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발췌본 번역본입니다. 오래전에 다운 받아논 것이라 출처는 잘 모르겠는데, 하정용씨가 원문은 입력하고, 번역본은 누가 입력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문이 번역본에서 빠졌는데, 서문의 번역본은 이종욱의 번역을 내가 다시 입력했습니다.
화랑세기는 지금 발췌본과 필사본 2종류인데, 필사본은 32대 화랑까지 나오고, 발췌본은 15대 나옵니다. 따라서 화랑세기를 제대로 보려면 필사본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현재 파일로 된 것이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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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의 동산, 노의 태산에서 하는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썻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낫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1. 위화랑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는 신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지내기를 마치 연나라가 동산에, 노나라가 태산에 제사 지내듯 하였다. 옛날에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기르면서 국화라 이름하였는데, 그 풍속이 우리 나라에 흘러들어 여자로써 원화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는데 화랑이란 홍대왕이 위화랑을 사라하여 활랑이라 부른데서 기인하였으니 화랑의 명칭이 이 때부터 비롯하였다.
전에는 선도들이 다만 신을 받드는 것만으로 주를 삼았는데 국공 열행 이후에는 선도들이 도의로써 서로 면려하였으므로 현좌충신과 양장용졸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화랑의 역사를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위화랑은 섬신공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벽아부인이다. 어머니가 조지왕의 총애를 받음으로 인하여 비처삼마복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마복칠성이다.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이고 아버지는 보혜이며 수지공의 아버지는 이혼이고 어머니는 준명이며 이등공의 아버지는 숙혼이고 어머니는 홍수며 태종공의 아버지는 아진종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며, 비량공의 아버지는 비지이고 어머니는 묘양이며 용취공의 아버지는 덕지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공주이다.
어떤 이는 법흥대왕이 칠성의 첫째 위치에 있고 위화랑은 어머니가 미천하기 때문에 칠성에 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칠성록과 보혜기에 모두 이등공은 없고 위황공이 실려있으니 누구의 설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공은 얼굴이 백옥같고 선명하고 말을 잘하였다. 벽아부인이 나을에 있을 적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비처후 벽화부인이다. 벽화부인이 궁으로 들어가자 공은 벽화부인의 사제로서 궁을 출입하면서 총애를 받았다. 법흥대왕은 이때 부근의 아들로서 위는 국공에 있었으나 총애는 공만 못하였다. 아시공이 대왕을 권하여 몸을 낮추어 공에 절을 하게 하자 공이 그 사실을 섬신공에게 고하니 섬신공이 말하기를 "국공이 몸을 낮추어 너에게 절을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에게 큰 인망이 있으니 너는 그를 섬기도록 하라."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곧 국공의 신하가 되어 그를 섬기게 되었는데, 옛일을 잘 알았으므로 법흥은 그를 나의 등통이라고 칭찬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비처가 과연 죽고 지증대왕이 즉위하여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벽화후를 권하여 태자를 섬기도록 하여 딸을 낳았으니 이가 삼엽궁주이다. 이때 태자비 보도부인은 바로 비처의 따로서 태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보도의 동생 오도는 묘심이 선혜후와 사룡하여 낳았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워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오도는 삼엽궁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과 깊이 결탁하여 은밀히 서로 정을 통하여 옥진궁주를 낳았다. 그런 사실을 안 태자는 오도를 아시공에게 벽화부인을 비량공에게 주고 이에 정비보도부인만을 사랑하고 공을 축출하여 멀리하였다. 그러나 보도부인은 덕을 입었다고 여겨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전추에 봉하여 제사를 맡게 하였는데 연제부인도 공을 사랑하였다.
옥진이 궁중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받게 됨에 따라 공은 다시 과거처럼 왕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이찬의 지위에 올랐다. 옥진이 법흥의 사랑을 독점하게 되자 법흥은 보도부인을 중으로 만들고 공을 보도의 신하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지소태후가 정권을 담당하여 화랑을 설치할 때 공을 그 으뜸으로 삼아 풍월주라 호칭하였다. 지소태후는 바로 보도의 딸로서 입종공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은 옥진공주를 사랑하여 진흥을 태자로 세울 뜻이 없으므로 지소가 이를 근심하자 공은 곧 대의로써 옥진을 깨우쳐 진흥을 세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도태후도 무사였으니 공의 덕이 크다 하겠다.
공의 자손이 매우 많은데 장녀 옥진궁주와 차녀 금진부인은 바로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이 처음 영실공에게 시집간지 얼마되지 않아 법흥대왕의 사랑을 받아 비대공을 낳으니 대왕이 비대를 세워 태자를 삼고자 하자 공이 간하기를 "저의 딸은 골품이 없고 또 영실과 함께 살았으니 그자식을 태자로 세우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법흥왕이 죽자 지소태후는 비대공을 왕자로 격하시켜 공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공의 딸 개원궁주가 동륜태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공의 아들 이화랑은 바로 준실부인이 낳은 아들이다. 준실부인은 수지공의 누이고 자비왕의 외손으로 얼굴이 예쁘고 문장을 잘하였다.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다시 공에게 시집와서 이화랑을 낳았다. 이화랑 역시 얼굴이 잘 생기고 문장을 잘 하였으므로 지소태후가 총애하여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있게 하였다. 그런데 태후의 딸 숙명궁주가 이화랑을 좋아하여 둘이 함께 도망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원광조사로서 우리나라의 큰 성인이다.
원광조사의 동생 보리사문이 바로 나의 증조이다.
2. 미진부공
미진부공은 아시공의 아들로 어머니는 법흥대왕의 따님이신 삼엽궁주인데, 삼엽궁주께서 백학의 꿈을 꾸고서 공을 낳았다. 공은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많았으므로 법흥대왕이 공주를 사랑하여 비대공등과 함께 궁중에서 키웠다.
이때 옥진궁주에 대한 법흥대왕의 총애가 대단하여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지소태후는 정통성을 들어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는데, 삼엽궁주와 아시공이 태후 편을 들었다. 이 때문에 태후는 삼엽궁주와 공을 사랑하였다. 그러다가 태후가 청정하게 되자 공을 폐신으로 삼으니 이 때 공은 16세의 나이로서 태후의 뜻을 잘 맞추었다.
이전에는 삼산공의 딸 준정이 원화가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백제에서 온 보고공주가 낳은 법흥대왕의 딸로 절색인 남모공주가 공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였는데 태후는 공을 총애하므로 남모공주를 도와 원화로 세우고자 하였다.
과거에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인 영실공을 용양군으로 삼고 은총을 내려 높은 지위에 두고 원화를 혁파하라 명하였다. 이 때문에 준정이 영실공을 잘 섬겨 남모공주가 원화로 세워지는 것을 저지하였다.
태후는 비록 유명에 따라 영실공을 계부로 삼기는 하였지만 실지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공에게 명하여 원화를 혁파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낭도들이 부리기에 넉넉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에게 부탁하여 낭도를 갑절로 늘리게 하자 준정은 이를 시기하여 그 낭도들을 술로 유인하여 수상에서 해쳤다. 모도, 남모공주의 낭도가 이를 고발하니 태후는 곧 원화를 폐하고 선화를 화랑으로 삼아 그 무리를 풍월이라 호칭하고 그 두목을 풍월주라 호칭하였는데 위화공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고 공이 차석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공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공이 남모를 잃은 뒤에는 아내를 얻지 않았다. 과거 공이 법흥대왕의 외손으로 궁중에서 법흥왕을 모실 적에 후궁 묘도부인과 사릉한 일이 있었으나 감히 말을 하지 않았는데 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서 허락해 주니 공은 곧 묘도부인을 아내로 맞아 미실랑주와 미생랑을 낳았다. 미실랑은 재색이 뛰어나 진흥왕과 진평왕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도 화랑이 되었다. 공이 충성을 다해 지소태후를 섬기다가 총애가 쇠하자 국가에 몸바치기를 원하여 낭도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큰공을 여러 번 세웠다. 그러다가 미실랑주가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공의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고 부인 묘도도 또한 궁주에 이르러 대원신통을 이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다음과 같이 찬 한다.
색으로 임금을 섬겨 충성을 다하였고 용맹으로 국가를 위하여 또 힘을 다하였다. 부인 묘도는 위공의 딸로 미화를 낳았으니 천도가 영원하다 하겠다.
3. 모랑
모랑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전에 법흥대왕이 국공으로서 백제에 들어갔다가 보고공주와 사통하여 뒤에 보고공주가 백제에서 도망하여 신라 궁중으로 들어와서 남모와 모랑을 낳았는데 모두 미색이 있었다. 미진부가 화랑이 되어 모랑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왕 9년에 태후의 명령으로 제3대 풍월주가 되어서는 남모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위공이 딸 준화를 그에게 주어 사위로 삼았으니 바로 이화랑의 누이이다. 딸 준모 하나만을 낳고 일찍 죽었으므로 드디어 이화랑으로 그의 뒤를 계승케 하였다. 동성의 아름다움이여 위화랑의 사위가 되었네. 대왕의 다을로서 태후의 총애를 받았네.
4. 이화랑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이다. 살결이 옥 같고 눈은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음악과 문장에 능하였고 열 두살에 모랑을 잘 보좌하니 태후가 무척이나 총애하였다. 당시에 황화, 숙명, 송화 등의 공주가 모두 공에게서 배웠으므로 공이 숙명공주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당시에 태후가 임금을 존귀하려는 마음에 공주로 하여금 임금을 받들게 하였는데 상은 그가 동복누이라는 이유로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고 공주 역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바로 태종공이며 당시 수석 재상으로서 나라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감히 공주를 소홀하게 여길 수 없었는데 공주는 그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굴더니 태자를 낳아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상은 본래 사도황후를 총애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동륜공을 태자로 삼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숙명후는 공과의 관계를 더욱 자주 가져 상에게 발각되었으므로 왕이 그를 내쫓으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이 숙명의 침실에 간 적이 없었는데도 숙명이 임신을 하였으므로 숙명은 공과 함께 도망갔다. 여러 신하들이 태자가 공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였으므로 이에 동륜공을 태자로 삼았다. 공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또한 도리어 동륜공의 한결같은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살펴주어 태후의 마음을 편한케 해주라고 하자, 드디어 숙명과 부부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원광과 보리를 낳았으니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었겠는가?
