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에서 동이계통과 슈메르족에 대해 언급을 하였다면, 이젠 '염제 신농씨'를 언급할 차례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동이계통은 일부가 기후의 영향을 받아 서방으로 1차로 건너가 1차 슈메르족이 된 이후 동이계통에서는 아주 인자한, 말 그대로 슈퍼 성군인 염제 신농씨께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농씨 하면 그저 삼황오제 시대 한 제왕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그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신농씨가 우리 고유의 전설에서는 전혀 전해져 내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신농씨는 이름만 바뀌어 우리의 전설 가운데 하나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단군 신화인데, 이것은 조금 뒤에 언급될 것입니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 이름 그대로 불을 최초로 발견한 불의 화신이요, 농사를 최초로 짓는 방법을 발견하여 인류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한마디로 신(神) 중의 신(神)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에는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는 이름인 신(神)이 들어가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소의 머리를 지녔다는 것도 그가 농사의 완전한 신(神)임을 나타냅니다. 나중에 그의 외손 뻘 되는 후직과 같이 조선(전주 李씨)시대에 농사신으로 섬겨집니다.
신농씨의 탄생도 특이합니다. 문헌상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전(少典), 어머니는 여등(女登)이라고 합니다.
전설에 그녀가 화양(華陽)이라는 곳엘 놀러 갔다가 신비스러운 용을 보고 난 후 임신을 해서 낳은 것이 신농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신화에서 신농의 아버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어머니는 정확히 나오는데 이 또한 모계사회였음을 반영합니다(상고대가 모계사회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엥겔스가 지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란 책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신농의 탄생신화는 또한 신농이 태양신임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놀러갔던 곳이 ‘화려한 햇볕’(華陽)이라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신농씨에 대해 자세히 나타낸 글 "동양의 신화" 일부를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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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 이전의 옛날 사람들은 대개 사냥을 해서 짐승의 고기만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신농 시대 무렵 인구가 늘어나면서 짐승이 부족하게 되었다. 신농은 백성들이 굶주려 하는 것을 보고 농업을 발명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몇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신농이 식량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곡식의 비가 내렸다고 한다. 신농이 그것들을 심어 비로소 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당시 몸 빛이 붉은 새 한 마리가 주둥이에 아홉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물고 나타나 그것을 땅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신농이 그것을 주워 밭에다 뿌렸는데 그 쌀을 먹은 사람들은 늙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류가 신농의 시대에서야 비로소 수렵채취의 단계에서 농업의 단계로 옮겨갔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불은 농업과 어떤 관련이 있길래 신농은 두 개의 신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을까? 처음에 농사는 경작지가 없었기 때문에 산에 불을 질러 화전(火田)을 일구어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불의 신이 농업의 신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신농은 태양신이기도 한데 태양이 작물의 생장을 주관한다는 사고가 신농으로 하여금 농업의 신도 겸하게 하였을 것이다. 붉은 새가 벼 이삭을 물고 날아왔다는 이야기도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붉은 새는 불의 신인 신농의 사자임을 암시하고, 많은 곡식 중 벼 이삭을 물고 온 것은 도작(稻作) 농업이 강남 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신농은 남방의 신이기 때문이다.
신농은 의약(醫藥)의 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의학을 창시한 신인 셈이다. 신농은 우선 어떤 풀이 인간에게 이롭고 해로운지를 감별해 내었다.
진(晉) 나라 때에 지어진 ‘수신기’(搜神記)에 의하면 신농에게는 신비한 붉은 채찍이 있었는데 이 채찍으로 풀을 한번 후려치면 그 풀의 독성의 유무와 맛, 특징 등을 다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농은 모든 풀이 어떠한 약효가 있는지를 파악하여 인간의 병 치료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한의학의 고전으로서 모든 한약재를 분류, 기록해 놓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는 책은 신농의 이러한 신화적 행위를 기려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신비한 붉은 채찍 같은 것은 없었고 신농은 매일 직접 풀을 씹어서 맛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농은 자주 독초에 중독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에 차 잎을 씹으면 해독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신농이 그만 단장초(斷腸草)라는 풀을 맛보다가 창자가 끊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는 신농 신화가 민간에서 전설로 변하면서 신농을 지나치게 인간화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신농이 이외에도 인간을 위하여 행한 중요한 업적으로는 시장을 개설한 일이 있다. 사람들이 편하게 물건을 바꾸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일정한 장소에 시장을 열도록 한 것이다.
태양신인 신농은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를 시장을 여는 시각으로 정하였다. 그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재물을 가지고 오게 하여 교역을 행하도록 하였다.
신농이 시장을 개설하였다는 것은 고대의 농경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진입하여 초보적으로 도시가 형성된 현실을 반영한다.
신농은 한(漢)나라 때에 만들어진 신들의 계보에서 남방을 다스리는 지역신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중앙을 다스리는 황제보다도 일찍 등장하여 인류 문명의 초기에 많은 공적을 끼쳤던 위대한 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역신으로 격하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후배 신인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신농은 황제와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벌였는데 한번은 신농 자신이 휘하의 신들을 거느리고 판천(阪泉)이라는 곳에서 싸웠고 또 한번은 신농의 후계자인 치우(蚩尤)가 탁록이라는 곳에서 싸웠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한 신농과 치우의 신족(神族)은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대륙의 중심부에서 쫓겨나 남방으로 이주했다고 한다.(필자 주 : 대표적으로 월남의 신화에 민족신으로 신농씨가 등장, 그리고 남방 민족 중에 치우를 시조로 하는 묘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남방으로 이주한 것은 아닙니다.)
월남의 개국신화에서 신농은 민족의 시조신으로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신농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손에 벼이삭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신농의 신화적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국에는 이러한 생동적인 신농의 그림이 없다. 신농은 이미 인간화되어 의젓한 임금님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인류를 위해 그토록 좋은 일을 많이 했던 신농, 그러나 신농은 별다른 이유없이 황제에게 지존의 자리를 물려주고 만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기 젊은 신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은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너무 탐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비롭고 베풀기 좋아하는 신농이 황제에게 축출된 것은 무언가 부당한 것 같고 억울한 느낌이 든다.
이 느낌, 그것은 한(恨)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한의 정서가 멀리 신농의 심정에 뿌리를 대고 있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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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면 신농씨는 농사, 불, 붉은 색 계통과 상당히 관련이 깊습니다. 붉은 새가 벼 이삭을 물고 날아왔다는 이야기, 신비한 붉은 채찍으로 약효를 파악했다는 이야기. 한국어의 뿌리를 보면, 불, 붉다, 밝다, 보다, (불) 붙다, (바람 등을) 불다 등의 용어는 모두 같습니다.
신농씨족(신농씨의 후예를 뜻함)들은 강(姜)을 족칭으로 삼았는데, 강이란 글자 자체가 '양(羊)'과 '여자'로 구성된 글자로서, 양은 신농씨족의 대표적 토템이었고 여자란 당시가 모계사회로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했음을 가리킵니다. 이후에도 언급하지만 황제계인 하계(夏啓)가 완전한 부계제로 제도를 바꾸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떨어졌습니다.
