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8년(기해), 원 지정 19년(1359)
(겨울 12월) 정묘일에 홍두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군사라 일컫는 군사 4만 명이 얼음 위로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그 고을 백성 1천여 명을 죽였다. 또 정주(靜州)를 함락시켜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드디어 인주(麟州)를 함락시켰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암을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副元帥)로, 김득배(金得培)를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서경윤(西京尹)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서경 존무사(西京存撫使)로 삼았다.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홀치(忽赤) · 충용(忠勇) · 삼도감(三都監) · 오군(五軍)에게 3년상을 면해 주었다.
전 찬성사(贊成事) 강윤충(康允忠), 전 대언(代言) 홍개도(洪開道), 상장군(上將軍) 손거원(孫巨源)을 죽이니, 당시의 의논이 이들을 원통히 여겼다.
을해일에 적이 철주(鐵州 平北 鐵山)에 들어오니, 안우(安祐)가 청강(淸江)에서 맞아 힘써 싸워서 물리쳤으므로, 왕이 우에게 금띠를 하사하였다. 경천흥(慶千興)은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병(屯兵)하였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나가지 못했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이에 홍언박(洪彦博)이 아뢰기를, “경천홍은 공평하고 청렴하며 근신하고 독실하오나, 장수 노릇 할 재주는 없사오니, 이것은 그를 쓴 사람의 잘못입니다”하니, 왕의 노여움이 풀어졌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김희조(金希祖)를 서해도 도지휘사(西海道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 이암이 서경(西京)에 이르니, 모든 군사가 아직 모이지 않았다. 이암이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서경은 지킬 수 없는 것을 알고 창고를 불사르고 물러가서 요해지(要害地)를 보전하려 하니, 호부낭중(戶部郎中) 김선치(金先致)가 말하기를,“만일 창고를 불태우면 적들은 양식이 없으므로 졸지에 안으로 쳐들어올 것이니, 이것은 좋은 계교가 아니다”하니, 이암이 이 말에 좇았다. 이 때문에 창고와 가옥들이 온전하게 되었다. 여러 군사가 퇴군하여 황주(黃州)에 둔을 치니, 안팎 인심이 흉흉하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피난할 계획을 세워서 서로 다투어 쌀을 내다 가벼운 물건과 바꾸었으므로, 전에는 포목[大布] 1필에 쌀 2말씩 하던 것이, 이 때에 와서는 곡식은 천하고 물건이 중해져서 대포(大布) 한 필에 쌀 5·6말씩 하였다.
여러 사(司)의 이서(吏胥)들을 뽑아 서북면(西北面)에서 싸울 군사(軍士)로 보충하고, 승선(承宣) 이상에게 각각 말 한 필씩을 내게 하였다. 또 모든 선교(禪敎)의 절의 중과 인마(人馬)를 모아서 군용(軍用)에 충당하였다.
정해일에 적이 서경(西京)을 함락시켰다.
호부상서(戶部尙書) 주사충(朱思忠)을 보내어, 가는 포목과 말안장과 말고삐와 술과 안주를 적의 장수에게 주고, 그들의 허실(虛實)을 엿보도록 하였다.
이암은 겁이 많아서 전쟁을 하지 못한다 하여,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에게 그를 대신해서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전진하게 하고, 전 찬성사(贊成事) 권적(權適)에게 명하여 승병(僧兵)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가도록 하였다.
이 해에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경상도 진제사(慶尙道賑濟使) 예부시랑(禮部侍郞) 전이도(全以道)가 돌아와 아뢰기를,“감무(監務)와 현령(縣令)의 직책은 가장 백성과 가까운 것인데,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들이 기한(飢寒)을 면할 수 없읍니다. 선왕(先王)께서는 그런 줄을 아셨기 때문에, 무릇 과거에 뽑힌 선비들을 모두 감무와 현령의 직책에 썼던 것이온데, 지금은 모두 서도(胥徒)에서 뽑아 쓰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침노하오니, 장차 농사와 양잠(養蠶) · 길쌈을 장려하고 교화(敎化)를 닦아 밝히는 일을 어찌 하겠읍니까. 신이 의성현(義城縣)을 순시할 때에 본즉, 옛 둑이 있사오니, 만일 이것을 더 수축하면 비록 심한 가뭄이 들어도 가히 물을 대서 쓸 수가 있을 터인데, 현령은 앉아서 보기만 하고 수리하지 않아서 실농하게 하였으므로, 신이 명령을 받들어 이미 곤장을 쳤읍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과거에 뽑힌 선비들을 감무(監務)와 현령으로 쓰게 하소서”하니, 왕도 옳게 여겼으나, 끝내 이 말을 쓰지는 못하였다.
