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절 일본의 천일창 설화와 쯔누가―아라시또 설화
가)천일창 설화의 줄거리와 쯔누가―아라시또 설화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신대>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끝내고 나서 <천손>의 자손인 제 1대 <천황>인 <신무>가 휴가 지방을 떠나 기내 야마도 지방을 쳐들어가 그 곳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을 통치하게 된 때부터를 역사 시대로 잡고 있으나 그 후에도 얼마간은 별로 이야기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꾸며져 있는 연대에 한국관계 설화들을 싣고 있다. 제 1 장에서 말한 『일본서기』한국 관계기사의 첫 그룹인 것이다. <천손 강림>시화나 이즈모 신화와는 달리 이 한국 관계 기사는 『일본서기』기년으로서는 <신무 동정>후 600여년이 지난 후에 있었던 일로 서술된 천일창과 쯔누가―아라시또(都怒我阿羅斯)설화다. 일본 학자들은 일찍부터 서력 기원전 660년이라는 <신무>의 기원의 연대는 순전히 후세에 조작한 것이기 때문에 600년정도 끌어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무>라는 왕이 실재했던 것도 아니며 야마도 지방에 국가적 세력 내지는 왕권이 생긴 것은 서력 기원후 4세기 초 경으로 오늘의 많은 일본 학자들이 잡고 있는 만큼 국가의 지배자로서의 그 어떤 제왕에 관한 사실이 <신무 동정>설화에 반영되어 있다면 그 연대는 천 년도 더 끌어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언급되겠지마는 <신무 동정> 설화는 오히려 그보다도 더 끌어 내려야 하는 설화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 『일본서기』에 서술된 사건들의 전후 관계도 전도된 것이 적지 앟으므로 그 배열 순차에도 구애될 필요가 그리 없는 것이다.
천일창 설화는 <쯔누가―아라시또>설화와 함께 가락국과 신라의 왕자(王子)들이 기원전 40년∼30년대에 일본에 <귀화>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당시의 역사적 환경과 결부하여 신라나 가락의 유력한 호족이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일본에 진출한 사실을 반영한 설화임이 명백하다. 신라나 가락등 한국의 나라들로부터 꼭 왕자가 아니더라도 통치 계급에 속하는 호족의 우두머리들을 포함하는 이주민 집단이 서부 일본 각지로 진출한 것은 야요이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므로 두 설화를 이 시대에 해당시켜 생각할 수 있다.
이 설화가 『일본서기』서술 전반에서 볼 때에 그 연대 배열에서는 어떻게 조립되어 있던 그 내용면에서는 실로 큰 자리를 차지한다. 앞서 말한바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로서 이 한국 관계 설화가 『일본서기』의 역사 시기 서술에서는 처음이라는 사실은 그 <신대>서술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가 한국 관계 서술이라는 사실과 함께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 저 땅으로 진출한 한국세력이 수행한 거대한 역사적 역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저 땅의 역사 위조자들은 역대로 내려오면서 계통적으로 이 사실을 말살하고 가리워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왔지만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저들의 솜씨가 유치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쓰게 된 이상 엄연한 사실을 그렇게 완전히 가리워 내지는 못하는 것이고 아무래도 한 모퉁이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특히 이 설화는 우리 사람들의 일본 열도 진출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간 문화에 대하여 풍부하고도 선명한 표상을 많이 전한다.
『일본서기』에 실린 천일창=아메노―히보꼬 설화의 줄거리를 먼저 더듬어 보자.
2권 제 6 <수인 천황> 2년 봄 3월 조 본문에
《신라 <고니시끼(王)>의 아들 <아메노―히보꼬>가 내귀(來歸)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하후도노―다마(羽太玉)> 한 개, <아시다까노―다마(足高玉)> 한 개, <우가까노―아까시노―다마( 鹿鹿亦石玉)> 한 개, <이즈시노―가다나(出石小刀)> 한 자루(一口), <이즈시노―호꼬(出●)> 한 자루(一枝), <히노―가가미(一鏡)> 한 개(一面), <구마노―히모로기(熊神籬) 한 벌(一具)등 모두 일곱 가지 물건이요, 다지마(但馬)국에 보관하여 신물(神物)로 삼았다.》
수인 3년이라는 연대는 『일본서기』기년을 그대로 신용한다면 기원전 27년에 해당한다.
『일본서기』편찬자는 이 연대에 이런 기사를 삽입해 놓고도 당대의 <천황>과는 아무런 관련을 짓지 못하고 있다. 이는 되는 대로 적당히 조립해 놓은 연대에 불과하며 그 시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증거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지마(효고 현 북부)지방의 호족이며 야마도 왕정을 대표하여 한국의 나라들과도 내왕한 것으로 되어 있는 <다지마―모리(田道間守)>의 조상 설화로서 전승되어 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서기』의 원(原)주석 기사와 『고사기』의 기사를 가지고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앞서 쓴 본문 서술에 이어 「일운(一云)」이라고 한 다음에 아래와 같은 설화를 실었다.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하리마 국에 정박하여 시사하(●粟) 촌(邑)에 있었던 때에 천황은 미와기미(君)의 조상인 <오―도모―누시(大友主)>와 애마도(倭) 다다헤(直)의 조상 <나가오이찌(長尾市)>를 하리마로 보내어 천일창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하였더니 천일창은 “나는 신라국의 기미(니히리:主)의 아들이다. 그런데 들으니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있다 하므로 자기 나라는 동생인 <지꼬(知古)>에게 주고 귀화하러 왔노라”라고 대답하면서 바친 물건은 <하호노소―다마(葉細珠)> <아시다까노―다마(足高珠)> <우가까노―이까시노―다마( 鹿錄亦石珠)> <이즈시노―가다나(出石刀子)> <이즈시노―호꼬(出石槍)> <히노―가가미(日鏡)> <구마노―히모로기(熊神籬)> <이사사노―가다나(膽狹沙太刀)>등 아울러 여덟가지 물건이다. 이어서 천일창에게 이르기를 “하리마 국 <시사하>촌, 아와지(淡路)섬 이데사(出淺) 촌의 두 마을에 너는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라고 하였다. 이 때 천일창은 아뢰기를 “신(臣)이 장차 살 곳에 대하여 만약 신에게 은혜를베풀어 신의 뜻을 들어 주시겠다면 신으로 하여금 몸소 여러 나라를 돌아보게 하고 신의 마음에 합당한 곳을 주시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천일창은 우지( 道)강을 소급해서 북으로 오―미 국(시가 현) 아나)吾名) 촌으로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오―미로부터 와까사 국(若狹國:후꾸이 현 서부)을 거쳐 서쪽으로 가서 다지마 국에 이르러 살 곳을 정했다. 그러므로 오―미 국 <가가미(하사마(鏡谷)>의 <스에비도(陶人)>는 천일창의 종인(從人)들이다. 때문에 천일창은 다지마 국 이즈시(出島) 사람 <후도미미(太耳)>의 딸 <마다오(麻多鳥)>를 얻어서 <다지마―모로스께(但馬諸助)>를 낳았다. <모로스께>는 <다지마―히나리기(但馬日楢杵)>를 낳았고 <하나라기>는 <기요(스가)히꼬(靑彦)>를 낳았고 <기요히꼬>는 <다지마―모리(田道間守)>를 낳았다.》
『일본서기』의 앞에 쓴 본문 기사에서 볼 수 없었던 이야기로서 이 「일운」에는 <천황>과 야마도 왕정과의 관계와 천일창의 다지마 정착까지의 경로가 들어 있다. 경로에 관한 이 이야기는 물론 헛소리다. 천일창 이야기를 야요이 시대라는 이른 시기로 잡지 않고 야마도 왕정이 생겨난 후에 있었던 일로 볼 수 없겠는가. <수인 천황>이라고 하는 것과 이상 인용문의 구체적인 대화 같은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잉갸기들은 고분시대 이야기로도 몰 수 있지 않는다. 여기 나온 <스에비도>는 <스에끼(須惠器)>를 만드는 장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스에끼>는 고분 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는 토기다. 그러므로 이 <스에비도>와 결부시켜 놓으면 고분 시대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이 이야기에는 후세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천일창을 신라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아메노―히꼬보>라고 한 것부터 후세에 일본식으로 윤색이 가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이라는 뜻이며 이주민에 관련된 인물이나 물건에 흔히 갖다 붙인 것이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더라도 ‘히’나‘보꼬(호꼬)’는 다 일본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신라 사람에 일본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신라로부터 건너간 사람이 <히보꼬>라는 이름을 가졌을 리가 없었을진대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 자체는 이 이야기가 후세에 많은 윤색이 가해졌음을 말한다. <히보꼬>로 되어 있는 인물은 실재 인물은 아니고,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호족급(級)의 사람들 내지는 훌륭한 무기와 보물을 가지고 간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킨 말일 것이다.