신농씨는 한(漢)나라 때 반고가 지은 책인 <<백호통(白虎通)>>에서 태양신으로까지 등장할 만큼 신농씨족과 태양은 뗄레야 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적인 태양 숭배 사상은 원래 신농씨족이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신농씨족은 태양을 토템으로 했기에 신농씨족의 씨칭자에는 모두 일(日), 양(陽)이 들어있다고 하며 나중에 아메리카로 건너간 인디언. 인디오의 여러 문명들도 하나같이 태양을 숭배하여 이는 연구 대상입니다. 신농씨족 동이계통의 한 갈래인 왜(일본) 역시 태양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의 업적을 말하자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매우 인자했고, 그가 성천자 혹은 성군으로 부르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발견한 불을 이용하여 청동기로 화폐도 처음 만들고, 시장 체제도 처음 지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공적은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가을을 뜻하는 글자 추(秋)에 단순히 햇빛에 익어간다고 불화(火) 자(字)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 신화에서는 염제 신농씨 이전에 이미 수인씨(燧人氏)니 태호 복희씨(太호 伏羲氏, 호字는 日+皐)니 하는 천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실상 알고 보면 수인씨는 본래 삼황오제의 신화가 아닌 단순 민간 신화에 불과했는데 후대에 편입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태호 복희씨는 어떤가.
태호와 복희씨는 원래 다른 인물이었다가 후대에 동일인으로 인식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신화의 원형을 전하는 문헌 가운데 하나인 <<산해경(山海經)>>에 태호씨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산해경에는 오히려 태호씨 보다는 신농씨에 대한 구절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는 신농씨가 더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복희씨 신화를 보면 그가 과연 동이계통이 맞는가가 의심됩니다. 복희씨 전설에서 복희씨의 어머니인 화서씨(華胥氏)는 커다란 발자국을 밟고 복희씨를 낳았는데, 이 전설은 동이계통의 전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화하계인 주(周)왕실의 시조 후직 기(后稷 棄)의 어머니가 큰 발자국을 밟고 후직을 낳은 것과 같은 유형입니다.
이로 볼 때 복희씨는 신농씨보다 후대의 인물로 혹시 황제(黃帝)계인 하우(夏禹)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하우의 부인이 여와이고, 하우와 여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하계(夏啓)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저는 염제 신농씨가 최초의 임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염제와 신농씨가 원래 다른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염제와 신농씨 역시 원래는 다른 인물이었는데 후대에 동일인으로 인식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연구해보면 염제=신농씨일 가능성이 여전히 높습니다.
염제는 신화 상에서 강(姜)씨족의 수령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신농씨는 신화 상에서 강수(姜水)에서 자랐기에 강씨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볼 때 두 인물은 같은 계통이 분명합니다. 물론 성씨의 개념은 주나라 때에 생겼지만 강(姜)이라는 것은 일종의 씨칭자(이름자)였고 이것이 한세대 한세대 내려오면서 족칭이 되었음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게다가 염제는 황제 바로 이전의 인물이 분명하고 신농씨 또한 전설상에서 헌원 황제 바로 이전의 인물로 나오고 있어 두 인물은 시대적으로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염제=신농씨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기술에 있어 염제와 신농씨는 동일인물임을 바탕으로 기술하고자 합니다.
본래 중원에는 많은 종족이 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미 높은 문명을 지니고 있던 신농씨족 동이계통이 중원(천하)을 최초로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천하를 어질게 다스리던 신농씨. 그러나 갑자기 어느 날 화하계에서 헌원 황제(軒轅 黃帝)라 하는 인물이 나타나 신농씨와 판천(版泉)의 들에서 3번 전쟁을 치룹니다. 황제로서는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야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농씨는 황제와의 전쟁에서 결국 패배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은 산해경에서 자세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 때 황제는 전쟁에 곰(熊), 호랑이(虎) 등을 데리고 싸웠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황제계의 토템은 곰과 호랑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이 토템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의 계통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은나라와 진나라 시조는 같은 제비알(현조의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신화적 공통이 단순히 이들이 같은 계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류를 하면서 나타난 공통적 현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조상의 이야기를 사고 팔고 합니까?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조상에 대한 전설이나 이야기는 함부로 사고 팔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합니다.
대표적으로 상(은)나라 말기에 나타난, 상왕실에서 믿던 신(神)들 가운데 하나인 상제(上帝)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은나라를 연구하는 갑골학자들은 이 상제가 본래는 은족이 아닌 다른 종족들이 섬기던 신인데, 상왕조 말기에 이 상제가 상왕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차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상제가 은나라의 시조로 나타난 적은 없습니다. 은나라에서는 조상신은 따로 모셨습니다. 즉 자기의 실제 조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교류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난생설화의 경우는 어느 정도 교류가 인정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남방계통에도 난생설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민족을 남방계로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남방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리 지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물길족 등의 북방계가 우리와 문화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들의 유전자를 보면 우리와 아주 가깝습니다.
우리민족과 만주족, 그리고 몽골민족, 인디언 등은 유전자가 서로 서로 매우 가깝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다시 되돌려 계속합니다. 어쨌든 신농씨는 이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서막에 불과합니다. 신농씨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을 때 신농씨는 매우 어진 정치를 폈기 때문에 신농씨의 편을 드는 신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반면에 황제는 대의가 없이 그저 자신이 천하를 차지해야겠다는 야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농씨 계통의 신들이 황제와 계속 전쟁을 하게 되는데, 황제는 이들을 상대로 혼자서 계속 싸워야만 했습니다.
염제 신농씨와 같은 계열로서 신농씨의 하야(下野 :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남) 후 황제와 탁록에서 전쟁을 계속한 인물, 바로 치우(蚩尤)입니다.
치우 언급에 앞서 신농씨의 하야 이후의 전설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신농씨는 정치에서 물러나신 이후에도 백성들을 위해 마지막 일을 하였는데 바로 최초의 약(藥)과 차(茶)를 발견한 것입니다. 신농씨는 이토록 백성을 위한 최초의 정치를 폈는데도 황제에 의해 억울하게 제위에서 밀려난 것입니다.
슈메르의 후손 중 하나로 보이는 유태인 역시 서양에서 고생을 심하게 했고, 인디언 또한 후에 미국 놈들에게 도륙 당한 이후 미국에게 자신의 역사마저 빼앗기고 고유 언어마저 빼앗겼는데 참 우리민족은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이러한 한(限)을 지닌 공통점이 있지요.
