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1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 「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捨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歷十餘代, 代臣中國, 前史載之詳矣. <開皇>初, 其王<餘昌>遣使貢方物, 拜<昌>爲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에서 나왔다. 그 나라의 왕에게 여자 시종이 한명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를 임신을 하자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여자 종이 말하길, “달걀 같은 상긴 것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고 하자, 왕이 이를 내버려 두니, 후에 남자아이를 하나 낳았다. 왕이 죽으라고 뒷간에 이를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아이를 기르도록 명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자 고려왕이 이를 시기를 하므로, 동명은 두려워하여 엄수에 이르렀는데, 부여 사람들이 그를 모두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가 있는데, 인자하고, 믿음이 있었다. 처음 나라를 대방의 옛땅에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도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가의 집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 불렀다.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앞의 역사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개황초(581-600)에 그 왕 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창을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았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2
◉其國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南接<新羅>, 北拒<高麗>. 其都曰<居拔城>. 官有十六品: 長曰左平,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杅率, 次奈率, 次將德, 服紫帶; 次施德, 皂帶; 次固德, 赤帶; 次李德, 靑帶; 次對德以下, 皆黃帶; 次文督,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剋虞, 皆用白帶. 其冠制並同, 唯奈率以上飾以銀花. 長史三年一交代. 畿內爲五部, 部有五巷, 士人居焉. 五方各有方領一人,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其衣服與<高麗>略同. 婦人不加粉黛, 女辮髮垂後, 已出嫁則分爲兩道, 盤於頭上. 俗尙騎射, 讀書史, 能吏事, 亦知醫藥․蓍龜․占相之術. 以兩手據地爲敬. 有僧尼, 多寺塔. 有鼓角․箜篌․箏․竽․箎․笛之樂, 投壺․圍棊․樗蒲․握槊․弄珠之戱.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 氏>․<解氏>․<貞氏>․<國氏>․<木氏>․<苩氏>. 婚娶之禮, 略同於華. 喪制如<高麗>. 有五穀․牛․猪․雞, 多不火食. 厥田下濕, 人皆山居. 有巨栗.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그 나라는 동서가 450리이고 남북이 900여리이다. 남쪽은 신라에 닿고, 북쪽은 고구려가 버티고 있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한다. 관직에는 16품이 있는데, 최고는 좌평이라 하고, 다음은 대솔, 은솔, 덕솔, 우솔, 내솔, 장덕인데, 자색 띠를 두른다. 다음은 시덕으로 검은색 띠를, 다음은 고덕으로 붉은띠를, 다음은 이덕으로 청색띠, 대덕이하로, 모두 황색띠를 하는데,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는 백색띠를 두른다. 관은 모두 같은데, 오직 내솔 이상은 은으로 꽃을 만들어 꾸민다. 장사는 삼년에 한번씩 교대로 한다.
경기(수도에서 5백리 안)에는 다섯 개의 부가 있고, 부에는 다섯 개의 항이 있어, 사람들이 거처한다. 오방에는 각각 방령이 한명씩 있고, 방좌가 2명이 있다. 방에는 열 개의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를 둔다. 사람들은 신라, 고려, 왜 등이 섞여 있는데, 중국 사람도 있다.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시집을 하면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로 틀어 올린다.
풍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며, 옛책과 역사책을 읽고, 관리의 일도 잘 본다. 또 의약, 거북점과 옛날 점치는 법도 안다. 두 손을 땅에 대는 것으로 공경함을 표시하고, 승려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다.
고각, 공후, 쟁, 우, 호, 적 등의 악기가 있고, 투호, 바둑, 저포, 악삭, 구슬놀이 등의 놀이가 있다. 송의 원가력을 사용하여 호랑이 달을 한 해의 머리 달로 삼는다. 나라에 큰 성씨인 8족이 있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정씨, 국씨, 목씨, 백씨 이다. 결혼하는 예의는 중국과 같고, 상을 당한 제도는 고구려와 같다. 오곡과 소, 돼지, 닭이 있으며, 화식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토지는 낮고 습하여 사람들은 모두 산에 거한다. 큰 밤이 나오고, 매 계절의 가운데 달에 왕은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도성 안에 세워 놓고, 해마다 4번 제사한다. 나라의 서쪽과 남쪽의 사람들은 15개의 섬에 거하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3
◉平<陳>之歲, 有一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來相體悉.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使者舞蹈而去.
진이 세상을 평정된 해(589년)에 전선 한척이 떠돌다 바다의 동쪽 담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수나라로 돌아올 적에 백제를 경유하니, 여창(위덕왕)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다.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진나라를 평정함을 축하하였다. 문제가 이를 착하게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백제왕이 이미 진이 평정했음을 듣고, 먼 곳에서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으나, 왕래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을 만난다면 인명이 손상될 것이오. 백제왕의 진실한 심정은 짐이 잘 알고 있소, 서로 거리는 멀다 하여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반드시 사신을 자주 보내와 서로 다 알아야 되겠소. 이후로는 해마다 따로 조공을 바칠 것이 없소. 짐도 역시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알아서 하시오”라고 하였다. 사신이 춤을 추고, 돌아갔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4
◉<開皇>十八年, <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 屬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曰: 「往歲爲<高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君臣恐懼, 畏服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高麗>頗知其事, 以兵侵掠其境.
개황 18년(598년)에 여창이 장사 왕변나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마침 요동정벌이 일어나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군의 길잡이가 될 것을 청했다. 문제가 조서를 내려
“지난해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의 예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명하여 토벌하라고 했소. 고원(영양왕)과 그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죄를 인정하고 복종하므로, 짐은 벌써 죄를 용서하여 주어 토벌할 수가 없소.” 라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고구려가 대략 이 사실을 알고, 병사를 내어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였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5
◉<昌>死, 子<餘宣>立, 死, 子<餘璋>立.
창이 죽고 아들 여선이 왕이 되었다. 여선(혜왕 혹은 법왕)이 죽고, 아들 여장(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6
◉<大業>三年, <璋>遣使者<燕文進>朝貢. 其年, 又遣使者<王孝鄰>入獻, 請討<高麗>. <煬帝>許之, 令覘<高麗>動靜.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七年, 帝親征<高麗>, <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 帝大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詣<百濟>, 與相知. 明年, 六軍渡<遼>, <璋>亦嚴兵於境, 聲言助軍, 實持兩端. 尋與<新羅>有隙, 每相戰爭. 十年, 復遣使朝貢. 後天下亂, 使命遂絶.
대업 3년(607년) 여장이 사신 연문진을 조공을 하였다. 그해 또 사신 왕효린을 보내어 입조하고,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여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장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화친을 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갖고 중국을 엿본 것이었다.
대업 7년(611년)에 양제가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여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를 보내와 출병의 시기를 물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고, 후하게 상을 내리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어 시기를 서로 알게 하였다. 다음해 6군이 요수를 건너고 여장도 군사를 고구려의 국경에 엄중히 배치하고, 수나라 군을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만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을 쓰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신라와 틈이 생겨 자주 전쟁을 했다.