공민왕 9년(경자), 원 지정 20년(1360)
봄 정월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로 삼고, 군중에서 공이 있는 자에게 은기(銀器) · 솜 · 비단 · 의복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계묘일에 형부상서(刑部尙書) 김진(金縉)과 환관 김현(金玄)이 수백 기(騎)를 거느리고 상원군(祥原郡)으로부터 사잇길을 따라 서경(西京)에서 적을 공격하여, 적 3백여 명을 만나 죽기로 싸워서 1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어사대(御史臺)에 명해서 백관을 거느리고 병장(兵仗) · 복종(僕從) · 말안장 · 말먹이 · 양식을 갖추어, 넓은 구정(毬廷)에서 수십 일 동안 수직하고 호위함으로써 창졸간에도 적을 피하는 것을 연습하게 했다. 왕은 본래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말에 걸터앉기를 겁내었으므로, 공주와 함께 밤에 후원(後園)에 나가서 말타기를 배웠다.
갑진일에 상장군(上將軍) 이방실(李芳實)이 철화(鐵化)에서 적을 만나 1백여 명을 베었다. 병오일에 모든 군사가 생양역(生陽驛)에 모이니 모두 2만 명이었다. 이 때 일기가 몹시 추워서, 손발이 얼어 터져 쓰러지는 군사(軍士)들이 매우 많았다. 적이, 우리가 장차 진군하여 공격할 것을 알고 저들이 사로 잡았던 의주(義州)와 정주(靜州)·서경(西京) 사람을 죽인 것이 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시체가 쌓여 산더미 같았다. 정미일에 우리 군사가 서경(西京)으로 나아가 공격하는데, 보병이 먼저 들어가다가 밟혀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고, 적의 군사도 죽은 자가 역시 수천 명이 넘으니, 적이 물러가서 용강(龍岡)·함종(咸從)에 둔을 쳤다.
안우(安祐)를 안주 도만호(安州都萬戶)로, 이방실(李芳實)을 상만호(上萬戶)로, 김어진(金於珍)을 부만호(副萬戶)로 삼았다.
2월 기미일에 안우(安祐)등이 함종(咸從)으로 진군하였으나, 우리가 아직 진(陣)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적이 돌격(突擊)해 오니, 우리 군사가 패해 달아났다. 적이 정기(精騎)로 쫓아왔으나, 안우(安祐)·이방실·김오진과 대장군(大將軍) 이순(李珣) 등이 군대의 뒤에서 막으니 가까이하지 못했다. 이 때 마침 동북면 천호(東北面千戶)정신계(丁臣桂)가 군사 1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적과 더불어 죽기로써 싸워 수십 명을 베니, 적이 50리를 따라오다가 그만두었다. 이에 우리 보병(步兵)은 산으로 올라가 죽음을 면하였고, 잡혀간 자도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강양백(江陽伯) 이승로(李承老)를 수안(遂安)·곡산(谷山) 등처 축성감독사(築城監督使)로 삼았다.
신유일에 적 4백여 명이 숙주(肅州) 산골짜기에 둔을 치고 있다가, 그의 도당이 서경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의주(義州)로 돌아갔다. 이 때 중랑장(中郞將) 유당(柳塘)과 낭장(郎將)김경(金景)이 의주에 있으면서 성문을 수축하다가, 적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소주(召州)의 천호(千戶) 장윤(張倫)을 불러 용주(龍州) 등 지방의 군사를 징발해서 맞아 공격하니, 적이 정주성(靜州城)으로 들어가 성을 보전하려 하므로, 유당(柳塘) 등이 진군해 쳐서 모두 섬멸시켰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안진(安震)이 졸하였다.
