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개혁과 좌절(하)
정조는 도성을 화성으로 옮기는 거대한 사업을 추진했다. 이어 내정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정조는 백성의 고통을 말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한다.
먼저 수령권의 강화를 도모했다. 다시 말해 지방관의 권력을 확대해준 것이다. 지방관들은 왕권을 대행하면서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지방 사대부와 토호의 위세에 눌려 소신껏 행정을 펼 수 없는 처지에 늘 몰렸다. 정조는 “나의 생각은 오직 백성들이 평안하게 사느냐, 근심에 찌들어 사느냐에 모아 있다. 이는 수령의 손에 달려 있다”(‘홍재전서’)고 했다.
정조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현지로 부임하는 수령을 만나 여러 가지 현지 실정을 묻고 선정을 당부했다. 그리고 15개월의 임기를 보장했다. 이어 수령들이 부정을 저지르면 늘 관대하게 조치했다. 부정 탐학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권을 존중해 사기를 높이고 사족 토호들을 억제하려는 정략이었다.
정조가 임명한 수령들은 사족과 토호들이 조세와 환곡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으며 군역의 부정을 적발해냈다. 사족 토호들이 거세게 저항했으나 임금의 비호를 받는 수령들에게 밀렸다. 정조는 승지나 각신 등 측근 세력을 곧잘 수령에 내보냈다. 수령들이 여러 폐단을 적은 응지소(應旨疏)를 올리면 일일이 읽고 대책을 내렸다.
그렇다고 수령의 부정행위를 눈감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적극 활용했다. 종전의 암행어사는 특수한 일을 처결키 위해 특정 지역에 파견되어 일을 처리했다. 한데 정조는 암행어사의 권한을 확대해
지나는 골골을 모조리 감찰케 했다.
보기를 들면 호남지방을 감찰할 임무를 띤 암행어사는 지나는 연로인 경기도·충청도까지 그 범위를 넓혀준 것이다.
암행어사도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수행 군관을 암행어사가 스스로 골라 데려가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선정을 베풀었다는 수령이 뒤에 부정사실이 적발되면 그 암행어사를 처벌했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110회 이상 암행어사를 보냈는데 여느 임금의 두 배가 넘는 숫자였다. 또 이들의 반수 이상이 규장각 초계문신 출신들이었다.
정조는 직접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정조는 수원에 자주 행차했으며 민생을 돌보려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정조는 백성들이 임금이 행차하는 연로에서 격쟁(擊錚)을 하게 했다. 곧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징을 쳐서 이를 알리게 하는 제도였다. 격쟁을 통해 알린 민원은 3일 안에 처리케 했다.
정조는 격쟁을 하는 백성을 불러 사안을 알고 스스로 그 결정을 낱낱이 챙겼다. 정조 재임 기간은 격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 격쟁이 요란하자 궁궐 앞의 세 곳을 지정해 격쟁을 허가하는 정도로 제한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잘못된 여러 제도를 하나씩 고치는 조치를 내렸다.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본다. 적자와 서자의 차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그 개선책이 자주 논의되었으나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정조는 서자 출신이라도 과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게 해 고위직 진출의 길을 열어주었다.
중인의 승급제한을 철폐했다. 중인들은 잡과를 거쳐 기술직에 종사하면서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제한을 받았다. 이들을 고을 수령으로 보내기도 하고 비록 영직(影職, 실직이 아니나 높은 품계를 주는 것)이나마 높은 품계에 임명했다. 이때 화가 김홍도는 수령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형벌·지역차별등 폐단 타파 진력18세기에 들어 많은 노비들이 신공의 고통을 벗어나려 도망쳤다. 포졸들과 상전들은 이들을 체포하려 고유 업무를 팽개치고 부산을 떨었다. 중앙에서도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고 노비 잡는 일을 맡겼다. 도둑 잡는 일 따위의 고유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정조는 그 관련 기구를 폐지하고 노비 잡는 일을 중지시켰다.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는 가혹한 형벌을 완화케 했다. 예전부터 곤장은 등과 관절을 때리지 못하게 하거나 3일 안에 다시 치지 못하게 하는 등 일정한 규정을 두어 시행케 했으나 이를 어기고 과도하게 때려 목숨을 잃는 일들이 많았다. 이를 엄하게 규정을 지키거나 완화케 했다.
옛부터 역적과 명화적, 강도와 절도에게는 난장질과 주리를 틀고 불로 지지는 고문을 가했다. 또 얼굴에 강도라고 쓰는 자자형(刺字刑)을 가하기도 했다. 난장형과 주리형, 자자형을 금지시켰다. 또 범죄자가 유배를 갈 때 가족들이 함께 유배를 가는 연좌죄를 없앴다. 또 죄수들에게 형틀을 씌우는 형구를 없애버리게 했다. 춘향이도 이 형벌을 받으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았던가?
