문제를 따로 고려한다면 『일본서기』으 펀찬자는 야마도에 예속된 그런 나라들이 한국에 있었다고 한 데서, 즉 주로 그 위치를 착각한 데서만 착오를 범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면 『일본서기』의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서술도 왜곡되게나마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에 다하여 상세히 말할 것이다.

그렇게 보지 않고 그 위치는 한국에 설정해 두고, 아무래도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후세의 일본 학자들은 연대를 120년 정도 끌어 내리고 <미야께>가 설치된 곳은 처음부터 미마나=가락국만이며, 이리하여 대체로 4세기 전반기부터 2∼3세기간 그 곳을 거점으로 해서 야마도 왕정이 남부 한국을 지배하고 고구려와 세력을 다툰 것으로 <미마나 미야께>설을 조작한 것은 저들의 선배를 능가하는 대위조 행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삼국사기』에 왜에 대한 서술이 가지고 있는 특징, 즉 왜가 한국의 나라들과 아주 가깝게 되어 있을뿐더러 신라와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백제와는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상과 같은 일본 열도 내의 형편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의 왜 관계 서술과 중국 사서들의 5세기 왜 왕들에 고나한 서술도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컨대 이상 한국과 중국 자료들은 그것들이 자료로서 진실인 한에 있어서는 결코 한국에 있었던 <미야께>를 증명하지는 않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오늘날 들고 나오는 4∼5세기 야마도 왕정의 <남한 경영>론으로서의 <미마나 미야께>설 (이하에서는 <미마나>설이라고 약칭함)은, 앞으로 검토하겠지마는 왜곡된 일본 고문헌 서술을 다시 2중으로 왜곡한 것이다.

일본 역사 학계에서 <미마나>문제는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다 해명이 된 문제로 치고 있다. 보수 반동 사가들 뿐만 아니라, 유감스러운 일로서는 진보적 입장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서술하는 학자들에 이르기까지도 미마나 문제에서는 같은 방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선행 편사학을 부정하면서도 그 다른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유산으로서 접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마나 문제에서 선행 부르즈와 사가들이 해 놓은 것이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닌 것만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 유일 왕조론이 재검토되고 뒤집히게 될 때 이 미마나 문제가 그러한 재검토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되었다는 데 대하여 기이한 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과거가 일본의 과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더욱이 미마나 문제는 과거 일제 어용 학자들이 목청을 돋우며 떠들던 가장 요란한 곡목이었다. 이를 재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 그것은 오히려 덮어두는 것만도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로서 초기 한일 관계를 검토함에 있어서 당시 양 지대에서 전개된 역사 발전의 이상과 같은 복잡성은 입론과 서술을 심히 곤란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이 부분의 문헌자료에 기초한 편사학적 연구 ‘성과’에는 양 지대 관계사 서술에 기준으로 될 만한 체제가 전연 서 있지 않다. 『삼국사기』의 왜 관계 서술을 기준으로 할 수도 없고 『일본서기』의 한국 관계 서술에 기준을 두고 그 체계에서 미마나 문제를 중심으로 푸는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없다. 양 지대의 유적과 유물들, 즉 고고학적 자료들의 대비와 분석에서 출발하여 여기서 기준을 찾아 문헌 자료들을 검토하는 방법이 현재 형편으로서는 불가피하다고 필자가 인정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