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잡히지 않는 말갈의 역사

작성자천산|작성시간08.01.14|조회수664 목록 댓글 14
말갈족은 6~7세기경 역사무대에 수서를 통해서 등장합니다.

이전 시대부터 역사무대에 말갈족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모두 이후시대의 기록이며 소급 적용된 내용입니다.
말갈이 말갈이란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6~7세기경입니다.

송화강 유역에 백돌, 속말부가 있었고
한반도 북류지역에 백산부가 있었고
우수리강 유역에 불열, 호실부가 있었고
삼강평원 유역에 흑수, 안거골부가 있었습니다.

각 부족의 군사력이 수천 명 정도 이었고
7부족이었으니 총 군사력은 2~3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군사 인구와 대비하여 총 인구수는 10~20만 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대의 고구려 인구는 350만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말갈족이 역사무대에 등장하였을 때 고구려 인구의 5~10% 정도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동북아시아의 족속을 변화시킬 만큼의 대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고
7부족이 동일 계통이거나 연맹의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후에 등장하는 말갈과 말갈의 후예라고 하는 여진, 만주족의 대부분이
말갈이 말갈이란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처음 등장하였을 때의 말갈 후예는 아닙니다.

우리가 기록한 말갈은 여진족이라고 보여 집니다.
삼국사기를 기록할 당대에는 한반도 북류지역에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발해의 후국인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 유예들조차 여진족속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말갈은 여진족의 선조이며, 한반도 북류지역에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으니
삼국초기의 한반도 북류지역의 군사세력은 말갈족 이라는 인식이 지배하지 않았나 사료됩니다.

말갈의 분포 세거지는 상당히 넓습니다.
고구려의 1/3 이상 되는 지역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인구는 고구려의 10% 미만입니다.
같은 지역에서 비 말갈 고구려인과 함께 거주하였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또한, 말갈족 분포 세거지의 대부분은 옥저, 예, 부여의 세력권과 겹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갈족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옥저, 예, 부여의 세력권이
어떻게 말갈족으로 변한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옥저, 예, 부여의 대부분이 고구려 속으로 녹아들어 갔으니
옥저계통의 고구려인, 예계통의 고구려인, 부여계통의 고구려인은
상당한 규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갈계통의 고구려인의 규모만 파악될 뿐
옥저, 예, 부여의 계통은 고구려 속에서 큰 흔적을 남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휴거하지 않았기에
말갈계통의 고구려인으로 기록되어졌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생각합니다.
말갈이 말갈이란 이름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하였을 때는
부여와 말갈의 교체시기입니다.

6~7세기경의 말갈은 5세기경의 물길이었다고 합니다.
물길은 5세기경 위진남북조 시대에 북사와 위서를 통해서 역사무대에 등장합니다.
북사나 수서는 당나라 때 편찬되었기 때문에
북사의 물길이나 수서의 말갈은 거의 같은 규모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위서의 물길에 대한 내용을 살펴서 위치를 추정하고 주변상황을 고려하면
물길은 백돌부나 속말부 정도의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갈의 핵심 세력은 될 수 있으나 물길과 말갈이 대등한 관계로 연결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길은 고구려의 예속을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시도한 흔적이 있습니다.
북위에 사신을 보내서 함께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제안을 했는데
북위 측에서 거절하여 성사는 되지 않았습니다.
북위로 간 사신이 전하는 이야기가 위서에 기록되어져 있는데
물길의 위치는 대략적으로 송화강, 눈강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속말부나 백돌부 정도가 물길의 세력권과 겹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5세기경 물길은 송화강, 눈강 사이에 있었고
주변에는 12개의 부족이 인접하여 존재하였는데
서쪽으로는 거란 족속들과 접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북부여의 후예인 두막루와 접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이전에는 부여의 세력권과 밀접한 공간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4세기경 부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공간에서 5세기경 물길이 등장합니다.
뭔 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입니다.
사가들은 부여가 약화되자 말갈이 부여의 내지로 침투해 들어와서 부여를 몰아냈고
부여의 터전을 장악하고 보니 땅이 비옥하여 증폭적인 인구증가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말갈족이 동북아시아를 장악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증폭적인 인구증가가 발생했고
7개 부족으로 지역을 확장해 갔다고 해도
고구려의 족적을 변화시킬 만한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물길의 북쪽에 있었던 두막루인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달말루(두막루)는 북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를 피해 나하를 건너서 그곳에 거처하게 되었다.
부여의 후예인 두막루는 고구려를 피해서 북상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사가들은 물길(말갈)이 부여를 몰아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4~5세기경 물길이 부여 내지로 침투해 들어와서 부여민을 몰아내고 세력을 형성하였다면
물길은 어디에서 부여의 내지로 침투해 들어온 것일까요?