대업 10년(614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고, 그 뒤로는 천하가 어지러워져 사신이 끊어졌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7
◉其南海行三月, 有<躭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그 남쪽 바다로 삼 개월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가 수백리이다.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의지해 있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
9.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1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所置內官曰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在外兵馬事. 又外置六帶方, 管十郡. 其用法: 叛逆者死, 籍沒其家; 殺人者, 以奴婢三贖罪; 官人受財及盜者, 三倍追贓, 仍終身禁錮. 凡諸賦稅及風土所産, 多與<高麗>同. 其王服大袖紫袍, 靑錦袴, 烏羅冠, 金花爲飾, 素皮帶, 烏革履. 官人盡緋爲衣, 銀花飾冠. 庶人不得衣緋紫. 歲時伏臘, 同於中國. 其書籍有《五經》․子․史, 又表疏並依中華之法.
백제국도 본래는 분여의 별종이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으로서 경사(장안)에서 동으로 6,200여리 밖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또 왕이 사는 곳에는 동, 서 3개 성이 있다.
그 나라에 설치된 내관으로 내신좌평은 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두좌평은 창고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법좌평은 예의에 관한 일을 맡아 복, 위사좌평은 숙위군의 일을 맡아 보고, 조정좌평은 형옥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병관좌평은 재외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아 본다. 또 외관으로는 6대방을 두어 10군을 총괄케 하였다.
그 형법을 적용함에 반역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만든다. 살인한 자는 노비 3명으로써 속죄케 한다. 관인으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한 자는 그 물건의 3배를 추징하고, 이어서 종신토록 금고에 처한다. 모든 부과와 세금 및 풍토의 물산은 대개 고구려와 같다.
그 나라 왕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오나관에 금화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는다. 관인들은 다 붉은 옷을 입고 은화로 관을 장식한다. 서민들은 붉은 옷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을 수 없다. 세시와 절기는 중국과 같다. 서적으로는 5경과 제자백가의 서적 및 역사책이 있으며, 또 표문과 상소의 글도 중화의 법에 의거한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2
◉<武德>四年, 其王<扶餘璋>遣使來獻果下馬. 七年, 又遣大臣奉表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百濟王>. 自是歲遣朝貢, <高祖>撫勞甚厚. 因訟<高麗>閉其道路, 不許來通中國, 詔遣<朱子奢>往和之. 又相與<新羅>世爲讎敵, 數相侵伐. <貞觀>元年, <太宗>賜其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徽猷, 甚以嘉慰. 朕自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王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藩臣, 王之鄰國, 每聞遣師, 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信福>及<高麗>․<新羅>使人, 具敕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鄰情, 卽停兵革.」 <璋>因遣使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如故. 十一年, 遣使來朝,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綵帛三千段幷錦袍等.
무덕 4년(621년)에 그 나라의 왕 부여장(무왕)이 사신을 보내와 과하마를 바쳤다. 무덕 7년(624년)에 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조공을 바쳤다. 고조는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어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고조는 수고로움을 위무하고 매우 후대하였다. 이어서 고구려가 길을 막고 중국과의 내왕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므로, 조서를 내려 주자서를 보내어 화해시켰다. 또 신라와는 대대로 서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 정관 원년(627년)에 태종이 그 나라 왕에게 “왕은 대를 이은 군장으로서 동쪽 오랑캐를 어루만져 주었소, 바다 한 모퉁이 머나먼 곳에서 풍랑이 험난하게 가로 막는 데도 정성이 지극하여 직공을 빼놓지 않으니, 그 아름다운 뜻은 생각할수록 가상하오. 짐이 삼가 총명을 받들어 천하에 군림하고부터 생각하는 것은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이라면 나의 본 뜻을 이루어 다같이 안녕을 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오. 신라왕 김진평은 짐의 번신이며, 왕의 이웃 나라요.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정벌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신복(복신?) 및 고구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하고 화합할 것을 명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이웃의 정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가는 국쇄를 찍은 문서를 주었다. 이에 부여장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비록 표면상으로는 명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예나 마찬가지로 원수 사이였다. 정관 11년(637년)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철제 갑옷과 독수리도끼를 바치니, 태종은 융숭하게 대접하고, 명주 3천단과 비단옷 등을 주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3
◉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 贈光祿大夫, 賻物二百段, 遣使冊命<義慈>爲柱國, 封<帶方郡王>․<百濟王>. 十六年, <義慈>興兵伐<新羅>四十餘城, 又發兵以守之, 與<高麗>和親通好, 謀欲取<党項城>以絶<新羅>入朝之路. <新羅>遣使告急請救, <太宗>遣司農丞<相里玄獎>齎書告諭兩蕃, 示以禍福. 及<太宗>親征<高麗>, <百濟>懷二, 乘虛襲破<新羅>十城. 二十二年, 又破其十餘城. 數年之中, 朝貢遂絶.
정관 15년(641년)에 부여장이 졸하니(죽으니), 그의 아들 의자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슬픔을 알렸다. 태종은 소복차림으로 곡을 하고, 광록대부를 추증하였으며, 부의용 물건으로 2백단을 주었다. 사신을 보내어 의자를 주국(종2품)으로 책봉하는 명을 내리고, 대방군왕 백제왕에 봉하였다.
정관 16년(642년)에 의자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40여성을 빼앗고 군대를 보내어 지키는 한편, 고구려와 화친을 맺어 교류하며 당항성을 탈취하여 신라의 입조하는 길을 끊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니, 태종은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보내어 화복으로 양쪽 번국(백제, 고구려)을 설득하였다.
정관 22년(648년)에 또 10여성을 빼앗고, 수년 후에는 조공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4
◉<高宗>嗣位, <永徽>二年, 始又遣使朝貢. 使還, 降璽書與<義慈>曰:
공종이 제위를 이어 받자, 영휘 2년(651년)에 비로서 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사신이 돌아갈 적에 의자에게 국쇄를 찍은 문서를 내려 이르기를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5-(詔1/1)
◉至如海東三國, 開基自久, 並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俎, 尋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愍. 去歲王及<高麗>․<新羅>等使並來入朝, 朕命釋茲讎怨, 更敦款穆. <新羅>使<金法敏>奏書: 「<高麗>․<百濟>, 脣齒相依, 競擧兵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並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並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故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齊><桓>列土諸侯, 尙存亡國; 況朕萬國之主, 豈可不卹危藩. 王所兼<新羅>之城, 並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俘虜, 亦遣還王. 然後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埸, 耕織並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矣. 王若不從進止, 朕已依<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麗>, 不許遠相救恤. <高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蕃渡<遼澤>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한지 오래이며, 국가의 경계가 나란히 있어 실로 개이빨의 형세처럼 국경이 서로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소. 근래에 와서 드디어 국경을 다투고 침공을 하여 조금도 편안할 해가 없었소. 마침내 삼한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이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을 찾아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거듭되니, 짐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 깊이 안타깝게 여기는 바이오.
