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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근대 토론방

일제강점기 역사 요약 시리즈`(37)/1943년도

작성자Flash|작성시간15.06.03|조회수195 목록 댓글 1

1944년도

*일제는 일본군 점령지에 급조된 괴뢰정부(만주, 중국 왕징웨이 정권, 미얀마, 필리핀 등)

대표를 모아 놓고 대동아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공존공영, 자주독립, 인종차별 없는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함으로써 세계평화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여자 정신대 금무령을 공표하여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일본이나 중국 , 남양 등 각지로 보냈다

*오랜 전쟁 여파로 서울 거리의 점포들은 진열장에 먼지가 쌓이고 미나카이, 조지아,

미쓰코시, 화신 등 백화점들의 진열장도 텅텅 비어 갔다

*사람들은 굼주려 부황이 나고 지쳐 쓰러지기 시작 했다. 그런데도 일제는 최후의 승리를

위해 참고 견뎌야 한다고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일본 제국호는 태평양 바다에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정치,행정>

*총독부는 긴급 국민근로 동원방책 요강 발표에 이어 총동원법에 따른 징용을 실시했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광산과 군수공장에 동원 했다 이광수. 최남선 등친일 인사들이 징병제 가 한국인의 위상을

격상시켜 준다고 한국 청년들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독려 하는 가운데 학병의 입영이 시작 되었다

이들 학병 가운데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임시정부를 찿아와 광복군에 편입한 이도 있었고 탈출도중에 발각되어

총살당한 이도 있었다

*조선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8대총독) 가 일본 수상으로 전임되고, 마지막 총독 에

아베노부유키(阿部信行)/9대 총독/2015년 현재 일본 수상의 조부)가 부임해 왔다

그는 부임 성명을 발표 했다

이제, 성전은 마지막 종전 단계에 이르렀다. ”귀축미영(鬼畜米英)은 최후 발악을 하고 있다.

승전의 날은 임박 했다 그의 성명이 발표 된지 사흘후 한반도 상공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미 B29 폭격기가 나타났다

*여운형은 일본의 패전에 대비하여 지하 비밀 단체인 건국 동맹을 조직 했다.

*충징의 임시 정부는 중국. 미국. 영국. 소련등 30 여개 연합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승인을 요청 했다

미국, 영국, 소련 등에서는 답이 없었고, 프랑스와 폴란드정부는 임시정부 승인 을 통보해 왔다.

*1.18 긴급 국민근로 동원 방책요강 발표

*1.20 한국인 학병 .입영시작

*2.8 총동원법에 따른 징용실시 (광산과 군수 공장에 동원)

*3.15 총독부 형사 재판과에 2 심제 채택

*3.중순 일본군에서 탈출한 김상태, 안국보, 이준승, 한춘규 등, 광복군에 편입

*4.20 임정, 임시약헌을 대한민국 임시 헌장으로 개정 공포

*6 임정, 중국, 미국, 영국, 소련 등에 30 여개 연합국에 정부 승인을 요구(프랑스와 폴란드 정부, 임정 승인을 통보)

*7.22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小磯國昭) 일본 수상으로 전임

*7.25 조선 총독에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임명됨

*8.23 여자 정신대 근무령 공포시행 (12세 이상 40세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을

일본. 남양 등 각지로 징용 실시)

*9.30 조선어학회사건의 최현배등 12, 예심을 종결(이윤재, 한징옥사, 장지영, 정열모 석방)

*9 여운형. 지하 비밀단체 건국 동맹 조직

*12 평양사단 한인 학생들의 탈출, 항일 게리라전 계획이 발각되어, 70 여명 검거됨

<사회,경제>

*총독부는 1943년 토요일 휴무제를 없앤데 이어, 1년만에 일요일 휴무제를 폐지했다.

