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에 드러난 미륵의 모습은 당시의 미적 기준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혹시 화랑의 모습을 본뜬 것은 아닐까?
1.
『삼국유사』 제4 탑상에 실린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와 국선 미시랑(未尸郞)에 관한 이야기에는 옛 신라인들이 화랑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 부분적으로 추측하게 해주는 부분이 조금 보인다. 이 부분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진지왕 대에 흥륜사(興輪寺)에는 진자(眞慈)【혹은 정자(貞慈)라고도 한다.】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항상 당주(堂主)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아가 서원을 발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으로 화하시어 세상에 출현하셔서 제가 항상 거룩하신 모습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들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중략)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를 모아 두루 마을을 다니면서 찾았다. 한 소년이 있었는데, 화장을 곱게 하고 용모가 수려하였으며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보자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분이 미륵선화다”고 하였다. 이에 다가가서 묻기를, “낭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성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그를 가마에 태우고 들어가서 왕에게 뵈었더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그의 자제들에 대한 화목과 예의와 풍교(風敎)는 보통과는 달랐다. 그 풍류가 세상에 빛난 지 거의 7년이 되더니 문득 간 곳이 없었다. 진자는 슬퍼하며 그리워함이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미사랑의) 자비로운 은택에 흠뻑 젖었고, 맑은 교화를 친히 접했으므로 스스로 뉘우치고 고쳐서 정성으로 도를 닦아 만년에는 또한 세상 마친 곳을 알 수 없다.
설명하는 이가 말하기를, “미(未)는 미(彌)와 음이 가깝고, 시(尸)는 력(力)과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하므로 그 근사함에 가탁하여 수수께끼처럼 한 것이다. 대성(大聖)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아마 이 땅에 인연이 있었으므로 때때로 나타나 보인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彌勒仙花)"라고 하고 남에게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륵의 유풍이다. 길 옆에 섰던 나무를 지금도 "견랑(見郞)"이라고 이름하고, 또 항간의 말로는 "사여수(似如樹)"【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 『삼국유사』 제4 탑상편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 中
다음의 기록에서 언급되는 국선(國仙), 즉 화랑을 지냈던 미시랑은 단순히 용모만 아름다운 소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사랑은 곧 미륵이 속세에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온 존재, 즉 미륵선화(彌勒仙花)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 존재 자체에 어떤 불교적 신성함이 부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이런 설화가 나오게 된 것일까? 다시 말해 화랑의 존재는 신라의 불교에서 어떤 존재로 인식되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당염립본왕회도에 실린 삼국의 사신의 모습.
좌로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2.
대체로 신라의 화랑도는 과거에 일본의 미시나 아키히데가 주장하였듯이, 인류학·민속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 시초를 원시사회의 유풍에서 기원을 두며 시작된 일종의 청소년집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후에 어떤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요건 하에 국가의 제도로 정비되었던 것이다.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화랑, 즉 국선은 대체로 진골 가운에서도 용모가 아름다우면서 품행이 단정한 인물을 엄선하여 뽑았으며, 화랑이 이끄는 화랑도는 진골보다는 급이 낮은 귀족부터 시작해서 평민과 승려도 포괄하고 있었다. 다양한 계층의 소년들을 포괄할 수 있는 화랑도는 곧 미래를 책임질 소년들로 하여금 일종의 집단 생활을 통해 한정적이지만 신분의 벽을 허물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 내부의 결속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화랑도는 그 존재의의가 단순한 청소년단체에 그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화랑은 그 고귀한 신분부터 시작해서 아름다운 용모 및 올곧은 성격과 품행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조건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단순한 청소년집단의 수장이 아니라 어떤 신성하고 중대한 의미가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중략)
당(唐)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국기 (新羅國記)》에서 말하기를, “귀족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
여러 해 뒤에 왕(진흥왕)은 또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명령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처음 설원랑 (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 『삼국유사』 제 4 탑상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
이처럼 신라인들이 화랑을 중시하며 또 이들을 숭상했던 까닭은 앞서 언급한 『삼국유사』에 실린 미시랑의 이야기에서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들이 화랑을 숭상한 까닭은 그의 신분이 단순히 고귀한 진골이라거나 혹은 용모가 빼어난 미소년인 때문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고 전륜성왕으로써 천하를 경영하는 신라의 왕을 돕는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전륜성왕을 보좌하는 미륵의 화신이라면 모름지기 그 존재가 자못 평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끌 수 있도록 설화에 보이는 미시랑의 경우처럼, 아름다운 용모에 화려한 치장을 한 미소년이야 했으며, 또한 미륵의 화신답게 그에 걸맞는 올곧은 인품과 품행 및 평판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3.