지난 해에 왕의 사신과 고구려,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입조하였을 적에 짐은 서로의 옛 원한을 푸고 다시 우호를 돈독히 하도록 명하였소. 신라의 사신 김범민은 호소문을 올려 ‘고구려와 백제가 순치(잇몸과 이빨)의 관계로 서로 의지하고 있으면서 앞을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침략하므로, 큰 성과 요해처의 군사기지들이 모두 백제에 병합되니, 강토는 날로 줄어들고 국력 또한 잃고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의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군사를 일으켜 싸움으로 되찾겠습니다. 다만 옛 땅만 찾으면 바로 화친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소. 짐은 그 말이 조리에 맞으므로 불가불 윤허하였소.
옛날 제환공은 제후의 자리에 있었으나 오히려 망하는 나라를 보존시켰소. 하물며 짐은 만국의 군주인데 어찌 위태로운 번국을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본국에 돌려주시오. 신라도 사로 잡아간 백제의 포로를 모두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오. 그런 뒤에야 서로의 불화가 풀리고 전쟁이 멎으니, 백성들은 쉬고 싶은 소원을 이루고 삼번(삼국)에는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게 될 것이오. 이 어찌 변방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 강토에 주검이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지되어 남자와 여자가 살 길이 없게 되는 것과 비교가 되겠는가. 왕이 만약 나의 처분에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이 청하는 대로 왕과 싸우게 놓아 둘 것이오. 또한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돕지 못하고 할 것이오. 고구려가 만약 이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거란의 여러 번병을 시켜 요택을 건너 쳐들어가게 할 것이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은 구하고, 주도면밀하게 좋은 계획을 세워 후회를 남김이 없게 하오“ 라고 하였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6
◉六年, <新羅王><金春秋>又表稱<百濟>與<高麗>․<靺鞨>侵其北界, 已沒三十餘城. <顯慶>五年, 命左衛大將軍<蘇定方>統兵討之, 大破其國. 虜<義慈>及太子<隆>․小王<孝演>․僞將五十八人等送於京師, 上責而宥之. 其國舊分爲五部, 統郡三十七, 城二百, 戶七十六萬. 至是乃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 各統州縣, 立其酋渠爲都督․刺史及縣令. 命右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總兵以鎭之. <義慈>事親以孝行聞, 友于兄弟, 時人號「海東<曾>․<閔>」. 及至京, 數日而卒.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特許其舊臣赴哭. 送就<孫晧>․<陳叔寶>墓側葬之, 幷爲豎碑.
영휘 6년(655년)에 신라왕 김춘추가 또 표문을 올려 백제가 고구려 및 말갈과 함게 북쪽 구경을 침공하여 벌써 30여성이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현경 5년(660년)에 좌위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니, 그 나라를 크게 깨뜨렸다. 의자 및 태자 융, 소왕 효연과 위장 58명 등을 사로 잡아 경사(장안)에 보내왔다. 황제는 이들을 꾸짓기만 하고 용서하였다.
그 나라는 본래 5부로 나뉘어져 모두 37군, 2백성에 호구는 76만이었다. 이때에 와서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 등 5도독부를 두고 각각 주와 현을 통괄케 하고, 백제 출신 추장과 거수로 도독, 자사 및 현령을 삼았다. 우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진압하고 어루만지게 하였다.
의자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행으로서 함이 널리 알려지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여 당시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 민자 라고 불렀다. 경사에 와서 며칠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으로 추증하고, 특별히 옛 신하들의 통곡을 허락하였다. 손호, 진숙보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도 세워 주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7
◉<文度>濟海而卒. <百濟>僧<道琛>․舊將<福信>率衆據<周留城>以叛.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豐>立爲王. 其西部․北部並翻城應之. 時郞將<劉仁願>留鎭於<百濟>府城, <道琛>等引兵圍之. <帶方州>刺史<劉仁軌>代<文度>統衆, 便道發<新羅>兵合契以救<仁願>, 轉鬪而前, 所向皆下. <道琛>等於<熊津江>口立兩柵以拒官軍, <仁軌>與<新羅>兵四面夾擊之, 賊衆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水及戰死萬餘人. <道琛>等乃釋<仁願>之圍, 退保<任存城>. <新羅>兵士以糧盡引還, 時<龍朔>元年三月也. 於是<道琛>自稱領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誘叛亡, 其勢益張. 使告<仁軌>曰: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以國付<新羅>. 與其受死, 豈若戰亡, 所以聚結自固守耳!」 <仁軌>作書, 具陳禍福, 遣使諭之. <道琛>等恃衆驕倨, 置<仁軌>之使於外館, 傳語謂曰: 「使人官職小, 我是一國大將, 不合自參.」 不答書遣之. 尋而<福信>殺<道琛>, 倂其兵衆, <扶餘豐>但主祭而已.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 백제의 승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다 왕으로 세웠다.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뒤집고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때에 낭장 유인원은 백제의 부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왕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인원을 구원하고 계속해서 싸워 이기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했다.
도침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책을 세워 관군에게 저항하자. 인궤는 신라병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이나 되었다. 도침 등은 이에 인원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보전하였다. 신라병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는 용삭 원년(661년0 3월이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일컬으며 배반하고 도망간 무리들을 유인하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인궤에게 사자를 보내어
“대당이 신라와 맹약하여 백제 사람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다음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준다고 들었소. 죽음을 당할 바에야 어찌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겠소. 무리를 모아 스스로 고수하는 이유요” 가로 했다. 인궤는 편지를 작성하여 재앙과 복됨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자를 보내어 설득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무리들이 많은 것만 믿고 교만이 생겨서, 인궤의 사자를 외관에 머무르게 하고, 전하는 말로,
“사자는 관직이 낮다. 나는 곧 일국의 대장인데, 스스로 만나 봄은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며, 답장을 써 주지 않고 사신을 돌려 보냈다. 얼마 아니 되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합병하니, 부여풍은 다만 제사나 주관할 뿐이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8
◉二年七月, <仁願>․<仁軌>等率留鎭之兵,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以<眞峴城>臨江高險, 又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引<新羅>之兵乘夜薄城, 四面攀堞而上, 比明而入據其城, 斬首八百級, 遂通<新羅>運糧之路. <仁願>乃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統衆浮海赴<熊津>, 以益<仁願>之衆. 時<福信>旣專其兵權, 與<扶餘豐>漸相猜貳. <福信>稱疾, 臥於窟室, 將候<扶餘豐>問疾, 謀襲殺之. <扶餘豐>覺而率其親信掩殺<福信>, 又遣使往<高麗>及<倭國>請兵以拒官軍. <孫仁師>中路迎擊, 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兵勢大振. 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率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 同趨<周留城>. <仁軌>遇<扶餘豐>之衆於<白江>之口, 四戰皆捷, 焚其舟四百艘, 賊衆大潰, <扶餘豐>脫身而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 <百濟>諸城皆復歸順, <孫仁師>與<劉仁願>等振旅而還. 詔<劉仁軌>代<仁願>率兵鎭守. 乃授<扶餘隆><熊津>都督, 遣還本國, 共<新羅>和親, 以招輯其餘衆.