임신일에 우리 군사가 또 함종(咸從)에서 싸우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와 장군(將軍) 이견(李堅)이 죽었다. 모든 군사가 힘껏 싸워 적병 2만 명을 베고 위원수(僞元帥)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으니, 적이 물러가서 증산현(甑山縣)을 지켰다.
계유일에 이방실이 정병(精兵) 1천 기(騎)를 거느리고 적을 쫓아 연주강(延州江)에 이르렀는데, 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김오진도 또한 정예한 기병을 거느리고 잇달아 달려오니, 형세가 궁한 적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서 죽은 자가 거의 수천 명이나 되었다. 적들이 언덕에 올라 대오(隊伍)를 짓고 다시 항거할 태세를 하니, 우리 대군(大軍)은 궁지에 몰린 도둑이 죽기로써 싸울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군사를 거두고 쫓지 않았느데, 적들은 이 날 밤에 도망하였다. 이방실이 새벽에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쫓았는데, 적의 무리들은 주리고 피곤하였으니, 안주(安州)와 철주(鐵州) 두 고을 사이는 죽는 자가 서로 길에 잇달았다. 이방실이 고선주(古宣州)까지 적을 쫓아 수백 명을 베었다. 형세가 궁한 적은 죽기로써 싸우고, 이방실은 군사와 말이 피곤하였으므로 군사를 거두고 그치니, 남은 적 3백여 명은 하룻낮 하룻밤이 걸려 의주에 이르러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이방실과 안우 등이 쫓았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생양역(生陽驛)에 있던 도원수(都元帥) 이승경(李承慶)은, 모든 장수들이 힘을 다하여 적을 치지 않았다 하여 항상 분하게 여기고 음식을 먹지 않아 드디어 병이 나서 돌아오니, 왕이 여러 재상들을 대하여 이승경을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는데, 이로부터 이승경은 병을 칭탁하고 일을 보지 않았다.
3월에 경천흥 · 안우 · 김득배가 전(箋)을 올려 적을 파한 경과를 아뢰었다.
을미일에 회군(回軍)하였다.
기유에 홍두적의 배 70척이 와서 서해도 풍주 벽달포(西海道豊州碧達浦)에 대였다. 또, 서경(西京) 덕도(德島)와 석도(席島) 등지에 적이 배를 대어, 봉주(鳳州)에 들어가 성문을 불태웠다. 또, 적의 배 1백여 척이 안악군(安岳郡)에 들어가 돈과 곡식을 빼앗고 가옥을 불태웠으며, 우리 군사는 그들과 수일 동안 싸워 30여 명이 죽었다. 적은 또 황주(黃州)와 안주(安州)를 침범하였다.
이승경(李承慶) · 경천흥 · 안우 · 김득배 · 이방실에게 공신호(功臣號)를 하사하고, 황지선(黃志善)을 베었다. 호부상서(戶部尙書) 주사충(朱思忠)을 원나라에 보내어 적을 평정한 일을 보고하게 하였더니, 요양(遼陽)에 이르자 길이 막혀서 그대로 돌아왔다.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이 왔다.
여름 4월에 홍두적이 황주를 침범하니, 목사(牧使) 민후(閔珝)가 적과 싸워 20여 명을 베고, 빼앗은 병기(兵器)를 바쳤다.
이방실을 풍주(豊州)로 보내서 적을 치게하여 30여 명을 베자, 적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
김백환(金伯環) · 권중화(權仲和)를 보내어 장사성(張士誠)에게 답례하였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띠와 옥영(玉纓)을 하사하니, 공주가 아뢰기를,“전하께서는 어찌 이런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시나이까”하니, 왕이 이르기를,“우리 종사(宗社)가 빈 터가 되지 않고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방실의 공로인데, 내 비록 살을 베어서 주어도 오히려 잘 보답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이 물건이겠느냐”하였다.