개국5년에 모랑공이 비사벌을 유람하다가 병이 나서 길에서 죽자 낭도들이 이에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는데 그때에 공은 태후의 총애를 받아 늘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려 하니, 낭도들이 말하기를 "위공의 아들이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누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명령하여 그 자리에 앉게 하고 제4대 풍월주로 삼아 군현을 순행케 하였다. 그때 마침 태후가 만호랑주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산한 뒤에 떠나게 되었다. 옥진공주의 동생 금진도 위공의 딸이었는데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고 대왕이 죽자 물러나 문천가에 살았는데 남모가 애당초 받들려고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구리지공이 그와 사통하여 토함공을 낳았는데 매우 정묘하여 일찍부터 낭적에 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를 받들어 부제로 삼았다. 태후가 그를 궁중으로 불러 보고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비량숙공만 못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모보다 더 나으니 훌륭한 인재를 얻었음을 경축할 만 하다."하였다. 공도 토함공을 매우 사랑하여 행동을 언제나 함께 하니 금진랑주가 고맙게 여기고 공에게 축수를 올렸다. 토함공의 동생 사다함공이 크게 묘량의 풍모를 가지고 있어서 많은 낭도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 당시 무궁랑이란 자가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있었다. 사다함공이 나이가 어리면서 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공자는 참으로 옛날 신릉군, 맹상군에 비견됩니다." 하고 섬기기를 원하니 사다함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받아들이겠는가" 라고 하고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이 태후에게 아뢰기를 "토함의 아우 사다함은 나이가 어린데도 스스로 낭도들을 데리고 있으니 국선이라 이를 만 합니다." 하니 태후가 그를 궁중으로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사람을 포용하는 방법을 물었다. 사다함이 대답하기를 "남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그들의 좋은 점을 좋게 여겨주는 일뿐입니다." 하니 태후가 기특하게 여겨 대왕에게 말하여 귀당으로 삼아 궁문을 맡게 하니 그의 무리 1천 여명이 모두 충성을 다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때에 비조공의 아들 문노에게 검술을 배우게 하니 문노가 말하기를 "칼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대적하지 못하고서 어찌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는 호협심이 있어 비록 따르는 무리가 많다 하더라도 적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잘 돌보아 주십시오"하였다. 이에 문노가 자기 무리 오백명으로 사다함을 따를게 하니 그 위세가 토함보다 더 성대하였다. 그 때에 동륜공이 차츰 성장하였으나 대왕은 그를 보도할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마침 토함으로 하여금 보필하게 하니 토함이 말하기를 "이것이 저의 직분입니다." 하고는 화랑의 자리를 아우에게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공은 사다함을 보좌로 삼고 토함과 마찬가지로 아끼니 당시 사람들은 공이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하였다. 얼마 뒤에 가야가 배반을 하자 사다함은 총군을 요청하여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공은 그에게 주위를 넘겨주고 토함공과 함께 오로지 태자를 보필하는 일에만 힘썼다. 아! 훌륭하도다. 공의 깨끗한 덕과 영광된 이름은 만세토록 전하여 끊기지 않으리라. 공이 숙명공주와 함께 영흥사에 전심하니 태후도 귀의하였고 숙태자도 화려한 장식을 벗고 수계하였다. 공의 아들 원광법사는 숙명공주의 소생이다. 수태할 때 공주가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으나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불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약사불인데 공주의 배를 빌려서 태어나고 싶소." 하였다. 이에 공주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 배례하니 부처는 공주를 안고 앞으로 엎어졌는데 흡사 뱃속으로 들어오는 듯하였다. 그때 마침 공도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궁중으로 몰래 들어가 엿보니 공주가 드러누워 마치 안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둥대고 있었으므로 그 까닭을 묻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부처의 힘이다." 하고는 서로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였다. 숙명은 또 공의 딸들을 낳았는데 곧 화명과 옥명이며 모두 궁중에 들어가 진평대왕의 후궁이 되었다. 원광의 아우 보리는 태자의 딸 만룡에게 장가들어 예원각간을 낳았는데 그는 곧 나의 할아버지이다. 공은 또 토함공의 동생에게 장가들어 서자 일곱명을 낳았는데 모두 귀히 되었다.
찬한다.
이황의 풍류는 계림의 청담 꺼리이네. 귀족의 자제로서 왕의 공주에게 장가들었고 금불이 와서 의지하니 그가 곧 약사여래였네. 화랑의 가문으로서 원광법사의 아버지이니. 수많은 공의 족속. 만세토록 무궁하리.
5. 사다함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다. 이전에 비량공이 벽화후를 사모하여 늘 그의 변소에 가곤 하였는데 법흥대왕은 비량공을 아껴 그 사실을 알고도 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 벽화후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구리지라 하였다. 벽화후처럼 얼굴이 아름답고 비량공처럼 용기가 있더니 성장하여 낭도의 무예를 좋아하였다. 금진랑주와 관계를 맺어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는데 새달은 이화공의 첩이 되었다. 사다함은 12세에 이미 검술에 능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며 16세에 정병 5천명을 거느리고 전단문으로 쳐들어가 백기를 세우고서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그 공으로 토지를 하사하자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어 양인으로 만들었다. 대왕은 더욱 그를 사랑하여 알천의 땅을 하사하였지만 그는 굳이 사양하고 그 가운데 불모지 약간만을 가려서 받고 말하기를 "이것이면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게 하는데 충분합니다." 하였다. 그때에 이화공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낭도들에게 싫증을 내었다. 그리하여 공을 제5대 풍월주로 삼고 공의 동포제인 설원랑을 보좌로 삼았다. 설원랑은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공의 신하 무관랑이 많은 공을 세우고도 신분이 미천하기 때문에 보답을 받지 못한 채 죽자 공은 슬프게 여겨 애통해하다가 몸이 야위어져 죽었다. 공이 본래 미진부공의 딸 미실을 사랑하였고 미실 또한 공을 좋아하였으나 태후가 세종에게 시집가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끝내 장가들지 않고 죽었다. 낭도들이 다시 이화공을 세우자고 요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세종 전군이 더 낫다."하였으므로 세종을 세워 풍월주로 삼았다.
찬한다.
비량공의 후예이고 위화공의 소자이다. 전장에 나가 많은 공을 세우고도. 스스로 불모지를 택하였네. 청조산속에 송백이 길이 푸르리.
6. 세종
태종공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지소태후이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풍채를 가졌고 태후에게는 효도하고 대왕에게는 충성을 다하니 대왕도 그를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의 막내동생이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단속하지 않았으나 워낙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여 실수하는 적이 없었다. 태후가 공경들의 예쁜 딸들을 가려 궁중에 모아놓고 공에게 보이자 공은 미실랑주를 가장 좋아하여 가까이 하려 하였으므로 태후는 크게 기뻐하여 미실로 하여금 궁중에 들어와 섬기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다함공이 정벌을 나갈적에 미실이 노래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부인이 되어 있었으므로 사다함공은 "청조가"를 지어 부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내가 죽어 신병이 되어 전군의 부처를 보호해 주리다."하였다. 임종할 즈음에 이화공이 그를 안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네 동생이 아직 어린데 네가 만약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뒤를 계승하겠는가?" 하니 사다함이 말하기를 "제 동생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의 고사에 따라 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이화공이 태후에게 아뢰어 세종을 세우고자 요청하니 태후가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 자신은 아직 유약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런데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종형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남긴 한마디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세종도 그렇다고 여기고 태화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 제6대 풍월주가 되고 설화랑을 보좌로 삼았다. 이 날 밤에 미실이 과연 꿈을 꾸었는데 사다함공이 품속으로 들어오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하였다. 그리하여 하종공을 낳았다. 이때에 동륜태자가 이미 장성하였으므로 태후가 만호공주를 짝지어 주어 진골정통을 잇고자 하였는데 사도황후는 대원신통을 잇게 하기 위하여 몰래 의논하기를 "내 아들이 훌륭하니 네가 태자와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 하였다.
이에 미실은 크게 기뻐하고 태자와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은 그것도 모르고서 미실로 하여금 들어와 자신을 받들게 하고 황후궁 전주로 삼았다. 세종이 이에 출정을 요청하여 나가니 미실은 총애를 믿고 방탕하게 굴면서 설원랑 및 그의 아우 미생과 정을 통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그 사실도 모르고 그를 받들어 원화로 삼고 두화랑으로 하여금 낭도들을 거느리고 조회하게 하였다. 대왕이 전주와 함께 남도에서 조회를 받으니 원화의 제도가 폐지된지 29년만에 다시 부활되었고 곧 연호를 고쳐 "대창"이라고 하였다. 미실은 얼굴이 예쁘고 교태를 잘 부렸으며 옥진의 풍모를 크게 닮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혼령이 늘 미실의 가슴속에 있으면서 좋은 꾀를 준다고 하였다. 홍제원년 3월에 동태자가 보명궁에서 큰 개의 소동으로 죽자 대왕이 태자를 찾았으나 시종들이 대부분 미실의 낭도로 들어가 있으므로 미실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원화의 자리를 내놓았다. 대왕은 또한 세종을 어여삐 여겨 불러들이고 미실을 다시 세종에게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미실은 세종을 권하여 설원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하였다. 이때에 금태자 또한 미실을 좋아하여 설원, 미생등과 더불어 방외우의 교제를 맺었다. 세종공은 홀로 청절을 지켜 밖에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궁중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담박하여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태후에게는 효도하고 대왕, 황후, 태자에게는 충성하였으며 미실에게는 정절을 지켰으니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한다.
태후의 사자이고 정승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네. 청아한 행실 우뚝한 의료는 화랑의 본보기였네
7. 설화랑
설화랑의 처음 이름은 설원랑으로 금진낭주의 사자이다. 그의 아비 설정은 낭도로 얼굴이 아름답고 아첨을 잘하여 구리지 용양의 신하가 되어 낭주와 통정하여 설원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을 잘 불었는데 출신이 미천한 탓에 낭도들이 받들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실이 상의 은총에 기대어 낭도들을 호령하였으므로 낭도들이 감히 많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제7대 풍월주가 되어 미실을 부풍월주로 삼았다. 설원은 허리를 굽혀 선비에게 겸손하고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도와주니 낭도들이 모두들 복종하였으나 설원자신은 오히려 자기의 행위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미실은 곧 설원에게 모랑공의 과처인 준화낭주에게 장가들도록 권하였다. 낭주는 당시 나이가 38세로 18년 동안이나 과부로 지내다가 다시 화랑을 낳았으므로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위공의 후손이니 다시는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그런데 설원은 기탄없이 미실과 통정하였다.