용삭 2년(662년)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러 지나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책을 빼앗고,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데다 높고 험하며, 또 요충의 위치라 하여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는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야음을 타 성 밑에 바짝 다가가서 사면에서 성가퀴를 더위잡고 기어 올라갔다. 날이 밝을 무렵 그 성을 점거하여 8백 명의 머리를 베어 마침내 신라의 군량운송로를 텄다. 인원이 이에 증병을 주청하니, 조서를 내려 치주, 청주, 래주, 해주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 손인사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융진으로 가서 인원의 무리를 도와주게 하였다.
이에 복신은 벌써 병권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서 부여풍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했다. 부여풍은 이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덮쳐 죽이고, 또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해 관군을 막았다. 손인사가 중도에서 맞아 쳐 무너뜨리고 드디어 인원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세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 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 및 별사 사상, 부여풍은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회합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진군하였다. 인궤가 백강 어귀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나 4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거짓왕자 부여충승, 충지 등이 남녀 및 왜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항복하니, 백제의 모든 성이 다시 귀순하였다. 손인사, 유인원 등이 철군을 하여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유인원 대신 유인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압하고 지키도록 하였다. 이에 부여융에게 웅진도독을 제수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신라와 화친을 맺고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9
◉<麟德>二年八月, <隆>到<熊津城>, 與<新羅王><法敏>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 而後歃血. 其盟文曰:
인덕 2년(665년) 8월에 부여융이 웅진성에 이르러 신라왕 법민과 백마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 먼저 천신, 지신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피를 마셨다. 그 맹세문은 이러하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0-(盟1/1)
◉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鄰好, 不睦親姻. 結託<高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無辜, 頻命行人, 遣其和好. 負險恃遠, 侮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瀦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然懷柔伐叛, 前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太子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弟兄. 祗奉綸言, 不敢失墜,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棄信不恆,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明神鑒之, 百殃是降, 子孫不昌, 社稷無守,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饗是福.
“지난날에 백제의 선왕이 역리와 순리를 혼미하여, 이웃과 우호가 돈독하지 못했으며,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읍을 깨뜨리고 성을 도륙하니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하나의 물건이라도 없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이 무고하게 고통 받는 것을 가엽게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어 우호를 닦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지세가 험준하고 도로가 먼 곳만 믿고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겨 태만히 하였다. 황제께서 이에 분노하시어 죄인을 치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삼가 거행하시니, 깃발이 나가는 곳에 한번의 싸움으로 모두가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은 못을 파고 집은 웅덩이를 뒷날의 경계로 삼고, 폐단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 다음 사람에게 훈계를 남겨야 될 일이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감싸 주고 배반하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 전왕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자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나라를 이어주는 것은 옛 철인의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러 역사책에 전해온다. 그런 까닭에 전 백제왕자 사가정경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서 제사를 받들고 그의 고장을 보존하게 하였다. 신라에 의존하여 영원한 동맹국으로서 각자 묵은 감정을 버리고 굳게 화친하라. 조명을 공손히 받들고 영원한 번국이 되라. 그리하여 사신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임하여 타이르고 깨우침과 아울러 짐의 뜻을 널리 펴게 하노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서로 다짐한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은 우호를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히 하기 위함이니, 재앙은 나누어 갖고 환란을 당하여서는 서로 구제하여 은의가 형제와 같이 지내도록 하라. 천자가 내리는 말을 공손히 받들어 함부로 저버리지 말며, 맹서를 하고 나서는 다 같이 언제고 변함이 없으라. 만약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신명께서 이를 보고 온갖 재앙을 내려서 자손이 번창하지 않게 되어 사직을 지킬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제사는 끊기고 남아나는 유족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철판에 글자를 새기어 금으로 칠한 것)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는 것이니, 자손만대토록 행하여 범함이 없어야 한다. 신명이 듣고 있으니, 이로서 누릴 복이 결정되리라.”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1
◉<劉仁軌>之辭也. 歃訖, 埋幣帛於壇下之吉地, 藏其盟書於<新羅>之廟.
이것은 유인궤의 글이다. 희생의 피를 마시고 나서 단 아래에 깨끗한 곳에 폐백을 묻고, 맹서문을 신라의 종묘에 간직하였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2
◉<仁願>․<仁軌>等旣還, <隆>懼<新羅>, 尋歸京師. <儀鳳>二年, 拜光祿大夫․太常員外卿兼<熊津>都督․<帶方郡王>, 令歸本蕃, 安輯餘衆. 時<百濟>本地荒毁, 漸爲<新羅>所據, <隆>竟不敢還舊國而卒. 其孫<敬>, <則天>朝襲封<帶方郡王>․授衛尉卿.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絶.
인원, 인궤 등이 돌아오자 부여융은 신라를 두려워하여 곧 경사(장안)로 돌아왔다. 의봉 2년(677년)에 부여융에게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옛 백제)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은 모아서 편안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손자 경이 측천무후 때에 대방군왕에 계승하여 책봉되어 위위경을 제수 받았다.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百濟>之先, 出自<高麗國>. 其國王有一侍婢, 忽懷孕, 王欲殺之. 婢云: 「有物狀如雞子, 來感於我, 故有娠也.」 王捨之. 後遂生一男, 棄之廁溷, 久而不死, 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高麗>王忌之, <東明>懼, 逃至<淹水>, <夫餘>人共奉之. <東明>之後, 有<仇台>者, 篤於仁信, 始立其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漸以昌盛, 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海, 因號<百濟>. 歷十餘代, 代臣中國, 前史載之詳矣. <開皇>初, 其王<餘昌>遣使貢方物, 拜<昌>爲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백제의 선조는 고려국에서 나왔다. 그 나라의 왕에게 여자 시종이 한명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를 임신을 하자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여자 종이 말하길, “달걀 같은 상긴 것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고 하자, 왕이 이를 내버려 두니, 후에 남자아이를 하나 낳았다. 왕이 죽으라고 뒷간에 이를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왕이 신령스럽게 여겨 아이를 기르도록 명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자 고려왕이 이를 시기를 하므로, 동명은 두려워하여 엄수에 이르렀는데, 부여 사람들이 그를 모두 받들었다.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가 있는데, 인자하고, 믿음이 있었다. 처음 나라를 대방의 옛땅에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중에서도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가의 집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 불렀다.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앞의 역사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개황초(581-600)에 그 왕 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창을 상개부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았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2
◉其國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南接<新羅>, 北拒<高麗>. 其都曰<居拔城>. 官有十六品: 長曰左平, 次大率, 次恩率, 次德率, 次杅率, 次奈率, 次將德, 服紫帶; 次施德, 皂帶; 次固德, 赤帶; 次李德, 靑帶; 次對德以下, 皆黃帶; 次文督, 次武督, 次佐軍, 次振武, 次剋虞, 皆用白帶. 其冠制並同, 唯奈率以上飾以銀花. 長史三年一交代. 畿內爲五部, 部有五巷, 士人居焉. 五方各有方領一人, 方佐貳之. 方有十郡, 郡有將. 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 亦有中國人. 其衣服與<高麗>略同. 婦人不加粉黛, 女辮髮垂後, 已出嫁則分爲兩道, 盤於頭上. 俗尙騎射, 讀書史, 能吏事, 亦知醫藥․蓍龜․占相之術. 以兩手據地爲敬. 有僧尼, 多寺塔. 有鼓角․箜篌․箏․竽․箎․笛之樂, 投壺․圍棊․樗蒲․握槊․弄珠之戱. 行<宋>《元嘉曆》, 以建寅月爲歲首. 國中大姓有八族, <沙氏>․<燕氏>․< 氏>․<解氏>․<貞氏>․<國氏>․<木氏>․<苩氏>. 婚娶之禮, 略同於華. 喪制如<高麗>. 有五穀․牛․猪․雞, 多不火食. 厥田下濕, 人皆山居. 有巨栗.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 皆有城邑.