5세기 물길의 전신은 3세기 읍루라고 합니다.
읍루는 바다 인근에 거주한 세력으로,
바다를 홍개호로 파악하는 이들도 있지만
배를 타고 이웃나라를 노략질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바다는 바다이지 홍개호는 아닐 것 같습니다.
배를 타고 노략질 할 수 있는 공간은
우수리강 동쪽에 있는 연안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읍루는 부여에게 복속되어 있다가 조세부담 때문에 3세기경 반란한 세력으로
주변 세력에게 골칫거리가 되었지만
별다른 역사의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우수리강 동쪽연안은 부여의 세력권과 너무나 먼 거리인데
부여가 우수리강 동쪽연안까지 신속하였다는 것인지
아니면 읍루가 부여를 피해 우수리강 동쪽연안으로 이주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부여의 세력권을 송화강을 중심으로 목단강까지의 범위로 생각한다면
사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부여와 읍루의 1000리의 거리를 고려하여
우수리강 동쪽연안에 읍루가 근거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여의 읍루 신속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읍루가 목단강이나 삼강평원 일원에 거주하였다고 판단하면 이후 역사는 해석하기가 편해집니다.
부여와 읍루의 거리를 부여의 세력권이 아닌 부여의 중심지역으로 이해를 하고 송화강 유역에서
목단강이나 삼강평원까지의 천리거리를 추정하면 유사하게 끼워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읍루의 역사 등단 배경이
위나라 세력이 고구려를 옥저지역까지 추적해 가서 읍루를 발견한데 있음을 고려한다면
읍루는 목단강이나 삼강평원 일대에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추정한 바와 같이 3세기경 우수리강 동쪽 연안의 읍루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후 5세기경 물길이란 이름으로 송화강 눈강 일대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만약 읍루의 후예가 이주를 해 갔다면 우수리강 유역은 공지가 되어야 하지만
불열부와 호실부는 우수리강 유역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읍루의 일부가 이주하여 부여를 몰락시켰던 것일까요?
물길의 전신이 읍루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크지 않나 생각되어 집니다.

물길의 전신이 읍루가 아니라면
5세기경 송화강 눈강 사이에 있었던 물길의 전신은 누구 이었을까요
4세기경 부여가 있었던 공간이기에
물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여인의 향방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발해시대의 송화강 유역에는 부여부와 막힐부가 있었는데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발해의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고 발해가 계승했다고 합니다.
물길의 독자적인 행동을 고구려가 감지하고 막힐부를 설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시대와 지리적 상황이 유사합니다.
위치만을 고려하면
발해의 막힐부는 물길-백돌-막힐로 연결되고
발해의 부여부는 물길-속말-부여부로 연결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발해의 막힐부와 부여부는 부여의 족속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부여가 몰락하면서 물길이 등장했다가 다시 부여의 후예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길(말갈)이 왔다 갔다 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그렇게 불리게 되었던 것일까요?

과연 물길은 부여의 또 다른 세력이었을까요?
물길, 말갈이 부여 이었는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물길, 말갈과 부여는 역사적으로 어떤 사연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을 것입니다.

3세기경 부여의 인구는 40만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3~4세기경 모용선비에게 끌려가고 중국에 동화된 인구를 제외하면
4세기경 부여의 터전에는 부여인이 30만명 정도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동부여가 되고, 두막루가 되고, 고구려가 되고,
거란이 되고, 실위가 되고, 말갈이 되었을 것입니다.

