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종교관련 기록
- 불교 -
(384, 침류왕1)7월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들어왔다. 왕이 그를 맞아들여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를 다해 공경하니, 백제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2년 2월(385)에 한산(漢山)에 절을 세우고 열 명의 승려를 두었다.
(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枕流王 즉위년)
승려 마라난타는 호승(胡僧)이다. 신이와 감통이 그 경지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데 뜻을 두어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옛 기록에 따르면 본래 인도 건너라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법을 전하고, 향의 연기를 증거로 하여 벗을 불러들였다.
(海東高僧傳 권1, 摩羅難陀傳)
백제 출신 승려 관륵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불법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지고 3백 년이 지난 후 다시 이것을 백제에 전하였으며, 그 후로부터 단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백제의 왕께서 일본 천황의 현명함에 대해 듣고 불상과 내전을 바쳤으니 그로부터 다시 백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日本書紀 권22, 推古天皇)
아신왕이 왕위에 올라 바로 그 해인 17년(392) 2월에 하교하기를 “불법을 숭배하고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였다.
(三國遺事 권3, 法興 難陁闢濟)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 말하였다. 백제 성왕4년(526)에 사문 겸익이 율전을 구하려는 뜻을 품고, 배를 타고 구법여향을 떠나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5년동안 범어를 배워 통달하고 율전을 깊이 연구하여 계체를 장엄한 후,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본 아비담장과 5부의 율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백제왕이 의관을 갖추고 북을 두드리며 교외로 나아가 맞이하여 흥륜사에 안치한 후, 국내의 유명한 승려 28명을 불러들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부 72권을 번역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백제 율종의 시작이다. 담욱과 혜인이 율소 36권을 지어 왕에게 바치니 왕은 비담과 신율의 서문을 지었다. 태요전에 받들어 보관하고 장차 판각을 하여 널리 베푸로자 하였으나, 왕이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이능화 《조선불교통사》上篇)
19년(541)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어 조공하고, 동시에 글월로써, 모시박사,『열반경』등의 경전의 뜻, 공장(工匠), 화사(畵師)등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聖王 19년)
이에 혜광이 진나라의 형산으로 가서 혜사화상을 만나 만물의 이치를 밝게 깨달았다. 신령스러움과 깨달음을 함께 갖추었으니, 혜사가 그러한 까닭을 관찰하고 은밀히 법화안락행문을 전수해 주었다. 혜광은 근기가 날카로워 마치 신령스런 송곳이 어떤 곧은 물건도 뚫지 못함이 없는 것과 같았고, 새로움은 마치 겁패수로 만든 천이 무엇을 물들여도 모두 아름다운 것과 같았다. 가르침을 받아 받들어 행하고 부치런히 정진하여 어긋나지 않아서, 마침내 법화삼매를 증득하고 인가해 줄 것을 요청하니 스승 혜사가 인증해 주었다. ...(중략)...
고국으로 돌아가 교화하던 현광은 말년에 사라졌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중국 형산에 건립된 조당에 28명의 영정이 그려져 있는데 현광도 그 중의 한 명이고, 천태산 국청사의 조당에도 또한 봉안되어 있다.
(宋高僧傳 권18, 玄光傳)
승려 혜현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열심히『법화경』을 염송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부처에게 빌어 복을 청하니 영험이 매우 컸다. 겸해서 삼론을 전공하여 오묘한 맛을 알고 신명에 통하였다.
(三國遺事 권5, 避隠 惠現)
예전에 동대사의 학자들은 법상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구사론을 배웠고 삼론종을 배우는 사람들은 성실론을 함께 배웠는데, 성실론을 강독함에 있어서는 도장이 지은『성실론소』에 근거하지 않음이 없었다.
(本朝高僧傳 권1, 道藏傳)
예전에 백제의 도장법사가『성실론소』16권을 지었는데, 오래도록 전래되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三國佛法傳統緣 卷中 成實宗)
13년(민달, 584) 9월, 백제에서 녹심신이 미륵석상 한 구를 가지고 왔다.
(日本書紀 권20, 敏達 13년조)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를 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큰 절을 건립하였으면 합니다”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우는 일에 관해 물었더니, 신통력으로 하룻밥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과 전각, 탑, 낭무(廊廡)등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三國遺事 권2, 紀異 武王)
- 도가 -
장군 막고해가 간하여 말하기를,"일찍이 도가의 말을 들었는데, ‘만족할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로움을 당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얻은 성과도 많은데 어찌 반드시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近肖古王 즉위년)
상방(尙方:임금이 사용하는 물건을 만드는 관청)에서 거울을 만들었는데, 참으로 좋구나!
위에 있는 선인(仙人)은 늙을 줄 모르는데, 목마르면 맑은 샘물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 먹으니, 수명이 금석 같구나!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 1, 武寧王出土方格規矩神獸文銅鏡銘)
승려와 사찰, 탑은, 매우 많으나 도사는 없다
(周書 권49, 列傳 百濟傳)
- 유학 -
고기(古記)에 의하면,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서기(書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흥은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三國史記 권24, 百濟本紀 近肖古王3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