그 나라는 동서가 450리이고 남북이 900여리이다. 남쪽은 신라에 닿고, 북쪽은 고구려가 버티고 있다. 그 도읍을 거발성이라 한다. 관직에는 16품이 있는데, 최고는 좌평이라 하고, 다음은 대솔, 은솔, 덕솔, 우솔, 내솔, 장덕인데, 자색 띠를 두른다. 다음은 시덕으로 검은색 띠를, 다음은 고덕으로 붉은띠를, 다음은 이덕으로 청색띠, 대덕이하로, 모두 황색띠를 하는데, 문독 무독 좌군, 진무, 극우는 백색띠를 두른다. 관은 모두 같은데, 오직 내솔 이상은 은으로 꽃을 만들어 꾸민다. 장사는 삼년에 한번씩 교대로 한다.
경기(수도에서 5백리 안)에는 다섯 개의 부가 있고, 부에는 다섯 개의 항이 있어, 사람들이 거처한다. 오방에는 각각 방령이 한명씩 있고, 방좌가 2명이 있다. 방에는 열 개의 군이 있고, 군에는 장수를 둔다. 사람들은 신라, 고려, 왜 등이 섞여 있는데, 중국 사람도 있다.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부인은 화장을 하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를 뒤로 드리우고, 시집을 하면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로 틀어 올린다.
풍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며, 옛책과 역사책을 읽고, 관리의 일도 잘 본다. 또 의약, 거북점과 옛날 점치는 법도 안다. 두 손을 땅에 대는 것으로 공경함을 표시하고, 승려와 비구니가 있고, 절과 탑이 많다.
고각, 공후, 쟁, 우, 호, 적 등의 악기가 있고, 투호, 바둑, 저포, 악삭, 구슬놀이 등의 놀이가 있다. 송의 원가력을 사용하여 호랑이 달을 한 해의 머리 달로 삼는다. 나라에 큰 성씨인 8족이 있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정씨, 국씨, 목씨, 백씨 이다. 결혼하는 예의는 중국과 같고, 상을 당한 제도는 고구려와 같다. 오곡과 소, 돼지, 닭이 있으며, 화식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토지는 낮고 습하여 사람들은 모두 산에 거한다. 큰 밤이 나오고, 매 계절의 가운데 달에 왕은 하늘과 5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도성 안에 세워 놓고, 해마다 4번 제사한다. 나라의 서쪽과 남쪽의 사람들은 15개의 섬에 거하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3
◉平<陳>之歲, 有一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來相體悉.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使者舞蹈而去.
진이 세상을 평정된 해(589년)에 전선 한척이 떠돌다 바다의 동쪽 담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수나라로 돌아올 적에 백제를 경유하니, 여창(위덕왕)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다.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진나라를 평정함을 축하하였다. 문제가 이를 착하게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백제왕이 이미 진이 평정했음을 듣고, 먼 곳에서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으나, 왕래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을 만난다면 인명이 손상될 것이오. 백제왕의 진실한 심정은 짐이 잘 알고 있소, 서로 거리는 멀다 하여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반드시 사신을 자주 보내와 서로 다 알아야 되겠소. 이후로는 해마다 따로 조공을 바칠 것이 없소. 짐도 역시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알아서 하시오”라고 하였다. 사신이 춤을 추고, 돌아갔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4
◉<開皇>十八年, <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 屬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曰: 「往歲爲<高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君臣恐懼, 畏服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高麗>頗知其事, 以兵侵掠其境.
개황 18년(598년)에 여창이 장사 왕변나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마침 요동정벌이 일어나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군의 길잡이가 될 것을 청했다. 문제가 조서를 내려
“지난해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의 예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명하여 토벌하라고 했소. 고원(영양왕)과 그의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죄를 인정하고 복종하므로, 짐은 벌써 죄를 용서하여 주어 토벌할 수가 없소.” 라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고구려가 대략 이 사실을 알고, 병사를 내어 백제의 국경을 침략하였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5
◉<昌>死, 子<餘宣>立, 死, 子<餘璋>立.
창이 죽고 아들 여선이 왕이 되었다. 여선(혜왕 혹은 법왕)이 죽고, 아들 여장(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6
◉<大業>三年, <璋>遣使者<燕文進>朝貢. 其年, 又遣使者<王孝鄰>入獻, 請討<高麗>. <煬帝>許之, 令覘<高麗>動靜.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 七年, 帝親征<高麗>, <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 帝大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詣<百濟>, 與相知. 明年, 六軍渡<遼>, <璋>亦嚴兵於境, 聲言助軍, 實持兩端. 尋與<新羅>有隙, 每相戰爭. 十年, 復遣使朝貢. 後天下亂, 使命遂絶.
대업 3년(607년) 여장이 사신 연문진을 조공을 하였다. 그해 또 사신 왕효린을 보내어 입조하고,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여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러나 장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화친을 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갖고 중국을 엿본 것이었다.
대업 7년(611년)에 양제가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여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를 보내와 출병의 시기를 물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고, 후하게 상을 내리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어 시기를 서로 알게 하였다. 다음해 6군이 요수를 건너고 여장도 군사를 고구려의 국경에 엄중히 배치하고, 수나라 군을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만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을 쓰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신라와 틈이 생겨 자주 전쟁을 했다.
대업 10년(614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고, 그 뒤로는 천하가 어지러워져 사신이 끊어졌다.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7
◉其南海行三月, 有<躭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그 남쪽 바다로 삼 개월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가 수백리이다.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의지해 있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
9.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1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其王所居有東西兩城. 所置內官曰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在外兵馬事. 又外置六帶方, 管十郡. 其用法: 叛逆者死, 籍沒其家; 殺人者, 以奴婢三贖罪; 官人受財及盜者, 三倍追贓, 仍終身禁錮. 凡諸賦稅及風土所産, 多與<高麗>同. 其王服大袖紫袍, 靑錦袴, 烏羅冠, 金花爲飾, 素皮帶, 烏革履. 官人盡緋爲衣, 銀花飾冠. 庶人不得衣緋紫. 歲時伏臘, 同於中國. 其書籍有《五經》․子․史, 又表疏並依中華之法.