준화낭주가 그 사실을 알고도 금하지를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준화낭주의 딸 준모가 미실을 통하여 동태자와 통정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또 금태자와 통정하고자 하니 설원이 이를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동태자를 섬긴 일을 임금이 알고 계시는데 지금 또 금태자를 받아들일 경우 임금이 그 사실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부를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하자 준화낭주가 말하기를 "낭군의 말이 옳다"고 하고는 준모에게 여승이 되도록 명하였으나 준모가 따르지 않았다. 설원이 준모를 유혹하여 통정하고는 1년여 동안 계속 정을 통하다가 준모가 임신을 하니 준화가 그 사실을 알고는 노하여 말하기를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가로막고는 자신을 정을 통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였다. 설원이 미실에게 도와주기를 요청하니, 미실이 미생으로 하여금 준모를 취하도록 해서 일이 평온해졌다. 준모는 미생에게 시집가서 설원의 딸을 낳아 미모라고 이름하였는데, 낭도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당시에 문도일파가 외방에서 세종을 따라다니면서 전공을 세웠으나 지위를 얻지 못하자 설원에게 복종하지 않고서 스스로 한 문파를 세웠다. 그렇게되자 낭도들이 드디어 두 파로 가라져서 설원파는 정통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고 문노파들은 청의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면서 서로 옳다고 다투니 미실이 이를 걱정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이들을 화합시키게 하였으나 화합시키지 못하였는데 미실이 비록 새 임금에게도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지도부인만큼 총애 받지 못하였다. 지도부인의 아비 기오공이 문노와 종형제간이었으므로 지도부인은 평소부터 문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세워 국선으로 삼고 비보랑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를 좋아하고 협기가 많았으며 설원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하고 청유를 좋아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문노의 낭도들을 호국선이라고 부르고 설원의 낭도들을 운상인이라고 불렀다. 골품사람들은 대부분 설원의 낭도들을 따랐고 민간 사람들은 대부분 문노의 낭도들을 따르면서 서로 의를 연마하는 것으로 주를 삼았다. 진지대왕이 미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가 이를 걱정하여 미실과 의논하여 폐위시키고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왕의 직무를 행하게 하였으니 노리부공은 바로 사도태후의 오빠이다. 그는 미실의 남편인 세종공과 함께 대사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문노의 낭도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사도태후의 명령으로 두 낭도들을 하나로 통합하고는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으로 문노를 아선으로 설원과 비보랑을 좌우화랑으로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불화를 진정시켰다. 이 때문에 문노의 낭도들이 미천한 출신의 사람으로서 고관에 많이 발탁되었으므로 초택의 사람들이나 항순한 사람들이 출신할 수 있는 문호로 여겨 문노를 받들기를 신과 같이 하였다. 그러자 미실이 설원이 문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는 설원에게 문노를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의 낭도들이 불평스러운 기색을 나타내자 설원이 말하기를 "총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다."하고는 무릎을 꿇고 문노를 섬겼다. 이로 인해 문노의 무리들도 설원에게 복종하니 미실이 기뻐하면서 문노로 하여금 그 자리를 설원에게 사양하게 하였다.
그러자 문노가 말하기를 "국선이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 그가 나의 제자가 되었는데 어찌 스승이 제자를 받들어 섬길 수가 있겠는가?" 하니 설원이 말하기를 "국선이 비록 전황이 설립한 것이기는 하나 풍월의 정통이 아니다. 그리고 세종전군은 왕자라는 귀한 신분으로도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는데 더구나 내가 사형을 봉향했던 것은 미실궁주의 명 때문이었다. 지금 궁주가 또 양위하도록 명하기 때문에 감히 반대치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문노가 말하기를 "궁주가 명하였다면 나 역시 어찌 감히 반대할 수 있는가?" 하고 또 이어 말하기를 "도맥으로는 스승이고 통맥으로는 동생이니 어떻게 처신해야 마땅한가?"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설원은 나의 충신이고 또 정통의 형이다. 어찌 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문노가 이에 절을 하고 신이라 칭하니 미실이 설원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문노에게 굽히게 하였던 것은 바로 오늘날고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니 설원이 배사하면서 말하기를 "신의 한 오라기의 터럭까지도 모두 총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문노는 국선으로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므로 선화라하고 설원은 미실을 영흥사에서 섬겼으므로 뒤에 미륵선화라고 하였다. ᄁ(?)까지 미실에게 충성을 바친 자는 설원이고 끝까지 세종에게 충성을 바친자는 문노이니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찬한다.
미실의 선하요 선화의 시초로다. 불문에 의탁하여 아름다움을 빛 냈도다. 성대 하도다. 청명이어 청사에 길이 남으리 시종 한결같은 충성 복의 터전 열으리로다.
8. 문노
문노는 비조부공의 아들이며 가야국의 문화공주이다. 어려서부터 검술을 잘하였고 의기가 있었다. 가야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다함이 함께 가서 토벌하기를 청하니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서 외조부 나라의 백성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사실을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말하기를 "나의 스승은 의인이다."하고는 가야국에 들어가서 함부로 살해하지 말라고 경계시키어 문노의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그의 뒤를 잇자 그의 낭도들을 세종에게 속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할 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어머니가 가야국 출신인 탓으로 현직에 오르지 못하니 세종공이 애석하게 여겼다.
진지대왕이 폐위되자 공으로 아찬이 되어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자리에 올라 제8대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용기가 있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아끼기를 자신을 아끼듯이 하였고 청탁을 구애하지 않고 자신에게 귀속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품어주었으므로 명성이 크게 떨쳐 낭도들이 서로 권면하여 그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사풍이 일어났으니 통일의 대업에 공에게 비롯하였다 하겠다. 공이 풍월주가 되었을 때 낭도들의 부곡을 나누는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풍월주로 있은 지 3년만에 비보랑에 그 자리를 전하였다. 공은 오래도록 장가들지 않았었는데 국선이 되어서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으로 삼았다.
윤궁낭주는 황종공의 딸로 동륜태자를 섬기어 딸을 낳고는 혼자 살고 있었으며 미실 및 미보랑과는 종형제간이었다. 비보랑이 윤궁낭주를 힘껏 권해 공의 계부로 삼게 하였다. 아들 셋을 낳고 딸 둘을 낳았다. 공이 선화가 된 데에는 윤궁낭주의 내조가 컸었다.
찬한다.
가야국이 외손이여 의기의 종주로다. 국선으로 화랑이 되어 나라의 기풍을 떨쳐 일으켰도다.
9. 비보랑
비보랑은 비대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낭주로 바로 미진부공의 여동생이다. 설원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함께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 미치지 못하였고 잣대를 배웠으면서도 또한 설원에게 미치지 못하자 문노의 낭도를 들어가 검술을 배워 드디어 고제가 되어 문노를 보필하여 선화가 되게 하였으므로 그 공으로 공이 부선화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9대 풍월주가 되었다.
힘써 문노의 법제를 준수하였으며 미천한 자를 이끌어 주고 약한 자를 도와주기를 힘썼으며, 낭도들을 나누어 보내어 변수를 위무하였다. 당시에 미생공이 설원공의 부제로서 오랫동안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문노공이 양위하도록 명하였고, 공이 자리에 있은 것도 3년밖에 안되었으므로
낭도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이때는 건복 정월(580년)이었다. 공은 노리부공의 딸 세진낭주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 세호랑을 낳았고 또 진흥대왕의 딸 덕명공주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귀현하게 되었다. 서자인 유오랑은 공의 첩인 유지가 낳았는데 지명법사를 따라 진나라(陳)로 들어갔다가 많은 서책을 가지고 돌아와 사문의 후진에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 공이 역시 크다 하겠다. 찬한다. 법흥왕의 후손이요 진흥왕의 사위로다.
10. 미생
미생은 미진부공의 아들로 어머니는 묘도부인이다. 공의 누이는 미실궁주로 진흥대왕에게 총애를 받았으므로 공 역시 진흥대왕의 은총을 입어 여러 차례 입궁하여 동태자, 금태자 등과 함께 토함공에게 배웠다. 사다함공을 따라 낭도가 되었다. 공의 나이 겨우 12세 때에 세종공이 사다함의 뒤를 이어 풍월주가 되어 공으로 전방화랑을 삼고는 자신의 지위를 전하고자 하였는데 미실궁주가 설화랑을 총애하여 공으로 하여금 설화랑을 섬기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제10대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가 이미 36세였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사다함공은 16세에 풍월주가 되었는데 천하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내가 13세에 전방화랑이 되니 사람들이 더욱더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16세가 되기 전에 반드시 풍월주가 될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어찌 36세가 되어서야 풍월주가 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내가 총애를 받을 때에도 네가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내가 총애를 받지 못할 때에는 누가 하종을 위하여 도와주겠는가?" 하고는 하종을 부풍월주로서 삼게 하였다. 당시에 낭도들이 서로 쟁론하였는데 내외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써서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자들을 통합원류라 하였고 또 한파는 대원신통을 받들고자한 미실의 파가 그 두 번째 파이며 다른 한파는 진골정통을 받들고자 하는 문노일파로 이들이 세 번째 파였다. 그러나 문노도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으므로 감히 하종에게 다투지 못하였고 통합파는 하종이 재목이 못된다고 여기에 미생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한 파는 숙태자를 세우고 원광으로 그를 돕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들은 문노파와 통합파가 혼합된 자들로서 이화류라 하였다. 또 다른 한파는 천주공을 세우고 서현랑으로 그를 돕고자 하였는데 이들은 통합파 가운데 가야파들이었다. 공은 풍월주로 있은지 3년 만에 논의가 일치하지 않자 하종에게 양위하였다. 공은 부귀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아랫사람들의 실정을 잘 몰랐고 성품 또한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였으므로 인망이 두텁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선문에 있었기 때문에 낭도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배반하지는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아 자식이 백 명이나 되니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찬한다.
옥진의 후손으로 대원신통이다. 아들은 백명이고 따르는 무리는 만명이로다.
11. 하종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니 역시 대원신통이다. 문노파가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이화공의 아들 보리공으로 부를 삼았는데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이니 진골의 정통이다. 그러나 주형과 부제가 파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불화하므로 미실궁주가 걱정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의 명으로 낭도를 대대적으로 모이게 하여 이화공과 세종공을 제사하게 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고 불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얻게 되자 서현랑으로 삼으니 이 역시 대원신통이다.