발해말갈의 중심세력이 되었을 속말 말갈의 실체를 부여에서 찾는 이들은
말갈 지도자명에서 부여와 관련 있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증거로 들기도 하고
길림지역의 동 ,서 문화 이질감이 발생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기도 합니다.
부여가 약화되자 물길 세력이 길림 동쪽 지역까지 밀고 들어왔으나
길림 서쪽 지역까지는 진출하지 않았고
속말말갈은 길림서쪽지역의 부여 잔류민이라고 합니다.
고고학에 대해서 전혀 아는바가 없으니 이해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렵습니다.

3세기 말경 부여는 모용선비 왕국에게 대패하였다가
서진의 도움으로 복국이 됩니다.
복국 지역은 길림지역이 아니라는 주장을 대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몽골 지역이었다는 견해가 있을 만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는 농안 지역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부여가 모용선비 족속에게 대패하고서도
모용선비 족속과 더 가까운 서쪽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야 했던 이유는
더 큰 위협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의하면 부여는 복국 과정에서
백제의 위협 때문에 서진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세기 중반에 모용선비의 왕국으로부터 재침을 당합니다.
복국 된 부여 유예의 역사는 연장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복국 지역에서의 부여 역사는 이 사건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나 사료되는 바입니다.

이러한 역사 기록을 두고서
일부는 백제의 요서지역 경영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는 백제라는 기록이 고구려의 오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백제 세력이었는지, 고구려의 오기 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세력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4세기경 길림지역의 부여를 농안지역으로 몰아낸 세력은
5세기경의 물길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즉 이들이 성장하여 5세기의 물길이 되지 않았나 사료되어 지는 바입니다.

자치통감에서 부여를 서진하게 한 백제는 과연 어떠한 세력이었을까요?

4세기 초반은 요하 동서 지역에서 모용선비가 대두되는 시대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문선비, 단선비가 몰락했고, 부여가 거의 멸국 되었고, 고구려가 대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란, 고막해, 두막루, 실위, 물길 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용선비는 요하 동서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백제의 백성까지 잡아간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용선비, 부여와 관련된 백제는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백제, 고구려의 오기, 물길은 동일한 실체가 아니었을까 의문을 품어 봅니다.

즉, 부여를 서진하게 한 세력과
부여가 멸국 과정에서 물길이 밀려들어 온 시대적 배경이 비슷하기 때문에
부여를 서진하게 한 세력이 물길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부여를 서진하게 한 세력과 부여를 몰아낸 물길이 동 시대의 상황이라고 해도
각자의 별도 세력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별도의 세력이었다고 해도
두 세력은 유사한 시대와 유사한 공간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교체 사유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역사를 자의적으로 쉽게 해석하면
물길은 부여도 되고
물길은 고구려도 되고
물길은 숙신도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멸국 시기의 부여는 도시국가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을 것이지만
강성할 때는 동북아시아의 메이저이었고
그래서 고구려도 부여에서 출발하였다고 하고
백제도 부여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며
두막루인은 북부여의 후예라고 합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족속이었을리는 없지만
그들의 일부가 부여의 일부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때 목단강 유역까지 부여의 세력권이었을 것이나 3세기 말경 목단강을 넘어서 삼강평원까지
고구려가 자신의 세력권으로 자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초경 선비족이 동북아시아를 넘나들면서 고구려 또한 혼란기를 겪습니다.
4세기 부여가 메이저를 자처할 수 없었고
고구려는 자신들이 메이저임을 자처하기는 했지만 흔들리는 시기이었고
부여는 선비족에게 와해된 이후 나하를 건너서 두막루를 형성하였을 것입니다.

두막루속의 북부여인들은
모용선비에게 멸국 되어 북상하였을 것인데
두막루인은 북부여의 멸국이 고구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가들은 물길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여는 모용선비에게 멸국 되었지만
모용선비의 왕국이 송화강 유역을 장악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즉 부여의 멸국은 모용선비의 침략 때문이지만
송화강 유역에서 밀려난 것은 모용선비가 아닌 고구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고구려가 아닌 어정쩡한 신속상태의 고구려이었던 것 같습니다.

