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은 신라 38대 임금으로 785-798 기간 동안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삼국사기는 신라 본기 12권 가운데 제 10권의 시작을 원성왕으로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신라 김씨는 내물왕계, 무열왕계, 또 원성왕계가 이어서 왕위를 이었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내물왕에서 진덕여왕까지의 계보와 무열왕 이후의 계보에서 훌쩍 뒤어넘은 변화가 있었고, 무열왕 이후 36대 혜공왕까지는 부자 상속이 잘 되어 오다가, 원성왕 부터는 별개의 계보가 이어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 성덕왕 - 효성왕, 경덕왕 - 혜공왕 까지는 부자 상속이 잘 되어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37대 선덕왕(780-785)입니다. 선덕왕은 혜공왕의 자식이 아니라, 33대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과 뒷날 개성대왕으로 추촌된 효방의 자식입니다. 선덕왕은 혜공왕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선덕왕이 왕실의 방계 출신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그의 집권 시기에 계속해서 양위를 하겠다는 등, 약한 왕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효방을 살펴볼까요. 효방은 내물왕의 9세손이라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 원훈 이전의 계보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두고 두고 문제가 되겠지요.
자, 그런데 38대 원성왕은 선덕왕과는 전혀 별개의 족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39대 이후의 족보를 보면
원성왕-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희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이 모두 다 그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원성왕계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무열왕계도 아니고, 원성왕계도 아닌 37대 선덕왕 김양상은 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원성왕과 선덕왕의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덕왕이 내물왕의 10대손, 원성왕이 12대 손이라고 기록에는 되어 있지만, 원성왕 즉위조에는 선덕왕의 동생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뭔가 계보의 조작 냄새가 풍김니다.
무엇보다 원성왕 김경신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자신의 고조부인 법선을 추봉해 현성대왕, 증조부인 희관을 신영대왕, 할아버지 위문을 흥평대왕,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 어머니를 소문태후로 각각 추봉합니다.
쉽게 말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으니, 자기 조상부터 새롭게 추봉을 한 것입니다. 즉 신라 왕실의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조치가 중요한데, 성덕대왕과 개성대왕 2묘를 철훼하고,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대왕, 문무대왕과 함께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을 신라 5묘로 만들어 버립니다. 5묘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왜 성덕대왕과 개성대왕 두 묘를 훼손시켰느냐는 것입니다. 성덕대왕은 신라 33대 임금으로 선덕왕의 모친 사소부인의 아버지입니다. 즉 그의 사위인 개성대왕의 아버지 원훈은 별 볼일 없는 인물이니가, 그의 장인인 33대 성덕대왕을 선덕왕이 제사를 지내주었던 것일 것입니다. 성덕대왕을 통해 선덕왕의 정통성이 확보되는 셈이니까요.
그것을 훼손했다는 것은 결국 원성왕이 이전 무열왕계의 김씨를 제거했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원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에 사실 더 유력한 왕위 계승자는 김주원이었습니다. 그는 선덕왕의 족자 즉 조카뻘 되는 인물이지요. 그런데 김주원이 북천이 넘쳐 왕궁에 못오는 사이에 김경신이 잽싸게 왕위에 오릅니다. 한마디로 찬탈이지요. 즉 쿠테타로 집권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김주원은 나중에 명주(강릉)으로 내려가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지요.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이 나중에는 헌덕왕14년(822년)에 반란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워 신라 전역을 혼란에 돌입시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결국은 원성왕의 후손에 의한 왕계는 계속 이어집니다.
원성왕은 쿠테타로 집권하여 신라 하대를 여는 장본인이 되는 셈입니다.
자,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소개합니다.
그것은 선덕왕의 할아버지인 원훈이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는데, 화랑세기의 기록이 만약 사실이라면, 왜 원성왕이 그를 제거하려고 했는지, 또 김유신의 후예인 신김씨가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풀어낼 수가 있겠지요.
신라 37대 선덕왕은 경주김씨가 아닌 가야김씨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참고로만 해두어야 하겠지요.