이러한 화랑의 특성은 고대 불교가 지닌 몇 가지의 특성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대의 불교 사상은 정복군주의 출현을 암시하고 이를 통해 국왕의 권위를 드높이고 신성화할 수 있는 전륜성왕 신앙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개념에 따르면, 전륜성왕은 무력으로써 이웃 국가들을 굴복시키고 그 땅에 불법의 통치를 펼치는 강력한 왕이었다. 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성행했던 것도 이러한 교리의 영향이 컸으니, 당시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의 견제를 받고 있었던 국왕이 속했던 크샤트리아 계급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당시 인도의 정복군주로써 불교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던 아소카 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신라의 왕들 또한 이러한 개념을 수용하여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 같다. 예컨데, 진흥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아들들에게 동륜이나 사륜 등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면에서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후에 흔히 말하는 성골(聖骨)이라는 개념도 아마 진평왕 대에 이르러 국왕과 그 근친왕족들을 신성화하기 위한 개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진평왕이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했기에 결국 성골은 진평왕과 그 딸들인 선덕여왕·진덕여왕의 대에서 끊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전륜성왕을 도와주는 존재는 다름아닌 미륵이었다. 전륜성왕이 세상에 태어나 불법통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면, 미륵 또한 속세에 화생하여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땅에서 중생들을 교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륵보살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근원이 브라만가에서 윤회한 것이라고 한다. 크샤트리아가 신라 사회 내에서 왕족에 해당된다면 브라만는 어찌 보면 귀족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귀족들은 국가적으로 불교를 공인하게 되면서 자신들 귀족 가운데 세상을 교화할 미륵이 태어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불교공인 이전의 고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있던 전통적인 무격신앙과 부합되는 요소가 있었다. 미륵선화는 곧 고귀한 신분의 자제로 환생한 존재로써 미사랑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선과 같은 개념으로 받들어졌으니 곧 신성함과 인간이 결합된 요소였다. 이는 곧 제사를 통해 제사를 통해 인간인 제사장의 몸에 신성한 기운을 담고자 했던 전통신앙과 흡사한 일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신라 귀족들은 전륜성왕과 같은 꺼림칙한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공인에 찬동했던 것 같다. 즉 신라의 왕들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전륜성왕의 개념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 그 지배력을 드높이며 신성화하고자 했다면, 귀족들 또한 전생의 업보에 따라 윤회하면서 신분이 결정된다는 윤회론적 요소 및 귀족으로부터 고귀한 미륵이 태어난다는 미륵신앙을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적 정통성을 추구하고 엄격한 신분제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혈통적인 정체성을 공고히 했던 것 같다. 불교의 공인은 이처럼 왕실과 귀족 쌍방의 이해관계에 따른 일종의 타협 속에서 이루어졌고, 화랑은 고대의 청소년집단에 이러한 불교적 요소가 더해져 생겨난 사회적·종교적 산물과 같았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화랑이 어떤 이유에서 신성한 미륵의 화신으로 떠받들어지며 신라인들에게 숭앙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三品彰英 저·이원호 역, 『신라화랑의 연구』, 집문당, 1995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 3 - 신라·가야』, 탐구당, 2003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8 : 삼국의 문화』, 탐구당, 2003
김두진, 「불교의 수용과 고대사회의 변화」, 『한길역사강좌 12 : 한국고대사론』, 한길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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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삼국시대의 사회구조와 신분구조」, 『한길역사강좌 12 : 한국고대사론』, 한길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