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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근대 토론방

조선인의 삶과 담배

작성자타메를랑|작성시간08.09.24|조회수233 목록 댓글 0

  이렇게 고추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담배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지금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 남성의 평균 흡연율이 불가리아에 이어 세계 2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한 학급의 절반 이상이 담배를 피워대며(주로 남학생들), 쉬는 시간이 되면 화장실은 온통 뽀얗고 매캐한 담배 냄새로 가득 찬다. 신체 건강한 한국의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곳이 군대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대에서는 담배가 의무적인 보급품이었다.

 
  담배는 끊는 것이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건강에 좋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담배를 끊는 독종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요상한 격언(?)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건강에 백해무익한 담배를 미친 듯이 피워대는 한국 남성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진다.

 
  담배는 언제, 누구에 의해 전래되었을까? 많은 연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담배는 일본에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담배를 가리켜 한결같이 ‘남초(南草)’라고 부르고 있는데, 남쪽의 풀이란 뜻이다. 즉, 담배는 조선의 남쪽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담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데, 임란 이후부터 담배 관련 내용들이 부쩍 늘어나고 담배란 말 자체가 스페인 어의 ‘타바코’에서 유래된 점을 감안해 본다면, 담배의 원산지인 중남미를 스페인이 정복하고 나서 이것을 일본에 전파했고, 다시 일본인들이 조선을 침략하는 동안 조선인들에게 퍼졌다고 전래 경로를 추측할 수 있다.

 
  다음은 경상도 민요 중의 하나인 ‘담바귀 타령’의 일부이다.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은을 주러 나왔느냐 금이나 주러 나왔느냐
  은도 없고 금도 없고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
 
  위의 본문에서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라는 언급이 보이는데, 이로 미루어 보건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오랫동안 주둔하던 동래와 울산에서 일본인들이 피우던 담배가 조선인들에게 유출되어 원래의 타바코에서 담바귀→담배로 불리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인들은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까? 1628년 8월 19일자 <인조실록>을 보면 광주(廣州)의 선비 이오(李晤)가 올린 상소에 “현재 교화가 쇠퇴해져 기강이 어지럽고, 염치가 땅에 떨어져 탐욕스러운 풍조가 마구 유행하고, (중략) 여러 신하들이 비국에 모여도 우스갯소리나 하며 담배만 피울 뿐입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공식 기록에 언급된 조선인이 최초로 흡연을 한 사례이다.

 
  한번 맛을 들인 담배는 금방 퍼져나갔던 모양이다. 1년 후인 1629년 11월 20일의 <인조실록>에는 진명생이란 사람이 동료인 양경홍에게 남초(南草: 담배)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인조실록> 인조 16년(1638년) 8월 4일 기사에 보면 조선인이 담배를 청나라 수도인 심양(瀋陽)에 몰래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 당시 유통되던 담배의 대략적인 설명이 자세히 언급된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이며, 잎을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은(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肝)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이 풀은 병진년(1616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년(1621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茶)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交易)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妖草)이라고 일컬었다.”
 
  기사의 끝 부분에서는 담배가 조선에서 심양으로 전파되자 청나라 사람들도 매우 좋아하였는데, 청나라 황제는 담배는 토산물(土産物)이 아니고,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엄금했다고 한다. 아마, 처음 보는 낯선 물건이라 거부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담배로 인한 국제간의 외교 문제는 그 뒤로도 불거진다. 1639년 3월 22일, 사헌부에서는 주청 상사(奏請上使) 윤휘(尹暉)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가마 속에 숨겨둔 담배(南草)가 발각되었다는 사건을 보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담배를 금한 청나라 조정과 큰 마찰을 빚지 않을까 우려한다.


  또 1년 후인 1640년 4월 19일, 빈객 이행원(李行遠)은 “요즘 들어 청나라에서 담배를 금하는 것이 더욱 심한데도, 사람들이 담배를 몰래 청나라 사람들에게 파는 이익을 탐내어 목숨을 걸고 온갖 방법으로 담배를 숨겨 가지고 들어간다.”라며 앞으로 담배를 숨기고 가다가 적발되면 그 양에 따라 1근(斤) 이상은 먼저 참수한 다음에 보고하게 하고 1근 미만인 자는 의주에 가두고서 경중에 따라 죄를 주게 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새 청나라의 지배층들도 담배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646년 2월 4일, 청에 사신으로 파견된 동지사(冬至使) 이기조(李基祚)는 북경에 도착해서 청의 장수인 용골대와 만나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다. 이기조 일행이 “지금 조선에 흉년이 큰 흉년이 들었으니, 청나라에 바칠 곡식의 양을 줄여 달라”는 부탁을 하자, 용골대는 “구왕(九王)의 힘으로 이번에 그대들이 바칠 곡식의 양을 덜게 되었다. 구왕이 남초(南草: 담배)를 즐겨 피우니 남초를 보내어 사의를 표하도록 하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용골대가 말한 구왕(九王)은 청 태종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당시 청의 실권자였던 도르곤이다.