삼국사기는 신라 본기 12권 가운데 제 10권의 시작을 원성왕으로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신라 김씨는 내물왕계, 무열왕계, 또 원성왕계가 이어서 왕위를 이었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내물왕에서 진덕여왕까지의 계보와 무열왕 이후의 계보에서 훌쩍 뒤어넘은 변화가 있었고, 무열왕 이후 36대 혜공왕까지는 부자 상속이 잘 되어 오다가, 원성왕 부터는 별개의 계보가 이어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 성덕왕 - 효성왕, 경덕왕 - 혜공왕 까지는 부자 상속이 잘 되어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37대 선덕왕(780-785)입니다. 선덕왕은 혜공왕의 자식이 아니라, 33대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과 뒷날 개성대왕으로 추촌된 효방의 자식입니다. 선덕왕은 혜공왕에게는 고모부가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선덕왕이 왕실의 방계 출신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그의 집권 시기에 계속해서 양위를 하겠다는 등, 약한 왕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효방을 살펴볼까요. 효방은 내물왕의 9세손이라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 원훈 이전의 계보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두고 두고 문제가 되겠지요.
자, 그런데 38대 원성왕은 선덕왕과는 전혀 별개의 족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39대 이후의 족보를 보면
원성왕-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희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이 모두 다 그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원성왕계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무열왕계도 아니고, 원성왕계도 아닌 37대 선덕왕 김양상은 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원성왕과 선덕왕의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덕왕이 내물왕의 10대손, 원성왕이 12대 손이라고 기록에는 되어 있지만, 원성왕 즉위조에는 선덕왕의 동생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뭔가 계보의 조작 냄새가 풍김니다.
무엇보다 원성왕 김경신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자신의 고조부인 법선을 추봉해 현성대왕, 증조부인 희관을 신영대왕, 할아버지 위문을 흥평대왕,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 어머니를 소문태후로 각각 추봉합니다.
쉽게 말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으니, 자기 조상부터 새롭게 추봉을 한 것입니다. 즉 신라 왕실의 혁명적인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조치가 중요한데, 성덕대왕과 개성대왕 2묘를 철훼하고,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대왕, 문무대왕과 함께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을 신라 5묘로 만들어 버립니다. 5묘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왜 성덕대왕과 개성대왕 두 묘를 훼손시켰느냐는 것입니다. 성덕대왕은 신라 33대 임금으로 선덕왕의 모친 사소부인의 아버지입니다. 즉 그의 사위인 개성대왕의 아버지 원훈은 별 볼일 없는 인물이니가, 그의 장인인 33대 성덕대왕을 선덕왕이 제사를 지내주었던 것일 것입니다. 성덕대왕을 통해 선덕왕의 정통성이 확보되는 셈이니까요.
그것을 훼손했다는 것은 결국 원성왕이 이전 무열왕계의 김씨를 제거했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원성왕이 왕위에 오를 때에 사실 더 유력한 왕위 계승자는 김주원이었습니다. 그는 선덕왕의 족자 즉 조카뻘 되는 인물이지요. 그런데 김주원이 북천이 넘쳐 왕궁에 못오는 사이에 김경신이 잽싸게 왕위에 오릅니다. 한마디로 찬탈이지요. 즉 쿠테타로 집권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김주원은 나중에 명주(강릉)으로 내려가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지요.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이 나중에는 헌덕왕14년(822년)에 반란을 일으켜 장안국을 세워 신라 전역을 혼란에 돌입시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결국은 원성왕의 후손에 의한 왕계는 계속 이어집니다.
원성왕은 쿠테타로 집권하여 신라 하대를 여는 장본인이 되는 셈입니다.
자,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소개합니다.
그것은 선덕왕의 할아버지인 원훈이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는데, 화랑세기의 기록이 만약 사실이라면, 왜 원성왕이 그를 제거하려고 했는지, 또 김유신의 후예인 신김씨가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를 쉽게 풀어낼 수가 있겠지요.
신라 37대 선덕왕은 경주김씨가 아닌 가야김씨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참고로만 해두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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