이로 인하여 이화, 미실, 가야 3파가 단결하게 되었다. "당시 궁중에는 3태후가 있었는데 행정대왕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잘 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훌륭한 낭도들을 태후궁에 많이 소속시켰다.
태상태후와 사도법주는 미실궁주로서 법운을 삼았기 때문에 정령이 대부분 미실궁에서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인 아양공주는 바로 서현랑의 어머니인데 가야파의 후광이 되어 미실궁의 세력을 나누어 가졌다. 만호태후는 대왕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욱 총애를 받아 진골 정통의 수주가 되었는데 지도태후가 태상과 만호에게 드나들면서 문노정파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밀어 보리공 대신 풍월주로 세우려 하였지만 만호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비록 풍월주의 지위는 얻지 못하였지만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때문에 서현랑이 "용춘공은 바로 선군의 아들이니 어찌 감히 내가 대적하겠는가?" 하고는 그 낭을 사양하며 양보하였다. 그렇게 되자 가야파도 용춘공에게 돌아갔는데 이들 역시 대원신통이었기 때문에 미실파들도 다투지 않았다. 낭도가 모두 축하하면서 "적임자를 얻었다." 하였다. 보리공도 용춘공을 아껴서 당을 달리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니 진골과 대원의 논의가 이 때에 비롯하였다. 하종공이 비록 어머니에게 효도하여 형세를 살펴 따랐으나 안으로 그 논의를 찬성하면서도 겉으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당시 은륜공주가 임금의 총애를 잃었는데 이는 바로 태상의 막내딸이었다. 태상이 대원을 염려하여 공에게 명하여 은륜공주를 받들게 해서 효종공을 낳았다.
앞서 설원공의 딸 미모낭주에게 장가들어 모종을 낳았었다. 효종의 누이는 하희와 월희이고 모종의 누이는 유모와 영모이다. 공은 청렴 검소하여 여색을 삼가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고 위를 잘 섬겨 세종의 풍토를 많이 지녔기 때문에 처음에는 복종하지 않는 파가 있었으나 결국은 모두 돌아왔다. 3년 동안 풍월주 자리에 있다가 보리공에게 물려주며 말하기를 "앞서의 열선들이 모두 대성이었는데도 오히려 3년 동안만 하였는데 내 어찌 감히 오래 있겠는가?" 하니 보리공이 "주형은 미실 원화의 아들이니 어찌 보통 열선과 동례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지만 공이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보리공이 비로서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바로 나의 상조이시다. 일찍이 선고에게 하종공에 대해 말하시기를 "지금 세상에 이러한 효자와 충신은 없다." 하셨는데 이는 미실궁주가 차례로 3조를 섬겼기 때문에 다른 형제가 있어 행동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은륜공주도 골품을 믿고 방탕하였지만 공은 세종공이 미실을 대하듯이 하여 따져 묻지 않았고 태양공주도 은륜의 형으로서 공과 이웃해 살면서 매우 유혹하였지만 공은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 공이 몸을 깨끗이 지킴이 이와 같았다.
찬한다. 청근함으로 덕을 지켜 휼륭한 이름 남겼으니, 세종의 아들로서 미실이 낳으셨도다.
12. 보리
보리공은 이화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로서 바로 지소태후의 딸이시다. 꿈에 황색사슴을 보고 공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큰 뜻을 품었다. 자라서 큰형인 원광법사와 함께 학문에 힘썼는데 원광이 일찍이 가르치기를 "나는 불이 되고 너는 선이 되면 우리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었는데 공이 비로소 낭도에 소속하여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때가 바로 건복8년(서기 586년)이었다. 공은 만호태후의 딸인 만룡낭주로 아내를 삼았는데 나이 겨우 13세였다. 이보다 앞서 태후는 공의 포형인 숙태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었는데 이때에 태후는 대원의 계통이 진골의 계통을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만룡을 주었고 만룡도 기꺼이 아내가 되었던 것이다.
만룡의 형 만명은 나이가 들도록 시집가기를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서현랑과 몰래 좋아하였다. 그러자 만호태후는 본래 아양과 좋지 않는 사이였으므로 만명을 가두고 서현은 만놀로 귀양보내려 하였다. 그러자 만명은 도망하여 서현과 함께 달아났다. 태후는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공과 만룡이 극력 만류하여 보호되었다. 이때 공의 여형인 화명과 옥명은 모두 진평대왕을 섬겨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려고 하였는데 공은 거절하면서 "우리 가문은 대대로 화랑을 이어온 것으로 만족한데 어찌 벼슬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렇듯 공은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지켰으나 낭주가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상으로 하사 받은 것이 매우 많아 집안이 매우 넉넉하였다. 공은 낭주에게 "나는 낭도의 우두머리로서 어찌 혼자서 만이 부귀를 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아내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하자 낭주는 "부부는 한 몸이니 낭군의 마음이 낭첩의 마음입니다. 안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고는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낭도들이 모두 부모 받들 듯이 하였으며 무릇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과 함께 가서 위로하고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으로 비유하였다. 낭주는 왕의 누이인 귀한 신분으로서 부도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공이 감동하여 다른 여인을 두지 않았으며 정분이 비할 데 없이 좋았다.
늦게 아들 1명과 딸 1명을 두었는데 아들은 예원이고 딸은 보룡이니 즉 문무왕의 어머니이시다.
3년 동안 풍월주로 있다가 부제 용춘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다. 아 훌륭하도다. 공의 만년의 사적이 고승전에 나온다.
찬한다.
보리사문은 위공의 자손이로다. 만룡과 같은 덕으로 베푼 은혜 산과 같도다.
13. 용춘
용춘은 금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이며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은 황란한 행실로 인하여 폐위되어서 3년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공은 어렸으므로 그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 지도태후는 태상태후의 명에 의하여 다시 신왕을 섬겼는데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은 공을 어여삐 여겨 매우 총애하였다. 장성한 뒤 공은 강개한 뜻을 품고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섬겨 형과 서제 사이가 되니 비형랑과 무사랑의 낭도가 모두 귀속하여 3파가 모두 추대하기를 원하였고 이로 인하여 서현랑도 지위를 사랑하여 양보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제13대째이다. 호림으로 부제를 삼았다. 공은 낭도의 묶은 풍습을 혁파하고 한결같이 인재의 여부로써만 선발하고 골품에는 구애받지 않으면서 "골품이란 왕이나 신하의 지위를 구별하는 것인데 낭도에 어찌하여 골품을 적용한단 말인가?" 하니 대중이 크게 흡족해하면서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질 수 있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대왕이 아들이 없어 공의 형 용수 전군으로 사위를 삼아 전위하려 하였는데 전군이 공에게 물으니 공이 "대왕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혹시라도 후사가 있게 되면 아마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전군이 이로 인하여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가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전군으로 사위를 삼으니 바로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이 때문에 내전에서는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겼으므로 호림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요직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후 낭도로서 등용된 자가 매우 많았다.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면서 용봉의 자태와 천일의 위의를 지녀 왕위를 이을 만 하자 대왕이 그에게 뜻을 두니 천명공주는 효순하여 양보하였다. 대왕이 공에게 선덕공주를 받들도록 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받들었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왕은 용수전군에게 모시도록 명하였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공은 고구려로 출정하여 큰공을 세워서 각간에 봉해졌다. 용수 전군이 임종시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부탁하였으니 아들은 바로 태종으로 우리의 임금이시다. 공주가 즉위하고 공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공은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니 여러 신하들이 사위를 셋을 두는 제도를 의논하였다. 공은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태종을 아들도 삼았다. 이보다 앞서 공은 왕명으로 호명궁에 있으면서 세 딸을 낳았었다. 공은 달리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태종으로 아들을 삼은 것이다. 서자 5명과 서녀 18명은 모두 귀히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아 훌륭하도다. 성덕의 천지와 같았다.
찬한다.
갈문의 덕이 일월과 같아 삼한의 대업이 힘입어 완성되었도다.
14. 호림
호림은 복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로 지소태후의 딸이다. 공은 공주의 사생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비보랑의 아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공은 용력이 많아 격검을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소탈하고 검소하게 처신하고 골품이라 하여 높은 체 하지 않았다. 공의 적형인 마야부인이 당시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이 공을 발탁하여 부제로 삼았다. 이 때에 이르러 14대 풍월주가 되었으니 바로 진골의 계통이다.
공은 마음가짐이 청렴 정직하여 재물을 대중들에게 나누어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공을 "옷벗은 지장이다." 고 하였다. 공은 낭도들에게 "선과 불은 같은 도이니 화랑도 불을 몰라서는 안된다. 우리의 미륵선화 보리사문이 모두 우리의 스승이다." 하고는 공은 보리공에게 가서 수계하였는데 이 때문에 선과 불이 점차 융화되었다. 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으므로 다시 하종공의 딸인 유모낭주에게 장가들었다. 이때 미실궁주는 나이가 많았는데도 낭주를 극진히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고자하여 공에게 천부의 관음을 조성토록 명하여 아들을 빌어서 선종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의 대성인이 되었다. 공이 더욱 불을 숭배하여 곧 유신공에게 양위하고서 무림거사라 스스로 칭하고 조정의 일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받들어 의견을 물었다. 알천공들과 칠성우를 만들었는데 통일의 대업이 공등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많았으니 훌륭하고 지극하도다.
찬한다.
태후의 손자요. 진골의 후예로서 불선에 들어 천추에 공을 남겼도다.
15. 유신
유신공은 서현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으로 바로 만호태후의 사생녀이고 아버지는 숙홀종으로 역시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다.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을 하자 태후는 서현을 대원의 유라하여 허락하지 않으려 하자 마침내 만노로 도망쳐 20개월뒤에 공을 낳았는데 상서로운 꿈의 징조가 많았었다. 진평대왕은 자시의 누이가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여 서현공을 만노공으로 봉해주었다. 공은 장성하면서 제왕이 될 모습을 지녔는데 태후는 보고싶어서 돌아오기를 허락하였는데 보고 나서는 기뻐하면서 "이게 참으로 나의 손자다." 하였다. 이 때문에 가야파가 마침내 호림공의 부제로 받들었다. 보종공은 미실궁주의 말자로서 아버지는 설원인데 공이 중망이 있으므로 그 지위를 양보하였는데 이는 대개 궁주께서 태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한 것이다.
당시에 공의 나이는 15세였는데...