어쨌든 이야기를 되돌려서, 치우는 황제와 전쟁을 했는데 이는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치우는 염제의 후손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치우가 염제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치우의 성씨가 강(姜)씨였다고 합니다. 그 또한 염제신농씨족(羊족, 태양족)이었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치우는 신농씨의 후손이라기 보다는 친척인 것 같습니다. 치우는 신농을 이은 2대 천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상고시대 치우는 천자(임금)였고, 아직 황제는 임금이 되지 못했을 시절입니다. 황제는 끝까지 임금이 되기 위해 치우와 전쟁을 하였는데 번번히 지기만 했습니다. 치우는 전쟁의 신(神)이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황제계의 후손을 자칭한 한(漢) 고조까지도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여기며 치우 사당을 세웠을까요?
치우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동양의 신화" 글을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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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농에게 도전하였고 양군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 위치한 판천(阪泉)의 들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황제는 호랑이 표범 곰 등을 길들여서 선봉으로 삼고 독수리 솔개 매 등을 깃발처럼 날려 신농군을 공격하였다.
세 차례의 전투에서 황제군은 모두 승리하였고 신농은 패배하여 남방으로 쫓겨갔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등 한(漢) 나라 때에 지어진 책들은 이 전쟁을 두고 신농이 제후들을 침략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했기에 황제가 징벌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신농의 선신(善神)으로서의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한 나라 때에 승리자인 황제를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신농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판천의 전투는 오히려 훨씬 더 큰 전쟁의 서곡에 불과하였으니 그것은 신농의 용맹한 신하 치우(蚩尤)가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치우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형제가 많아 72명이라고도 하고 81명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의 용감하고 강인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리라.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또 그의 귀밑 털이 칼날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는 설도 있다. 소의 발굽을 했다거나 머리에 뿔이 돋았다는 설은 신농이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가 신농의 혈통임을 암시한다.
치우는 훌륭한 무기제작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일족은 갈로산(葛盧山)과 옹호산(雍狐山) 이라는 곳에서 구리를 캐서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많이 만들었고 무장한 군사력으로 신농 신족 내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된다.
치우의 도전은 자신의 임금이자 어른인 신농의 억울한 패배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복수심에 불탄 치우는 전군을 동원하여 황제의 영역인 탁록으로 진격하였다. 탁록은 지난번 황제와 신농이 싸웠던 판천 근처의 땅이다.
치우의 군대에는 앞서 말한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72명 혹은 81명의 용맹한 형제들과 바람의 신 풍백(風伯), 비의 신 우사(雨師)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하고 다리가 넷인 이매 등의 도깨비 무리가 대거 참여하여 사나운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황제 측에서도 대비가 없을 수 없었다.
호랑이 표범 곰 독수리 솔개 매 등의 맹수ㆍ맹금(猛禽) 군단과 충직한 신하인 날개 돋힌 용 응룡(應龍), 황제의 딸이자 가뭄의 여신인 발(魃) 등이 군대를 이루어 치우군에 대항하였다.
전세는 처음부터 황제군에게 불리하였다.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치우 형제들과 도깨비 군단의 위세에 황제군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는 황제가 치우와의 처음 아홉 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마지막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치우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은 어떠했던가.
계속 치우군에게 밀리던 황제는 응룡을 시켜 천상에 엄청난 양의 물을 모아 두었다가 치우군에게 퍼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알아 챈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요청하여 그 물을 황제군에게 쏟아 붓도록 하였다.
황제군 위로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 닥쳐 병사들이 떠내려가고 우왕좌왕 혼란에 빠지자 황제는 딸인 발을 불러 지상에 내려오게 했다. 가뭄의 신이 나타나자 폭풍우는 곧 개었고 황제군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깨비 군단이 쳐들어 왔다. 이들은 신음하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어 황제군을 어지럽게 했다. 황제는 이에 호각을 크게 불어 용의 울음소리를 내게 하였더니 도깨비 군단이 놀라 달아났다.
황제는 호각 외에도 신기한 북을 만들어 자기편의 사기를 돋우고 치우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는 외다리에 천둥소리를 내는 기(夔)라는 괴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택(雷澤)이라는 호수 가에 살던 뇌수(雷獸)의 뼈를 뽑아 북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을 두들겼더니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오백리 밖에서도 들렸다 한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손실을 본 치우는 이번에는 큰 안개를 일으켜 황제군으로 하여금 갈피를 못잡게 했다. 황제는 이에 신하 풍후(風后)로 하여금 북두칠성을 본따 지남거(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 수레는 북두칠성과는 정반대로 항상 남쪽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 있었다. 황제군은 지남거에 의지해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되어 오히려 치우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토록 용감했던 치우 형제들도 하나 둘, 전사하고 치우만이 혼자 싸우다가 결국 힘이 딸려 응룡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운 뒤 즉각 처형하였다. 이로써 중국 신화에서 보기드문 큰 싸움인 황제-치우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치우는 목이 잘려 몸과 목이 따로 묻혔고 신농과 치우의 신족은 죽거나 변방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황제는 이제 명실공히 신들의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황제-치우의 전쟁신화는 한(漢) 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민족의 정통성과 권위를 밑받침하는 역사 이야기로 탈바꿈 하였다. 즉 중국민족의 조상인 황제가 야만족인 치우를 물리침으로써 문명의 제국인 중국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화는 이처럼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은 치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들에게 영원한 죽음이란 없다. 치우는 얼마 안 있어 전쟁의 신으로 부활하였다. 그의 강렬한 투쟁 의욕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숱한 전쟁을 통해 한(漢) 왕조를 건설하였던 고조(高祖) 유방(劉邦) 조차도 치우의 힘을 빌기 위해 제사를 드렸다 한다.
치우는 또한 은(殷) 나라 때에 도철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치우의 이러한 형상과 역할은 신라 시대의 도깨비 모습을 새긴 귀면와(鬼面瓦)에까지 이어진다.
요즘 거리와 경기장을 메운 붉은 악마의 물결과 그들이 휘두르는 깃발에서 도깨비 얼굴을 많이 본다. 붉은 악마 응원단은 이 도깨비가 치우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들은 알까? 그들 자신이 투혼의 상징인 치우가 부활한 몸이기도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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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는 황제와의 전쟁에서 싸우기만 하면 무조건 이겼습니다. 치우는 신농씨의 청동무기를 이용하여 황제를 압도한 것입니다. 염제의 후손인 '과보' 역시 치우를 도왔습니다. 치우는 도깨비 군단을 이끈 것으로 전해지는데, 도깨비는 우리민족의 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유물이 많이 존재합니다. 먼저 은나라 유물에도 등장하고 이후 고구려, 신라 등의 귀면와에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산해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고 문헌과 전설 등을 살펴보면 치우와 황제의 마지막 전투에서 치우가 패함으로써 황제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이 설을 중심으로 하고자 합니다.
치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과보와 함께 황제에게 붙잡혀 죽었습니다. 이제 황제 헌원의 세상이 되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신농씨족의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여담 : 이점 고구려, 백제 유민과 상당히 닮았습니다).