이와 같이 후세적인 윤색이 덧붙었다고 해서 이야기를 통털어 후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천일창은 다른 문헌들에서는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더욱 넓은 지역을 이주의 무대로 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이 고장에 큰 지배 세력이 생겨나지 않았던 사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렇다면 천일창 이야기의 원 줄거리에 담겨 있는 사실은 이주모의 국가 세력이 아직 기내 지방이라고 부르는 이 고장에까지 미쳐 오기 전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고사기』에서는 천일창 이야기를 중권의 <응신(應神: 제 15대, 270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천황>대에 수록하면서도 이야기 자체는 아주 오랜 것으로 취급하였다. 『고사기』에서는 『일본서기』와는 전연 다른 내용을 전한다.
《또 옛날 신라의 국주(國主:고시니끼)의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아메노―히보꼬(天之日矛)>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건너왔다. 건너오게 된 까닭은 (이렇다.) 신라 나라에 한 늪(沼)이 있었다. 이름은 <아구누마(阿具奴摩)>라고 하였다. 이 늪가에서 어떤 천(賤)한 여인이 낮잠을 잤다. 이에 햇빛이 무지개처럼 빛나더니 그 배(호도)위를 가리키는 것을 어떤 천한 사나이(賤夫)가 이상히 여개 내내 그 여인의 하는 짓을 엿보았다. 그랬더니 이 여인은 낮잠을 잘 때부터 임신하여 빨간 구슬(赤玉)을 낳았다. 이에 엿보던 천한 사나이는 그 구슬을 얻어 가졌다. (그는 이를)항상 싸가지고 허리에 차고 다녔다. 사나이는 산골자기에 밭을 장만하였다. 때문에 밭갈이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소 한 마리에 지워가지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 나라 임금(고니끼시)의 아들 <아메노―히보꼬>를 만났다. 이에 그 사나이에게 묻기를“무엇하러 너는 음식을 소에 지워 산골짜기로 들어가는가? 너는 필시 소를 잡아먹자는 것이렸다.”라고 말하고 그 사나이를 옥에 가두려고 하였다. 그 사나이는 대답하기를 “나는 소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밭일하는 사람들의 먹을 것을 나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에 그 허리의 구슬을 풀어 임금의 아들에게 바쳤다. 때문에 그는 천한 사나이를 용서하고 그 구슬을 가져다가 침상가에 놓았더니 곧 아름다운 계집아이로 화하였다. 이래서 혼인하여 아내(嫡妻)로 삼았다. 이에 그 계집아이는 늘 갖가지 맛좋은 것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먹이었다. 때문에 임금의 아들은 거만해져서 아내를 꾸짖었더니 그 여인은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너의 처가 될 여인이 아니다. 나의 조국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곧 몰래 작은 배를 타고 피하여 (바다를)건너 와서 나니와에 머물었다. 이는 나니와(難波)의 히메고소(比賣碁會) 신사에 자리잡은 <아가루―히메(阿加流比賣)>신이라고 한다.
이에 <아메노―히보꼬>는 그 아내가 피하였음을 알고 곧 쫓아 건너와 나니와에 이르려 할 즈음에 그 나루의 신이 가로막아 받지 않았다. 때문에 다지마 국에 정박하였다. 즉 그 나라에 머물러 다지마의 <마다오(●尾)>의 딸, 이름은 <마에쯔미(前津見)>를 얻어 낳은 아들이 <다지마―모로스꾸(多遲摩母呂須玖)>요, 이의 아들이 <다지마―히네(斐泥)>요, 이의 아들이 <다지마―히나라기(比那良岐)>요, 이의 아들이 <다지마―모리(毛理)>와 다음의 <다지마―하다까(比多詞)>와 다음의 <기요히꼬(淸日子)>의 세사람이며. <기요히꼬>가 <다가마(當摩)>의 <히메( 斐)>를 얻어 낳은 아들이 <스가노―모로오(酢鹿之諸男)>요, 다음은 딸 <스가가마―유라도미(菅●由良度美)>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다지마―하다까>가 그 조카딸 <유라도미>를 얻어서 낳은 아들이 가쯔라기(葛城)의 <다까누까―히메노―미꼬도(高額賣命:이는 <오끼나가―다라시―히메노―미꼬도>의 조상이다)>다.
그리고 <아메노―히보꼬>가 가지고 온 물건은 <다마쯔―다까라(玉津寶)>라고 해서 구슬(珠)이 두 꼬치(貫)요, 물결을 흔들어 일으키는 지느러미(浪振比禮)와 물결 끊는(浪切) 지느러미와 바람을 일으키는(風振) 지느러미와 바람을 끊는 (風切) 지느어미와 또 어끼쯔 거울(奧津鏡)과 헤쯔(邊津)거울 등 모두 여덟가지다. 이것들은 이즈시―야마헤(伊豆志八前) 신사의 대신(大神)이다.》
『고사기』에 나오는 이 천일창의 신화와 비슷한 내용의 황소, 구슬, 미녀의 도망 이야기는 『일본서기』애서는 천일창 설화를 삽입한 <수인 천황>3년의 전년에 있었던 미마나와의 관계 기사에 대한 「일운」기사로서 싣고 있다. 즉 그 본문에 <수인 천황>2년 조에 미마나 사신 <소나가시찌(蘇那曷叱智)>가 귀국했다는 기사를 싣고 미마나와의 관계가 나온 김에 하나 써 넣는다는 식으로 <쯔누가―아라시또>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소나가시찌>의 본문 기사에 대한 「일운」기사는 두 개가 있고 첫 「일운」기사에는 미마나의 국명에 관한 설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이것은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거기서 『고사기』의 천일창 설화 내용과 비슷하게 되어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일운(一云) 미마끼(御間城) 청황 때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배 한척을 타고 고시(越)국 개히( 飯) 포구에 머물렀다. 때문에 그 곳을 <쯔누가(角鹿)>라고 한다.
그에게 묻기를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오호―가라국왕(意富加羅國王)의 아들이요, 이름은 <쯔누가―아라시또>이며 일명은 <우시끼―아리시찌―감게(千斯岐阿利智千岐)>다. 전해 들은 바에 일본국에는 성황이 있다 하므로 귀화하려고 아나도에 이르니 마침 그 나라에 사람이 있어 이름을 <이쯔쯔―히꼬(伊都都比古)>라 하더니 신(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곧 이나라의 왕(기미)다. 나를 빼놓고 다른 왕은 없으니 다시는 다른 데로는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신의 생김생김을 자세히 보아하니 필시 왕이 아님을 알았다. 곧 돌아가 섬들과 포구들에 유련하다가 북해로부터 이즈모 국을 거쳐 예지 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야기는 미마나 국명과 관련된 설화로 넘어가 밑도 끝도 없이 되고 말았는데, 이렇게 된 것을 보충하려고 함에서인지 『일본서기』편찬자는 또 하나의 「일운」기사를 삽입하였다. 이 두 번째「일운」기사가 『고사기』의 천일창 설화와 흡사한데 주인공이 천일창이 아니라 <쯔누가―아라시또(여기서는 대가야국의 왕자라고 하지 않았다.)>가 황소에 음식을 지워가지고 갔었다고 한다. 그는 소를 잃었는데 알고 보니 <군가(郡家)>에서 잡아 먹었기 때문에 <군공(郡公)>들로부터 그 보상으로 붉은 구슬이 아니라 흰 구슬을 받았고, 이 흰 구슬을 그는 자리(寢床) 속에 넣어 두었더니 미려(美麗)한 동녀(童女)로 화하였다고 하며 <아라시또>는 기뻐서 그에게 장가들려고 하였으나 밖으로 나간 사이에 동녀는 피하고 말았으므로 자기 처에게 물은즉 그 동녀는 동방으로 향하여 가버렸다고 하였다. <아라시또>는 바다로 해서 “일본국으로 들어왔고”찾는 동녀는 <나니와>에 이르러 <히메고소> 신사의 신이 되었고 또 도요 국( 國:큐슈 섬의 동부)의 미찌노―구찌(國前)군에 이르러 >히메고소>신사의 신으로 되어 두 곳에서 다 제사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고사기』의 천일창 이야기와 이 『일본서기』「일운」기사의 <쯔누가―아라시또>의 기사가 미인의 이야기에서 혼선이 된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두 인물이 다 설화상의 존재이므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이 이야기들을 통하여 신라 계통 이주민과 못지 않게 가락 계통 이주민에 관한 사실도 고 문헌들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두 설화에 나타난 지역과 연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 천일창이 정착하여 그 자손이 번영한 고장으로 되어 있는 곳은 다지마 지방, 즉 이즈모의 동쪽 효고 현의 북부이며 동해에 면한 지역이다. 이 곳에 정착하기까지의 그의 활동과 관련된 지역으로는 하리마의 시사하 촌(오늘도 같은 이름의 군이 효고 현에 있다.)아와지 섬(오―사까 시꼬꾸 사이에 있는 큰 섬)과 그리고 우지(宇治)강을 오―사까 부근에서 소상하여 그 상류 일대인 오미 지방(사가 현)과 그 북쪽의 화까사 지방을 거쳐 다지마로 퍼져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서부 일본의 중앙부를 남쪽 세도 바다쪽에서 상륙하여 효고, 오―사까, 교토, 시가, 후꾸이 등 현의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된다. 이는 <이즈모>신화에서 이즈모 세력이 서부 일본의 중앙부를 서북쪽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동방향으로 뻗었던 것과는 반대 방향이다. 『고사기』에서 천일창은 나니와(오―사까)에 상륙하려다가 길을 막는 자가 있어서 상륙하지 못하고 되돌아서서 다지마 지방으로 갔다고 했는데 이를 세도 내해를 되돌아 다시 동해 바다로 나가 쥬고꾸 반도의 북해안을 따라 다지마까지 우회했던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상, 아니와에서 상륙하지 못하였으므로 효고 현 해안에나 상륙하여 육로로 북상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사까 해안에 상륙해서 다지마로 가는 길 외에 제 2의 북상로가 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리마(효고 현) 시사하 촌을 거치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첫째 「일운」기사에서는 천일창이 하리마 국의 시사하 촌에 배를 댄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 시사하라는 곳은 우주(宇頭)강 [오늘의 이히보(●保)강]의 상류로서 내륙으로 상당히 들어가 있다. 이 강을 따라 북상했다면 그 강구를 거쳤을 것이다.