3세기 말경 고구려가 삼강평원 일대를 신속하기 시작하였고
3세기 말경 부여가 목단강 유역을 지켜냈을 리가 만무하니
목단강 이서지역 또한 고구려의 신속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4세기 초반은 고구려 또한 흔들리는 시기 이었으니
부여도 없는 자리, 고구려도 흔들리는 자리에서 독자적인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들 세력이 물길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4세기말경, 5세기 초에 고구려는 삼강평원 일대의 숙신(식신)을 순방한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식신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순방한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3세기말경 고구려가 숙신을 신속하고 나서
4세기 초 고구려화가 진행되었기에
4세기 말, 5세기 초 고구려가 식신을 순방하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정벌하였겠죠
즉 5세기의 물길은 삼강평원에서 고구려 허락 없이 이주해갔을 수 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5세기 송화강 유역의 물길은 4세기 목단강 이서지역, 그리고 송화강 유역의
지역주민이었을 것입니다.
일부는 고구려에게 끌려온 단로성 일대의 지역주민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4세기초 고구려가 선비족속에게 흔들릴 때 독자세력화를 시도하였다가
이후 고구려가 단속하여 막힐부를 설치하여 비로소 완전한 고구려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여도 되고 숙신도 되고, 고구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여의 원수도 되고, 고구려의 반항아도 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자의적으로 편안하게 해석하면 이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다만 말갈의 전부는 동북아시아 지역주민의 일부이었다는 것이 사실이기에
말갈의 전부는 발해의 일부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다는 것입니다.
또한 말갈 선조의 대부분은 부여, 옥저, 예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말갈족은 분명한 실체를 남긴 세력이지만
그 실체는 상당부분이 왜곡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여진족의 선조는 말갈이라는 대등한 등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진족의 대부분은 동북아시아의 지역주민이니
고구려인이나 발해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말갈은 동북아시아의 일부 지역주민이었습니다.
둘째 말갈의 대부분은 부여, 옥저, 예의 후예들입니다.
읍루가 성장하여 말갈이 되지 않았으며
은주 교체기의 숙신의 역사가 이어져서 말갈이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천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1.16 저는 대륙백제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공감은 하지만 확증하지 못하고, 공감하고 나면 다른 것이 더 꼬여서, 세월을 보내고 난 후 다시 한번 고민해 보자는 입장입니다.
  • 작성자Republic | 작성시간 08.01.15 그리고 말갈의 후예가 대부분 고구려인이였다는건 커다란 비약이 아닐까싶습니다. 수서 동이전에 보이는 말갈은 한서동이전에 보이는 읍루와 습성과 지역이 비슷합니다. 따라서 동일계통의 부족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계통임엔 맞습니다. 예와 부여 고구려 옥저는 풍습이 있고 제도와 질서가 있어 비교적 발달되있습니다. 말갈계통과는 확실히 구별되보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천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1.15 수서의 말갈이 위에서 처음 언급된 말갈이고 그 분포지역입니다. 읍루와 많이 다릅니다. 읍루의 언어와 부여의 언어는 다르지만, 말갈의 언어와 북부여의 후예인 두막루, 거란, 실위등의 언어는 같았습니다. 3세기 읍루가 아닌 3세기 숙신으로 기록된 세력은 읍루와는 다른 성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다른 부분도 어느정도 있지는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천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1.16 고구려인이라고 말할때의 고구려인은 고구려 지배층을 말했던 것이 아니며, 말갈의 후예가 고구려인이라고 말했던 것도 아니며, 여진족의 선조를 다 말갈족이라고 말하지만, 6~7세기경의 말갈족 보다, 6~7세기경의 고구려인이 여진족속에는 더 많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 작성자Republic | 작성시간 08.01.15 후한서 동이전에보이는 읍루입니다. 다른 사서에서 보이는 말갈도 이와 비슷합니다.[[산림사이에 거하며 몹시도 추우며 항시 토굴에 있어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기어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즐겨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 기름을 두터히 나누어 몸에 발라 이로써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 벗고 그 전후에 베로 가린다. 사람이 냄새가 많이 나고 더러움을 알지 못하여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산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