왕이 서정(西亭)에 나갔다가 어떤 여자가 매우 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 오빠가 전쟁에 나가 죽었는데, 어머니도 그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하다가 죽었읍니다. 그러나, 집이 가난해서 장사를 지낼 수 없으므로 우는 것입니다”하였다. 포목 50필을 하사하였다.
북방을 정벌한 장사들에게 크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교서를 내리기를,“지금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리고 주림에 괴로움을 받고 있으니 심히 민망하도다. 또, 오랫동안 옥중에 있는 죄수 중에 혹시 억울한 자가 있으면 화기(和氣)를 상할 것이니, 2등죄 이하는 사하고, 또 각 도의 염세(鹽稅)를 면제하라”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가문다 하여, 식사를 하루에 한 끼만 하였다.
(중략)
공민왕 10년(신축), 원 지정 21년(1361)
봄 2월에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각각 현량(賢良) 2명씩을 천거하게 하였다.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내가 왕위(王位)를 계승한 후,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조상의 교훈을 본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마음에 간절하였으나, 마침 어려움이 많은 때이어서 은혜가 아래로 미치지 못하여, 난리가 자주 일어나며 재앙과 괴이한 변이 여러 번 나타나므로, 내 이를 두려워하여 도선(道詵)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땅[白岳]에 옮겼으니, 이는 대저 장차 국운(國運)을 무궁(無窮)하게 이으려 하는 것이다. 오직 백성들이 분주히 일을 하여 수고로움이 실로 많은데, 내 어찌 나라를 구제할 큰 계책을 알지 못하겠는가. 나 역시 감히 도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새 은혜를 펴라. 2등죄 죄인 이하는 모두 용서하고, 북방을 정벌하는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는 국가에서 내리는 은전(恩典)을 더하며, 그들의 아들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도록 하라”하였다.
(중략)
(겨울 10월) 정유일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반성(潘誠) · 사유(沙劉) · 관선생(關先生) · 주원수(朱元帥) 등 10여만의 무리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삭주(朔州)를 침범하니,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이방실(李芳實)을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 삼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이여경(李餘慶)을 보내서 절령에 책(柵)을 세웠다.
학성후(鶴城侯) 서를 원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더니, 길이 중도에서 막혀 가지 못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여러 도의 군사를 점검하고, 국내의 절에 명령하여 전마(戰馬)를 차등 있게 내게 하였다. 서울 사람을 모아서 성문을 수리하였다.
임인에 홍두적(紅頭賊)이 이성(泥城)을 침범하니,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휘(鄭暉)를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삼았다.
모병(募兵)하는 방에,“무릇 모집에 응하는 자 중에, 사삿집 노비를 제외한 선비나 향리(鄕吏)에게는 벼슬을 주고, 궁(宮)·사(司)의 노예는 양민(良民)으로 삼든지 혹은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그들의 소원에 따라라” 하였다.
지숙주사(知肅州事) 강여가 백성의 집을 불태우고 도망했다.
11월에 홍두적이 무주(撫州 平北 寧邊)에 둔을 치니, 저쪽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다 하여 이방실이 군사를 거두어 물러와서, 순(順) · 은(殷) · 성(成) 3주(州)와 양암(陽巖 平南 陽德) · 수덕(樹德 平南 陽德) · 강동(江東) · 삼등(三登 平南 江東) · 상원(祥原 平南 中和) 5현의 백성과 곡식을 절령(절嶺)으로 옮기자고 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이방실이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 대장군(大將軍) 최준(崔準) 등을 박천(博川)으로 보내어 적을 쳐서 이겼다. 이방실은 또 지휘사(指揮使) 김경제와 더불어 개주(价州 平南 价川)에서 적을 쳐 1백 50여 명을 베었다.