신농씨의 후손인 형천(刑天)이 치우에 이어 등장하여 황제계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황제는 신농씨족들과 전쟁을 계속 하느라 제위에 오르지도 못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동양의 신화" 글을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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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의 투혼 그리고 후계자들
치우의 잘린 몸에선 붉은 단풍·붉은 호수 생겨나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황제(黃帝)에게 도전장을 냈던 치우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장렬히 죽고 말았다. 그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장자’(莊子)에서는 탁록의 들녘에 피가 백리를 두고 흘러내렸다고 표현하였다.
황제는 패배한 치우에게 온갖 죄악을 덮어 씌웠다. 그는 탐욕과 오만, 잔인함과 무도함의 화신이 되었다. 반대로 황제가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요, 자비와 인정을 베푸는 선신(善神)으로 칭송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치우는 호락호락 죽어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강인한 신이었다. 그래서 몸은 비록 죽었어도 기운은 살아 있어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으로 살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그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무렵부터 일어났다. 황제는 치우를 사로잡았을 때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꽉 채웠다. 그리고 치우의 목을 자르고 난 후 피묻은 수갑과 족쇄를 풀어 내버렸는데 그것들이 나무로 변해버렸다.
그 나무의 잎새는 피빛처럼 붉어서 치우의 처참한 죽음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단풍나무는 이렇게 치우의 넋이 깃들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신체의 변형(Metamorphoses)이 흔히 일어난다. 고대인들은 몸이 스러져도 바탕의 생명력이나 영혼은 죽지 않고 다시 몸을 바꾸어 되살아난다고 믿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변형 이야기가 많다.
가령 아폴론이 에로스가 쏜 사랑의 화살을 맞고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된 요정 다프네는 아폴론에게 쫓기다 못해 월계수로 변해버린다. 치우가 처형당한 땅에서도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치우의 목이 잘린 지역은 몸이 분해되었다고 해서 해현(解縣)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현에 있는 해지(解池)라는 호수는 물 빛깔이 붉다. 그것은 치우가 목이 잘릴 때 흘린 피 때문이라고 한다.
치우의 잘린 목과 몸체는 그의 본거지였던 산둥 땅의 수장현(壽張縣)과 거야현(鉅野縣) 두 지역에 따로 묻혔다. 머리가 매장된 수장현의 주민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이 용맹한 신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무덤으로부터 피어올라 하늘까지 치솟아 마치 깃발이 너울거리는 것 같아 그것을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 한다.(필자 주 : 치우가 붉은 것과 관련이 많은 것도 그가 신농씨의 친척임을 암시합니다. 치우는 우리민족 상고대의 임금임에 동시에 신농씨족이었습니다.)
이 붉은 안개같은 기운은 붉은 단풍, 붉은 호수와 마찬가지로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의 변형된 모습이지만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죽어서도 굴복하지 않는 치우의 기개와 투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치우는 고향인 산둥에서 병주(兵主)로 숭배된다. 병주는 곧 군대와 전쟁의 신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이처럼 훌륭한 무인이나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을 때 신으로 숭배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는 일찍이 치우가 있었고 삼국시대 이후에는 그것이 관우(關羽)로 바뀐다.
오(吳) 나라 장군 여몽(呂蒙)에게 비명횡사한 관우가 후일 민간에서 군대의 신, 재물의 신으로 숭배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최영(崔瑩), 임경업(林慶業) 등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최영 장군은 고려의 충신이었으나 이성계 일파에게 제거당한 후 무속의 큰 신으로 거듭 태어나고 임경업 장군 역시 충신이었으나 간신 김자점(金自點) 등의 모함에 의해 옥사(獄死)하자 그가 한때 머물렀던 연평도의 해신(海神)으로 섬겨진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고대 동아시아의 원시종교인 샤마니즘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한(恨)이 깊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필자 주 : 여기서 샤머니즘을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이는 북몽골계통에서 자주 있는 것으로서 상고대에는 동이계통이, 후에는 유목민 등에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치우 일족이 패망한 이후 더 이상 황제계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신농의 자손은 중국 도처에 있어서 치우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선 그 중의 하나인 형천(刑天)이라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형천은 본래 신농의 신하로서 음악을 담당하던 신이라는 것 외에 그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신농에게 무척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끓는 피의 기질을 지녔던 신이었던 듯 하다. 치우가 실패하자 그는 다시 흩어진 신족(神族)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 잘 쓰는 무기인 도끼를 휘두르며 황제에게 덤벼들었다. 황제 역시 응수하여 두 신은 불꽃 튀는 대결을 벌였다. 교봉한지 얼마 안되어 황제의 칼이 번득이더니 형천의 목이 날아갔다. 형천 역시 황제의 적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는 형천의 목을 곧 땅에다 묻었다. 목이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목이 잘린 형천은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가? 형천의 젖가슴이 눈으로 변하고 배꼽이 입으로 변하더니 그는 도끼와 방패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형천은 비록 목이 잘렸어도 황제에 대한 증오와 투쟁의 의지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서 마침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고 만 것이다.
음악의 신답게 그는 투지를 리드미칼한 춤으로 표출하였다. 형천의 이러한 형상은 반항아의 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머리 없는 몸의 도끼 춤, 그의 이 무망(無望)한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한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그것을 승화시키려는 몸부림이 느껴지기도 한다.(필자 주 : 이러한 신화는 형천 군<軍>의 끝없는 저항을 신화적으로 나타내면서 이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는 결국 치우와 형천 등 크고 작은 반란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신계(神界)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후 황제의 치세 동안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황제와 치우, 형천과의 전쟁신화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중국의 신계(神界)를 크게 양분하였던 황제계와 신농계 신들간의 갈등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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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황제는 신농씨족들과 전쟁을 계속하여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제왕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결국 황제의 아들인 소호가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했다(黃帝代政)는 설입니다.
이제까지는 염제신농씨계와 황제유웅씨(有熊氏)계의 전쟁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억울하게 밀려난 신농씨족. 그러나 아직 신농씨족은 완전히 밀려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본심은 신농씨족을 싹쓸이하는 것이었는데, 황제는 신농씨족의 이러한 등쌀에 못 견뎌 신농씨족의 존재를 인정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농씨족에서 임금이 나타나는데 바로 제순(帝舜=帝俊)입니다.
어쨌든 신농씨족은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황제계에게 잠시 밀려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서방으로 또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2차 이주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2차 슈메르족입니다. 바로 슈메르가 고도로 발전을 거듭한 것도 이 2차 슈메르족에 의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면서 실크로드가 생겼을 가능성을 남겨두고 이제 이 글을 마칩니다.