조선 구호령이 공포 되는 등, 민생은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도 미곡 강제공출

할당제를 실시하여 농민들은 목숨이라도 잇고자 비상식량을 낟가락에 숨기는 일까지 생겨 났다

*총독부는 학도 동원 본부 규정을 공포하여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생, 전문대생 까지

아우르는 동원 체제를 세웠다 이 규정에 따라 어린 초등학교 학생까지 근로봉사에 강제로 동원 되었다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은 사할린, 남양군도, 중국, 동남아시아의 광산, 비행장 건설 공사장 등에서 일했다

이들은 사실상 임금을 받지 못했다 우편저축, 은행적금, 채권매입, 보험등 각종 명목으로 임금을 차압당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패전 하자 그 증서 들은 휴지가 되버렸다 그나마 징용 현장에서 목숨이라도 연명 했으면 다행 이였다.

징용자 가운데는 안전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 일본인 감독에게 맞 아 죽거나 굶어서 죽은 사람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2.1 여객 열차를 감축하고 화물열차 증설

*2.9 회사등 임시조치법 공포

*2.10 조선여자청년연성소규정 제정

*2.관청의 일요일 휴무제를 폐지

*3.1 조선 구호령 시행

*3.3 전국 금융통제령, 금융기관 일요일 휴무제 폐지 (8.30 첯째 및 셋째 일요일은 제외)

*4.1 군수 광공업 생산 책임제 실시

*4.28 총독부 학도동원본부규정 공포(초등학교 4학년 이상 대학생, 전문대생까지 동원체제 확립)

*6.17 미곡 강제 공출제 할당제 실시

*9.5 복표(福票)규칙 공포 시행(식산은행에서 5원이하의 복표를 발행 하게함)

*12.1 체신국, 지하방공통신 사령부 설치)

<문화,생활>

*서정주가 매일 신보오장 마쓰이 송가를 부를 때, 이육사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숨졋다

*이육사는 본명이 원록(源綠), 아명이 원삼(源三)이 었는데 17번이나 감옥을 드나든 기개

높은 항일 지사 였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할때 그의

수인 번호가 264번 이었기에 이육사(李陸史) 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일본 관헌은 신부를 구속하고 신부. 신학생을 군인 또는 노무자로 징용을 보냈는가 하면,

전국각지의 성당을 군대용으로 접수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총독부는 학도 군사교육강화와 학도동원 비상조치를 발표하여 휴일에도 학교 수업을 실시 했다

또 보성전문을 경성척식경제전문으로, 연희전문을 공업경영전문으로, 이화여전,숙명 여전을

농업 지도원 연습소로 만들었다

*1938년 중일전쟁을 합리화 시키는 극영화 군용열차이후 일제의 선전 영화가 판을 쳤다

망루의 결사대와 같은 조선 독립군을 비적 또는 마적으로 간주하는 영화에다가 그대와 나같은

내선일체와 전쟁 완수를 위한 선전 영화 일색 이였다

*1942년 백년설은 친일 가요아들의 혈서를 불렀고, 이듬해 백년설, 남인수, 박향림 세 사람은 함께

혈서지원이라는 친일 가요를 함께 불렀다

*홍난파 작곡의 봉선화윤극영의반달도 많이 애창 되었다 이들 노래는 계레의 아픔을 담 고 있었다

*1. 시인 이육사(李陸史),베이징에서 옥사

*3.18 학도군사교육강화 요강과 학도동원비상조치 요강발표

*3.전국신문의 석간폐지

*4.22 신사참배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 순교

*5.4 휴일에도 학교 수업 실시 하기로 함

*8. 일본 관헌, 신부를 구속하고 신부. 신학생을 군인, 또는 노무자로 징용, 평양, 대전 .연안 (延安)

각지의 성당을 군대용으로 접수

*10.15 경성 제국대학 대학원의 특별연구생에 관한 령() 공포시행

*12.8 종교 보국회 결성

 

2015년 6월 3일 ( Wed)

Alo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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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현월 | 작성시간 15.06.0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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