『하리마 국 풍토기』에 해당한 기사가 있다. 그 이히보 군 이히보 리 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이히보 리: 이히보라고 칭하는 까닭은 이 마을이 이히보 산에 의지했기에 산을 인연하여 이름 삼았다.
이히보 오까(丘:이히보 언덕―필자): 이히보―오까라고 이름 지은 까닭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천일창)>가 가라구니로부터 건너와 우즈 강 강구에 이르러 묵을 곳(宿處)을 <아시하라―시꼬오노―오노―미꼬도(葦原志許乎命)>에게 청하였다. “너는 국주(國主:구니누시)다. 나는 묵을 곳을 얻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시꼬>는 곧 바다 가운데를 허락하였다. 그 때 객신(客神:천일창―필자)은 칼을 가지고 바닷물을 휘저으며 갔다. 주신(主神)은 객신의 요란한 짓을 두렵게 여겨 먼저 나라를 차지하려고 돌아 올라가(巡上) 이히보에 이르러 밥을 먹었다. 그런데 입에서 밥알이 떨어졌다. 때문에 이히보―오까(粒丘)라고 이름 지었다. 또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곧 지팡이 꽂은 곳에 삼(寒泉)이 솟아나 드디어 남북으로 흘렀다.》
이히보 리에서 강을 좀더 소급하면 시사하 군으로 되는데 같은 『풍토기』의 시사하 군 <가와또>촌 조에는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가 이 마을에 묵으면서 말(勅)하기를 “강물소리 심히 높다.”고 하였다. 때문에 <가와또(川音)>라고 한다.》
라고 말하였다. 『풍토기』의 교주자는 이 마을을 시사하 군의 최남단 우즈강의 유역으로 잡고 있다.
『풍토기』본문에서 같은 시사하 군 내의 <가와또>촌의 다음 다음 마을로서 든 <우바히다니> 조에는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 두 신이 이 골짜기를 서로 빼앗았다. 때문에 <우바히다니(●谷)>라고 한다. 그들이 서로 빼앗던 까닭으로 골짜기 모양이 꼬부라진 것이 칡넝쿨 같다.》
라고 하였고 같은 군의 <다까야> 리 조에는
《<다까야>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가 말(告)하기를 “이 마을은 높은 것이 다른 마을보다 월등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까야(高家)>라고 한다》
라고 하였고 우즈 강의 지류로 『풍토기』의 교주자가 치고 있는 <아나가(같은 시사하군)> 강 조에는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와 나라 차지(國占)을 하였을 때 우는 말이 있어 이 강에서 마주쳤다. 때문에 <아나가(伊奈加)>강이라고 한다.》
라고 하였다. 말이 우는 것을 일본말로 ‘이나나꾸’라고 한다.
전기 『풍토기』의 교주자가 우즈 강의 썩 상류 유역으로 잡는 <하까>조 에는
《나라 차지하던 때에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가 먼저 이 곳에 이르고 이와 대신(伊和大神)은 나중에 이르렀다. 이에 대신이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헤아리지 못했도다. 먼저 왔구나”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고 같은 우즈 강 상류 유역으로 잡는 <미가다> 리 조에는
《<미가다>라고 이름 지은 까닭은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와 검은 흙의 시니 산(志●嵩)에 이르자 각각 칡(黑葛)넝쿨 세 가닥을 가지고 발에 붙이고 던지었다. 그 때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의 칡은 한 가닥이 다지마의 개다(氣多) 군에 떨어지고 한 가닥은 야부(夜夫) 군에 떨어지고 한 가닥은 이 마을에 떨어졌다. 때문에 미가다 라고 한다.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의 칡은 모두 다지마 국에 떨여졌다. 때문에 다지마의 이즈시(伊都志)의 땅을 차지하였다.…》
라고 하였다.
『하리마 풍토기』는 앞서 앞서 간단히 소개한 바도 있지만, 교주자의 해설에 의하면 713년 [화동(和銅:일본 연호) 6년] 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까지 우즈 강 유역에 이상과 같이 여러곳에 천일창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는 것은 더 상대로 소급하면 이 강 유역의 더욱 많은 마을들이 천일창 설화를 가진 이주민의 부락들이었음을 생각게 한다.
우즈 강에서 좀 동쪽에 있는 오―가와(大川) 강은 히히보 군 동쪽의 시까마(식磨) 군(하리마 국)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시까마 군에는 히라노(枚野) 마을이 있고 그 일명은 <시라구니(新羅訓)> 촌이라고 했으며, 그러한 이름이 붙은 까닭은 “옛날에 신라국 사람들이 왔을 때에 이 마을에 묵었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이 <시라구니> 촌에서 오―가와 강을 좀더 소급하면 <가무가찌(神前)> 군 땅이다. <가무자끼>군에 들어서서 강줄기를 따라 좀더 올라가면 바로 강 기슭에 <누까―오까(粳岡)>이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명에 대하여 『풍토기』는 다음과 같이 썼다.
《누까―오까에서는 이와 대신(伊和大神)과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의 두 신이 각각 군사를 내어 서로 전쟁하였다. 이 때에 대신의 군대가 모여서 벼를 짷어 그 겨(일본말의 누까―필자)가 쌓여서 산으로 되었다. 그 키를 놓은 곳을 하까(墓)라고 하는데 또 기무례(城牟禮) 산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城)을 쌓는 곳에는 흠무다(品太) 천황때에 건너온 가다라(百濟)사람들이 습속(習俗)에 따라 성을 쌓고 살았다고 한다. 그 자손은 가와노베(川邊) 마을의 미야께(三家) 사람 야시로(夜代)등이다.
야찌구사(八千軍)라고 말하는 까닭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에게 군사 8천 명이 있었다. 때문에 야찌구사노(八千軍野)라고 하는 것이다.》
시까마 군과 그 밖의 군들에서는 구다라(百濟) 사람과 <가라>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나 천일창 설화처럼 계통적이 되지 못한다. 시라기, 가라, 구다라는 왕왕 일본 고문헌들에서 혼동되어 있으므로 여기의 <구다라>는 신라를 가지고 그렇게 전승된 것이라고도 보이며, 가라라고 한 것도 신라 이야기의 와전일 수 있다. 이 문제는 더 건드리지 않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이히보 강 유역 뿐만 아니라 다른 강의 유역에서도 농사를 짓기 편리한 곳을 택하여 우리 이주민들이 많이 살았으며, 그 중에서도 신라 계통이 하리마에는 많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 두는 데 긫겠다. 다지마 국 형편도 비슷했을 것이나 그 곳의 『풍토기』는 전하지 않는다.
이주민등은 우주 강을 까고 논 농사에 적당한 벌판을 차지하여 부락들을 형성하였고, 이 부락들은 다시 연합하여 보다 우즈 강 유역의 이히보 군(고호리:郡)를 형성하였다. 이상에서 인용한 우즈 강 유역의 이히보 군(고호리)과 시사라 군(고호리)은 남북으로 흐르는 이 강 하나를 끼고 이히보는 그 중류 이하를, 시사하는 즈 중류 이상을 점거하고 있다. 이리하여 교주자가 작성한 『풍토기』의 부록의 지도에 의하면 이 군들은 남복으로 강줄기를 따라 길게 생긴 군으로 되었다. 시까마 군(고호리)이라는 것도 길이가 우즈 강의 반 밖에 안 되어 보이는 남북으로 흐르는 세 개의 작은 강 유역을 포괄하는 보기 싫을 정도로 남죽으로 긴 군으로 되어 있고, 가무자끼 군(고호리)이라는 것도 오―가와 강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만 긴 군으로만 되어 있다. 야요이 시개에 들어와서 농경을 하게 됨에 따라 수리(水利)애 편한 강 유역 곳곳에 부락이 형성되고 그것들을 통합한 고을이다 보니 그러한 모양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일본 학자는 야요이 시대 후반기로부터 고분 시대에 걸쳐 일본에는 수다한 지역적 통일 집단이 존재한 것을 지적하고,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바다와 하천의 무인 <젤타> 지대라던가 큰 하천과 산 언덕 등의 자연 경계로 확연히 또는 완만히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말하면서 거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물의 이용을 위한 조건을 갖추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분 시대 전반기에 걸친 시기에 수장들을 묻은 대형 고분의 “계보적(系譜的)인 축조에서 본 지역적 통일 집단의 존재 방식”을 예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지도는 효고 현의 서쪽 이웃인 오까야마 현의 동부, 요시이(吉井) 강 유역에 형성된 <통일적 집단>이다. 이 집단은 소평야를 단위로 하고 산과 언덕으로 서로 분리되며, 이를 몇 번 되풀이하는 가운데 몇 개의 비슷한 충적 평야들을 형성하였고, 평야는 부락들과 농경지의 자리로 되고 험한 산굽이들은 큰 부락과 큰 부락과의 경계선으로 되고 큰 부락들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방어 진지로도 되었을 것이다.
