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大長今).
2003년과 2004년에 방송되어 오랜만에 '국민 드라마'라는 칭송까지 얻으며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과 중국, 대만과 이란까지 수출되어 '드라마 한류'를 불러일으키까지 한 명작이었습니다.
대장금의 중심 인물은 수랏간 숙수이자 의녀인 '장금'인데, 이 장금의 실존 여부를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금이란 인물 자체가 실존하지 않았던 가공인물이다.", "제작진에서 전부 허구로 꾸며낸 가짜다. 세상에, 남녀 차별이 제일 심했던 조선 시대에 어떻게 여자가 왕의 주치의가 될 수 있겠느냐?", "있지도 않은 가짜 인물을 그럴싸하게 꾸며내어 진짜인 것처럼 굴다니", "한의학같은 사이비 가짜 의학을 무슨 신비의 의학으로 포장한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극치"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일변도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대장금(장금)이 실존하지 않았던 가공 인물인지, 아니면 실존했던 인물인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의 중종실록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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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21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3월 21일(무인) 1번째기사
헌부에서 선·교 양종의 위전을 추쇄하도록 아뢰다
전교하였다,
“대저 사람의 사생이 어찌 의약(醫藥)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書吏)에 속하게 함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醫女)인 장금(長今)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杖刑)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兩端)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 장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처음 실록에 보이는 것은 중종 10년인 1515년 3월 21일 기사에서입니다. 보시다시피 장금은 엄연한 의녀(醫女)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표기됩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을 의녀로 설정했던 것이 현실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죠. 조선 시대라고 해서 여자가 의원이 될 수 없던 것도 아니고, 왕을 치료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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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46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嘉靖) 1년) 9월 5일(무신) 1번째기사
대비의 병세가 나아지자 약방들에게 상을 주다
대비전(大妃殿)의 증세가 나아지자, 상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제조(提調) 김전(金詮)·장순손(張順孫)과 승지 조순(趙舜)에게는 말안장 20부(部)·활 1정(丁)·전죽(箭竹) 1부(部), 의원 하종해(河宗海)에게는 말 한 필과 쌀·콩 각 10석, 김순몽(金順蒙)에게는 말 1필, 의녀 신비(信非)와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콩 각 10석씩을 주고, 내관(內官)·반감(飯監)·별감(別監)에게도 모두 하사가 있었다.】
- 여기서 의녀 장금은 쌀과 콩 10석을 상으로 받습니다. 아마, 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진 것에 따른 포상이던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대비의 병세의 호전에 뭔가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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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52권, 19년(1524 갑신 / 명 가정(嘉靖) 3년) 12월 15일(을사) 2번째기사
의술에 대한 권과·의녀의 요식 등에 대해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백공(百工)의 기예(技藝)는 다 부족하여서는 안되고 권과 절목(勸課節目)이 상세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다만 각사(各司)의 관원이 힘을 다하여 권과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성효(成効)가 없다. 그 가운데에서도 의술(醫術)은 더욱 큰일인데 각별히 권과하지 않으니, 지금 그 기술을 조금 아는 자는 다 성종조(成宗朝)에서 가르쳐 기른 자인데, 이제는 그 권과하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사(醫司)에 물어서 아뢰라. 또 의녀(醫女)의 요식(料食)12682) 에는 전체아(全遞兒)12683) 가 있고 반체아(半遞兒)가 있는데, 요즈음 전체아에 빈 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받을 자를 아뢰지 않으니, 아래에서 아뢰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바야흐로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看病)하니, 이 전체아를 대장금에게 주라.”
요식(料食) : 급료.
전체아(全遞兒) : 상시 근무하고 급료의 전부를 받는 체아. 체아는 현직(現職)의 자리에 있지 않은 자에게 급료를 주거나 대우하기 위하여 두는 직역(職役)인데, 체아직을 두는 경우는 매우 많아서 자세히 논할 수 없으나, 대개 실직(實職)에서 떠나 다음 실직을 받을 때까지 녹을 주기 위한 경우, 실무는 있으나 현직의 자리가 없는 자에게 녹을 주기 위한 경우, 실무도 녹도 없이 대우만을 위한 경우, 임시로 직함을 지닐 필요가 있을 경우 등이 있다.
여기서부터 장금은 대장금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대(大)라는 호칭이 장금의 의술을 높이사서 붙여지게 된 것인지, 어떤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설정되었죠) 그러나 본문의 대장금과 장금은 결코 동명이인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아래의 기사들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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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2월 11일(갑신) 1번째기사
약방 제조와 의원들을 상주다
전교하였다.