백제국도 본래는 분여의 별종이다. 일찍이 마한의 옛 땅으로서 경사(장안)에서 동으로 6,200여리 밖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른다. 또 왕이 사는 곳에는 동, 서 3개 성이 있다.
그 나라에 설치된 내관으로 내신좌평은 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두좌평은 창고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내법좌평은 예의에 관한 일을 맡아 복, 위사좌평은 숙위군의 일을 맡아 보고, 조정좌평은 형옥에 관한 일을 맡아 보고, 병관좌평은 재외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아 본다. 또 외관으로는 6대방을 두어 10군을 총괄케 하였다.
그 형법을 적용함에 반역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만든다. 살인한 자는 노비 3명으로써 속죄케 한다. 관인으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한 자는 그 물건의 3배를 추징하고, 이어서 종신토록 금고에 처한다. 모든 부과와 세금 및 풍토의 물산은 대개 고구려와 같다.
그 나라 왕은 소매가 큰 자주색 도포에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오나관에 금화로 장식하며, 흰 가죽띠에 까만 가죽신을 신는다. 관인들은 다 붉은 옷을 입고 은화로 관을 장식한다. 서민들은 붉은 옷이나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을 수 없다. 세시와 절기는 중국과 같다. 서적으로는 5경과 제자백가의 서적 및 역사책이 있으며, 또 표문과 상소의 글도 중화의 법에 의거한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2
◉<武德>四年, 其王<扶餘璋>遣使來獻果下馬. 七年, 又遣大臣奉表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百濟王>. 自是歲遣朝貢, <高祖>撫勞甚厚. 因訟<高麗>閉其道路, 不許來通中國, 詔遣<朱子奢>往和之. 又相與<新羅>世爲讎敵, 數相侵伐. <貞觀>元年, <太宗>賜其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徽猷, 甚以嘉慰. 朕自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王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藩臣, 王之鄰國, 每聞遣師, 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信福>及<高麗>․<新羅>使人, 具敕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鄰情, 卽停兵革.」 <璋>因遣使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如故. 十一年, 遣使來朝,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綵帛三千段幷錦袍等.
무덕 4년(621년)에 그 나라의 왕 부여장(무왕)이 사신을 보내와 과하마를 바쳤다. 무덕 7년(624년)에 또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조공을 바쳤다. 고조는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어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니, 고조는 수고로움을 위무하고 매우 후대하였다. 이어서 고구려가 길을 막고 중국과의 내왕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호소하므로, 조서를 내려 주자서를 보내어 화해시켰다. 또 신라와는 대대로 서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공하였다. 정관 원년(627년)에 태종이 그 나라 왕에게 “왕은 대를 이은 군장으로서 동쪽 오랑캐를 어루만져 주었소, 바다 한 모퉁이 머나먼 곳에서 풍랑이 험난하게 가로 막는 데도 정성이 지극하여 직공을 빼놓지 않으니, 그 아름다운 뜻은 생각할수록 가상하오. 짐이 삼가 총명을 받들어 천하에 군림하고부터 생각하는 것은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이라면 나의 본 뜻을 이루어 다같이 안녕을 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오. 신라왕 김진평은 짐의 번신이며, 왕의 이웃 나라요. 매번 듣건대 군사를 보내어 쉬지 않고 정벌하며, 무력만 믿어 잔인한 행위를 예사로 한다 하니 너무나도 기대에 어긋나오. 짐은 이미 왕의 신복(복신?) 및 고구려, 신라의 사신을 대하여 함께 통하고 화합할 것을 명하고, 함께 화목할 것을 허락하였오. 왕은 아무쪼록 그들과의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함께 이웃의 정을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멈추기 바라오.” 가는 국쇄를 찍은 문서를 주었다. 이에 부여장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비록 표면상으로는 명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예나 마찬가지로 원수 사이였다. 정관 11년(637년)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철제 갑옷과 독수리도끼를 바치니, 태종은 융숭하게 대접하고, 명주 3천단과 비단옷 등을 주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3
◉十五年, <璋>卒, 其子<義慈>遣使奉表告哀. <太宗>素服哭之, 贈光祿大夫, 賻物二百段, 遣使冊命<義慈>爲柱國, 封<帶方郡王>․<百濟王>. 十六年, <義慈>興兵伐<新羅>四十餘城, 又發兵以守之, 與<高麗>和親通好, 謀欲取<党項城>以絶<新羅>入朝之路. <新羅>遣使告急請救, <太宗>遣司農丞<相里玄獎>齎書告諭兩蕃, 示以禍福. 及<太宗>親征<高麗>, <百濟>懷二, 乘虛襲破<新羅>十城. 二十二年, 又破其十餘城. 數年之中, 朝貢遂絶.
정관 15년(641년)에 부여장이 졸하니(죽으니), 그의 아들 의자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슬픔을 알렸다. 태종은 소복차림으로 곡을 하고, 광록대부를 추증하였으며, 부의용 물건으로 2백단을 주었다. 사신을 보내어 의자를 주국(종2품)으로 책봉하는 명을 내리고, 대방군왕 백제왕에 봉하였다.
정관 16년(642년)에 의자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40여성을 빼앗고 군대를 보내어 지키는 한편, 고구려와 화친을 맺어 교류하며 당항성을 탈취하여 신라의 입조하는 길을 끊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니, 태종은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보내어 화복으로 양쪽 번국(백제, 고구려)을 설득하였다.
정관 22년(648년)에 또 10여성을 빼앗고, 수년 후에는 조공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4
◉<高宗>嗣位, <永徽>二年, 始又遣使朝貢. 使還, 降璽書與<義慈>曰:
공종이 제위를 이어 받자, 영휘 2년(651년)에 비로서 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사신이 돌아갈 적에 의자에게 국쇄를 찍은 문서를 내려 이르기를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5-(詔1/1)
◉至如海東三國, 開基自久, 並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俎, 尋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愍. 去歲王及<高麗>․<新羅>等使並來入朝, 朕命釋茲讎怨, 更敦款穆. <新羅>使<金法敏>奏書: 「<高麗>․<百濟>, 脣齒相依, 競擧兵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並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並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故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齊><桓>列土諸侯, 尙存亡國; 況朕萬國之主, 豈可不卹危藩. 王所兼<新羅>之城, 並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俘虜, 亦遣還王. 然後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埸, 耕織並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矣. 王若不從進止, 朕已依<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麗>, 不許遠相救恤. <高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蕃渡<遼澤>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한지 오래이며, 국가의 경계가 나란히 있어 실로 개이빨의 형세처럼 국경이 서로 들쭉날쭉 서로 닿아 있소. 근래에 와서 드디어 국경을 다투고 침공을 하여 조금도 편안할 해가 없었소. 마침내 삼한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이 도마 위에 놓이게 하고, 창을 찾아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저녁으로 거듭되니, 짐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 깊이 안타깝게 여기는 바이오.