을묘일에 안우가 보낸 조천주 · 정이(鄭履) 등이 보병과 기병 4백 명을 가지고 박주(博州 平北 博川)에서 적을 쳐서 적 1백여 명을 베었다. 또 기병 1백 명을 거느린 이방실은 연주(延州)에서 1천여 명을 쳐서 20명을 베었다. 이에 안우(安祐)는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나가 둔을 치고 첩보(捷報)를 올리니, 왕이 명하여 안우를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병진일에 적이 안주를 습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하여, 상장군(上將軍) 이음(李蔭)과 조천주가 죽었다. 적은 지휘사 김경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元帥)로 삼고 글을 보내기를,“군사 1백 10만을 거느리고 동으로 갈 테니 속히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공(公) · 후(侯) 이하는 전쟁에 쓸 말을 차등 있게 내놓으라고 명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세운(鄭世雲)을 서북면 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로 삼고, 전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사도(鄭思道) · 김두를 보내어 절령의 책(柵)을 지키게 하며, 평장사(平章事) 이공수(李公遂)는 죽전(竹田)에서 둔을 치게 하였다.
우리 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1백여 명을 베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다.
계해에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전 형부상서(刑部尙書) 유연(柳淵)을 병마사(兵馬使)로 삼았다. 적은 이 날 밤에 군사 1만여 명을 절령(절嶺) 책 옆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鐵騎) 5천 명으로 책문(柵門)을 공격하여 깨뜨리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單騎)로 도망해 돌아왔다. 을축일에 안우가 군사를 수습하여 김용(金鏞)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 둔을 친 다음, 용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최영(崔塋)을 왕께 보내어 서울 군사를 청하니, 왕이 일이 급함을 알고서 마침내 피난할 것을 생각하여 먼저 서울에 있는 부녀들과 늙고 약한 자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하자,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 날,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 黃海 牛峯)에 이르렀다.
병인일에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장차 남쪽으로 파천하려 하는데, 날이 밝기 전에 김용 · 안우 · 이방실 등이 달려와서 모두 아뢰기를,“경성은 지키지 않을 수 없읍니다” 하였다. 최영이 가장 통분하여 크게 부르짖기를.“원하건대, 주상(主上)께서는 조금 머루르셔서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宗社)를 지키소서”하니, 재신(宰臣)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날이 밝자, 왕의 일행은 민천사(旻天寺)로 거둥하였다. 근신(近臣)들을 각각 거리로 나누어 보내서 큰 소리로 의병(義兵)을 모집하게 하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모집에 응한 자는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안우 등도 어찌할 수 없어 왕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여기 머물러 적을 막을 것이오니, 청하건대 주상께서는 나가소서”하였다. 이에 왕이 숭인문(崇仁門)을 나서니, 늙고 어린 자들은 땅에 넘어지고, 어미와 자식을 서로 버리고, 서로 짓밟은 자가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왕의 일행이 통제원(通濟院)에 이르자 경성으로부터 오는 자가 아뢰기를,“적이 이미 가까이 왔읍니다.”하니, 드디어 임진강을 건넜다. 공주는 연(輦)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하여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 왕이 산하를 돌아다보며 원송수(元松壽) · 이색에게 이르기를,“풍경(風景)이 이와 같으니, 경(卿) 등은 마땅히 연귀(聯句)를 지을 만하다” 하였다.
상주 판관(尙州判官) 조진(趙縉)이 군사 1천 4백 명을 데리고 왔으므로, 대장군(大將軍) 김득제(金得齊)로 하여금 거느리게 했다. 사평원(沙平院)에 이르니, 개령감무(開寧監務)가 와서 쇄마(刷馬) 1백여 필을 바쳤다. 광주(廣州)에 이르러 유탁(柳濯)을 경상도 도순문 겸 병마사(慶尙道都巡問兼兵馬使)로, 이춘부(李春富)를 전라도 도순문 겸 병마사(全羅道都巡問兼兵馬使)로, 이성서(李成瑞)를 양광도 도순문 겸 병마사(楊廣道都巡問兼兵馬使)로, 강석(姜碩)을 교주 · 강릉도 도순문 겸 병마사(交州江陵道都巡問兼兵馬使)로 삼았다. 중랑장(中郞將) 임견미(林堅味)가 재(宰) · 추(樞)에게 말하기를,“적이 이미 경성에 들어 왔으니, 임진강(臨津江) 북쪽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청하건대, 모든 도의 군사를 뽑아 적을 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재 · 추들이 응하지 않으므로 임견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바로 왕에게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지금 창졸간에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신미일에 눈이 내리는데 이천현(利川縣)에 다다르니, 왕의 옷이 젖고 얼어서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풀었다. 이 날 적이 경성을 함락시켰는데, 여러 달 동안 둔병(屯兵)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 그 가죽을 베껴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가지 못했다. 또 사람을 잡아서 굽고, 혹은 임부(妊婦)의 젖을 구어서 먹는 등 잔학(殘虐)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다.