“내가 여러달 병을 앓다가 이제야 거의 회복이 되었다. 약방 제조와 의원들에게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의녀(醫女) 대장금(大長今)과 계금(戒今)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관목면(官木綿)과 정포(正布)를 각기 10필씩 내리고, 탕약 사령 등에게는 각기 차등 있게 상을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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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대장금)은 여전히 의녀로 불리며, 중종의 병이 회복되자 쌀과 콩을 각각 15석씩 받는 포상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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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1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1월 29일(무진) 1번째기사
내의원 제조에게 감기약을 의논하라고 이르고 중화의 주물도 멈추라고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내가 접때 감기가 들어 해수증(咳嗽症)을 얻어서 오래 시사(視事)하지 못하였다. 조금 나아서 경연(經筵)을 열었더니, 그날 마침 추워서 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 의원(醫員) 박세거(朴世擧)와 홍침(洪沈) 및 내의녀(內醫女) 대장금(大長今)과 은비(銀非) 등에게 약을 의논하라고 이미 하유(下諭)하였거니와, 이 뜻을 내의원 제조에게 이르라."
- 중종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의녀 대장금은 왕명으로 다른 의원과 의녀들과 함께 약을 제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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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2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2월 9일(무인) 1번째기사
내의원 제조와 의원 의녀들에게 상을 내리다
전교하였다.
“내의원 제조 윤은보(尹殷輔)와 정순붕(鄭順朋)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하사하고 도승지 이해(李瀣), 의원 박세거(朴世擧)·홍침(洪沈)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유지번(柳之蕃)·한순경(韓順敬)에게는 아마(兒馬) 각 1필씩, 의녀 대장금(大長今)에게는 쌀과 콩을 도합 5석(石), 은비(銀非)에게는 쌀과 콩 3석을 하사하고 탕약 사령(湯藥使令)들에게는 관고(官庫)의 목면 2필씩을 지급하라.”
- 의녀 대장금은 왕으로부터 쌀과 콩을 5석 씩 포상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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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10월 25일(경인) 3번째기사
의녀와 의원이 왕의 병세에 대하여 말하다
의정부·중추부·육조·한성부의 당상 및 대사헌 정순붕 등이 문안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날 의녀 장금(長今)이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상께서 삼경(三更)에 잠이 들었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들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고 했다.
- 대장금이라고 불리던 것을 여기서는 장금이라고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기사 내용으로 보건데, 의녀 대장금과 내의녀 대장금, 혹은 의녀 장금이 다른 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기사에서 의녀 장금은 이제 직접 중종의 병세를 진찰하고 그것을 조정 대신들에 말하는 역할까지 맡습니다. 그만큼 장금이 왕의 병세의 진찰에서 맡고 있는 비중이 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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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10월 26일(신묘) 1번째기사
정원이 문안하자 병세에 대하여 답을 내리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전교하기를,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여의 장금(女醫長今)의 말이 ‘지난 밤에 오령산을 달여 들였더니 두 번 복용하시고 삼경에 잠이 드셨습니다. 또 소변은 잠깐 통했으나 대변은 전과 같이 통하지 않아 오늘 아침 처음으로 밀정(蜜釘)을 썼습니다.’ 하였다.】
- 저번 기사와 마찬가지로 의녀 장금은 계속 왕을 진찰하며 상태를 자세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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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10월 29일(갑오) 1번째기사
상의 병환에 하기가 비로소 통하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정원이 문안을 드리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중략) 아침에 의녀 장금(長今)이 내전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하기가 비로소 통하여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 장금이라는 인물이 실록에 보이는 것이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장금은 중종의 진찰을 마친 후, 사망한 듯 합니다.
지금까지의 기사들로 보건데, 조선 중종 무렵에 의녀 장금(혹은 대장금)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녀가 임금인 중종을 직접 진료하며 병세를 관찰하고 약을 지으며 치료의 역할을 맡았던 것도 모두 사실입니다.
물론, 드라마 대장금의 초반부에서 나왔던 수랏간 숙수(요리사)라든지, 장금이 직접 음식을 만들거나 혹은 수랏간의 책임자 자리를 두고 동료들과 경쟁을 벌인다든가,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든가 하는 설정은 모두 제작진들이 극중 흥미를 위해 꾸며낸 허구입니다.
여하튼, 장금이라는 여의는 분명히 실존인물이니, 괜히 쓸데없는 비하는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