다음 글에서는 제소호, 제전욱, 제곡, 제준, 제요, 제순 등등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조금 지루한 글이겠지만 이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이러면서 고조선, 부여 등에 대한 의문도 조금씩 걷혀지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신농씨의 문화라는 이른바 불! 에 대해서도 능력이 된다면 다뤄볼 예정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동이계통은 일부가 기후의 영향을 받아 서방으로 1차로 건너가 1차 슈메르족이 된 이후 동이계통에서는 아주 인자한, 말 그대로 슈퍼 성군인 염제 신농씨께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농씨 하면 그저 삼황오제 시대 한 제왕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그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신농씨가 우리 고유의 전설에서는 전혀 전해져 내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신농씨는 이름만 바뀌어 우리의 전설 가운데 하나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단군 신화인데, 이것은 조금 뒤에 언급될 것입니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 이름 그대로 불을 최초로 발견한 불의 화신이요, 농사를 최초로 짓는 방법을 발견하여 인류에게 문명을 전수해준 한마디로 신(神) 중의 신(神)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에는 아무에게나 주어질 수 없는 이름인 신(神)이 들어가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소의 머리를 지녔다는 것도 그가 농사의 완전한 신(神)임을 나타냅니다. 나중에 그의 외손 뻘 되는 후직과 같이 조선(전주 李씨)시대에 농사신으로 섬겨집니다.
신농씨의 탄생도 특이합니다. 문헌상에서 그의 아버지는 소전(少典), 어머니는 여등(女登)이라고 합니다.
전설에 그녀가 화양(華陽)이라는 곳엘 놀러 갔다가 신비스러운 용을 보고 난 후 임신을 해서 낳은 것이 신농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신화에서 신농의 아버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어머니는 정확히 나오는데 이 또한 모계사회였음을 반영합니다(상고대가 모계사회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엥겔스가 지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란 책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신농의 탄생신화는 또한 신농이 태양신임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놀러갔던 곳이 ‘화려한 햇볕’(華陽)이라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신농씨에 대해 자세히 나타낸 글 "동양의 신화" 일부를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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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 이전의 옛날 사람들은 대개 사냥을 해서 짐승의 고기만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신농 시대 무렵 인구가 늘어나면서 짐승이 부족하게 되었다. 신농은 백성들이 굶주려 하는 것을 보고 농업을 발명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몇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신농이 식량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곡식의 비가 내렸다고 한다. 신농이 그것들을 심어 비로소 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당시 몸 빛이 붉은 새 한 마리가 주둥이에 아홉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물고 나타나 그것을 땅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신농이 그것을 주워 밭에다 뿌렸는데 그 쌀을 먹은 사람들은 늙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류가 신농의 시대에서야 비로소 수렵채취의 단계에서 농업의 단계로 옮겨갔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불은 농업과 어떤 관련이 있길래 신농은 두 개의 신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을까? 처음에 농사는 경작지가 없었기 때문에 산에 불을 질러 화전(火田)을 일구어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불의 신이 농업의 신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신농은 태양신이기도 한데 태양이 작물의 생장을 주관한다는 사고가 신농으로 하여금 농업의 신도 겸하게 하였을 것이다. 붉은 새가 벼 이삭을 물고 날아왔다는 이야기도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붉은 새는 불의 신인 신농의 사자임을 암시하고, 많은 곡식 중 벼 이삭을 물고 온 것은 도작(稻作) 농업이 강남 지역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신농은 남방의 신이기 때문이다.
신농은 의약(醫藥)의 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한의학을 창시한 신인 셈이다. 신농은 우선 어떤 풀이 인간에게 이롭고 해로운지를 감별해 내었다.
진(晉) 나라 때에 지어진 ‘수신기’(搜神記)에 의하면 신농에게는 신비한 붉은 채찍이 있었는데 이 채찍으로 풀을 한번 후려치면 그 풀의 독성의 유무와 맛, 특징 등을 다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농은 모든 풀이 어떠한 약효가 있는지를 파악하여 인간의 병 치료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한의학의 고전으로서 모든 한약재를 분류, 기록해 놓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는 책은 신농의 이러한 신화적 행위를 기려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신비한 붉은 채찍 같은 것은 없었고 신농은 매일 직접 풀을 씹어서 맛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농은 자주 독초에 중독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에 차 잎을 씹으면 해독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신농이 그만 단장초(斷腸草)라는 풀을 맛보다가 창자가 끊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는 신농 신화가 민간에서 전설로 변하면서 신농을 지나치게 인간화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신농이 이외에도 인간을 위하여 행한 중요한 업적으로는 시장을 개설한 일이 있다. 사람들이 편하게 물건을 바꾸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도록 일정한 장소에 시장을 열도록 한 것이다.
태양신인 신농은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를 시장을 여는 시각으로 정하였다. 그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재물을 가지고 오게 하여 교역을 행하도록 하였다.
신농이 시장을 개설하였다는 것은 고대의 농경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진입하여 초보적으로 도시가 형성된 현실을 반영한다.
신농은 한(漢)나라 때에 만들어진 신들의 계보에서 남방을 다스리는 지역신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중앙을 다스리는 황제보다도 일찍 등장하여 인류 문명의 초기에 많은 공적을 끼쳤던 위대한 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역신으로 격하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후배 신인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신농은 황제와 두 차례의 큰 전쟁을 벌였는데 한번은 신농 자신이 휘하의 신들을 거느리고 판천(阪泉)이라는 곳에서 싸웠고 또 한번은 신농의 후계자인 치우(蚩尤)가 탁록이라는 곳에서 싸웠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한 신농과 치우의 신족(神族)은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대륙의 중심부에서 쫓겨나 남방으로 이주했다고 한다.(필자 주 : 대표적으로 월남의 신화에 민족신으로 신농씨가 등장, 그리고 남방 민족 중에 치우를 시조로 하는 묘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남방으로 이주한 것은 아닙니다.)
월남의 개국신화에서 신농은 민족의 시조신으로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신농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하고 손에 벼이삭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신농의 신화적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국에는 이러한 생동적인 신농의 그림이 없다. 신농은 이미 인간화되어 의젓한 임금님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인류를 위해 그토록 좋은 일을 많이 했던 신농, 그러나 신농은 별다른 이유없이 황제에게 지존의 자리를 물려주고 만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기 젊은 신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은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너무 탐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비롭고 베풀기 좋아하는 신농이 황제에게 축출된 것은 무언가 부당한 것 같고 억울한 느낌이 든다.
이 느낌, 그것은 한(恨)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한의 정서가 멀리 신농의 심정에 뿌리를 대고 있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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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면 신농씨는 농사, 불, 붉은 색 계통과 상당히 관련이 깊습니다. 붉은 새가 벼 이삭을 물고 날아왔다는 이야기, 신비한 붉은 채찍으로 약효를 파악했다는 이야기. 한국어의 뿌리를 보면, 불, 붉다, 밝다, 보다, (불) 붙다, (바람 등을) 불다 등의 용어는 모두 같습니다.
신농씨족(신농씨의 후예를 뜻함)들은 강(姜)을 족칭으로 삼았는데, 강이란 글자 자체가 '양(羊)'과 '여자'로 구성된 글자로서, 양은 신농씨족의 대표적 토템이었고 여자란 당시가 모계사회로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했음을 가리킵니다. 이후에도 언급하지만 황제계인 하계(夏啓)가 완전한 부계제로 제도를 바꾸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떨어졌습니다.