화랑세기는 지금 발췌본과 필사본 2종류인데, 필사본은 32대 화랑까지 나오고, 발췌본은 15대 나옵니다. 따라서 화랑세기를 제대로 보려면 필사본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현재 파일로 된 것이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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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의 동산, 노의 태산에서 하는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썻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낫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1. 위화랑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는 신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지내기를 마치 연나라가 동산에, 노나라가 태산에 제사 지내듯 하였다. 옛날에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기르면서 국화라 이름하였는데, 그 풍속이 우리 나라에 흘러들어 여자로써 원화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는데 화랑이란 홍대왕이 위화랑을 사라하여 활랑이라 부른데서 기인하였으니 화랑의 명칭이 이 때부터 비롯하였다.
전에는 선도들이 다만 신을 받드는 것만으로 주를 삼았는데 국공 열행 이후에는 선도들이 도의로써 서로 면려하였으므로 현좌충신과 양장용졸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화랑의 역사를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위화랑은 섬신공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벽아부인이다. 어머니가 조지왕의 총애를 받음으로 인하여 비처삼마복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마복칠성이다.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이고 아버지는 보혜이며 수지공의 아버지는 이혼이고 어머니는 준명이며 이등공의 아버지는 숙혼이고 어머니는 홍수며 태종공의 아버지는 아진종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며, 비량공의 아버지는 비지이고 어머니는 묘양이며 용취공의 아버지는 덕지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공주이다.
어떤 이는 법흥대왕이 칠성의 첫째 위치에 있고 위화랑은 어머니가 미천하기 때문에 칠성에 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칠성록과 보혜기에 모두 이등공은 없고 위황공이 실려있으니 누구의 설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공은 얼굴이 백옥같고 선명하고 말을 잘하였다. 벽아부인이 나을에 있을 적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비처후 벽화부인이다. 벽화부인이 궁으로 들어가자 공은 벽화부인의 사제로서 궁을 출입하면서 총애를 받았다. 법흥대왕은 이때 부근의 아들로서 위는 국공에 있었으나 총애는 공만 못하였다. 아시공이 대왕을 권하여 몸을 낮추어 공에 절을 하게 하자 공이 그 사실을 섬신공에게 고하니 섬신공이 말하기를 "국공이 몸을 낮추어 너에게 절을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에게 큰 인망이 있으니 너는 그를 섬기도록 하라."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곧 국공의 신하가 되어 그를 섬기게 되었는데, 옛일을 잘 알았으므로 법흥은 그를 나의 등통이라고 칭찬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비처가 과연 죽고 지증대왕이 즉위하여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벽화후를 권하여 태자를 섬기도록 하여 딸을 낳았으니 이가 삼엽궁주이다. 이때 태자비 보도부인은 바로 비처의 따로서 태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보도의 동생 오도는 묘심이 선혜후와 사룡하여 낳았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워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오도는 삼엽궁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과 깊이 결탁하여 은밀히 서로 정을 통하여 옥진궁주를 낳았다. 그런 사실을 안 태자는 오도를 아시공에게 벽화부인을 비량공에게 주고 이에 정비보도부인만을 사랑하고 공을 축출하여 멀리하였다. 그러나 보도부인은 덕을 입었다고 여겨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전추에 봉하여 제사를 맡게 하였는데 연제부인도 공을 사랑하였다.
옥진이 궁중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받게 됨에 따라 공은 다시 과거처럼 왕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이찬의 지위에 올랐다. 옥진이 법흥의 사랑을 독점하게 되자 법흥은 보도부인을 중으로 만들고 공을 보도의 신하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지소태후가 정권을 담당하여 화랑을 설치할 때 공을 그 으뜸으로 삼아 풍월주라 호칭하였다. 지소태후는 바로 보도의 딸로서 입종공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은 옥진공주를 사랑하여 진흥을 태자로 세울 뜻이 없으므로 지소가 이를 근심하자 공은 곧 대의로써 옥진을 깨우쳐 진흥을 세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도태후도 무사였으니 공의 덕이 크다 하겠다.
공의 자손이 매우 많은데 장녀 옥진궁주와 차녀 금진부인은 바로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이 처음 영실공에게 시집간지 얼마되지 않아 법흥대왕의 사랑을 받아 비대공을 낳으니 대왕이 비대를 세워 태자를 삼고자 하자 공이 간하기를 "저의 딸은 골품이 없고 또 영실과 함께 살았으니 그자식을 태자로 세우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법흥왕이 죽자 지소태후는 비대공을 왕자로 격하시켜 공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공의 딸 개원궁주가 동륜태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공의 아들 이화랑은 바로 준실부인이 낳은 아들이다. 준실부인은 수지공의 누이고 자비왕의 외손으로 얼굴이 예쁘고 문장을 잘하였다.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다시 공에게 시집와서 이화랑을 낳았다. 이화랑 역시 얼굴이 잘 생기고 문장을 잘 하였으므로 지소태후가 총애하여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있게 하였다. 그런데 태후의 딸 숙명궁주가 이화랑을 좋아하여 둘이 함께 도망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원광조사로서 우리나라의 큰 성인이다.
원광조사의 동생 보리사문이 바로 나의 증조이다.
2. 미진부공
미진부공은 아시공의 아들로 어머니는 법흥대왕의 따님이신 삼엽궁주인데, 삼엽궁주께서 백학의 꿈을 꾸고서 공을 낳았다. 공은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많았으므로 법흥대왕이 공주를 사랑하여 비대공등과 함께 궁중에서 키웠다.
이때 옥진궁주에 대한 법흥대왕의 총애가 대단하여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지소태후는 정통성을 들어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는데, 삼엽궁주와 아시공이 태후 편을 들었다. 이 때문에 태후는 삼엽궁주와 공을 사랑하였다. 그러다가 태후가 청정하게 되자 공을 폐신으로 삼으니 이 때 공은 16세의 나이로서 태후의 뜻을 잘 맞추었다.
이전에는 삼산공의 딸 준정이 원화가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백제에서 온 보고공주가 낳은 법흥대왕의 딸로 절색인 남모공주가 공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였는데 태후는 공을 총애하므로 남모공주를 도와 원화로 세우고자 하였다.
과거에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인 영실공을 용양군으로 삼고 은총을 내려 높은 지위에 두고 원화를 혁파하라 명하였다. 이 때문에 준정이 영실공을 잘 섬겨 남모공주가 원화로 세워지는 것을 저지하였다.
태후는 비록 유명에 따라 영실공을 계부로 삼기는 하였지만 실지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공에게 명하여 원화를 혁파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낭도들이 부리기에 넉넉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에게 부탁하여 낭도를 갑절로 늘리게 하자 준정은 이를 시기하여 그 낭도들을 술로 유인하여 수상에서 해쳤다. 모도, 남모공주의 낭도가 이를 고발하니 태후는 곧 원화를 폐하고 선화를 화랑으로 삼아 그 무리를 풍월이라 호칭하고 그 두목을 풍월주라 호칭하였는데 위화공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고 공이 차석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공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공이 남모를 잃은 뒤에는 아내를 얻지 않았다. 과거 공이 법흥대왕의 외손으로 궁중에서 법흥왕을 모실 적에 후궁 묘도부인과 사릉한 일이 있었으나 감히 말을 하지 않았는데 태후가 그 사실을 알고서 허락해 주니 공은 곧 묘도부인을 아내로 맞아 미실랑주와 미생랑을 낳았다. 미실랑은 재색이 뛰어나 진흥왕과 진평왕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도 화랑이 되었다. 공이 충성을 다해 지소태후를 섬기다가 총애가 쇠하자 국가에 몸바치기를 원하여 낭도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큰공을 여러 번 세웠다. 그러다가 미실랑주가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공의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고 부인 묘도도 또한 궁주에 이르러 대원신통을 이었으니 아 성대하도다.
다음과 같이 찬 한다.
색으로 임금을 섬겨 충성을 다하였고 용맹으로 국가를 위하여 또 힘을 다하였다. 부인 묘도는 위공의 딸로 미화를 낳았으니 천도가 영원하다 하겠다.
3. 모랑
모랑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전에 법흥대왕이 국공으로서 백제에 들어갔다가 보고공주와 사통하여 뒤에 보고공주가 백제에서 도망하여 신라 궁중으로 들어와서 남모와 모랑을 낳았는데 모두 미색이 있었다. 미진부가 화랑이 되어 모랑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왕 9년에 태후의 명령으로 제3대 풍월주가 되어서는 남모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위공이 딸 준화를 그에게 주어 사위로 삼았으니 바로 이화랑의 누이이다. 딸 준모 하나만을 낳고 일찍 죽었으므로 드디어 이화랑으로 그의 뒤를 계승케 하였다. 동성의 아름다움이여 위화랑의 사위가 되었네. 대왕의 다을로서 태후의 총애를 받았네.
4. 이화랑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이다. 살결이 옥 같고 눈은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웠다. 음악과 문장에 능하였고 열 두살에 모랑을 잘 보좌하니 태후가 무척이나 총애하였다. 당시에 황화, 숙명, 송화 등의 공주가 모두 공에게서 배웠으므로 공이 숙명공주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당시에 태후가 임금을 존귀하려는 마음에 공주로 하여금 임금을 받들게 하였는데 상은 그가 동복누이라는 이유로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고 공주 역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바로 태종공이며 당시 수석 재상으로서 나라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감히 공주를 소홀하게 여길 수 없었는데 공주는 그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굴더니 태자를 낳아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상은 본래 사도황후를 총애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동륜공을 태자로 삼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숙명후는 공과의 관계를 더욱 자주 가져 상에게 발각되었으므로 왕이 그를 내쫓으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이 숙명의 침실에 간 적이 없었는데도 숙명이 임신을 하였으므로 숙명은 공과 함께 도망갔다. 여러 신하들이 태자가 공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였으므로 이에 동륜공을 태자로 삼았다. 공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또한 도리어 동륜공의 한결같은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살펴주어 태후의 마음을 편한케 해주라고 하자, 드디어 숙명과 부부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원광과 보리를 낳았으니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었겠는가?