『하리마 풍토기』의 이히보 군과 사사히 군을 우즈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지적한 것들만 가지고도 천일창의 이주민 부락들은 바로 이렇게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것 들 중에서 적게 남은 것이 역사 자료다. 『풍토기』편찬 연대보다 5∼6세기나 7∼8세기 정도로 소급될 수 있는 야요이 시대 당시에는 천일창 설화에 나타난 우리의 이주민 부락들은 우즈 강과 오―가와 강 유역의 충적 평야를 뒤덮었으리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며, 큰 마을들의 연합체인 고호리들이 다시 연합하여 이주민들이 마침내 <국>을 이루었을 것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천일창의 설화는 다지마에 살았고 나중에는 야마도 왕정에서 유력한 지위에 있게 되었던 한 신라 계통 호족의 조상 설화다. 그 조상이 거쳐 왔다고 하는 복잡하고도 긴 경로가 그대로 천일창이라는 개인을 중심한 특정한 집단이 거쳐온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특정한 인물로는 보지 말아야 한다고 앞서 말하였다. 중요한 문제는 『하리마 국 풍토기』에서도 볼 수 있는 바의 충적 평야를 가진 서부 일본의 강들의 유역 일대에 비록 우즈 강이나 오―가와 강 유역 같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 집단들, 집작컨대 진한=신라 계통 이주민 집단들이 많이 정착하여 <무리>와 <고호리>를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야요이 시대에 걸쳐 서부 일본의 중앙부 내륙 깊이까지 종황하는 강줄기를 따라 들어가 우리 이주민의 집단은 평야 지대에 정착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는 나중에 일본의 중심지대로 되는 야마도 지방도 결코 이와는 달리 될 수 없었으리라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이 말이 결코 사실과 어긋나지 않은 것임을 앞으로 <신무 동정>설화에서 보게 될 것이다.
서부 일본의 중앙부(대체로 기내 지방)를 세도 바다 쪽에서 상륙하여 북상하는 경로의 상륙점은 나니와(오―사까)나 하리마(효고)의 해안 포구들이었다. 이 곳 포구들에 이르기까지에는 큐슈 섬과 시꼬꾸 섬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쯔누가―아라시또>설화에 북 큐슈 동부의 도요구니( 國)는 큐슈 섬 동쪽에서 세도 바다에 면한 지대요, 큐슈 섬에서 이 바다로 들어가는 출발 지대다. 이 도요구니 일대는 가락 계통 사람들의 이주 지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앞서 말하였다. 이 곳은 가락 계통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고장이었지마는 동시에 나중에는 고국에서 신라 영역에 포괄되는 지역 사람들, 즉 진한 지역의 사람들도 이 곳에 들어가정착하였으며 또 그 곳을 거쳐 세도 바다로 들어갔던 것이다. 황소=미인 이야기가 신라, 가락을 혼선하게 된 까닭도 이런 데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두 가닥의 길을 통하여 북상하는 이주민이 그 곳에서 일정한 저항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남으로부터 올라가는 두 길 중 『풍토기』를 통하여 비교적 상세히 볼 수 있었던 하리마로부터 가는 길에서 천일창과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가 <나라 차지>를 위하여 다투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전자를 『풍토기』에서는 <葦原志許乎命>으로 표기했으나 앞서 쓴 이즈모 신화의 『일본서기』 제 6「일서」에는 <葦原醜男>이라고 하였다. ‘노―미꼬도’가 덧붙은 데 다른 뜻은 없다. 이는 ‘라고 하는 어른’이라는 뜻이 군말로 붙은 데 불과하다. 즉 무슨 <기미(神)>라고 하는 것을 갖다 붙이는 것과 같다. 『일본서기』의 「일서」에는 <아시하라노―시꼬오>를 <스사노―오노―미꼬도>의 자손인 바로 <오―구니―누시노―미꼬도>의 별명의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어쨌든 천일창 설화 전체를 통하여 볼 때 그와 <시꼬오>와의 관계는 상호 반발적이다.
8천 명의 군대를 가지고 맞섰다는 이야기까지 있고 하룻밤을 묵어 가자는 데 대하여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요컨대 서로 골짜기 빼앗기(●谷)와 나라 차지(國占: 일본말로 구니―시메)를 하기 위하여 대립된 세력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렇게 천일창과 대립한 세역을 이즈모 세력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아시하라노―시꼬오>라는 말에서 그 세력을 이주민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시하라>는 갈대벌이라는 말이요, 이주민들이 갈대벌 황무지로 부르는 것을 일본말로 나중에 그렇게 고쳐진 것이겠다는 것을 앞서 말하였다. 아무튼 일본 열도를 가리킨 말이다. <시꼬오>는 앞서 쓴 한자 표기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못 생긴 사나이>란 뜻이다. 즉 <갈대벌의 못 생긴 사나이> <일본땅의 못난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큰 나라의 주인(大國主)> <큰 물건의 주인(大物主)> <나라를 만든 크고도 위한 어른(國作大己貴命)> <팔천 개의 과를 가진 신(八千戈神)> <큰 나라의 구슬(大國玉)> <아름나라의 구슬(顯國玉)> 등의 좋은 이름만 골라다 붙인 이즈모 국주(國主)의 한 개 별명으로 될 수는 없다. 이즈모 신화를 서술한 『일본서기』제 6의 「일서」에 <오―구니―누시(大國主)> 신의 오직 하나의 추명인 이 <아시하라노―시꼬오>는 이름은 완전히 이단(異端)적인 것이다. 생각건대 <하리마>나 그 밖의 지방에서 천일창과 같은 이주민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던 원주민 계통 호족의 이름이 이즈모 신화 속에 휩쓸려 들어간 것은 아닌가? 이 「일서」에서는 또한 <오―구니―누시>신의 아들이 181명이나 있다고 하였다. 이즈모 세력이 확대되었을 때 그의 휘하에 들어온 호족들이 모두 그 아들로도 불리웠을 수 있고, 이러한 <아들> 가운데 원주민 계통이 아주 많았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오―구니―누시>신의 별명 가운데는 원주민 대호족의 이름인 <시꼬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도 들어갔을 수 있다. <시꼬오>와 <오―구니―누시>신이 같은 이름이라고 한 『일본서기』「일서」의 말에서 필자는 그와 대항한 것으로 되어 있는 천일창의 설화가 <오―구니―누시>신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 즉 야요이 시대에 포함될 수 있는 오랜 설화로 볼 수 있겠다는 근거의 하나를 찾을 뿐이다.
『일본서기』의 천일창 설화에서 그는 야마도 왕정의 승인 하에 열도 내의 여러 곳을 제 마음대로 돌아다닌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사기』에 실린 설화에서는 나니와 상륙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신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일정한 대립 세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점에서 『하리마 풍토기』이 내용과 상통한다. 따라서 이 설화는 선주민들이 이주민에 대하여 대항을 보이던 시기 또는 각지에 호족 세력이 형성되어 새로 이주하는 집단들에 대하여 일정한 저항과 통제를 가하던 시기로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야요이 시대도 마지막에 가까운 시기가 아니었겠는가> 이 경우에 개 이주민에 대하여 반발적으로 나왔던 선주민의 세력은 이즈모 세력과 같은 신라 계통의 앞서 이주한 집단들이 패권을 쥔 국가 세력일 수도 있고 원주민들이 패권을 잡은 보다 작은 그러한 세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때에도 계속 한국으로부터 계통적인 이주민 집단이 건너갔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전대(前代)에는 겪지 못하였던 그 어떤 통제와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서기』가 말하는 것처럼 그 곳에 가서 ‘귀화’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아직 생각할 수 없다. 여전히 그들은 정착한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유지했으며, 그 중에는 다지마의 호족처럼 이즈모 동쪽에서 강력한 자기 세력을 구축해 낸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리마 지방의 강줄기들을 타고 오―미 지방으로 들어간 이주민들, 그리고 짐작컨대 나라(奈良) 평야, 즉 야마도 지방으로도 강줄기를 타고 들어갔을 이주민들도 다지마의 호족의 경우와 기본 성격에서 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 야요이 시대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일대에 그들이 들어가 ‘귀화’할 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고 원주민들에 비하여 여전히 선진한 문화와 독자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천일창 설화의 줄거리와 쯔누가―아라시또 설화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신대>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끝내고 나서 <천손>의 자손인 제 1대 <천황>인 <신무>가 휴가 지방을 떠나 기내 야마도 지방을 쳐들어가 그 곳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을 통치하게 된 때부터를 역사 시대로 잡고 있으나 그 후에도 얼마간은 별로 이야기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후반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꾸며져 있는 연대에 한국관계 설화들을 싣고 있다. 제 1 장에서 말한 『일본서기』한국 관계기사의 첫 그룹인 것이다. <천손 강림>시화나 이즈모 신화와는 달리 이 한국 관계 기사는 『일본서기』기년으로서는 <신무 동정>후 600여년이 지난 후에 있었던 일로 서술된 천일창과 쯔누가―아라시또(都怒我阿羅斯)설화다. 일본 학자들은 일찍부터 서력 기원전 660년이라는 <신무>의 기원의 연대는 순전히 후세에 조작한 것이기 때문에 600년정도 끌어 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무>라는 왕이 실재했던 것도 아니며 야마도 지방에 국가적 세력 내지는 왕권이 생긴 것은 서력 기원후 4세기 초 경으로 오늘의 많은 일본 학자들이 잡고 있는 만큼 국가의 지배자로서의 그 어떤 제왕에 관한 사실이 <신무 동정>설화에 반영되어 있다면 그 연대는 천 년도 더 끌어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언급되겠지마는 <신무 동정> 설화는 오히려 그보다도 더 끌어 내려야 하는 설화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 『일본서기』에 서술된 사건들의 전후 관계도 전도된 것이 적지 앟으므로 그 배열 순차에도 구애될 필요가 그리 없는 것이다.
