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이 장군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일단 임진왜란 파병 당시 명군의 존재는 실제 전투 참전을 통해서 전쟁 억지력을 하였다기 보다는 파병을 하여 전투에 임하되 박터지게 싸우기 보다는 외교적인 경로를 통해서 전쟁을 끝내려는 경향이 짙었다고 볼수 있지요.
이여송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전 이후 벽제관에서 왜군 유인전술에 휘말려 예기가 꺽이고 나서부터였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나라 파병에 대해 폄하할순 없습니다.
지상군, 수군 전력 다 합쳐서 총 14만명이 전쟁기간중에 파병되었죠.
실질적인 전투를 수행을 하고 피를 본것은 조선군이요 의병들이긴 하죠. 실질적이던 형식적이던 왜란 당시의 명나라군은 없어서는 않될 존재들이었습니다.
똘이장군님께서 가장 열받아하시는 대목이 명나라 파병군들의 민폐를 끼친것을 거론하시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것 하나가 있죠.
먼저 설명을 드리자면은 명나라 파병군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눕니다.
조선과 인접해 있는 요동 군구에서 차출된 병력과 남방 절강성에서 차출된 병력들이죠.
이여송 직속 부대인 요동군구는 경무장된 보병, 기병 부대들이라 할수 있고 절강부대들은 화창, 화포같은 중화기들을 보유한 중무장 병력들이었죠.
만력제 즉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장거정의 대대적인 변방 부대 개혁 작업을 통해 북로남왜의 화중에 하나인 왜구를 진압한 명장 척계광을 등용하였고 절강 부대는 그의 직속 부대였습니다.
군기와 군율이 아주 쎄다고 할수 있지요. 적어도 명나라 군 부대들 중에서는 말입니다.
이여송이 평양성 전투 승리 이후 벽제관으로 급하게 추적을 하다가 일본군의 유인 전술에 말려 큰 피해를 입고 후퇴를 하였고 이때 패배로 인해서 전쟁 보단 외교채널을 통해서 끝내려고 하죠.
당시 이여송이 벽제관으로 향할때 휘하 병력은 자신이 이끌고 온 요동 군구쪽의 병력들입니다.
이여송은 절강병력들과의 연계를 통한 통합적인 작전을 벌어지 않고 군구간의 알력 경쟁 심리에 의해서 전공을 자신과 휘하의 부대들에게 돌리기 위해서 요동병들만 이끌고 무리하게 추적을 감행한것입니다.
그리고 절강 부대들이 중무장한 병력들인 관계로 요동군과 더불어서 신속한 추격전을 감행하기 어려웠던 면도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군의 매복에 제대로 대응못하고 낭패를 당하고 만거죠.
임진 왜란 당시 명나라는 전국이 민란으로 휩싸여 있던 시기였는데 조선 조정이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던 때가 섬서성 영하쪽에 중급 군관 발배가 반란을 일으켜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죠.
발배의 난이 진압되고 나서야 명나라 조정은 파병을 결정합니다. 발배를 진압한 그들 병력을 바로 조선으로 보내도록 조치를 하죠.
워낙 갑작스럽게 파병되는 관계로 명군은 중, 장기적인 보급을 비롯한 후속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조선으로 향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명군 수뇌부들은 일단 본토에서 원활하게 보급이 될때까지 식량이나 피복과 같은 물자들은 모자라는 것은 조선 현지에서 직접 구매를 해서 조달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은괴를 잔뜩 짊어지고 왔죠.
그런데 그들이 조선으로 왔을때 그들이 내미는 은괴들을 받아주는 곳이 전혀 없었어요.
당시 조선은 화폐 자체가 없었지요. 일상 생활에서 통용되는 것은 쌀이나 곡식, 포목, 비단과 같은 실물 화폐들이 었습니다.
고려때 화폐가 만들어지긴 하였죠. 은병, 활구 등등.... 하지만은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사장되다 시피한 것들이었고 조선까지 그렇게 이어진거죠.
화폐가 통용되기 위해서는 상공업이 발전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경제 의식 수준이 농업방면의 생산력 증대에만 국한되어 있었고 정작 증대된 물자를 통한 유통의 활성화에는 문외한이었지요.
이런 이유로 화폐 경제 자체가 태생적으로 자리 잡을수가 없었던 거죠.
하여간에 이런 상황이다 보니 명나라군들은 현지 조선인들이랑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었을겁니다.
보급에만 의존하자니 헐벗고 굶주리기 십상이고......
필요한것 직접 구매를 하자니 돈을 내밀어도 받아주지도 않고.....(돈이 뭐데유?)
이런 상황에서 창칼을 짊어진 외국 군대가 행할수 있는 가장 쉽고 합리적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명나라 파병군과 조선 현지인들과의 충돌과 민폐 사례중에 이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명군 사령관 이여송이 조선 조정에다가 조속히 은본위 화폐 경제 체제를 구축하라고 엄포를 놨다고 하더군요.
파병군 사령관의 입김을 무시하기 어려웠던 조선 조정은 받아들입니다.
사실 터무니 없는 요구사안도 아닌데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한 기존의 농업 기반의 경제체제가 완번 붕괴된 상태였기에 실물 화폐보다는 명목상의 화폐에 대한 필요성을 그들도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죠.
몇십년후 숙종조에 등장하는 상평통보는 그렇게 해서 자의반 타의 반의 형식으로 탄생을 하게 됩니다.
명나라 파병군의 군기빠지고 기강이 헤이해진 애들에 의한 것도 한몫하고 있긴 하였습니다만은 그게 전부 다는 아니었다 그말입니다.
글출처: 유용원군사세계 파렌하잇님.
http://bemil.chosun.com/brd/view.html?tb=BEMIL085&pn=2&num=117516
================================================================================
글자체에서는 화폐경제에 대해서 조선이 무지한 모습이었다는 좀 비하성같은 글이 있다 보지만.. 명군의 약탈문제는 자체 기강문제와 명인들 자체의 조선에 대한 동맹국이 아닌 식민지급 인식등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런 문제성이 있는 것인지.. 한번 이번에 알아보게되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마두리 작성시간 09.02.12 약탈이 화폐 탄생에 간접적 영향이라... 좀 어불성설로 보입니다만.. 과연 당시 화폐 경제 체제를 떠나서라도 전시통에 백성들이 타국의 군인들에게 팔만한 여유분의 물자가 있었을런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기강이 해이하고 조선백성들을 만만하고 우습게 보는데 왜 굳이 자기 돈 써가면 구매를 하려 할까요? (조선백성들만이 아닌 관리들도 병사한테 맞거나 하급 장교가 신료들을 패는 마당인데..) 그러고보니 명군 수뇌부가 물자 구매를 위한 은괴를 들고 갔다는 기록은 어디서 나오는지 함 찾아봐야겠군요. 정말 금시초문이라서요.
-
답댓글 작성자밀리터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2.13 말씀하신 것 때문에 자문을 구한것인데 말이죠..ㅠ_ㅠ..
-
답댓글 작성자마두리 작성시간 09.02.13 아 그런겁니까? 이런..ㅜㅜ 그런데 기본적인 식량같은 보급문제에 대해선 조선조정에서 하지 않았나요? 저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본 글이라 다시 기억을 더듬어 근거를 다시 찾는 중인데 쉽지가 않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