수령이건 형리건 남형(濫刑)을 일삼는 담당관을 적발해 엄한 처벌을 내렸다. 또 그 규정을 확실하게 해두는 조치를 병행했다. 이어 억울한 죽음을 막으려 ‘증수무원록’을 간행하여 지침서로 삼게 했다. 이어 ‘대전통편’을 만들어 성문법으로 그 규정을 확실하게 했다. 이 조치야말로 정조의 인권의식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지역 차별을 철폐하는 조치를 내렸다. 조선 초기부터 서북 등 지역 차별이 계속 강화되었으며 후기에는 전라도·경상도의 일부 인사들도 차별을 받았다. 정조는 특정 지역 출신의 인사를 고루 등용케 하라는 지시를 여러차례 내렸다. 어진 이를 추천 받아 벼슬에 임명하기도 하고 과거에 합격한 자들에게는 실직의 임명에 불이익을 받지 않게 했다. 특히 할아버지 영조가 실시했던 탕평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강력하게 추진했다. 물론 당파를 고루 등용하여 남인인 채제공, 정약용 등이 주요 인사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문벌과 당쟁의 뿌리를 완전히 불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으며 인사권을 쥔 인사들의 방해를 완전하게 잘라내지 못했다.
어쨌든 정조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보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뿌리를 완벽하게 뽑지 못했고, 그들의 방해를 끊임없이 받았다.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불의에 죽은 것도 이와 맞물려 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자기 방어는 완강했던 것이다.
정조를 반대하는 벽파 또는 일부 노론들이 집권한 뒤에 정조의 여러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조는 영조가 만들어놓은 기초 위에서 열렬한 개혁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그 좌절을 맛본 것이다. 뒤따라 등장한 문벌정치는 부정과 불법, 벼슬의 독점 등 반동정치를 자행했다.
결국 이들은 조선 말기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으며 끝내 나라가 유리되는 현실을 빚었다. 개항기 국력이 기울어졌다. 국력의 소진은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이 갈등을 빚어 내부의 분열이 가중된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해 그의 빛나는 개혁정치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그 유향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 변색되지 않을 것이다.
-증수무원록은 어떤 책-
세종은 무고한 죽음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해 사망 원인을 철저히 가려내는 법의학서를 만들려 했다. 마침 원나라에서 편찬한 ‘무원록’을 보고 주를 달아 다시 펴냈다. 그러나 풀이가 너무 간단해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며 용어도 중국의 방언을 그대로 사용하는 따위로 난해해 이용하기에 불편했다.
영조는 이 책의 결함을 여러모로 바로잡고 보충하는 작업을 벌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정조는 이 작업을 떠맡았다. 서유린에게 이 일을 맡겨 1792년 완성을 보아 ‘증수무원록’이라는 이름으로 간행케 했다. 이 책을 관련기관에 배포하여 널리 이용되었다.
이 책의 제목을 비록 증수라 했으나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사례를 담았으며 검시의 과학적 방법과 공정함을 기저로 한 법의학서였다. 또 언해로 번역해 누구나 쉽게 읽도록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죽은 사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검사케 하고, 시체를 계절에 따라 검안하는 방법, 뼈와 살이 상한 경우 판별하는 방법, 땅에 묻은 시체를 판별하는 방법, 목매 죽었을 경우 스스로 목을 맸는지 남이 목을 맸는지, 물에 빠져 죽었을 경우 스스로 빠져 죽었는지 남이 빠뜨려 죽였는지, 매맞아 죽었을 경우 어떻게 맞았는지 무엇으로 맞았는지, 칼에 찔려 죽었을 때 스스로 찔렀는지 남이 찔렀는지, 불에 타 죽었을 경우 실화로 죽었는지 방화로 죽었는지 따위를 가리게 한 것이다.
더욱이 약물중독으로 죽었을 경우 생전에 중독되었는지, 사후에 중독되었는지, 독약·벌레·독초로 중독되었는지도 가리게 했다. 그밖에도 여러 죽음에 대한 검시방법을 제시했다. 현대의학이 수용되지 않은 시기에 참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요모조모로 제시했다.
이 책이 출간되자 죄인을 다스리는 담당관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가져가 중요한 참고서적이 되었다. 더욱이 정약용은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흠흠신서’를 저작했다. 적어도 이 책은 근대 이전시기, 법의학서의 길잡이가 되었다. 정조는 이를 토대로 하여 인권을 중시하고 죄인의 형벌에 공정성을 기약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이이화/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