천일창 설화는 <쯔누가―아라시또>설화와 함께 가락국과 신라의 왕자(王子)들이 기원전 40년∼30년대에 일본에 <귀화>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당시의 역사적 환경과 결부하여 신라나 가락의 유력한 호족이 자기 세력을 거느리고 일본에 진출한 사실을 반영한 설화임이 명백하다. 신라나 가락등 한국의 나라들로부터 꼭 왕자가 아니더라도 통치 계급에 속하는 호족의 우두머리들을 포함하는 이주민 집단이 서부 일본 각지로 진출한 것은 야요이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므로 두 설화를 이 시대에 해당시켜 생각할 수 있다.
이 설화가 『일본서기』서술 전반에서 볼 때에 그 연대 배열에서는 어떻게 조립되어 있던 그 내용면에서는 실로 큰 자리를 차지한다. 앞서 말한바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로서 이 한국 관계 설화가 『일본서기』의 역사 시기 서술에서는 처음이라는 사실은 그 <신대>서술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가 한국 관계 서술이라는 사실과 함께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 저 땅으로 진출한 한국세력이 수행한 거대한 역사적 역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저 땅의 역사 위조자들은 역대로 내려오면서 계통적으로 이 사실을 말살하고 가리워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왔지만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저들의 솜씨가 유치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쓰게 된 이상 엄연한 사실을 그렇게 완전히 가리워 내지는 못하는 것이고 아무래도 한 모퉁이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특히 이 설화는 우리 사람들의 일본 열도 진출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간 문화에 대하여 풍부하고도 선명한 표상을 많이 전한다.
『일본서기』에 실린 천일창=아메노―히보꼬 설화의 줄거리를 먼저 더듬어 보자.
2권 제 6 <수인 천황> 2년 봄 3월 조 본문에
《신라 <고니시끼(王)>의 아들 <아메노―히보꼬>가 내귀(來歸)하였다. 가지고 온 물건은 <하후도노―다마(羽太玉)> 한 개, <아시다까노―다마(足高玉)> 한 개, <우가까노―아까시노―다마( 鹿鹿亦石玉)> 한 개, <이즈시노―가다나(出石小刀)> 한 자루(一口), <이즈시노―호꼬(出●)> 한 자루(一枝), <히노―가가미(一鏡)> 한 개(一面), <구마노―히모로기(熊神籬) 한 벌(一具)등 모두 일곱 가지 물건이요, 다지마(但馬)국에 보관하여 신물(神物)로 삼았다.》
수인 3년이라는 연대는 『일본서기』기년을 그대로 신용한다면 기원전 27년에 해당한다.
『일본서기』편찬자는 이 연대에 이런 기사를 삽입해 놓고도 당대의 <천황>과는 아무런 관련을 짓지 못하고 있다. 이는 되는 대로 적당히 조립해 놓은 연대에 불과하며 그 시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증거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지마(효고 현 북부)지방의 호족이며 야마도 왕정을 대표하여 한국의 나라들과도 내왕한 것으로 되어 있는 <다지마―모리(田道間守)>의 조상 설화로서 전승되어 오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서기』의 원(原)주석 기사와 『고사기』의 기사를 가지고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는 앞서 쓴 본문 서술에 이어 「일운(一云)」이라고 한 다음에 아래와 같은 설화를 실었다.
《처음에 천일창이 배를 타고 하리마 국에 정박하여 시사하(●粟) 촌(邑)에 있었던 때에 천황은 미와기미(君)의 조상인 <오―도모―누시(大友主)>와 애마도(倭) 다다헤(直)의 조상 <나가오이찌(長尾市)>를 하리마로 보내어 천일창에게 묻기를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하였더니 천일창은 “나는 신라국의 기미(니히리:主)의 아들이다. 그런데 들으니 일본국에 성황(聖皇)이 있다 하므로 자기 나라는 동생인 <지꼬(知古)>에게 주고 귀화하러 왔노라”라고 대답하면서 바친 물건은 <하호노소―다마(葉細珠)> <아시다까노―다마(足高珠)> <우가까노―이까시노―다마( 鹿錄亦石珠)> <이즈시노―가다나(出石刀子)> <이즈시노―호꼬(出石槍)> <히노―가가미(日鏡)> <구마노―히모로기(熊神籬)> <이사사노―가다나(膽狹沙太刀)>등 아울러 여덟가지 물건이다. 이어서 천일창에게 이르기를 “하리마 국 <시사하>촌, 아와지(淡路)섬 이데사(出淺) 촌의 두 마을에 너는 마음대로 가서 살아라”라고 하였다. 이 때 천일창은 아뢰기를 “신(臣)이 장차 살 곳에 대하여 만약 신에게 은혜를베풀어 신의 뜻을 들어 주시겠다면 신으로 하여금 몸소 여러 나라를 돌아보게 하고 신의 마음에 합당한 곳을 주시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천일창은 우지( 道)강을 소급해서 북으로 오―미 국(시가 현) 아나)吾名) 촌으로 들어가 잠시 살았다. 다시 오―미로부터 와까사 국(若狹國:후꾸이 현 서부)을 거쳐 서쪽으로 가서 다지마 국에 이르러 살 곳을 정했다. 그러므로 오―미 국 <가가미(하사마(鏡谷)>의 <스에비도(陶人)>는 천일창의 종인(從人)들이다. 때문에 천일창은 다지마 국 이즈시(出島) 사람 <후도미미(太耳)>의 딸 <마다오(麻多鳥)>를 얻어서 <다지마―모로스께(但馬諸助)>를 낳았다. <모로스께>는 <다지마―히나리기(但馬日楢杵)>를 낳았고 <하나라기>는 <기요(스가)히꼬(靑彦)>를 낳았고 <기요히꼬>는 <다지마―모리(田道間守)>를 낳았다.》
『일본서기』의 앞에 쓴 본문 기사에서 볼 수 없었던 이야기로서 이 「일운」에는 <천황>과 야마도 왕정과의 관계와 천일창의 다지마 정착까지의 경로가 들어 있다. 경로에 관한 이 이야기는 물론 헛소리다. 천일창 이야기를 야요이 시대라는 이른 시기로 잡지 않고 야마도 왕정이 생겨난 후에 있었던 일로 볼 수 없겠는가. <수인 천황>이라고 하는 것과 이상 인용문의 구체적인 대화 같은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잉갸기들은 고분시대 이야기로도 몰 수 있지 않는다. 여기 나온 <스에비도>는 <스에끼(須惠器)>를 만드는 장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스에끼>는 고분 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는 토기다. 그러므로 이 <스에비도>와 결부시켜 놓으면 고분 시대의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이 이야기에는 후세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천일창을 신라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아메노―히꼬보>라고 한 것부터 후세에 일본식으로 윤색이 가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이라는 뜻이며 이주민에 관련된 인물이나 물건에 흔히 갖다 붙인 것이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더라도 ‘히’나‘보꼬(호꼬)’는 다 일본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신라 사람에 일본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신라로부터 건너간 사람이 <히보꼬>라는 이름을 가졌을 리가 없었을진대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 자체는 이 이야기가 후세에 많은 윤색이 가해졌음을 말한다. <히보꼬>로 되어 있는 인물은 실재 인물은 아니고,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호족급(級)의 사람들 내지는 훌륭한 무기와 보물을 가지고 간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킨 말일 것이다.
이와 같이 후세적인 윤색이 덧붙었다고 해서 이야기를 통털어 후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천일창은 다른 문헌들에서는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더욱 넓은 지역을 이주의 무대로 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이 고장에 큰 지배 세력이 생겨나지 않았던 사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렇다면 천일창 이야기의 원 줄거리에 담겨 있는 사실은 이주모의 국가 세력이 아직 기내 지방이라고 부르는 이 고장에까지 미쳐 오기 전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고사기』에서는 천일창 이야기를 중권의 <응신(應神: 제 15대, 270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천황>대에 수록하면서도 이야기 자체는 아주 오랜 것으로 취급하였다. 『고사기』에서는 『일본서기』와는 전연 다른 내용을 전한다.