개국5년에 모랑공이 비사벌을 유람하다가 병이 나서 길에서 죽자 낭도들이 이에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는데 그때에 공은 태후의 총애를 받아 늘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사양하려 하니, 낭도들이 말하기를 "위공의 아들이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누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명령하여 그 자리에 앉게 하고 제4대 풍월주로 삼아 군현을 순행케 하였다. 그때 마침 태후가 만호랑주를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산한 뒤에 떠나게 되었다. 옥진공주의 동생 금진도 위공의 딸이었는데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고 대왕이 죽자 물러나 문천가에 살았는데 남모가 애당초 받들려고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구리지공이 그와 사통하여 토함공을 낳았는데 매우 정묘하여 일찍부터 낭적에 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를 받들어 부제로 삼았다. 태후가 그를 궁중으로 불러 보고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비량숙공만 못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모보다 더 나으니 훌륭한 인재를 얻었음을 경축할 만 하다."하였다. 공도 토함공을 매우 사랑하여 행동을 언제나 함께 하니 금진랑주가 고맙게 여기고 공에게 축수를 올렸다. 토함공의 동생 사다함공이 크게 묘량의 풍모를 가지고 있어서 많은 낭도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 당시 무궁랑이란 자가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많은 무리들을 데리고 있었다. 사다함공이 나이가 어리면서 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공자는 참으로 옛날 신릉군, 맹상군에 비견됩니다." 하고 섬기기를 원하니 사다함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받아들이겠는가" 라고 하고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이 태후에게 아뢰기를 "토함의 아우 사다함은 나이가 어린데도 스스로 낭도들을 데리고 있으니 국선이라 이를 만 합니다." 하니 태후가 그를 궁중으로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사람을 포용하는 방법을 물었다. 사다함이 대답하기를 "남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그들의 좋은 점을 좋게 여겨주는 일뿐입니다." 하니 태후가 기특하게 여겨 대왕에게 말하여 귀당으로 삼아 궁문을 맡게 하니 그의 무리 1천 여명이 모두 충성을 다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때에 비조공의 아들 문노에게 검술을 배우게 하니 문노가 말하기를 "칼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대적하지 못하고서 어찌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는 호협심이 있어 비록 따르는 무리가 많다 하더라도 적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잘 돌보아 주십시오"하였다. 이에 문노가 자기 무리 오백명으로 사다함을 따를게 하니 그 위세가 토함보다 더 성대하였다. 그 때에 동륜공이 차츰 성장하였으나 대왕은 그를 보도할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마침 토함으로 하여금 보필하게 하니 토함이 말하기를 "이것이 저의 직분입니다." 하고는 화랑의 자리를 아우에게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공은 사다함을 보좌로 삼고 토함과 마찬가지로 아끼니 당시 사람들은 공이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하였다. 얼마 뒤에 가야가 배반을 하자 사다함은 총군을 요청하여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공은 그에게 주위를 넘겨주고 토함공과 함께 오로지 태자를 보필하는 일에만 힘썼다. 아! 훌륭하도다. 공의 깨끗한 덕과 영광된 이름은 만세토록 전하여 끊기지 않으리라. 공이 숙명공주와 함께 영흥사에 전심하니 태후도 귀의하였고 숙태자도 화려한 장식을 벗고 수계하였다. 공의 아들 원광법사는 숙명공주의 소생이다. 수태할 때 공주가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으나 화를 당할까 염려하여 자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금불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약사불인데 공주의 배를 빌려서 태어나고 싶소." 하였다. 이에 공주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 배례하니 부처는 공주를 안고 앞으로 엎어졌는데 흡사 뱃속으로 들어오는 듯하였다. 그때 마침 공도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궁중으로 몰래 들어가 엿보니 공주가 드러누워 마치 안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둥대고 있었으므로 그 까닭을 묻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부처의 힘이다." 하고는 서로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였다. 숙명은 또 공의 딸들을 낳았는데 곧 화명과 옥명이며 모두 궁중에 들어가 진평대왕의 후궁이 되었다. 원광의 아우 보리는 태자의 딸 만룡에게 장가들어 예원각간을 낳았는데 그는 곧 나의 할아버지이다. 공은 또 토함공의 동생에게 장가들어 서자 일곱명을 낳았는데 모두 귀히 되었다.
찬한다.
이황의 풍류는 계림의 청담 꺼리이네. 귀족의 자제로서 왕의 공주에게 장가들었고 금불이 와서 의지하니 그가 곧 약사여래였네. 화랑의 가문으로서 원광법사의 아버지이니. 수많은 공의 족속. 만세토록 무궁하리.
5. 사다함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다. 이전에 비량공이 벽화후를 사모하여 늘 그의 변소에 가곤 하였는데 법흥대왕은 비량공을 아껴 그 사실을 알고도 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결국 벽화후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구리지라 하였다. 벽화후처럼 얼굴이 아름답고 비량공처럼 용기가 있더니 성장하여 낭도의 무예를 좋아하였다. 금진랑주와 관계를 맺어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는데 새달은 이화공의 첩이 되었다. 사다함은 12세에 이미 검술에 능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며 16세에 정병 5천명을 거느리고 전단문으로 쳐들어가 백기를 세우고서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그 공으로 토지를 하사하자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어 양인으로 만들었다. 대왕은 더욱 그를 사랑하여 알천의 땅을 하사하였지만 그는 굳이 사양하고 그 가운데 불모지 약간만을 가려서 받고 말하기를 "이것이면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하게 하는데 충분합니다." 하였다. 그때에 이화공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낭도들에게 싫증을 내었다. 그리하여 공을 제5대 풍월주로 삼고 공의 동포제인 설원랑을 보좌로 삼았다. 설원랑은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공의 신하 무관랑이 많은 공을 세우고도 신분이 미천하기 때문에 보답을 받지 못한 채 죽자 공은 슬프게 여겨 애통해하다가 몸이 야위어져 죽었다. 공이 본래 미진부공의 딸 미실을 사랑하였고 미실 또한 공을 좋아하였으나 태후가 세종에게 시집가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끝내 장가들지 않고 죽었다. 낭도들이 다시 이화공을 세우자고 요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세종 전군이 더 낫다."하였으므로 세종을 세워 풍월주로 삼았다.
찬한다.
비량공의 후예이고 위화공의 소자이다. 전장에 나가 많은 공을 세우고도. 스스로 불모지를 택하였네. 청조산속에 송백이 길이 푸르리.
6. 세종
태종공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지소태후이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풍채를 가졌고 태후에게는 효도하고 대왕에게는 충성을 다하니 대왕도 그를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는 나의 막내동생이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단속하지 않았으나 워낙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여 실수하는 적이 없었다. 태후가 공경들의 예쁜 딸들을 가려 궁중에 모아놓고 공에게 보이자 공은 미실랑주를 가장 좋아하여 가까이 하려 하였으므로 태후는 크게 기뻐하여 미실로 하여금 궁중에 들어와 섬기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다함공이 정벌을 나갈적에 미실이 노래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부인이 되어 있었으므로 사다함공은 "청조가"를 지어 부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내가 죽어 신병이 되어 전군의 부처를 보호해 주리다."하였다. 임종할 즈음에 이화공이 그를 안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네 동생이 아직 어린데 네가 만약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뒤를 계승하겠는가?" 하니 사다함이 말하기를 "제 동생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의 고사에 따라 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이화공이 태후에게 아뢰어 세종을 세우고자 요청하니 태후가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 자신은 아직 유약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런데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종형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으면서 남긴 한마디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세종도 그렇다고 여기고 태화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 제6대 풍월주가 되고 설화랑을 보좌로 삼았다. 이 날 밤에 미실이 과연 꿈을 꾸었는데 사다함공이 품속으로 들어오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하였다. 그리하여 하종공을 낳았다. 이때에 동륜태자가 이미 장성하였으므로 태후가 만호공주를 짝지어 주어 진골정통을 잇고자 하였는데 사도황후는 대원신통을 잇게 하기 위하여 몰래 의논하기를 "내 아들이 훌륭하니 네가 태자와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는다면 너를 부인으로 삼아주겠다." 하였다.
이에 미실은 크게 기뻐하고 태자와 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은 그것도 모르고서 미실로 하여금 들어와 자신을 받들게 하고 황후궁 전주로 삼았다. 세종이 이에 출정을 요청하여 나가니 미실은 총애를 믿고 방탕하게 굴면서 설원랑 및 그의 아우 미생과 정을 통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그 사실도 모르고 그를 받들어 원화로 삼고 두화랑으로 하여금 낭도들을 거느리고 조회하게 하였다. 대왕이 전주와 함께 남도에서 조회를 받으니 원화의 제도가 폐지된지 29년만에 다시 부활되었고 곧 연호를 고쳐 "대창"이라고 하였다. 미실은 얼굴이 예쁘고 교태를 잘 부렸으며 옥진의 풍모를 크게 닮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혼령이 늘 미실의 가슴속에 있으면서 좋은 꾀를 준다고 하였다. 홍제원년 3월에 동태자가 보명궁에서 큰 개의 소동으로 죽자 대왕이 태자를 찾았으나 시종들이 대부분 미실의 낭도로 들어가 있으므로 미실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원화의 자리를 내놓았다. 대왕은 또한 세종을 어여삐 여겨 불러들이고 미실을 다시 세종에게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미실은 세종을 권하여 설원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하였다. 이때에 금태자 또한 미실을 좋아하여 설원, 미생등과 더불어 방외우의 교제를 맺었다. 세종공은 홀로 청절을 지켜 밖에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궁중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담박하여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태후에게는 효도하고 대왕, 황후, 태자에게는 충성하였으며 미실에게는 정절을 지켰으니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한다.
태후의 사자이고 정승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네. 청아한 행실 우뚝한 의료는 화랑의 본보기였네
7. 설화랑
설화랑의 처음 이름은 설원랑으로 금진낭주의 사자이다. 그의 아비 설정은 낭도로 얼굴이 아름답고 아첨을 잘하여 구리지 용양의 신하가 되어 낭주와 통정하여 설원을 낳았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을 잘 불었는데 출신이 미천한 탓에 낭도들이 받들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실이 상의 은총에 기대어 낭도들을 호령하였으므로 낭도들이 감히 많은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제7대 풍월주가 되어 미실을 부풍월주로 삼았다. 설원은 허리를 굽혀 선비에게 겸손하고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도와주니 낭도들이 모두들 복종하였으나 설원자신은 오히려 자기의 행위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미실은 곧 설원에게 모랑공의 과처인 준화낭주에게 장가들도록 권하였다. 낭주는 당시 나이가 38세로 18년 동안이나 과부로 지내다가 다시 화랑을 낳았으므로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위공의 후손이니 다시는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그런데 설원은 기탄없이 미실과 통정하였다.
