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님은 자국민역사제일주의 관에 빠지신것 같군요..역사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식민사대관이고 이런것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믿고 그에따른 옳바른 사고관을 가져야 합니다.
귀폭님식의 역사관은 일본이 조작한 역사를 최고라고 믿는꼴과 같습니다.
바로 잘못된 학자가쓴 글을 읽고 정말 우리나라 역사가 최고구나 이런식의 행동 말입니다.
객관성을 가지고 백제를 바라볼때 왜와 백제는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백제를 알아볼수 있는 자료서인 삼국사기,삼국유사,일본서기 등을 검토하면 쉽게 알수있으실 겁니다.
간혹 일부의 학자들이 다른 주장을 펼치긴 하지만 왜와 백제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는것은 요즘학계에선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고로 백제는 왜를 제후국으로 삼고있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의 사이는 서로 동등했고 세월에 따라 그 국가적 지휘가 약간씩 변화했던 사이였습니다.
물론 백제가 왜에 선진문물등을 전해준것도 사실이지만 제후국이기에 그랬다는것은 억측입니다.하지만 귀폭님이나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왜에는 백제인들이 많이 건너가 그들의 세력을 구축했고 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 두나라는 백제가 명망할때까지 함께했던 형제와 같은 사이였습니다.
백제가 형의 위치에 있고 왜가 동생의 위치에 있는 셈이지요.
자~그럼 대왕,후왕,창왕,사마왕의 등의 호칭을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대왕은 제후국의 왕이 종주국왕에게 썼던 칭호입니다.
대왕과 후왕은 확연히 구분해야 하는데 그를 받쳐주는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제후국의 왕이 종주국의 왕을 높여 부를때 마땅한 호칭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대왕이란 호칭입니다.
만약 대왕이란 호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주인국과 같은 국가의 왕을 자신의 칭호와 같은 평범한왕이라고 칭해야 하기때문입니다.이는 신하가 자신의 주인인 왕을 자신과 같은 호칭으로 칭하는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대왕을 칭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로는 종주국의 왕이 제후국의 왕에게 자신의 위엄을 내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후국의 왕은 종주국왕에게는 신하와 같은 존재입니다.그래서 그에 다르는 호칭로 '후왕'이라 정확히 명시하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직접 '대왕' 이라 높여 칭했습니다.
비슷한 판례로 한때 고구려가 신라를 조공 통치했을때 사용한 호칭입니다.
고구려는 자신을 중국과 대등하게 봐왔고 칭제를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같이 직접 정복하여 통치한것이 아니라 조공통치를 했습니다.
광개토태왕때 신라의 위치가 그러했으며 둘사이의 오간 왕들의 표문에도 잘나와있습니다.
이렇듯 그당시에는 대왕이란 호칭은 종주국왕을 상징하는 표식 같은거였고 그것이 없었다면 종주국의 왕이라고 보기에는 힘들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교육과 잘못된 역사관이 백제가 왜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높은나라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학설이고 고쳐져야할 부분입니다.이런 잘못된 학설을 믿는것이 일본인들의 역사관을 욕하는 우리입장에선 그들과 같은 길을 걷는 것밖에는 되지않습니다.
이번에는 사마왕에 대해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사마왕 귀폭님이 잘못알고 계신 지식중 하나가 사마왕입니다. 사마왕은 백제 무령왕(백제 25대왕 즉위기간 서기 : 501년 11월~ 523년 5월 총 21년 6개월)의 호칭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대왕과는 다른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마란 일본인들이 '섬'을 칭할때 쓰는 일본식 발음입니다. 그를 사마왕이라 부른것으로 볼때 무령왕은 성장기에 왜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무령왕의 성장기는 아주 길기때문에 따로히 글을써 사마의 대한 설명은 마치겠습니다.)
무령왕 즉 사마왕은 왜에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개로왕의 부인으로 후에 곤지에게 시집을 가게됩니다. 이에따른 많으 우화들은 너무 길어 차마 여기에 실지는 못하지만 후에 반드시 설명드리겠으며 사마왕의 완벽한 풀이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신왕(재위기간:서기392년11월~405년9월,총 12년10개월)입니다.
아신왕은 백제의 대표적인 비운의 왕입니다.
고구려의 담덕과 같은때에 왕위에 있었고 그와의 전투에서 단 한차례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왜에 자신의 태자를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군사를 빌려온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편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다른건 생략하고 병신년에 기사를 다루겠습니다.
병신년(396년)
청목령에 진을 쳤던 아신왕이 되돌아가자, 이번에는 광개토태왕이 백제의 허를 찌르며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이때의 상황을 광개토왕릉비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잔(백제를 낮춰 부른 말)은 의(義)에 굴복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덤볐다. 왕(광개토)은 위엄을 떨치며 노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두부대를 백잔성으로 진격시켰다.백잔의 병사들은 그들의 소굴로 도망쳤으나 곧 그들의 소굴은 포위됐다. 그러나 백잔의 군주는 방도를 구하지 못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고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이에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여 후에도 그가 성의를 다하며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번에 모두 백잔의 58개 성, 700개 촌을 얻었다. 또한 백잔의 형제와 대신 10을 데리고 충정했던 군대를 이끌고 국도로 돌아왔다.
다소 고구려의 입장에서 쓴 면이 없지 않겠지만,백제의 아신왕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음이 분명했습니다.이듬해인 397년에 태자(전지왕)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 구원을 요청한 것을 보면,당시 백제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짐작할수 있을 것입니다.'광개토왕릉비문은 아신왕이 '지금부터 이후로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적고 있는데,이것은 크게 과장한 것을 아닐것입니다.
조선의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의 신하국이 되겠다고 맹세한 일과 비슷한 치욕을 당했음이 분명합니다.얼마나 분했으면 태자를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왜국과 연합전선을 펼치려 했을까요..
자..방금 언급했듯이 아신왕은 분명 왜에 태자를 볼모로 보내 군사를 얻어왔습니다. 이는 두나라 사이가 대등했다는것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것입니다.
종주국의 왕이 제후국왕에게 태자를 볼모로 보내면서 군사를 끌어오는 경우는 생각할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일본서기,삼국유사에서 확실히 찾아볼수 있으며 명확한 사실입니다.
귀폭님이 제가 말한글에 의심을 가지신다면 가까운 서점에서 백제관련 서적을 몇권 사서 읽는것도 좋은 방도가 될것입니다.
이제 충분한 설명이 되셨습니까?? 더 궁금한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질문해 주십시오. 성심성의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이상 백제학자 무령왕 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