신농씨는 한(漢)나라 때 반고가 지은 책인 <<백호통(白虎通)>>에서 태양신으로까지 등장할 만큼 신농씨족과 태양은 뗄레야 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적인 태양 숭배 사상은 원래 신농씨족이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신농씨족은 태양을 토템으로 했기에 신농씨족의 씨칭자에는 모두 일(日), 양(陽)이 들어있다고 하며 나중에 아메리카로 건너간 인디언. 인디오의 여러 문명들도 하나같이 태양을 숭배하여 이는 연구 대상입니다. 신농씨족 동이계통의 한 갈래인 왜(일본) 역시 태양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의 업적을 말하자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매우 인자했고, 그가 성천자 혹은 성군으로 부르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발견한 불을 이용하여 청동기로 화폐도 처음 만들고, 시장 체제도 처음 지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공적은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가을을 뜻하는 글자 추(秋)에 단순히 햇빛에 익어간다고 불화(火) 자(字)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 신화에서는 염제 신농씨 이전에 이미 수인씨(燧人氏)니 태호 복희씨(太호 伏羲氏, 호字는 日+皐)니 하는 천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실상 알고 보면 수인씨는 본래 삼황오제의 신화가 아닌 단순 민간 신화에 불과했는데 후대에 편입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태호 복희씨는 어떤가.
태호와 복희씨는 원래 다른 인물이었다가 후대에 동일인으로 인식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신화의 원형을 전하는 문헌 가운데 하나인 <<산해경(山海經)>>에 태호씨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산해경에는 오히려 태호씨 보다는 신농씨에 대한 구절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는 신농씨가 더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복희씨 신화를 보면 그가 과연 동이계통이 맞는가가 의심됩니다. 복희씨 전설에서 복희씨의 어머니인 화서씨(華胥氏)는 커다란 발자국을 밟고 복희씨를 낳았는데, 이 전설은 동이계통의 전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화하계인 주(周)왕실의 시조 후직 기(后稷 棄)의 어머니가 큰 발자국을 밟고 후직을 낳은 것과 같은 유형입니다.
이로 볼 때 복희씨는 신농씨보다 후대의 인물로 혹시 황제(黃帝)계인 하우(夏禹)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하우의 부인이 여와이고, 하우와 여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하계(夏啓)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저는 염제 신농씨가 최초의 임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염제와 신농씨가 원래 다른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염제와 신농씨 역시 원래는 다른 인물이었는데 후대에 동일인으로 인식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연구해보면 염제=신농씨일 가능성이 여전히 높습니다.
염제는 신화 상에서 강(姜)씨족의 수령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신농씨는 신화 상에서 강수(姜水)에서 자랐기에 강씨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볼 때 두 인물은 같은 계통이 분명합니다. 물론 성씨의 개념은 주나라 때에 생겼지만 강(姜)이라는 것은 일종의 씨칭자(이름자)였고 이것이 한세대 한세대 내려오면서 족칭이 되었음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게다가 염제는 황제 바로 이전의 인물이 분명하고 신농씨 또한 전설상에서 헌원 황제 바로 이전의 인물로 나오고 있어 두 인물은 시대적으로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염제=신농씨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기술에 있어 염제와 신농씨는 동일인물임을 바탕으로 기술하고자 합니다.
본래 중원에는 많은 종족이 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미 높은 문명을 지니고 있던 신농씨족 동이계통이 중원(천하)을 최초로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천하를 어질게 다스리던 신농씨. 그러나 갑자기 어느 날 화하계에서 헌원 황제(軒轅 黃帝)라 하는 인물이 나타나 신농씨와 판천(版泉)의 들에서 3번 전쟁을 치룹니다. 황제로서는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야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농씨는 황제와의 전쟁에서 결국 패배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은 산해경에서 자세히 나타나고 있는데, 이 때 황제는 전쟁에 곰(熊), 호랑이(虎) 등을 데리고 싸웠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황제계의 토템은 곰과 호랑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이 토템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의 계통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은나라와 진나라 시조는 같은 제비알(현조의 알)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신화적 공통이 단순히 이들이 같은 계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류를 하면서 나타난 공통적 현상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조상의 이야기를 사고 팔고 합니까?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조상에 대한 전설이나 이야기는 함부로 사고 팔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합니다.
대표적으로 상(은)나라 말기에 나타난, 상왕실에서 믿던 신(神)들 가운데 하나인 상제(上帝)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은나라를 연구하는 갑골학자들은 이 상제가 본래는 은족이 아닌 다른 종족들이 섬기던 신인데, 상왕조 말기에 이 상제가 상왕실의 신들 가운데 하나로 차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상제가 은나라의 시조로 나타난 적은 없습니다. 은나라에서는 조상신은 따로 모셨습니다. 즉 자기의 실제 조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교류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난생설화의 경우는 어느 정도 교류가 인정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남방계통에도 난생설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민족을 남방계로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도 언급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남방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리 지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물길족 등의 북방계가 우리와 문화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들의 유전자를 보면 우리와 아주 가깝습니다.
우리민족과 만주족, 그리고 몽골민족, 인디언 등은 유전자가 서로 서로 매우 가깝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다시 되돌려 계속합니다. 어쨌든 신농씨는 이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서막에 불과합니다. 신농씨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을 때 신농씨는 매우 어진 정치를 폈기 때문에 신농씨의 편을 드는 신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반면에 황제는 대의가 없이 그저 자신이 천하를 차지해야겠다는 야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농씨 계통의 신들이 황제와 계속 전쟁을 하게 되는데, 황제는 이들을 상대로 혼자서 계속 싸워야만 했습니다.
염제 신농씨와 같은 계열로서 신농씨의 하야(下野 :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남) 후 황제와 탁록에서 전쟁을 계속한 인물, 바로 치우(蚩尤)입니다.
치우 언급에 앞서 신농씨의 하야 이후의 전설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신농씨는 정치에서 물러나신 이후에도 백성들을 위해 마지막 일을 하였는데 바로 최초의 약(藥)과 차(茶)를 발견한 것입니다. 신농씨는 이토록 백성을 위한 최초의 정치를 폈는데도 황제에 의해 억울하게 제위에서 밀려난 것입니다.
슈메르의 후손 중 하나로 보이는 유태인 역시 서양에서 고생을 심하게 했고, 인디언 또한 후에 미국 놈들에게 도륙 당한 이후 미국에게 자신의 역사마저 빼앗기고 고유 언어마저 빼앗겼는데 참 우리민족은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이러한 한(限)을 지닌 공통점이 있지요.
어쨌든 이야기를 되돌려서, 치우는 황제와 전쟁을 했는데 이는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치우는 염제의 후손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치우가 염제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치우의 성씨가 강(姜)씨였다고 합니다. 그 또한 염제신농씨족(羊족, 태양족)이었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치우는 신농씨의 후손이라기 보다는 친척인 것 같습니다. 치우는 신농을 이은 2대 천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상고시대 치우는 천자(임금)였고, 아직 황제는 임금이 되지 못했을 시절입니다. 황제는 끝까지 임금이 되기 위해 치우와 전쟁을 하였는데 번번히 지기만 했습니다. 치우는 전쟁의 신(神)이었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황제계의 후손을 자칭한 한(漢) 고조까지도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여기며 치우 사당을 세웠을까요?