임신일에 왕이 음죽현(陰竹縣)에 다다르니, 관리와 백성은 모두 도망해 숨었다. 판각문사(判閣門事) 허유(許猷)가 쌀 두 말을 바치니, 왕이 안렴사(按廉使) 안종원(安宗源)과 안무사(安撫使) 허강(許綱)이 음식과 장막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하여 이지태(李之泰)를 안종원에 대신하게 했다.
장군 홍선(洪瑄)이 자청해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려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남경윤 양광도관군 상만호(南京尹楊廣道管軍上萬戶)로 발탁하고, 조희고(趙希古)를 광주목사 양광도 부만호(廣州牧使楊廣道副萬戶)로 삼았다.
12월 임진일에 왕이 복주(福州 慶北 安東)에 이르렀다. 정세운(鄭世雲)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였다. 왕이 파천(播遷)한 뒤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히 여겨서, 홍두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시킬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 여러 번 왕에게 청하기를,“속히 애통교서(哀痛敎書)를 내리시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시어 징병(徵兵)을 독려시키시옵소서”하였다. 이에 왕이 드디어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정승되기에 기울이고, 천하가 위태하면 뜻을 장수되기에 기울이는 것이다. 시세(時勢)의 경중(輕重)은 오직 사람에게 있는데 어찌 삼가지 않으리오. 공경히 생각건대, 태조께서 국가를 이룩하시고 여러 성왕(聖王)이 서로 계승하여 백성들을 길러 오셨는데, 과인에게 이르러서는 태평 시대를 믿어 군사의 일은 폐하고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두적의 침범을 입어서 파천하여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매양 종사(宗社)를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림을 어찌 견디리오. 이제 모든 장수를 나누어 보내니, 군사를 합하여 적을 쳐라. 이에 정세운(鄭世雲)에게 절월(節鉞)을 주는 명을 내리니, 가서 군사를 감독하며 명령을 듣고 안 듣는 자를 가려 상주고 벌주라”하였다. 정세운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나는 심히 한미(寒微)한 사람인데, 나 같은 것이 재상이 되었으니 국가가 마땅히 어지러운 것이다”하고, 유숙(柳淑)에게 말하기를,“내일 군사를 출발시킬 것이니, 공(公)은 돌아가서 군사를 점검(點檢)하시오”하니, 유숙이 말하기를,“군사가 이미 죽령대원(竹嶺大院)에 이르렀다”하였다. 정세운이 다시 말하기를,“만일 군사가 기한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공도 역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하고, 또 김용(金鏞)에게 말하기를,“지금 두 정승이 적을 구경만 하고 치려 하지 않으니, 누가 본받지 않으리오. 만일 적을 소탕하지 못하면, 비록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을지라도 어떻게 살아 있으며, 어떻게 나라가 되겠는가”하였다. 시중 이암이 말하기를, “이제 적이 몰래 들어와서 왕과 신하들이 파천(播遷)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은 그대가 절월(節鉞)을 가지고 군사를 거느려 떠나는데, 사직(社稷)이 다시 편안할 수 있는 것은 이번 한 싸움에 있으니, 공은 오직 힘쓰라”하였다.
왕이 영호루(映湖樓)에 거둥하여 얼마동안 경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누(樓)에서 내려 배를 타고 놀므로, 구경하는 자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혹은 돌아서서 탄식하는 자도 있었다.
정세운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삼았다.