준화낭주가 그 사실을 알고도 금하지를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준화낭주의 딸 준모가 미실을 통하여 동태자와 통정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또 금태자와 통정하고자 하니 설원이 이를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동태자를 섬긴 일을 임금이 알고 계시는데 지금 또 금태자를 받아들일 경우 임금이 그 사실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부를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하자 준화낭주가 말하기를 "낭군의 말이 옳다"고 하고는 준모에게 여승이 되도록 명하였으나 준모가 따르지 않았다. 설원이 준모를 유혹하여 통정하고는 1년여 동안 계속 정을 통하다가 준모가 임신을 하니 준화가 그 사실을 알고는 노하여 말하기를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가로막고는 자신을 정을 통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였다. 설원이 미실에게 도와주기를 요청하니, 미실이 미생으로 하여금 준모를 취하도록 해서 일이 평온해졌다. 준모는 미생에게 시집가서 설원의 딸을 낳아 미모라고 이름하였는데, 낭도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당시에 문도일파가 외방에서 세종을 따라다니면서 전공을 세웠으나 지위를 얻지 못하자 설원에게 복종하지 않고서 스스로 한 문파를 세웠다. 그렇게되자 낭도들이 드디어 두 파로 가라져서 설원파는 정통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고 문노파들은 청의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면서 서로 옳다고 다투니 미실이 이를 걱정하여 세종으로 하여금 이들을 화합시키게 하였으나 화합시키지 못하였는데 미실이 비록 새 임금에게도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지도부인만큼 총애 받지 못하였다. 지도부인의 아비 기오공이 문노와 종형제간이었으므로 지도부인은 평소부터 문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세워 국선으로 삼고 비보랑으로 하여금 그를 돕게 하였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를 좋아하고 협기가 많았으며 설원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하고 청유를 좋아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문노의 낭도들을 호국선이라고 부르고 설원의 낭도들을 운상인이라고 불렀다. 골품사람들은 대부분 설원의 낭도들을 따랐고 민간 사람들은 대부분 문노의 낭도들을 따르면서 서로 의를 연마하는 것으로 주를 삼았다. 진지대왕이 미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였으므로 사도태후가 이를 걱정하여 미실과 의논하여 폐위시키고 노리부공으로 하여금 왕의 직무를 행하게 하였으니 노리부공은 바로 사도태후의 오빠이다. 그는 미실의 남편인 세종공과 함께 대사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문노의 낭도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사도태후의 명령으로 두 낭도들을 하나로 통합하고는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으로 문노를 아선으로 설원과 비보랑을 좌우화랑으로 미생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불화를 진정시켰다. 이 때문에 문노의 낭도들이 미천한 출신의 사람으로서 고관에 많이 발탁되었으므로 초택의 사람들이나 항순한 사람들이 출신할 수 있는 문호로 여겨 문노를 받들기를 신과 같이 하였다. 그러자 미실이 설원이 문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는 설원에게 문노를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의 낭도들이 불평스러운 기색을 나타내자 설원이 말하기를 "총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다."하고는 무릎을 꿇고 문노를 섬겼다. 이로 인해 문노의 무리들도 설원에게 복종하니 미실이 기뻐하면서 문노로 하여금 그 자리를 설원에게 사양하게 하였다.
그러자 문노가 말하기를 "국선이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 그가 나의 제자가 되었는데 어찌 스승이 제자를 받들어 섬길 수가 있겠는가?" 하니 설원이 말하기를 "국선이 비록 전황이 설립한 것이기는 하나 풍월의 정통이 아니다. 그리고 세종전군은 왕자라는 귀한 신분으로도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는데 더구나 내가 사형을 봉향했던 것은 미실궁주의 명 때문이었다. 지금 궁주가 또 양위하도록 명하기 때문에 감히 반대치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문노가 말하기를 "궁주가 명하였다면 나 역시 어찌 감히 반대할 수 있는가?" 하고 또 이어 말하기를 "도맥으로는 스승이고 통맥으로는 동생이니 어떻게 처신해야 마땅한가?"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설원은 나의 충신이고 또 정통의 형이다. 어찌 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문노가 이에 절을 하고 신이라 칭하니 미실이 설원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문노에게 굽히게 하였던 것은 바로 오늘날고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니 설원이 배사하면서 말하기를 "신의 한 오라기의 터럭까지도 모두 총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문노는 국선으로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므로 선화라하고 설원은 미실을 영흥사에서 섬겼으므로 뒤에 미륵선화라고 하였다. ᄁ(?)까지 미실에게 충성을 바친 자는 설원이고 끝까지 세종에게 충성을 바친자는 문노이니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찬한다.
미실의 선하요 선화의 시초로다. 불문에 의탁하여 아름다움을 빛 냈도다. 성대 하도다. 청명이어 청사에 길이 남으리 시종 한결같은 충성 복의 터전 열으리로다.
8. 문노
문노는 비조부공의 아들이며 가야국의 문화공주이다. 어려서부터 검술을 잘하였고 의기가 있었다. 가야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다함이 함께 가서 토벌하기를 청하니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서 외조부 나라의 백성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사실을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말하기를 "나의 스승은 의인이다."하고는 가야국에 들어가서 함부로 살해하지 말라고 경계시키어 문노의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그의 뒤를 잇자 그의 낭도들을 세종에게 속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할 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어머니가 가야국 출신인 탓으로 현직에 오르지 못하니 세종공이 애석하게 여겼다.
진지대왕이 폐위되자 공으로 아찬이 되어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자리에 올라 제8대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용기가 있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아끼기를 자신을 아끼듯이 하였고 청탁을 구애하지 않고 자신에게 귀속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품어주었으므로 명성이 크게 떨쳐 낭도들이 서로 권면하여 그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사풍이 일어났으니 통일의 대업에 공에게 비롯하였다 하겠다. 공이 풍월주가 되었을 때 낭도들의 부곡을 나누는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풍월주로 있은 지 3년만에 비보랑에 그 자리를 전하였다. 공은 오래도록 장가들지 않았었는데 국선이 되어서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으로 삼았다.
윤궁낭주는 황종공의 딸로 동륜태자를 섬기어 딸을 낳고는 혼자 살고 있었으며 미실 및 미보랑과는 종형제간이었다. 비보랑이 윤궁낭주를 힘껏 권해 공의 계부로 삼게 하였다. 아들 셋을 낳고 딸 둘을 낳았다. 공이 선화가 된 데에는 윤궁낭주의 내조가 컸었다.
찬한다.
가야국이 외손이여 의기의 종주로다. 국선으로 화랑이 되어 나라의 기풍을 떨쳐 일으켰도다.
9. 비보랑
비보랑은 비대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낭주로 바로 미진부공의 여동생이다. 설원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 함께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 미치지 못하였고 잣대를 배웠으면서도 또한 설원에게 미치지 못하자 문노의 낭도를 들어가 검술을 배워 드디어 고제가 되어 문노를 보필하여 선화가 되게 하였으므로 그 공으로 공이 부선화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9대 풍월주가 되었다.
힘써 문노의 법제를 준수하였으며 미천한 자를 이끌어 주고 약한 자를 도와주기를 힘썼으며, 낭도들을 나누어 보내어 변수를 위무하였다. 당시에 미생공이 설원공의 부제로서 오랫동안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문노공이 양위하도록 명하였고, 공이 자리에 있은 것도 3년밖에 안되었으므로
낭도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이때는 건복 정월(580년)이었다. 공은 노리부공의 딸 세진낭주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 세호랑을 낳았고 또 진흥대왕의 딸 덕명공주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귀현하게 되었다. 서자인 유오랑은 공의 첩인 유지가 낳았는데 지명법사를 따라 진나라(陳)로 들어갔다가 많은 서책을 가지고 돌아와 사문의 후진에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 공이 역시 크다 하겠다. 찬한다. 법흥왕의 후손이요 진흥왕의 사위로다.
10. 미생
미생은 미진부공의 아들로 어머니는 묘도부인이다. 공의 누이는 미실궁주로 진흥대왕에게 총애를 받았으므로 공 역시 진흥대왕의 은총을 입어 여러 차례 입궁하여 동태자, 금태자 등과 함께 토함공에게 배웠다. 사다함공을 따라 낭도가 되었다. 공의 나이 겨우 12세 때에 세종공이 사다함의 뒤를 이어 풍월주가 되어 공으로 전방화랑을 삼고는 자신의 지위를 전하고자 하였는데 미실궁주가 설화랑을 총애하여 공으로 하여금 설화랑을 섬기게 하였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제10대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가 이미 36세였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사다함공은 16세에 풍월주가 되었는데 천하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내가 13세에 전방화랑이 되니 사람들이 더욱더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16세가 되기 전에 반드시 풍월주가 될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어찌 36세가 되어서야 풍월주가 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내가 총애를 받을 때에도 네가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내가 총애를 받지 못할 때에는 누가 하종을 위하여 도와주겠는가?" 하고는 하종을 부풍월주로서 삼게 하였다. 당시에 낭도들이 서로 쟁론하였는데 내외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써서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자들을 통합원류라 하였고 또 한파는 대원신통을 받들고자한 미실의 파가 그 두 번째 파이며 다른 한파는 진골정통을 받들고자 하는 문노일파로 이들이 세 번째 파였다. 그러나 문노도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으므로 감히 하종에게 다투지 못하였고 통합파는 하종이 재목이 못된다고 여기에 미생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한 파는 숙태자를 세우고 원광으로 그를 돕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들은 문노파와 통합파가 혼합된 자들로서 이화류라 하였다. 또 다른 한파는 천주공을 세우고 서현랑으로 그를 돕고자 하였는데 이들은 통합파 가운데 가야파들이었다. 공은 풍월주로 있은지 3년 만에 논의가 일치하지 않자 하종에게 양위하였다. 공은 부귀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아랫사람들의 실정을 잘 몰랐고 성품 또한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였으므로 인망이 두텁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선문에 있었기 때문에 낭도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배반하지는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아 자식이 백 명이나 되니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찬한다.
옥진의 후손으로 대원신통이다. 아들은 백명이고 따르는 무리는 만명이로다.
11. 하종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니 역시 대원신통이다. 문노파가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이화공의 아들 보리공으로 부를 삼았는데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이니 진골의 정통이다. 그러나 주형과 부제가 파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불화하므로 미실궁주가 걱정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의 명으로 낭도를 대대적으로 모이게 하여 이화공과 세종공을 제사하게 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고 불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얻게 되자 서현랑으로 삼으니 이 역시 대원신통이다.