지난 해에 왕의 사신과 고구려,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입조하였을 적에 짐은 서로의 옛 원한을 푸고 다시 우호를 돈독히 하도록 명하였소. 신라의 사신 김범민은 호소문을 올려 ‘고구려와 백제가 순치(잇몸과 이빨)의 관계로 서로 의지하고 있으면서 앞을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침략하므로, 큰 성과 요해처의 군사기지들이 모두 백제에 병합되니, 강토는 날로 줄어들고 국력 또한 잃고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의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군사를 일으켜 싸움으로 되찾겠습니다. 다만 옛 땅만 찾으면 바로 화친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소. 짐은 그 말이 조리에 맞으므로 불가불 윤허하였소.
옛날 제환공은 제후의 자리에 있었으나 오히려 망하는 나라를 보존시켰소. 하물며 짐은 만국의 군주인데 어찌 위태로운 번국을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본국에 돌려주시오. 신라도 사로 잡아간 백제의 포로를 모두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오. 그런 뒤에야 서로의 불화가 풀리고 전쟁이 멎으니, 백성들은 쉬고 싶은 소원을 이루고 삼번(삼국)에는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게 될 것이오. 이 어찌 변방에서 피를 흘리며 싸워 강토에 주검이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지되어 남자와 여자가 살 길이 없게 되는 것과 비교가 되겠는가. 왕이 만약 나의 처분에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이 청하는 대로 왕과 싸우게 놓아 둘 것이오. 또한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돕지 못하고 할 것이오. 고구려가 만약 이 명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거란의 여러 번병을 시켜 요택을 건너 쳐들어가게 할 것이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은 구하고, 주도면밀하게 좋은 계획을 세워 후회를 남김이 없게 하오“ 라고 하였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6
◉六年, <新羅王><金春秋>又表稱<百濟>與<高麗>․<靺鞨>侵其北界, 已沒三十餘城. <顯慶>五年, 命左衛大將軍<蘇定方>統兵討之, 大破其國. 虜<義慈>及太子<隆>․小王<孝演>․僞將五十八人等送於京師, 上責而宥之. 其國舊分爲五部, 統郡三十七, 城二百, 戶七十六萬. 至是乃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 各統州縣, 立其酋渠爲都督․刺史及縣令. 命右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總兵以鎭之. <義慈>事親以孝行聞, 友于兄弟, 時人號「海東<曾>․<閔>」. 及至京, 數日而卒.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特許其舊臣赴哭. 送就<孫晧>․<陳叔寶>墓側葬之, 幷爲豎碑.
영휘 6년(655년)에 신라왕 김춘추가 또 표문을 올려 백제가 고구려 및 말갈과 함게 북쪽 구경을 침공하여 벌써 30여성이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현경 5년(660년)에 좌위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니, 그 나라를 크게 깨뜨렸다. 의자 및 태자 융, 소왕 효연과 위장 58명 등을 사로 잡아 경사(장안)에 보내왔다. 황제는 이들을 꾸짓기만 하고 용서하였다.
그 나라는 본래 5부로 나뉘어져 모두 37군, 2백성에 호구는 76만이었다. 이때에 와서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 등 5도독부를 두고 각각 주와 현을 통괄케 하고, 백제 출신 추장과 거수로 도독, 자사 및 현령을 삼았다. 우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진압하고 어루만지게 하였다.
의자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행으로서 함이 널리 알려지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돈독하여 당시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 민자 라고 불렀다. 경사에 와서 며칠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으로 추증하고, 특별히 옛 신하들의 통곡을 허락하였다. 손호, 진숙보의 묘 옆에 장사하고 아울러 비도 세워 주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7
◉<文度>濟海而卒. <百濟>僧<道琛>․舊將<福信>率衆據<周留城>以叛. 遣使往<倭國>, 迎故王子<扶餘豐>立爲王. 其西部․北部並翻城應之. 時郞將<劉仁願>留鎭於<百濟>府城, <道琛>等引兵圍之. <帶方州>刺史<劉仁軌>代<文度>統衆, 便道發<新羅>兵合契以救<仁願>, 轉鬪而前, 所向皆下. <道琛>等於<熊津江>口立兩柵以拒官軍, <仁軌>與<新羅>兵四面夾擊之, 賊衆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水及戰死萬餘人. <道琛>等乃釋<仁願>之圍, 退保<任存城>. <新羅>兵士以糧盡引還, 時<龍朔>元年三月也. 於是<道琛>自稱領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誘叛亡, 其勢益張. 使告<仁軌>曰: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以國付<新羅>. 與其受死, 豈若戰亡, 所以聚結自固守耳!」 <仁軌>作書, 具陳禍福, 遣使諭之. <道琛>等恃衆驕倨, 置<仁軌>之使於外館, 傳語謂曰: 「使人官職小, 我是一國大將, 不合自參.」 不答書遣之. 尋而<福信>殺<道琛>, 倂其兵衆, <扶餘豐>但主祭而已.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가서 죽었다. 백제의 승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다 왕으로 세웠다. 서부와 북부가 모두 성을 뒤집고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때에 낭장 유인원은 백제의 부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였다.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왕문도를 대신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병을 출동시켜 합세하여 인원을 구원하고 계속해서 싸워 이기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항복했다.
도침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책을 세워 관군에게 저항하자. 인궤는 신라병과 함께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적들은 후퇴하여 책 안으로 달아났지만, 물에 막히고 다리는 좁아 물에 빠지거나 전사한 사람이 1만이나 되었다. 도침 등은 이에 인원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나 보전하였다. 신라병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는 용삭 원년(661년0 3월이었다.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일컬으며 배반하고 도망간 무리들을 유인하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인궤에게 사자를 보내어
“대당이 신라와 맹약하여 백제 사람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다음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준다고 들었소. 죽음을 당할 바에야 어찌 싸우다 죽으려 하지 않겠소. 무리를 모아 스스로 고수하는 이유요” 가로 했다. 인궤는 편지를 작성하여 재앙과 복됨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자를 보내어 설득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무리들이 많은 것만 믿고 교만이 생겨서, 인궤의 사자를 외관에 머무르게 하고, 전하는 말로,
“사자는 관직이 낮다. 나는 곧 일국의 대장인데, 스스로 만나 봄은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며, 답장을 써 주지 않고 사신을 돌려 보냈다. 얼마 아니 되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들을 합병하니, 부여풍은 다만 제사나 주관할 뿐이었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8
◉二年七月, <仁願>․<仁軌>等率留鎭之兵,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以<眞峴城>臨江高險, 又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引<新羅>之兵乘夜薄城, 四面攀堞而上, 比明而入據其城, 斬首八百級, 遂通<新羅>運糧之路. <仁願>乃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統衆浮海赴<熊津>, 以益<仁願>之衆. 時<福信>旣專其兵權, 與<扶餘豐>漸相猜貳. <福信>稱疾, 臥於窟室, 將候<扶餘豐>問疾, 謀襲殺之. <扶餘豐>覺而率其親信掩殺<福信>, 又遣使往<高麗>及<倭國>請兵以拒官軍. <孫仁師>中路迎擊, 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兵勢大振. 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率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 同趨<周留城>. <仁軌>遇<扶餘豐>之衆於<白江>之口, 四戰皆捷, 焚其舟四百艘, 賊衆大潰, <扶餘豐>脫身而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 <百濟>諸城皆復歸順, <孫仁師>與<劉仁願>等振旅而還. 詔<劉仁軌>代<仁願>率兵鎭守. 乃授<扶餘隆><熊津>都督, 遣還本國, 共<新羅>和親, 以招輯其餘衆.