염주(鹽州 黃海 延白)사람 검교 중랑장(檢校中郞將) 김장수(金長壽)가 주동이 되어서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적을 막아, 적의 유기(遊騎) 1백 4십여 명을 죽이고, 적의 위방(僞榜)을 그 고을 사람 최영기(崔英起)에게 주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보고하게 하니, 김장수를 상장군 겸 만호(上將軍兼萬戶)로, 최영기를 서해도 안무사(西海道安撫使)로 삼았다.
적 3백여 기(騎)가 원주(原州)를 함락시키니, 목사(牧使) 송광언(宋光彦)이 죽었다. 적 29명이 또 안변부(安邊府)에 이르렀는데, 이 때 고을 사람이 항복하는 체하고 술을 대접하여, 세 순배가 돌자 모두 때려 죽였다.
강화부(江華府)도 적에게 거짓 항복하고, 적의 비장(裨將) 왕동첨(王同簽)에게 음식을 주다가 복병(伏兵)을 내어 모두 죽이니, 적이 감히 그 고을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공민왕 11년(임인), 원 지정 22년(1362)
봄 정월에 구묘(九廟)의 가주(假主)를 복주향교(福州鄕校)로 봉안(奉安) 하였다.
갑자일에 안우 · 이방실 · 황상(黃裳) · 한방신(韓方信) · 이여경(李餘慶) · 김득배 · 안우경(安遇慶) · 이귀수(李龜壽) · 최영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둔을 쳤다.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모든 장수를 독려하고 진군시켜 경성(京城)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와 도솔원(稻率院)에 둔을 쳤다. 이 때 막 진눈깨비「雨雲」가 내리는데, 적의 방비가 해이(解弛)하였다. 이여경이 숭인문(崇仁門)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의 휘하 호군(護軍) 권회(權僖)가 적을 정탐하여 이것을 알고 말하기를, “적의 정예(精銳)군사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만일 우리가 불의(不意)에 공격해 나간다면 가히 이길 것입니다“ 하였다. 을축일 동틀 무렵에, 권희가 군사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돌입해 들어가면서 떠들썩 하게 북을 치며 날쌔게 공격하니, 적의 무리가 깜짝 놀랐다.
이 때 우리 태조가 휘하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대파하였는데, 점심때 쯤에 적의 괴수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니, 적의 무리들이 저희끼리 서로밟아 쓰러진 시체가 성 안에 가득하였다.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대개 10여만 명이요, 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금은 · 동인(銅印)과 병기(兵器) 등의 물건들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궁한 도둑을 모두 잡을 수는 없다”하고, 숭인 (崇仁) · 탄현(炭峴) 두 문을 열어 놓으니,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등 10여만 명이 도망하여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고, 드디어 적을 평정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은 비록 형세가 궁해졌으나 누벽(壘壁)을 쌓고 굳게 지켰는데, 날이 저물자 우리 군사가 진군해 포위하고 육박했다. 태조는 길가 어느 집에 멈추고 있었는데, 밤 중에 적들이 포위된 것을 헤치고 달아나니, 태조가 동문(東門)으로 달려갔다. 적과 우리 군사가 문을 서로 다투니 혼잡하여 나가지 못했는데, 뒤에서 오던 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사세가 심히 급박했다. 이에 태조가 칼을 빼어 앞에 있는 적 7, 8 명을 베고, 말을 뛰게 하여 성을 넘었으나 말이 넘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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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입니다. 중간에 왜적에 대한 기록이나 필요없는 기록은 생략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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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감찬 작성시간 06.05.16 중간에 "우리 태조가 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1백여 명을 베고, 한 사람을 사로잡아 바쳤다.." 이 태조는 누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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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민족사관 작성시간 06.05.16 태조라고 한건 분명히 이성계일테니 이기록은 조선세종때 편찬된 고려사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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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양사랑 작성시간 06.05.17 <고려사> 나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발췌한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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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감찬 작성시간 06.05.17 아, 이성계 씨 생각을 못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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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麗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6.05.17 고려사절요에서 발췌한 기록들입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어디서 발췌했는지 안 적어놨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