 
  청 태종이 담배를 엄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때가 1638년인데, 8년 후인 1646년에는 청의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인 도르곤이 담배를 즐기고 있다. 어느새 청의 왕족도 담배의 중독성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담배에 적대적이었던 청인들도 이러하니, 그것을 가르쳐 준 조선인들은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숙종실록> 숙종 1년(1674년) 8월 20일 기사에 의하면 “궁궐의 소렴전(小斂奠) 중에 유밀과(油蜜果)의 밖을 둘러싼 기둥 위에 담배 진이 낭자(狼藉)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유밀과란 전통 과자인 한과의 일종이다. 이 유밀과를 보관한 소렴전의 기둥 위에 담배를 피운 사람들이 담뱃재를 털어 놓아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재떨이가 없었던 옛날에도 담뱃재로 인한 문제는 여전했던 것 같다.

 
  또한 담배는 어느새 뇌물로도 사용되었다. 숙종 3년(1677년), 서치(徐穉)라는 사람은 담배(南草) 1태(馱)를 이조 판서 민점(閔點)의 사위에게 뇌물로 주고 감찰(監察)에 제수될 수 있었다고 한다.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 선원 하멜은 그의 저서 ‘표류기’에서 “조선에서는 담배가 매우 크게 퍼져, 4~5세 된 어린아이도 쉽게 피우며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무렵에는 아직 어린아이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등장하기 전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렇게 친숙했던 담배는 점차 국가의 규제를 받기 시작한다. 특히 담배는 화재를 쉽게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692년 2월 27일, 능(陵) 안의 재실(齋室)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담배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병조(兵曹)의 해당 낭관(郞官)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문(推問)하고, 실화한 사람을 체포하고 죄를 가하도록 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1701년 5월 12일에는 숙종 임금이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에서 문무백관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명을 내렸는데, 서관(庶官) 두어 명이 이것을 위반하니 숙종이 대궐 안 사람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고, 위반한 두 사람의 직위를 도태시켰다고 한다.

 
  이즈음, 임금과 대신 등 위정자들은 담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하게 된다. 그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땅에 곡식을 심지 않고 담배를 심어 장사해 이익을 벌기 때문이었다. 1732년 7월 21일, 영조 임금은 조정 회의에서 충청, 전라, 경상 세 도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좋은 밭에 담배를 심는 것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더구나 담배의 나쁜 측면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커져 갔다. 성호 이익은 담배를 피우게 되면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고, 재물을 소모하며 남녀노소가 할 일 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고 주장했으며, 장령(掌令) 윤지원(尹志遠)이란 사람은 “담배의 해독은 술에 비해 더욱 심하니 시골에서는 심지 못하게 하고 점포에서는 판매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한다. (1734년 11월 5일)

  
  영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97년 7월 8일, 조정 회의에서 “담배(南草)를 심은 땅에 모두 곡식을 심게 하면 몇 만 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사실도 그러했다. 기껏 기호품 정도 밖에 안 되는 백해무익한 담배를 심느니 곡식을 심으면 훨씬 많은 식량을 수확하고, 이는 더욱 생산적인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심리가 어디 그런가? “사람은 빵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도 살 수 없다.”란 말도 있지 않은가.

 
  정조에 말에 이병모는 “기름진 토지에 다 담배를 심었는데 서로(西路)가 더욱 심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서로란 조선의 북서쪽인 평안도를 가리킨다. 어째서 이들 지방에서 담배 재배에 열을 올렸을까? 평안도는 기후가 춥고 서늘하여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중국 사신들이 자주 행차하는 지역이라 사람들이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떠, 담배를 길러 내다 팔아 이익을 얻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땅에 담배를 심지 못하게 했으나, 흡연의 즐거움과 판매 이익에 눈이 뜬 농민들은 좀처럼 그 지시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1798년 11월 30일, 정조는 농사를 권장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기름진 땅은 모두 다 담배와 차를 심는 밭이 되고 말아서 농사가 형편없게 되었다.”라고 개탄했다.

 
  18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담배를 피우는 데도 일정한 예절(?)이 생겨난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의하면 “비천한 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조관들이 거리로 나갈 때, 담배를 피우는 것을 엄하게 금하며, 재상이나 홍문관 관원들이 지나가는데 담배를 피우는 자가 있으면, 우선 길가의 집에다 구금시켜 놓고 나중에 잡아다 치죄한다.”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현실 속에서 흔히 체감하고 있는 ‘담배 예절’이 이때부터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연장자나 상위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예절 말이다. 한국인들은 ‘맞담배질’을 무슨 크나큰 패륜으로 알고 기겁을 하지만, 맞담배질을 금기하는 문명권은 내가 알기로 한국 말고는 어디에도 없다. 서구 선진국은 물론이고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 한국보다 더 보수적인 풍습을 가지고 있는 아랍권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이상한 담배 예절은 왜 생겨났을까? 추측컨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및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유교적인 규범이 상층부뿐만이 아니라 하층부에까지 강하게 파고들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잇따른 전쟁과 사회 혼란으로 사대부들의 지배 체제가 흔들리자, 이를 막고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조선의 지배층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백성들이 즐겨 피우는 담배에까지도 ‘상하질서’를 엄격히 하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애당초 한국 땅에서 나던 토산품도 아닌 외래 기호품인 담배가 한국 사회에 확고히 정착했고, 그와 동시에 ‘담배 예절’도 아직까지 그 뿌리가 강고한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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