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1.개황
- 강점기 3년차! 나라는 망했으나 죽창을 든 백성들의 항쟁은 그치지 않았다
한일 합병 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화승총과 죽창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 하였다
또 독립 지사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찿고저 국외에서 독립운동과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을 벌였다
서울의 이희영 6형제,경상도 안동의 이상룡,김동원, 선산의 왕산, 허위 유족 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나 연해주의 신한촌으로 망명하여 독립기지를 마련 했다
서간도의 경학사, 부민단, 신흥학교와 연해주의 신한촌 에서 조직된 권업회가 조선의 독립기지
역할을 하는 해외 항일 단체 들이였다
이들 독립지사들은 내 자식은 왜놈의 종이 되게 할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피눈물을 흘리며 국경을 넘었다
<정치, 행정>분야
*9월 105인 사건: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105인의 합산이 무려 630년에 이르렀다
조선 백성들이 나라 빼앗긴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것은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령이
내려서부터 이다
총독부의 토지조사 목적은
첯째 식민지가 된 조선 땅을 약탈하여 총독부 소유지로 만들고,
둘째는 일본의 토지 없는 농민을 대량으로 조선에 이주 시킴이요
셋째는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만들고저 함이였다
토지 조사 과정중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는 모두 총독부소유로 빼앗겼다
소유자 였던 농민들은 해당 토지가 이들 배성에겐 토지는 곧 생명줄이 였는데
빼앗긴 백성들은 살길을 찿아 괴나리봇짐을 지고 국경을 넘어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 하였다 ,
*1.6 의병장 최영우 (最永宇), 양평에서 검거됨
*2.4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전국에 배포하고 경학원 강사 취임을 거절한 김순흠(金舜欽)자결
*3.18조선 총독부 재판소령개정 공표
*3.25경찰범 처벌 규칙 공표
*3.31 최재형(崔在亨),정재관(鄭在寬)등 독립운동을 위해 니콜라에프크스, 하바로브스크등에
권업회(勸業會)지부설치
*7.4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慇植)등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조직
*8월 손정도(孫貞道) 조성환(曺成煥) 일본 경제계 거물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기도 협의로
후 중국 다렌에서 체포됨/ 가츠라 다로는 후일 총리로 취임
*8.13 토지조사 사업 시작
*9.28 신민회 사건 피의자 105인에 유죄 판결
*10.14 총포 화약류 취체령 공표
*11월 이상룡(李相徿) 서간도에서 경학사(耕學社) 토대위에 부민단(扶民團)조직
*12월 임병찬(林炳瓚) 전라도 지방에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조직
<사회,경제> 분야
-1912년 1월1일부터 한국의 표준시를 일본에 맞춰 30분 앞당긴 오전 11시30분을 정오로 삼았다
일본은 칙령 19호로 축제일을 지정하여 원시제 (1월3일),신년연회(1월5일), 기원절(2월11일),
신무천황제(4월3일), 명치천황제(7월31일)등을 조선에서도 그대로 시행케 했다
-3월25일에 공표된 총독부의 경찰범 처벌 규칙에는 헌병과 경찰은 정식 법절차나 재판 없이
한국인들 가운데 불온한 연설을 하고 불온문서, 도서, 시가 등을 반포하거나 낭독하는 자도
처벌 하게하여 1912년에만 5만 명이상이 검거 되었다
경성 마포에 경성 감옥을 새로 짖고 종전 경성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총독부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을 공표하여 분묘의 위생관리와 자연 경관
보호 등을 이유로 내세워 공동묘지에만 시신을 매장 토록 했다
*1.1 표준시를 일본에 맞추어 어전 11시 30분을 정오로함
*1.20 조선은행 신축건물 낙성식 거행
*2.16어업세령 공표
*3.24 호남선 강경 -군산 간 개통
*3.25 경찰범 처벌 규칙 공표
*3.27 제생원 (
*4.10 러시아 정부 ,헤이룽 지방의 한국인 2068호 (4988명)의 귀화를 인정
*4.26 서울 호구 6만 5098호 인구 29만 3816명 집계
*5.31 총독부 전 관리에게 무관 복장 착용 개시
*6.15 부산-장춘간 직통열차 운행개시
*6.20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 공표
*9.2 마포에 경성 감옥 설립, 종전 경성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개칭
*10.2 호남선 이리-김제 간 개통
*12.6 일한 와전(
<문화,생활분야>
-만주 (중국 동북)는 한일 합방 독립투사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입에 풀칠을 하기위해, 일본인이 보기 싫어 싫어 국경을 넘은백성들이 간도
곳곳에다 학교를 세웠다
-이곳에서 배출된 학생들의 다수가 청년 독립군으로 민족 정기를 이어 갔다
-창덕궁 궁내에는 박물관이 들어 섰고 동국통감, 동국 여지승람, 택리지 등의 책이
간행되었다 총독부는 황현의 "매천집"과 김택영 “창강집”을 압수했다
-캐나다 선교회가 함흥에 영생 중학교 , 간도에 은중 학교를 설립했다
-서울 장안 에서는 일본인들이 택시 영업을 하기 시작 했다
-경성에 수도 사용 호수는 일본인 8003호, 한국인 9893호 였고
1912년 말에 만주의 한국인은 23만 8403명 이였다
*2.1 평양 일일신보 창간
*2.10 천도교 종학원(宗學院)설립
*2.18 혁신단, 연흥사에서 육혈포 강도 등 공연
*3.14 착덩궁 박물관 준공
*3.29 윤백남 조중환등 극단 무수성 창단
*4.1 일본 유학생회“학계보(學界報)창간 편집 발행인 문일평)
*4.30 권업신문(勸業新問)창간(주필; 신채호)
*9.1 예수교 장로회 조선총회 , 평양에서 창립 (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11월 YMCA 야구단 최초로 일본 원정
*12.19 총독부 황현(黃玹)의 매천집(梅泉集)김창영의 창강집 (滄江集)을압수함
*12월 총독부 한글에 의한 일본어 가나(暇銘)의 요(拗)음 표기법 제정
오늘은 여기 까지 입니다
2015-4-16Th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