《또 옛날 신라의 국주(國主:고시니끼)의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아메노―히보꼬(天之日矛)>라고 하였다. 이 사람이 건너왔다. 건너오게 된 까닭은 (이렇다.) 신라 나라에 한 늪(沼)이 있었다. 이름은 <아구누마(阿具奴摩)>라고 하였다. 이 늪가에서 어떤 천(賤)한 여인이 낮잠을 잤다. 이에 햇빛이 무지개처럼 빛나더니 그 배(호도)위를 가리키는 것을 어떤 천한 사나이(賤夫)가 이상히 여개 내내 그 여인의 하는 짓을 엿보았다. 그랬더니 이 여인은 낮잠을 잘 때부터 임신하여 빨간 구슬(赤玉)을 낳았다. 이에 엿보던 천한 사나이는 그 구슬을 얻어 가졌다. (그는 이를)항상 싸가지고 허리에 차고 다녔다. 사나이는 산골자기에 밭을 장만하였다. 때문에 밭갈이하는 사람들의 음식을 소 한 마리에 지워가지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 나라 임금(고니끼시)의 아들 <아메노―히보꼬>를 만났다. 이에 그 사나이에게 묻기를“무엇하러 너는 음식을 소에 지워 산골짜기로 들어가는가? 너는 필시 소를 잡아먹자는 것이렸다.”라고 말하고 그 사나이를 옥에 가두려고 하였다. 그 사나이는 대답하기를 “나는 소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밭일하는 사람들의 먹을 것을 나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에 그 허리의 구슬을 풀어 임금의 아들에게 바쳤다. 때문에 그는 천한 사나이를 용서하고 그 구슬을 가져다가 침상가에 놓았더니 곧 아름다운 계집아이로 화하였다. 이래서 혼인하여 아내(嫡妻)로 삼았다. 이에 그 계집아이는 늘 갖가지 맛좋은 것을 만들어 그 남편에게 먹이었다. 때문에 임금의 아들은 거만해져서 아내를 꾸짖었더니 그 여인은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너의 처가 될 여인이 아니다. 나의 조국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곧 몰래 작은 배를 타고 피하여 (바다를)건너 와서 나니와에 머물었다. 이는 나니와(難波)의 히메고소(比賣碁會) 신사에 자리잡은 <아가루―히메(阿加流比賣)>신이라고 한다.
이에 <아메노―히보꼬>는 그 아내가 피하였음을 알고 곧 쫓아 건너와 나니와에 이르려 할 즈음에 그 나루의 신이 가로막아 받지 않았다. 때문에 다지마 국에 정박하였다. 즉 그 나라에 머물러 다지마의 <마다오(●尾)>의 딸, 이름은 <마에쯔미(前津見)>를 얻어 낳은 아들이 <다지마―모로스꾸(多遲摩母呂須玖)>요, 이의 아들이 <다지마―히네(斐泥)>요, 이의 아들이 <다지마―히나라기(比那良岐)>요, 이의 아들이 <다지마―모리(毛理)>와 다음의 <다지마―하다까(比多詞)>와 다음의 <기요히꼬(淸日子)>의 세사람이며. <기요히꼬>가 <다가마(當摩)>의 <히메( 斐)>를 얻어 낳은 아들이 <스가노―모로오(酢鹿之諸男)>요, 다음은 딸 <스가가마―유라도미(菅●由良度美)>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다지마―하다까>가 그 조카딸 <유라도미>를 얻어서 낳은 아들이 가쯔라기(葛城)의 <다까누까―히메노―미꼬도(高額賣命:이는 <오끼나가―다라시―히메노―미꼬도>의 조상이다)>다.
그리고 <아메노―히보꼬>가 가지고 온 물건은 <다마쯔―다까라(玉津寶)>라고 해서 구슬(珠)이 두 꼬치(貫)요, 물결을 흔들어 일으키는 지느러미(浪振比禮)와 물결 끊는(浪切) 지느러미와 바람을 일으키는(風振) 지느러미와 바람을 끊는 (風切) 지느어미와 또 어끼쯔 거울(奧津鏡)과 헤쯔(邊津)거울 등 모두 여덟가지다. 이것들은 이즈시―야마헤(伊豆志八前) 신사의 대신(大神)이다.》
『고사기』에 나오는 이 천일창의 신화와 비슷한 내용의 황소, 구슬, 미녀의 도망 이야기는 『일본서기』애서는 천일창 설화를 삽입한 <수인 천황>3년의 전년에 있었던 미마나와의 관계 기사에 대한 「일운」기사로서 싣고 있다. 즉 그 본문에 <수인 천황>2년 조에 미마나 사신 <소나가시찌(蘇那曷叱智)>가 귀국했다는 기사를 싣고 미마나와의 관계가 나온 김에 하나 써 넣는다는 식으로 <쯔누가―아라시또>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소나가시찌>의 본문 기사에 대한 「일운」기사는 두 개가 있고 첫 「일운」기사에는 미마나의 국명에 관한 설화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이것은 나중에 검토하기로 하고 거기서 『고사기』의 천일창 설화 내용과 비슷하게 되어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일운(一云) 미마끼(御間城) 청황 때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배 한척을 타고 고시(越)국 개히( 飯) 포구에 머물렀다. 때문에 그 곳을 <쯔누가(角鹿)>라고 한다.
그에게 묻기를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오호―가라국왕(意富加羅國王)의 아들이요, 이름은 <쯔누가―아라시또>이며 일명은 <우시끼―아리시찌―감게(千斯岐阿利智千岐)>다. 전해 들은 바에 일본국에는 성황이 있다 하므로 귀화하려고 아나도에 이르니 마침 그 나라에 사람이 있어 이름을 <이쯔쯔―히꼬(伊都都比古)>라 하더니 신(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곧 이나라의 왕(기미)다. 나를 빼놓고 다른 왕은 없으니 다시는 다른 데로는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신의 생김생김을 자세히 보아하니 필시 왕이 아님을 알았다. 곧 돌아가 섬들과 포구들에 유련하다가 북해로부터 이즈모 국을 거쳐 예지 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야기는 미마나 국명과 관련된 설화로 넘어가 밑도 끝도 없이 되고 말았는데, 이렇게 된 것을 보충하려고 함에서인지 『일본서기』편찬자는 또 하나의 「일운」기사를 삽입하였다. 이 두 번째「일운」기사가 『고사기』의 천일창 설화와 흡사한데 주인공이 천일창이 아니라 <쯔누가―아라시또(여기서는 대가야국의 왕자라고 하지 않았다.)>가 황소에 음식을 지워가지고 갔었다고 한다. 그는 소를 잃었는데 알고 보니 <군가(郡家)>에서 잡아 먹었기 때문에 <군공(郡公)>들로부터 그 보상으로 붉은 구슬이 아니라 흰 구슬을 받았고, 이 흰 구슬을 그는 자리(寢床) 속에 넣어 두었더니 미려(美麗)한 동녀(童女)로 화하였다고 하며 <아라시또>는 기뻐서 그에게 장가들려고 하였으나 밖으로 나간 사이에 동녀는 피하고 말았으므로 자기 처에게 물은즉 그 동녀는 동방으로 향하여 가버렸다고 하였다. <아라시또>는 바다로 해서 “일본국으로 들어왔고”찾는 동녀는 <나니와>에 이르러 <히메고소> 신사의 신이 되었고 또 도요 국( 國:큐슈 섬의 동부)의 미찌노―구찌(國前)군에 이르러 >히메고소>신사의 신으로 되어 두 곳에서 다 제사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고사기』의 천일창 이야기와 이 『일본서기』「일운」기사의 <쯔누가―아라시또>의 기사가 미인의 이야기에서 혼선이 된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두 인물이 다 설화상의 존재이므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이 이야기들을 통하여 신라 계통 이주민과 못지 않게 가락 계통 이주민에 관한 사실도 고 문헌들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두 설화에 나타난 지역과 연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 천일창이 정착하여 그 자손이 번영한 고장으로 되어 있는 곳은 다지마 지방, 즉 이즈모의 동쪽 효고 현의 북부이며 동해에 면한 지역이다. 이 곳에 정착하기까지의 그의 활동과 관련된 지역으로는 하리마의 시사하 촌(오늘도 같은 이름의 군이 효고 현에 있다.)아와지 섬(오―사까 시꼬꾸 사이에 있는 큰 섬)과 그리고 우지(宇治)강을 오―사까 부근에서 소상하여 그 상류 일대인 오미 지방(사가 현)과 그 북쪽의 화까사 지방을 거쳐 다지마로 퍼져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서부 일본의 중앙부를 남쪽 세도 바다쪽에서 상륙하여 효고, 오―사까, 교토, 시가, 후꾸이 등 현의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된다. 이는 <이즈모>신화에서 이즈모 세력이 서부 일본의 중앙부를 서북쪽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동방향으로 뻗었던 것과는 반대 방향이다. 『고사기』에서 천일창은 나니와(오―사까)에 상륙하려다가 길을 막는 자가 있어서 상륙하지 못하고 되돌아서서 다지마 지방으로 갔다고 했는데 이를 세도 내해를 되돌아 다시 동해 바다로 나가 쥬고꾸 반도의 북해안을 따라 다지마까지 우회했던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상, 아니와에서 상륙하지 못하였으므로 효고 현 해안에나 상륙하여 육로로 북상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사까 해안에 상륙해서 다지마로 가는 길 외에 제 2의 북상로가 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리마(효고 현) 시사하 촌을 거치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첫째 「일운」기사에서는 천일창이 하리마 국의 시사하 촌에 배를 댄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 시사하라는 곳은 우주(宇頭)강 [오늘의 이히보(●保)강]의 상류로서 내륙으로 상당히 들어가 있다. 이 강을 따라 북상했다면 그 강구를 거쳤을 것이다.