이로 인하여 이화, 미실, 가야 3파가 단결하게 되었다. "당시 궁중에는 3태후가 있었는데 행정대왕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잘 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훌륭한 낭도들을 태후궁에 많이 소속시켰다.
태상태후와 사도법주는 미실궁주로서 법운을 삼았기 때문에 정령이 대부분 미실궁에서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인 아양공주는 바로 서현랑의 어머니인데 가야파의 후광이 되어 미실궁의 세력을 나누어 가졌다. 만호태후는 대왕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더욱 총애를 받아 진골 정통의 수주가 되었는데 지도태후가 태상과 만호에게 드나들면서 문노정파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밀어 보리공 대신 풍월주로 세우려 하였지만 만호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비록 풍월주의 지위는 얻지 못하였지만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때문에 서현랑이 "용춘공은 바로 선군의 아들이니 어찌 감히 내가 대적하겠는가?" 하고는 그 낭을 사양하며 양보하였다. 그렇게 되자 가야파도 용춘공에게 돌아갔는데 이들 역시 대원신통이었기 때문에 미실파들도 다투지 않았다. 낭도가 모두 축하하면서 "적임자를 얻었다." 하였다. 보리공도 용춘공을 아껴서 당을 달리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니 진골과 대원의 논의가 이 때에 비롯하였다. 하종공이 비록 어머니에게 효도하여 형세를 살펴 따랐으나 안으로 그 논의를 찬성하면서도 겉으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당시 은륜공주가 임금의 총애를 잃었는데 이는 바로 태상의 막내딸이었다. 태상이 대원을 염려하여 공에게 명하여 은륜공주를 받들게 해서 효종공을 낳았다.
앞서 설원공의 딸 미모낭주에게 장가들어 모종을 낳았었다. 효종의 누이는 하희와 월희이고 모종의 누이는 유모와 영모이다. 공은 청렴 검소하여 여색을 삼가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고 위를 잘 섬겨 세종의 풍토를 많이 지녔기 때문에 처음에는 복종하지 않는 파가 있었으나 결국은 모두 돌아왔다. 3년 동안 풍월주 자리에 있다가 보리공에게 물려주며 말하기를 "앞서의 열선들이 모두 대성이었는데도 오히려 3년 동안만 하였는데 내 어찌 감히 오래 있겠는가?" 하니 보리공이 "주형은 미실 원화의 아들이니 어찌 보통 열선과 동례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지만 공이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보리공이 비로서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바로 나의 상조이시다. 일찍이 선고에게 하종공에 대해 말하시기를 "지금 세상에 이러한 효자와 충신은 없다." 하셨는데 이는 미실궁주가 차례로 3조를 섬겼기 때문에 다른 형제가 있어 행동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은륜공주도 골품을 믿고 방탕하였지만 공은 세종공이 미실을 대하듯이 하여 따져 묻지 않았고 태양공주도 은륜의 형으로서 공과 이웃해 살면서 매우 유혹하였지만 공은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 공이 몸을 깨끗이 지킴이 이와 같았다.
찬한다. 청근함으로 덕을 지켜 휼륭한 이름 남겼으니, 세종의 아들로서 미실이 낳으셨도다.
12. 보리
보리공은 이화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로서 바로 지소태후의 딸이시다. 꿈에 황색사슴을 보고 공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큰 뜻을 품었다. 자라서 큰형인 원광법사와 함께 학문에 힘썼는데 원광이 일찍이 가르치기를 "나는 불이 되고 너는 선이 되면 우리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었는데 공이 비로소 낭도에 소속하여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때가 바로 건복8년(서기 586년)이었다. 공은 만호태후의 딸인 만룡낭주로 아내를 삼았는데 나이 겨우 13세였다. 이보다 앞서 태후는 공의 포형인 숙태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었는데 이때에 태후는 대원의 계통이 진골의 계통을 빼앗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만룡을 주었고 만룡도 기꺼이 아내가 되었던 것이다.
만룡의 형 만명은 나이가 들도록 시집가기를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서현랑과 몰래 좋아하였다. 그러자 만호태후는 본래 아양과 좋지 않는 사이였으므로 만명을 가두고 서현은 만놀로 귀양보내려 하였다. 그러자 만명은 도망하여 서현과 함께 달아났다. 태후는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공과 만룡이 극력 만류하여 보호되었다. 이때 공의 여형인 화명과 옥명은 모두 진평대왕을 섬겨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려고 하였는데 공은 거절하면서 "우리 가문은 대대로 화랑을 이어온 것으로 만족한데 어찌 벼슬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렇듯 공은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지켰으나 낭주가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상으로 하사 받은 것이 매우 많아 집안이 매우 넉넉하였다. 공은 낭주에게 "나는 낭도의 우두머리로서 어찌 혼자서 만이 부귀를 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아내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하자 낭주는 "부부는 한 몸이니 낭군의 마음이 낭첩의 마음입니다. 안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고는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낭도들이 모두 부모 받들 듯이 하였으며 무릇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과 함께 가서 위로하고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두 성인으로 비유하였다. 낭주는 왕의 누이인 귀한 신분으로서 부도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공이 감동하여 다른 여인을 두지 않았으며 정분이 비할 데 없이 좋았다.
늦게 아들 1명과 딸 1명을 두었는데 아들은 예원이고 딸은 보룡이니 즉 문무왕의 어머니이시다.
3년 동안 풍월주로 있다가 부제 용춘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다. 아 훌륭하도다. 공의 만년의 사적이 고승전에 나온다.
찬한다.
보리사문은 위공의 자손이로다. 만룡과 같은 덕으로 베푼 은혜 산과 같도다.
13. 용춘
용춘은 금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이며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은 황란한 행실로 인하여 폐위되어서 3년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공은 어렸으므로 그 얼굴도 보지 못하였다. 지도태후는 태상태후의 명에 의하여 다시 신왕을 섬겼는데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은 공을 어여삐 여겨 매우 총애하였다. 장성한 뒤 공은 강개한 뜻을 품고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섬겨 형과 서제 사이가 되니 비형랑과 무사랑의 낭도가 모두 귀속하여 3파가 모두 추대하기를 원하였고 이로 인하여 서현랑도 지위를 사랑하여 양보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제13대째이다. 호림으로 부제를 삼았다. 공은 낭도의 묶은 풍습을 혁파하고 한결같이 인재의 여부로써만 선발하고 골품에는 구애받지 않으면서 "골품이란 왕이나 신하의 지위를 구별하는 것인데 낭도에 어찌하여 골품을 적용한단 말인가?" 하니 대중이 크게 흡족해하면서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질 수 있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대왕이 아들이 없어 공의 형 용수 전군으로 사위를 삼아 전위하려 하였는데 전군이 공에게 물으니 공이 "대왕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혹시라도 후사가 있게 되면 아마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전군이 이로 인하여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가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전군으로 사위를 삼으니 바로 천명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이 때문에 내전에서는 공을 더욱 중하게 여겼으므로 호림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요직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후 낭도로서 등용된 자가 매우 많았다.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면서 용봉의 자태와 천일의 위의를 지녀 왕위를 이을 만 하자 대왕이 그에게 뜻을 두니 천명공주는 효순하여 양보하였다. 대왕이 공에게 선덕공주를 받들도록 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받들었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왕은 용수전군에게 모시도록 명하였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공은 고구려로 출정하여 큰공을 세워서 각간에 봉해졌다. 용수 전군이 임종시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부탁하였으니 아들은 바로 태종으로 우리의 임금이시다. 공주가 즉위하고 공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공은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니 여러 신하들이 사위를 셋을 두는 제도를 의논하였다. 공은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태종을 아들도 삼았다. 이보다 앞서 공은 왕명으로 호명궁에 있으면서 세 딸을 낳았었다. 공은 달리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태종으로 아들을 삼은 것이다. 서자 5명과 서녀 18명은 모두 귀히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아 훌륭하도다. 성덕의 천지와 같았다.
찬한다.
갈문의 덕이 일월과 같아 삼한의 대업이 힘입어 완성되었도다.
14. 호림
호림은 복승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로 지소태후의 딸이다. 공은 공주의 사생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비보랑의 아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공은 용력이 많아 격검을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소탈하고 검소하게 처신하고 골품이라 하여 높은 체 하지 않았다. 공의 적형인 마야부인이 당시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이 공을 발탁하여 부제로 삼았다. 이 때에 이르러 14대 풍월주가 되었으니 바로 진골의 계통이다.
공은 마음가짐이 청렴 정직하여 재물을 대중들에게 나누어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공을 "옷벗은 지장이다." 고 하였다. 공은 낭도들에게 "선과 불은 같은 도이니 화랑도 불을 몰라서는 안된다. 우리의 미륵선화 보리사문이 모두 우리의 스승이다." 하고는 공은 보리공에게 가서 수계하였는데 이 때문에 선과 불이 점차 융화되었다. 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으므로 다시 하종공의 딸인 유모낭주에게 장가들었다. 이때 미실궁주는 나이가 많았는데도 낭주를 극진히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고자하여 공에게 천부의 관음을 조성토록 명하여 아들을 빌어서 선종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의 대성인이 되었다. 공이 더욱 불을 숭배하여 곧 유신공에게 양위하고서 무림거사라 스스로 칭하고 조정의 일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받들어 의견을 물었다. 알천공들과 칠성우를 만들었는데 통일의 대업이 공등에게서 처음 나온 것이 많았으니 훌륭하고 지극하도다.
찬한다.
태후의 손자요. 진골의 후예로서 불선에 들어 천추에 공을 남겼도다.
15. 유신
유신공은 서현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으로 바로 만호태후의 사생녀이고 아버지는 숙홀종으로 역시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다.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을 하자 태후는 서현을 대원의 유라하여 허락하지 않으려 하자 마침내 만노로 도망쳐 20개월뒤에 공을 낳았는데 상서로운 꿈의 징조가 많았었다. 진평대왕은 자시의 누이가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여 서현공을 만노공으로 봉해주었다. 공은 장성하면서 제왕이 될 모습을 지녔는데 태후는 보고싶어서 돌아오기를 허락하였는데 보고 나서는 기뻐하면서 "이게 참으로 나의 손자다." 하였다. 이 때문에 가야파가 마침내 호림공의 부제로 받들었다. 보종공은 미실궁주의 말자로서 아버지는 설원인데 공이 중망이 있으므로 그 지위를 양보하였는데 이는 대개 궁주께서 태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한 것이다.
당시에 공의 나이는 15세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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