치우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동양의 신화" 글을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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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농에게 도전하였고 양군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 위치한 판천(阪泉)의 들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황제는 호랑이 표범 곰 등을 길들여서 선봉으로 삼고 독수리 솔개 매 등을 깃발처럼 날려 신농군을 공격하였다.
세 차례의 전투에서 황제군은 모두 승리하였고 신농은 패배하여 남방으로 쫓겨갔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등 한(漢) 나라 때에 지어진 책들은 이 전쟁을 두고 신농이 제후들을 침략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많이 했기에 황제가 징벌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신농의 선신(善神)으로서의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한 나라 때에 승리자인 황제를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신농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판천의 전투는 오히려 훨씬 더 큰 전쟁의 서곡에 불과하였으니 그것은 신농의 용맹한 신하 치우(蚩尤)가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치우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라는 신족(神族)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형제가 많아 72명이라고도 하고 81명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은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의 용감하고 강인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리라.
치우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가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또 그의 귀밑 털이 칼날과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는 설도 있다. 소의 발굽을 했다거나 머리에 뿔이 돋았다는 설은 신농이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었음을 생각할 때 그가 신농의 혈통임을 암시한다.
치우는 훌륭한 무기제작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일족은 갈로산(葛盧山)과 옹호산(雍狐山) 이라는 곳에서 구리를 캐서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많이 만들었고 무장한 군사력으로 신농 신족 내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된다.
치우의 도전은 자신의 임금이자 어른인 신농의 억울한 패배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복수심에 불탄 치우는 전군을 동원하여 황제의 영역인 탁록으로 진격하였다. 탁록은 지난번 황제와 신농이 싸웠던 판천 근처의 땅이다.
치우의 군대에는 앞서 말한 구리 머리에 쇠 이마를 한 72명 혹은 81명의 용맹한 형제들과 바람의 신 풍백(風伯), 비의 신 우사(雨師) 그리고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하고 다리가 넷인 이매 등의 도깨비 무리가 대거 참여하여 사나운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황제 측에서도 대비가 없을 수 없었다.
호랑이 표범 곰 독수리 솔개 매 등의 맹수ㆍ맹금(猛禽) 군단과 충직한 신하인 날개 돋힌 용 응룡(應龍), 황제의 딸이자 가뭄의 여신인 발(魃) 등이 군대를 이루어 치우군에 대항하였다.
전세는 처음부터 황제군에게 불리하였다.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치우 형제들과 도깨비 군단의 위세에 황제군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는 황제가 치우와의 처음 아홉 번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는 마지막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치우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은 어떠했던가.
계속 치우군에게 밀리던 황제는 응룡을 시켜 천상에 엄청난 양의 물을 모아 두었다가 치우군에게 퍼부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을 미리 알아 챈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요청하여 그 물을 황제군에게 쏟아 붓도록 하였다.
황제군 위로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 닥쳐 병사들이 떠내려가고 우왕좌왕 혼란에 빠지자 황제는 딸인 발을 불러 지상에 내려오게 했다. 가뭄의 신이 나타나자 폭풍우는 곧 개었고 황제군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깨비 군단이 쳐들어 왔다. 이들은 신음하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어 황제군을 어지럽게 했다. 황제는 이에 호각을 크게 불어 용의 울음소리를 내게 하였더니 도깨비 군단이 놀라 달아났다.
황제는 호각 외에도 신기한 북을 만들어 자기편의 사기를 돋우고 치우군의 혼을 빼놓았다. 그는 외다리에 천둥소리를 내는 기(夔)라는 괴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택(雷澤)이라는 호수 가에 살던 뇌수(雷獸)의 뼈를 뽑아 북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을 두들겼더니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오백리 밖에서도 들렸다 한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손실을 본 치우는 이번에는 큰 안개를 일으켜 황제군으로 하여금 갈피를 못잡게 했다. 황제는 이에 신하 풍후(風后)로 하여금 북두칠성을 본따 지남거(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이 수레는 북두칠성과는 정반대로 항상 남쪽 방향을 가리키게 되어 있었다. 황제군은 지남거에 의지해 방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되어 오히려 치우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토록 용감했던 치우 형제들도 하나 둘, 전사하고 치우만이 혼자 싸우다가 결국 힘이 딸려 응룡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운 뒤 즉각 처형하였다. 이로써 중국 신화에서 보기드문 큰 싸움인 황제-치우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치우는 목이 잘려 몸과 목이 따로 묻혔고 신농과 치우의 신족은 죽거나 변방으로 쫓겨갔다. 그리고 황제는 이제 명실공히 신들의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황제-치우의 전쟁신화는 한(漢) 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민족의 정통성과 권위를 밑받침하는 역사 이야기로 탈바꿈 하였다. 즉 중국민족의 조상인 황제가 야만족인 치우를 물리침으로써 문명의 제국인 중국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화는 이처럼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은 치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들에게 영원한 죽음이란 없다. 치우는 얼마 안 있어 전쟁의 신으로 부활하였다. 그의 강렬한 투쟁 의욕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숱한 전쟁을 통해 한(漢) 왕조를 건설하였던 고조(高祖) 유방(劉邦) 조차도 치우의 힘을 빌기 위해 제사를 드렸다 한다.
치우는 또한 은(殷) 나라 때에 도철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치우의 이러한 형상과 역할은 신라 시대의 도깨비 모습을 새긴 귀면와(鬼面瓦)에까지 이어진다.
요즘 거리와 경기장을 메운 붉은 악마의 물결과 그들이 휘두르는 깃발에서 도깨비 얼굴을 많이 본다. 붉은 악마 응원단은 이 도깨비가 치우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들은 알까? 그들 자신이 투혼의 상징인 치우가 부활한 몸이기도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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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는 황제와의 전쟁에서 싸우기만 하면 무조건 이겼습니다. 치우는 신농씨의 청동무기를 이용하여 황제를 압도한 것입니다. 염제의 후손인 '과보' 역시 치우를 도왔습니다. 치우는 도깨비 군단을 이끈 것으로 전해지는데, 도깨비는 우리민족의 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유물이 많이 존재합니다. 먼저 은나라 유물에도 등장하고 이후 고구려, 신라 등의 귀면와에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산해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고 문헌과 전설 등을 살펴보면 치우와 황제의 마지막 전투에서 치우가 패함으로써 황제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설이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이 설을 중심으로 하고자 합니다.
치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과보와 함께 황제에게 붙잡혀 죽었습니다. 이제 황제 헌원의 세상이 되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신농씨족의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여담 : 이점 고구려, 백제 유민과 상당히 닮았습니다).