『하리마 국 풍토기』에 해당한 기사가 있다. 그 이히보 군 이히보 리 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이히보 리: 이히보라고 칭하는 까닭은 이 마을이 이히보 산에 의지했기에 산을 인연하여 이름 삼았다.
이히보 오까(丘:이히보 언덕―필자): 이히보―오까라고 이름 지은 까닭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천일창)>가 가라구니로부터 건너와 우즈 강 강구에 이르러 묵을 곳(宿處)을 <아시하라―시꼬오노―오노―미꼬도(葦原志許乎命)>에게 청하였다. “너는 국주(國主:구니누시)다. 나는 묵을 곳을 얻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시꼬>는 곧 바다 가운데를 허락하였다. 그 때 객신(客神:천일창―필자)은 칼을 가지고 바닷물을 휘저으며 갔다. 주신(主神)은 객신의 요란한 짓을 두렵게 여겨 먼저 나라를 차지하려고 돌아 올라가(巡上) 이히보에 이르러 밥을 먹었다. 그런데 입에서 밥알이 떨어졌다. 때문에 이히보―오까(粒丘)라고 이름 지었다. 또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곧 지팡이 꽂은 곳에 삼(寒泉)이 솟아나 드디어 남북으로 흘렀다.》
이히보 리에서 강을 좀더 소급하면 시사하 군으로 되는데 같은 『풍토기』의 시사하 군 <가와또>촌 조에는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가 이 마을에 묵으면서 말(勅)하기를 “강물소리 심히 높다.”고 하였다. 때문에 <가와또(川音)>라고 한다.》
라고 말하였다. 『풍토기』의 교주자는 이 마을을 시사하 군의 최남단 우즈강의 유역으로 잡고 있다.
『풍토기』본문에서 같은 시사하 군 내의 <가와또>촌의 다음 다음 마을로서 든 <우바히다니> 조에는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 두 신이 이 골짜기를 서로 빼앗았다. 때문에 <우바히다니(●谷)>라고 한다. 그들이 서로 빼앗던 까닭으로 골짜기 모양이 꼬부라진 것이 칡넝쿨 같다.》
라고 하였고 같은 군의 <다까야> 리 조에는
《<다까야>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가 말(告)하기를 “이 마을은 높은 것이 다른 마을보다 월등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다까야(高家)>라고 한다》
라고 하였고 우즈 강의 지류로 『풍토기』의 교주자가 치고 있는 <아나가(같은 시사하군)> 강 조에는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와 나라 차지(國占)을 하였을 때 우는 말이 있어 이 강에서 마주쳤다. 때문에 <아나가(伊奈加)>강이라고 한다.》
라고 하였다. 말이 우는 것을 일본말로 ‘이나나꾸’라고 한다.
전기 『풍토기』의 교주자가 우즈 강의 썩 상류 유역으로 잡는 <하까>조 에는
《나라 차지하던 때에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가 먼저 이 곳에 이르고 이와 대신(伊和大神)은 나중에 이르렀다. 이에 대신이 괴이히 여겨 말하기를 “헤아리지 못했도다. 먼저 왔구나”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고 같은 우즈 강 상류 유역으로 잡는 <미가다> 리 조에는
《<미가다>라고 이름 지은 까닭은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와 검은 흙의 시니 산(志●嵩)에 이르자 각각 칡(黑葛)넝쿨 세 가닥을 가지고 발에 붙이고 던지었다. 그 때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의 칡은 한 가닥이 다지마의 개다(氣多) 군에 떨어지고 한 가닥은 야부(夜夫) 군에 떨어지고 한 가닥은 이 마을에 떨어졌다. 때문에 미가다 라고 한다.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의 칡은 모두 다지마 국에 떨여졌다. 때문에 다지마의 이즈시(伊都志)의 땅을 차지하였다.…》
라고 하였다.
『하리마 풍토기』는 앞서 앞서 간단히 소개한 바도 있지만, 교주자의 해설에 의하면 713년 [화동(和銅:일본 연호) 6년] 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까지 우즈 강 유역에 이상과 같이 여러곳에 천일창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는 것은 더 상대로 소급하면 이 강 유역의 더욱 많은 마을들이 천일창 설화를 가진 이주민의 부락들이었음을 생각게 한다.
우즈 강에서 좀 동쪽에 있는 오―가와(大川) 강은 히히보 군 동쪽의 시까마(식磨) 군(하리마 국)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시까마 군에는 히라노(枚野) 마을이 있고 그 일명은 <시라구니(新羅訓)> 촌이라고 했으며, 그러한 이름이 붙은 까닭은 “옛날에 신라국 사람들이 왔을 때에 이 마을에 묵었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이 <시라구니> 촌에서 오―가와 강을 좀더 소급하면 <가무가찌(神前)> 군 땅이다. <가무자끼>군에 들어서서 강줄기를 따라 좀더 올라가면 바로 강 기슭에 <누까―오까(粳岡)>이라는 지명이 있고 이 지명에 대하여 『풍토기』는 다음과 같이 썼다.
《누까―오까에서는 이와 대신(伊和大神)과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의 두 신이 각각 군사를 내어 서로 전쟁하였다. 이 때에 대신의 군대가 모여서 벼를 짷어 그 겨(일본말의 누까―필자)가 쌓여서 산으로 되었다. 그 키를 놓은 곳을 하까(墓)라고 하는데 또 기무례(城牟禮) 산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城)을 쌓는 곳에는 흠무다(品太) 천황때에 건너온 가다라(百濟)사람들이 습속(習俗)에 따라 성을 쌓고 살았다고 한다. 그 자손은 가와노베(川邊) 마을의 미야께(三家) 사람 야시로(夜代)등이다.
야찌구사(八千軍)라고 말하는 까닭은 <아메노―히보꼬노―미꼬도>에게 군사 8천 명이 있었다. 때문에 야찌구사노(八千軍野)라고 하는 것이다.》
시까마 군과 그 밖의 군들에서는 구다라(百濟) 사람과 <가라>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나 천일창 설화처럼 계통적이 되지 못한다. 시라기, 가라, 구다라는 왕왕 일본 고문헌들에서 혼동되어 있으므로 여기의 <구다라>는 신라를 가지고 그렇게 전승된 것이라고도 보이며, 가라라고 한 것도 신라 이야기의 와전일 수 있다. 이 문제는 더 건드리지 않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이히보 강 유역 뿐만 아니라 다른 강의 유역에서도 농사를 짓기 편리한 곳을 택하여 우리 이주민들이 많이 살았으며, 그 중에서도 신라 계통이 하리마에는 많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 두는 데 긫겠다. 다지마 국 형편도 비슷했을 것이나 그 곳의 『풍토기』는 전하지 않는다.
이주민등은 우주 강을 까고 논 농사에 적당한 벌판을 차지하여 부락들을 형성하였고, 이 부락들은 다시 연합하여 보다 우즈 강 유역의 이히보 군(고호리:郡)를 형성하였다. 이상에서 인용한 우즈 강 유역의 이히보 군(고호리)과 시사라 군(고호리)은 남북으로 흐르는 이 강 하나를 끼고 이히보는 그 중류 이하를, 시사하는 즈 중류 이상을 점거하고 있다. 이리하여 교주자가 작성한 『풍토기』의 부록의 지도에 의하면 이 군들은 남복으로 강줄기를 따라 길게 생긴 군으로 되었다. 시까마 군(고호리)이라는 것도 길이가 우즈 강의 반 밖에 안 되어 보이는 남북으로 흐르는 세 개의 작은 강 유역을 포괄하는 보기 싫을 정도로 남죽으로 긴 군으로 되어 있고, 가무자끼 군(고호리)이라는 것도 오―가와 강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만 긴 군으로만 되어 있다. 야요이 시개에 들어와서 농경을 하게 됨에 따라 수리(水利)애 편한 강 유역 곳곳에 부락이 형성되고 그것들을 통합한 고을이다 보니 그러한 모양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일본 학자는 야요이 시대 후반기로부터 고분 시대에 걸쳐 일본에는 수다한 지역적 통일 집단이 존재한 것을 지적하고,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바다와 하천의 무인 <젤타> 지대라던가 큰 하천과 산 언덕 등의 자연 경계로 확연히 또는 완만히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말하면서 거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물의 이용을 위한 조건을 갖추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분 시대 전반기에 걸친 시기에 수장들을 묻은 대형 고분의 “계보적(系譜的)인 축조에서 본 지역적 통일 집단의 존재 방식”을 예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지도는 효고 현의 서쪽 이웃인 오까야마 현의 동부, 요시이(吉井) 강 유역에 형성된 <통일적 집단>이다. 이 집단은 소평야를 단위로 하고 산과 언덕으로 서로 분리되며, 이를 몇 번 되풀이하는 가운데 몇 개의 비슷한 충적 평야들을 형성하였고, 평야는 부락들과 농경지의 자리로 되고 험한 산굽이들은 큰 부락과 큰 부락과의 경계선으로 되고 큰 부락들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는 방어 진지로도 되었을 것이다.
