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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규의 난" -> "왕요의 정변"이 아닐까?

작성자大欽茂| 작성시간14.06.28| 조회수413|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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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다물전사 작성시간14.06.28 왕건의 죽음에서 성종의 즉위때까지는 고려사 초기 매우 흥미로운 시대인데 제국의 아침에서 망쳐버려 유감이죠. 사극으로 다시 한번 만들어야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大欽茂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6.30 동감입니다. 제국의 아침, 이방 저방 옮겨다니며 대사만 읊조리다가 끝나버렸죠;;
  • 작성자 김준수 작성시간14.06.30 왕요의 정변이라 함이 옳겠지요. 대흠무 회원님의 글에 공감 1표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황상폐하 작성시간14.06.30 거란 침입중 7대실록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고려초기 기록이 너무 부실하여 사건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여 사실을 정확히 알기가 곤란함...;
  • 작성자 공실불 작성시간14.07.04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패자인 왕규를 승자인 정종 광종 형제세력이 간신 역적으로 악의적으로 기록한 것이죠
  • 작성자 공실불 작성시간14.07.04 반대세력이 사후에 집권할시에 반대세력과 대립했던 전 정권의 수장이나 정치가들은 부정적으로 서술되기 다반사이지요 왕규의 논란도 그런 성격에 속하지요
  • 답댓글 작성자 大欽茂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4.07.06 혜종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던 박술희의 무력과 서경의 왕식렴과 평주의 박수경 세력을 등에 엎은 왕요,왕소세력, 평주 유금필의 외손인 효은태자세력이 버티고 있는 처지에 왕규 혼자의 힘으로 혜종을 암살하고 외손자 광주원군을 옹립한다는 것은 엄청난 무리수가 뒤따르는 모험이죠. 태조 혜종 두 임금의 장인이오. 고명대신이며 혜종정권에서 국정을 주도하던 왕규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외손자를 앉혀야만 했단 이유가 있었을까요. 고려사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는 구석이 너무나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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