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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도 당나라 관복을 입었나요?

작성자백제사랑| 작성시간09.12.26| 조회수389|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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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지수신 작성시간09.12.27 이후 기록에 신라 본래의 복식으로 회귀했다는 내용이 없으므로, 아마도 문무왕 때까지가 아니라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되었을겁니다. 그렇게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뿐만아니라 이후 당의 의복은 사실상 우리 민족의 의복을 대체하게 됩니다. 명/청대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의 옷을 '당나라 옷'이라 했고, 실제로 고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의상과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시대 의상은 전혀 다릅니다. 진덕왕대의 당복식 수용은 여러모로 민족사적 의미가 큰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9.12.27 진덕왕대의 당복식 수용은 여러모로 민족사적 의미보다도 신라가 얼마나 다른 문화를 재빠르게 흡수 수용해 나갔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겠지요...오늘날 우리가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복장이나 한복을 민족사적 의미에서 고집할 수 없듯이 선진 유행에 따르든 편리성에 따르든 합리성에 따르든 자신의 것보다 장점이 많으면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바로 발전이지요!
  • 작성자 海東成國 작성시간09.12.27 자주적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ㅠ.ㅠ
  •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9.12.27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신라가 당나라의 관복등을 도입한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당은 이미 신라에 비해 여러 문물이 들어온 선진 문화국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관직과 관복을 당나라의 것으로 동일시하게 맞추었다면 일단 그품계와 관복으로 당나라와 접촉시(=사신)에 당나라 조정의 그품계와 동등한 인식과 함께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즉 소국이라하여 정3품급이 사신을 갔는데도 당나라에서는 종5품급 대우도 안해주는 비극은 최소한 없앨 수 있는 효과를 낼수가 있다는 것이지요..자주적인 문제가 아닌 실리적인 즉 대국의 선진 다문화를 빠르게 도입하고 모방, 흡수시켜 나가는 정책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9.12.27 우선 신라왕은 당의 관복을 입을 수가 없었다고 보여집니다..첫째는 신라왕이 입을 수 있는 관복이 해당되는 직급이 없어 그에 따른 관복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렇다고 당황제가 입는 관복을 그대로 똑 같이 입을 수도 없기 때문에 신라왕은 고유복장 그대로 이거나 당나라에서 수입된 비단정도로 디자인해서 입는 정도 이겠지요..물론 비단자체도 신라 자체생산품 보다도 질이 좋을 경우에 해당되겠지요...선진문화와 문물 도입에 자존심을 걸고 쇄국정책을 쓸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역사님 작성시간09.12.27 당은 이미 신라에 비해 여러 문물이 들어온 선진 문화국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당이 신라보다 선진적이였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도리어 신라의 서라벌등 도시 문명을 보면 규모를 떠나서 당보다 더 했으면 했지요.. 당시의 복식등 변화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에서 생존을 위한 친당으로의 선회를 위한 일종의 자구책에 따른 변화로 볼수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역사님 작성시간09.12.27 이러한 복식도 주로 귀족계급에 한한 것으로 일반서민과는 관련이 적었으며 따라서 신라말기에서의 통일신라의 복식은 당제도를 상류계급의 복식으로 하고 하류계급에서는 국제(國制)를 습용하여 지키도록 했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우리의 복식문화가 중공에게 미친 부분도 존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미주가효 작성시간09.12.27 역사님// 이 토론 주제는 아는 바 적어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만, '중공' 부분은 조금 잘못 쓰신 것 같습니다. 중공은 공산중국을 말하므로 현대 중국을 지칭할 때에는 그리 문제될 게 없겠으나, '공산당' 이라는 것이 발생하기 이전의 중국을 '중공' 이라 부르기는 무리라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고구려벌판 작성시간09.12.29 역사님/신라의 도시 문명이 당의 도시 문명보다 뛰어났다? 일단 도시 문명이라는 말 자체부터 조금 맞지 않는 말이라 보이는군요. 역사님께서는 도시 문명을 '도시 발전 정도'로 쓰신것 같습니다만 현재 학계에서 도시 문명이란 도시를 중심으로 문명이 탄생한 문명권을 지칭합니다. 예를 들면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그리스 문명이 있겠지요.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도 도시는 존재했으나 그리스 문명의 도시와는 다른 행정적,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경제, 문화적 성격은 부차적인 것이었죠. 두 번째로 그 당시 신라 도시 발전도가 당의 도시와 견주어졌거나 혹은 더 뛰어났다는 역사님의 주장에도 의문이 생깁니다.
  • 답댓글 작성자 고구려벌판 작성시간09.12.29 중국에 있어 도시의 역사는 상 시대의 읍부터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도시라 부를 수 있는 성읍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 속에서 도시문화라는 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춘추전국시대라고 보여집니다. 전국시대 말부터 도시가 중앙집권체제에 편입되게 되고 진한시대에 이르게 되면 중국의 도시들은 고도로 발전한 행정체제에 의해 황제가 거주하는 도읍을 정점으로 편제되게 됩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경제력의 발달, 유목민의 개방적 성격으로 행정, 군사적 도시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까지 갖춘 도시의 면모를 보이지만 근대 이전의 중국 도시는 여전히 행정, 군사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중국의 도시는 앞에서
  • 답댓글 작성자 고구려벌판 작성시간09.12.29 언급하였듯이 중앙집권체제와 고도로 발달한 행정관료체제를 기반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에서 도시가 계획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부터입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화려한 서라벌의 모습입니다. 물론 앞에서 잠깐 언급한 그리스의 예처럼 도시가 발전할 수 있는 방법과 가능성은 많습니다만, 역사님님의 말씀대로라면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이전, 거대했던 서라벌의 모습을 묘사한 사료가 존재해야 하는데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는 없습니다. 혹시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 백제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12.28 저는 신라가 당나라관복을 입게 된게 아주 단기간에만 한건줄 알았는대.. 당나라가 멸망되는 이후까지도 지속됬을 가능성도 크군요... 더군다나 이러한 것이 훗날 한국 복식역사에 크나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도 놀랍네요^^ 긍정적인 면도 없잖아 있긴 하겠으나, 나름 부정적인 면도 전혀 없다곤 할수 없다고 보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신라의 당나라 관복을 입게 된것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입니다^^
  •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9.12.28 그런데 당나라의 관제와 관복을 신라가 도입하기전의 신라의 복식과 관제는 신라 건국시 부터 내려오는 신라 고유의 것이었을까요? ...신라 본래의 복식은 어디서 유래된 것이었을까요?..신라 고유복식이라?...진한족 부터?, 박혁거세로 부터?, 석탈해로 부터?..아니면 미추왕 때부터??...복식은 수시로 변천되고 바뀌면서 Upgrade 되어 발전된 것이 아닐런지요?..
  • 답댓글 작성자 백제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12.28 복식이야 수시로 변천되고 발전되가지만... 중요한것은 나라의 자주성을 저버렸다는 것이고, 그 나라의 신하들이 입던 관복을 신라 신하들이 입게됨으로써 속국화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죠...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많고 복식의 발전을 이끈 점도 분명하긴 하지만.. 비판해야 할점은 분명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당시 신라가 어쩔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더라도요. ^^
  • 답댓글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9.12.28 뭐 자주성이야 자신에게 힘이 있을때는 당연히 지켜야 할 문제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자주성 보다는 실리를 택하는게 현명한 방법이겟지요..당시 신라정세로 보아 신라인들이 그렇게 선택함은 나름대로 국가의 손익을 계산한 방법이겠지요..문제는 신라의 실리선택이 훗날 최후까지 살아 남았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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