『하리마 풍토기』의 이히보 군과 사사히 군을 우즈 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지적한 것들만 가지고도 천일창의 이주민 부락들은 바로 이렇게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것 들 중에서 적게 남은 것이 역사 자료다. 『풍토기』편찬 연대보다 5∼6세기나 7∼8세기 정도로 소급될 수 있는 야요이 시대 당시에는 천일창 설화에 나타난 우리의 이주민 부락들은 우즈 강과 오―가와 강 유역의 충적 평야를 뒤덮었으리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며, 큰 마을들의 연합체인 고호리들이 다시 연합하여 이주민들이 마침내 <국>을 이루었을 것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천일창의 설화는 다지마에 살았고 나중에는 야마도 왕정에서 유력한 지위에 있게 되었던 한 신라 계통 호족의 조상 설화다. 그 조상이 거쳐 왔다고 하는 복잡하고도 긴 경로가 그대로 천일창이라는 개인을 중심한 특정한 집단이 거쳐온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특정한 인물로는 보지 말아야 한다고 앞서 말하였다. 중요한 문제는 『하리마 국 풍토기』에서도 볼 수 있는 바의 충적 평야를 가진 서부 일본의 강들의 유역 일대에 비록 우즈 강이나 오―가와 강 유역 같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 집단들, 집작컨대 진한=신라 계통 이주민 집단들이 많이 정착하여 <무리>와 <고호리>를 이루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야요이 시대에 걸쳐 서부 일본의 중앙부 내륙 깊이까지 종황하는 강줄기를 따라 들어가 우리 이주민의 집단은 평야 지대에 정착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는 나중에 일본의 중심지대로 되는 야마도 지방도 결코 이와는 달리 될 수 없었으리라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이 말이 결코 사실과 어긋나지 않은 것임을 앞으로 <신무 동정>설화에서 보게 될 것이다.
서부 일본의 중앙부(대체로 기내 지방)를 세도 바다 쪽에서 상륙하여 북상하는 경로의 상륙점은 나니와(오―사까)나 하리마(효고)의 해안 포구들이었다. 이 곳 포구들에 이르기까지에는 큐슈 섬과 시꼬꾸 섬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쯔누가―아라시또>설화에 북 큐슈 동부의 도요구니( 國)는 큐슈 섬 동쪽에서 세도 바다에 면한 지대요, 큐슈 섬에서 이 바다로 들어가는 출발 지대다. 이 도요구니 일대는 가락 계통 사람들의 이주 지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앞서 말하였다. 이 곳은 가락 계통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고장이었지마는 동시에 나중에는 고국에서 신라 영역에 포괄되는 지역 사람들, 즉 진한 지역의 사람들도 이 곳에 들어가정착하였으며 또 그 곳을 거쳐 세도 바다로 들어갔던 것이다. 황소=미인 이야기가 신라, 가락을 혼선하게 된 까닭도 이런 데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점은 두 가닥의 길을 통하여 북상하는 이주민이 그 곳에서 일정한 저항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남으로부터 올라가는 두 길 중 『풍토기』를 통하여 비교적 상세히 볼 수 있었던 하리마로부터 가는 길에서 천일창과 <아시하라노―시꼬오노―미꼬도>가 <나라 차지>를 위하여 다투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전자를 『풍토기』에서는 <葦原志許乎命>으로 표기했으나 앞서 쓴 이즈모 신화의 『일본서기』 제 6「일서」에는 <葦原醜男>이라고 하였다. ‘노―미꼬도’가 덧붙은 데 다른 뜻은 없다. 이는 ‘라고 하는 어른’이라는 뜻이 군말로 붙은 데 불과하다. 즉 무슨 <기미(神)>라고 하는 것을 갖다 붙이는 것과 같다. 『일본서기』의 「일서」에는 <아시하라노―시꼬오>를 <스사노―오노―미꼬도>의 자손인 바로 <오―구니―누시노―미꼬도>의 별명의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어쨌든 천일창 설화 전체를 통하여 볼 때 그와 <시꼬오>와의 관계는 상호 반발적이다.
8천 명의 군대를 가지고 맞섰다는 이야기까지 있고 하룻밤을 묵어 가자는 데 대하여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요컨대 서로 골짜기 빼앗기(●谷)와 나라 차지(國占: 일본말로 구니―시메)를 하기 위하여 대립된 세력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렇게 천일창과 대립한 세역을 이즈모 세력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아시하라노―시꼬오>라는 말에서 그 세력을 이주민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시하라>는 갈대벌이라는 말이요, 이주민들이 갈대벌 황무지로 부르는 것을 일본말로 나중에 그렇게 고쳐진 것이겠다는 것을 앞서 말하였다. 아무튼 일본 열도를 가리킨 말이다. <시꼬오>는 앞서 쓴 한자 표기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못 생긴 사나이>란 뜻이다. 즉 <갈대벌의 못 생긴 사나이> <일본땅의 못난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큰 나라의 주인(大國主)> <큰 물건의 주인(大物主)> <나라를 만든 크고도 위한 어른(國作大己貴命)> <팔천 개의 과를 가진 신(八千戈神)> <큰 나라의 구슬(大國玉)> <아름나라의 구슬(顯國玉)> 등의 좋은 이름만 골라다 붙인 이즈모 국주(國主)의 한 개 별명으로 될 수는 없다. 이즈모 신화를 서술한 『일본서기』제 6의 「일서」에 <오―구니―누시(大國主)> 신의 오직 하나의 추명인 이 <아시하라노―시꼬오>는 이름은 완전히 이단(異端)적인 것이다. 생각건대 <하리마>나 그 밖의 지방에서 천일창과 같은 이주민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던 원주민 계통 호족의 이름이 이즈모 신화 속에 휩쓸려 들어간 것은 아닌가? 이 「일서」에서는 또한 <오―구니―누시>신의 아들이 181명이나 있다고 하였다. 이즈모 세력이 확대되었을 때 그의 휘하에 들어온 호족들이 모두 그 아들로도 불리웠을 수 있고, 이러한 <아들> 가운데 원주민 계통이 아주 많았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오―구니―누시>신의 별명 가운데는 원주민 대호족의 이름인 <시꼬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도 들어갔을 수 있다. <시꼬오>와 <오―구니―누시>신이 같은 이름이라고 한 『일본서기』「일서」의 말에서 필자는 그와 대항한 것으로 되어 있는 천일창의 설화가 <오―구니―누시>신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 즉 야요이 시대에 포함될 수 있는 오랜 설화로 볼 수 있겠다는 근거의 하나를 찾을 뿐이다.
『일본서기』의 천일창 설화에서 그는 야마도 왕정의 승인 하에 열도 내의 여러 곳을 제 마음대로 돌아다닌 것으로 되어 있으나 『고사기』에 실린 설화에서는 나니와 상륙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신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일정한 대립 세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점에서 『하리마 풍토기』이 내용과 상통한다. 따라서 이 설화는 선주민들이 이주민에 대하여 대항을 보이던 시기 또는 각지에 호족 세력이 형성되어 새로 이주하는 집단들에 대하여 일정한 저항과 통제를 가하던 시기로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야요이 시대도 마지막에 가까운 시기가 아니었겠는가> 이 경우에 개 이주민에 대하여 반발적으로 나왔던 선주민의 세력은 이즈모 세력과 같은 신라 계통의 앞서 이주한 집단들이 패권을 쥔 국가 세력일 수도 있고 원주민들이 패권을 잡은 보다 작은 그러한 세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때에도 계속 한국으로부터 계통적인 이주민 집단이 건너갔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전대(前代)에는 겪지 못하였던 그 어떤 통제와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서기』가 말하는 것처럼 그 곳에 가서 ‘귀화’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아직 생각할 수 없다. 여전히 그들은 정착한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유지했으며, 그 중에는 다지마의 호족처럼 이즈모 동쪽에서 강력한 자기 세력을 구축해 낸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리마 지방의 강줄기들을 타고 오―미 지방으로 들어간 이주민들, 그리고 짐작컨대 나라(奈良) 평야, 즉 야마도 지방으로도 강줄기를 타고 들어갔을 이주민들도 다지마의 호족의 경우와 기본 성격에서 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 야요이 시대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일대에 그들이 들어가 ‘귀화’할 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고 원주민들에 비하여 여전히 선진한 문화와 독자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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