용삭 2년(662년)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무리들을 크게 무찔러 지나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책을 빼앗고,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어서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에 바짝 닿아 있는데다 높고 험하며, 또 요충의 위치라 하여 군사를 증원시켜 지켰다. 인궤는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야음을 타 성 밑에 바짝 다가가서 사면에서 성가퀴를 더위잡고 기어 올라갔다. 날이 밝을 무렵 그 성을 점거하여 8백 명의 머리를 베어 마침내 신라의 군량운송로를 텄다. 인원이 이에 증병을 주청하니, 조서를 내려 치주, 청주, 래주, 해주의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좌위위장군 손인사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융진으로 가서 인원의 무리를 도와주게 하였다.
이에 복신은 벌써 병권을 모두 장악하여 부여풍과 점점 서로 시기하여 사이가 나빠지고 있었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방에 누워서 부여풍이 문병오기를 기다려 덮쳐 죽일 것을 꾀했다. 부여풍은 이를 알아차리고는 그의 심복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덮쳐 죽이고, 또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병을 청해 관군을 막았다. 손인사가 중도에서 맞아 쳐 무너뜨리고 드디어 인원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세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 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유인궤 및 별사 사상, 부여풍은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회합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진군하였다. 인궤가 백강 어귀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나 4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적들은 크게 붕괴되고, 부여풍은 몸만 빠져 달아났다. 거짓왕자 부여충승, 충지 등이 남녀 및 왜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항복하니, 백제의 모든 성이 다시 귀순하였다. 손인사, 유인원 등이 철군을 하여 돌아왔다.
조서를 내려 유인원 대신 유인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진압하고 지키도록 하였다. 이에 부여융에게 웅진도독을 제수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신라와 화친을 맺고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09
◉<麟德>二年八月, <隆>到<熊津城>, 與<新羅王><法敏>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 而後歃血. 其盟文曰:
인덕 2년(665년) 8월에 부여융이 웅진성에 이르러 신라왕 법민과 백마를 잡아 놓고 맹약하였다. 먼저 천신, 지신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피를 마셨다. 그 맹세문은 이러하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0-(盟1/1)
◉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鄰好, 不睦親姻. 結託<高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無辜, 頻命行人, 遣其和好. 負險恃遠, 侮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瀦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然懷柔伐叛, 前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太子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弟兄. 祗奉綸言, 不敢失墜,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棄信不恆,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明神鑒之, 百殃是降, 子孫不昌, 社稷無守,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饗是福.
“지난날에 백제의 선왕이 역리와 순리를 혼미하여, 이웃과 우호가 돈독하지 못했으며,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그들과 함께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읍을 깨뜨리고 성을 도륙하니 잠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하나의 물건이라도 없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이 무고하게 고통 받는 것을 가엽게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어 우호를 닦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지세가 험준하고 도로가 먼 곳만 믿고 하늘의 도리를 업신여겨 태만히 하였다. 황제께서 이에 분노하시어 죄인을 치고 백성을 위로하는 일을 삼가 거행하시니, 깃발이 나가는 곳에 한번의 싸움으로 모두가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은 못을 파고 집은 웅덩이를 뒷날의 경계로 삼고, 폐단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 다음 사람에게 훈계를 남겨야 될 일이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감싸 주고 배반하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 전왕의 아름다운 법도요, 망한 자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나라를 이어주는 것은 옛 철인의 법칙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러 역사책에 전해온다. 그런 까닭에 전 백제왕자 사가정경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서 제사를 받들고 그의 고장을 보존하게 하였다. 신라에 의존하여 영원한 동맹국으로서 각자 묵은 감정을 버리고 굳게 화친하라. 조명을 공손히 받들고 영원한 번국이 되라. 그리하여 사신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임하여 타이르고 깨우침과 아울러 짐의 뜻을 널리 펴게 하노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서로 다짐한다.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는 것은 우호를 처음부터 끝까지 돈독히 하기 위함이니, 재앙은 나누어 갖고 환란을 당하여서는 서로 구제하여 은의가 형제와 같이 지내도록 하라. 천자가 내리는 말을 공손히 받들어 함부로 저버리지 말며, 맹서를 하고 나서는 다 같이 언제고 변함이 없으라. 만약 신의를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다면, 신명께서 이를 보고 온갖 재앙을 내려서 자손이 번창하지 않게 되어 사직을 지킬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제사는 끊기고 남아나는 유족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철판에 글자를 새기어 금으로 칠한 것)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는 것이니, 자손만대토록 행하여 범함이 없어야 한다. 신명이 듣고 있으니, 이로서 누릴 복이 결정되리라.”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1
◉<劉仁軌>之辭也. 歃訖, 埋幣帛於壇下之吉地, 藏其盟書於<新羅>之廟.
이것은 유인궤의 글이다. 희생의 피를 마시고 나서 단 아래에 깨끗한 곳에 폐백을 묻고, 맹서문을 신라의 종묘에 간직하였다.
#舊唐書卷199上-列傳第149上-百濟國-12/12
◉<仁願>․<仁軌>等旣還, <隆>懼<新羅>, 尋歸京師. <儀鳳>二年, 拜光祿大夫․太常員外卿兼<熊津>都督․<帶方郡王>, 令歸本蕃, 安輯餘衆. 時<百濟>本地荒毁, 漸爲<新羅>所據, <隆>竟不敢還舊國而卒. 其孫<敬>, <則天>朝襲封<帶方郡王>․授衛尉卿.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百濟>之種遂絶.
인원, 인궤 등이 돌아오자 부여융은 신라를 두려워하여 곧 경사(장안)로 돌아왔다. 의봉 2년(677년)에 부여융에게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웅진도독 대방군왕을 제수하여 본번(옛 백제)에 돌아가 남은 무리들은 모아서 편안케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옛 땅이 황폐하여 점점 신라의 소유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융은 끝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손자 경이 측천무후 때에 대방군왕에 계승하여 책봉되어 위위경을 제수 받았다. 이로부터 그 땅은 신라 및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으며, 백제의 종족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