신농씨의 후손인 형천(刑天)이 치우에 이어 등장하여 황제계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황제는 신농씨족들과 전쟁을 계속 하느라 제위에 오르지도 못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동양의 신화" 글을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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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의 투혼 그리고 후계자들
치우의 잘린 몸에선 붉은 단풍·붉은 호수 생겨나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황제(黃帝)에게 도전장을 냈던 치우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장렬히 죽고 말았다. 그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장자’(莊子)에서는 탁록의 들녘에 피가 백리를 두고 흘러내렸다고 표현하였다.
황제는 패배한 치우에게 온갖 죄악을 덮어 씌웠다. 그는 탐욕과 오만, 잔인함과 무도함의 화신이 되었다. 반대로 황제가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요, 자비와 인정을 베푸는 선신(善神)으로 칭송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치우는 호락호락 죽어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강인한 신이었다. 그래서 몸은 비록 죽었어도 기운은 살아 있어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으로 살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그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무렵부터 일어났다. 황제는 치우를 사로잡았을 때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꽉 채웠다. 그리고 치우의 목을 자르고 난 후 피묻은 수갑과 족쇄를 풀어 내버렸는데 그것들이 나무로 변해버렸다.
그 나무의 잎새는 피빛처럼 붉어서 치우의 처참한 죽음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단풍나무는 이렇게 치우의 넋이 깃들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신체의 변형(Metamorphoses)이 흔히 일어난다. 고대인들은 몸이 스러져도 바탕의 생명력이나 영혼은 죽지 않고 다시 몸을 바꾸어 되살아난다고 믿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변형 이야기가 많다.
가령 아폴론이 에로스가 쏜 사랑의 화살을 맞고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된 요정 다프네는 아폴론에게 쫓기다 못해 월계수로 변해버린다. 치우가 처형당한 땅에서도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치우의 목이 잘린 지역은 몸이 분해되었다고 해서 해현(解縣)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현에 있는 해지(解池)라는 호수는 물 빛깔이 붉다. 그것은 치우가 목이 잘릴 때 흘린 피 때문이라고 한다.
치우의 잘린 목과 몸체는 그의 본거지였던 산둥 땅의 수장현(壽張縣)과 거야현(鉅野縣) 두 지역에 따로 묻혔다. 머리가 매장된 수장현의 주민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이 용맹한 신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무덤으로부터 피어올라 하늘까지 치솟아 마치 깃발이 너울거리는 것 같아 그것을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 한다.(필자 주 : 치우가 붉은 것과 관련이 많은 것도 그가 신농씨의 친척임을 암시합니다. 치우는 우리민족 상고대의 임금임에 동시에 신농씨족이었습니다.)
이 붉은 안개같은 기운은 붉은 단풍, 붉은 호수와 마찬가지로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의 변형된 모습이지만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죽어서도 굴복하지 않는 치우의 기개와 투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치우는 고향인 산둥에서 병주(兵主)로 숭배된다. 병주는 곧 군대와 전쟁의 신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이처럼 훌륭한 무인이나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을 때 신으로 숭배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는 일찍이 치우가 있었고 삼국시대 이후에는 그것이 관우(關羽)로 바뀐다.
오(吳) 나라 장군 여몽(呂蒙)에게 비명횡사한 관우가 후일 민간에서 군대의 신, 재물의 신으로 숭배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최영(崔瑩), 임경업(林慶業) 등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최영 장군은 고려의 충신이었으나 이성계 일파에게 제거당한 후 무속의 큰 신으로 거듭 태어나고 임경업 장군 역시 충신이었으나 간신 김자점(金自點) 등의 모함에 의해 옥사(獄死)하자 그가 한때 머물렀던 연평도의 해신(海神)으로 섬겨진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고대 동아시아의 원시종교인 샤마니즘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속의 세계에서는 한(恨)이 깊을수록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필자 주 : 여기서 샤머니즘을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이는 북몽골계통에서 자주 있는 것으로서 상고대에는 동이계통이, 후에는 유목민 등에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치우 일족이 패망한 이후 더 이상 황제계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신농의 자손은 중국 도처에 있어서 치우 말고도 수많은 신들이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선 그 중의 하나인 형천(刑天)이라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형천은 본래 신농의 신하로서 음악을 담당하던 신이라는 것 외에 그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신농에게 무척 충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끓는 피의 기질을 지녔던 신이었던 듯 하다. 치우가 실패하자 그는 다시 흩어진 신족(神族)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평소 잘 쓰는 무기인 도끼를 휘두르며 황제에게 덤벼들었다. 황제 역시 응수하여 두 신은 불꽃 튀는 대결을 벌였다. 교봉한지 얼마 안되어 황제의 칼이 번득이더니 형천의 목이 날아갔다. 형천 역시 황제의 적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황제는 형천의 목을 곧 땅에다 묻었다. 목이 몸에 다시 붙어 살아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목이 잘린 형천은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가? 형천의 젖가슴이 눈으로 변하고 배꼽이 입으로 변하더니 그는 도끼와 방패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형천은 비록 목이 잘렸어도 황제에 대한 증오와 투쟁의 의지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서 마침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고 만 것이다.
음악의 신답게 그는 투지를 리드미칼한 춤으로 표출하였다. 형천의 이러한 형상은 반항아의 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머리 없는 몸의 도끼 춤, 그의 이 무망(無望)한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한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그것을 승화시키려는 몸부림이 느껴지기도 한다.(필자 주 : 이러한 신화는 형천 군<軍>의 끝없는 저항을 신화적으로 나타내면서 이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는 결국 치우와 형천 등 크고 작은 반란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신계(神界)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후 황제의 치세 동안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황제와 치우, 형천과의 전쟁신화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중국의 신계(神界)를 크게 양분하였던 황제계와 신농계 신들간의 갈등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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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황제는 신농씨족들과 전쟁을 계속하여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제왕세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결국 황제의 아들인 소호가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했다(黃帝代政)는 설입니다.
이제까지는 염제신농씨계와 황제유웅씨(有熊氏)계의 전쟁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억울하게 밀려난 신농씨족. 그러나 아직 신농씨족은 완전히 밀려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본심은 신농씨족을 싹쓸이하는 것이었는데, 황제는 신농씨족의 이러한 등쌀에 못 견뎌 신농씨족의 존재를 인정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농씨족에서 임금이 나타나는데 바로 제순(帝舜=帝俊)입니다.
어쨌든 신농씨족은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하여 황제계에게 잠시 밀려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서방으로 또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2차 이주민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2차 슈메르족입니다. 바로 슈메르가 고도로 발전을 거듭한 것도 이 2차 슈메르족에 의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면서 실크로드가 생겼을 가능성을 남겨두고 이제 이 글을 마칩니다.
다음 글에서는 제소호, 제전욱, 제곡, 제준, 제요, 제순 등등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조금 지루한 글이겠지만 이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이러면서 고조선, 부여 등에 대한 의문도 조금씩 걷혀지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신농씨의 문화라는 이른바 불! 에 대해서도 능력이 된다면 다뤄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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