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기원은 갑골이 아닙니다.

작성자sorgai|작성시간10.11.12|조회수2,116 목록 댓글 6

• 갑골문이 이미 성숙된 문자라는 사실은 글자의 숫자가 많다는 사실에서 뿐만 아니라, 글자 구조의 복잡성에서도 알 수 있다. 갑골문 모두가 상형자인 것만은 아니며, 상형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실제로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다....즉, 상형자의 예를 든다고 해도 갑골문은 이미 원시의 단계는 훨씬 지났다. 《古文字學첫걸음/이학근》101p

 

 

갑골문은 최초의 문자의창조물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어휘수는 물론 형태에서도 초기문자 단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중론이고, 오늘날은 갑골문을 한자의 기원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높습니다. 이는 갑골 이전에 갑골문의 원시형태 혹은 초기형태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갑골문으로 문자의 원형을 논하는 것 자체가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점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글자는 어떤 것일까?

이는 갑골문과 연장선상에 있는 초기형태의 문자가 될 것입니다.

이 초기형태의 문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갑골문 이후에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금문'입니다. 그것도 초기 금문이죠.

 

금문은 문헌상으로 이미 신농, 황제 시기에 시작되어 갑골이 사라진 이후 춘추시기에도 만들어지고 후대에 계승되었던 귀한 문건이었으니까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갑골문은 금문과 기록내용에서도 그 목적이 다를뿐더러, 금문이 사용된 장구한 기간 중의 한 시기에 문자기록으로 남긴 것이 갑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금문은 초기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형태가 발전된 이후의 것으로 갑골과 그 시기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시대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갑골문보다 이른 시기의 문자기록, 즉, 한자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은 어떤 것일까요?

한 예를 들면 아래의 기록과 같은 것들입니다.

 

 

 

 

 

 

금문초기의 글자들은 대략 4-6자 정도로 되어있으며, 이는 해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문을 갑골문 이후의 글자로 본다는 것은 금문을 해석한 범위 안에서의 주장일 뿐이며, 실제로 해석하지 못한 초기 문자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해석되지 못한 금문 가운데 우리의 역사에서 실종된 고조선, 한국을 설명한 근거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해석되지 못한 금문 속에 우리가 알고 있는 '난생실화', '신화 전설'의 내용이 족보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든 금문은 위에서 부터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미 선대에서 해석을 시도하기는 했습니다만, 그저 보이는대로 점자를 읽듯이 읽어간 수준에 불과합니다. 기록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 특정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와 무관한 해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문은 분명 역사에 존재하는 인물을 남겼는데도 말이죠.)

 

첫째, 아버지 癸씨가 이름을 '견의'라 하고, 이 금문이 새겨진 청동기물을 선물한 것입니다.

두번째, 아버지 珠씨(구어 '알씨')가 아들에게 '羊족의 아들 馬씨'라는 이름을 준 것을 기념하여 청동기물을 선물한 것입니다.

세번째, 두번째의 알씨 손자들이 선조를 기록한 족보입니다.

(여기서는 설명이 길어지므로 생략합니다.)

 

곽말약 선생은 이런 까닭에 ‘옛날의 글자는 인명 외에 다른 뜻이 없다’고 자신의 저서 《곽말약 전집》에서 결론 내렸던 것입니다. 즉, 한자의 기원은 자신의 정체성, 족보, 인척관계를 남기려는 욕구에서부터 출발했으며, 따라서 이는 어느 한 시대에 완성될 수 있는 글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문자 기록을 누가 먼저 시작할 수는 있어도 완성시킬 수 있는 글자는 아니며, 어느 한 시대나 개인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① 한자의 기원은 갑골문이 아니다,  ② 초기 금문은 읽지 못한 것이 허다하고, 이를 외면하고서 금문이 갑골 이후의 문자라는 주장은 오류다 ③ 문자의 시작은 '인명'을 나타내는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갑골문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문자의 시작이 우리로부터라는 생각은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추기) 앞의 금문을 해석할 수 있는 근거의 고대의 족보가 새겨진 청동과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고, 이를 고대문헌이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이 족보를 조상의 기일이 새겨진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는 참 바보같은 해석이었음이 최근에 확인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일을 논하는 댓글은 사양하겠습니다.)

 

또한 동양삼국의 문자를 '漢字'로 통용한다는 것은 그 용어 자체가 이미 문자의 시작이 '한나라에 정통성을 둔 글자'가 되어 우리와는 무관한 글자가 되어버린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가 중에서 혹자는 한자보다 이른 시기의 글자인 은나라 글자, 즉 갑골문자를 계승한 것이 한자이므로 이름을 '은나라 글자(殷字)'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분도 계십니다. 한자라는 용어보다는 타당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이또한 이보다 이른 시기의 글자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다시 수정되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한시적인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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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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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르마뉴 @ 바얀칸 | 작성시간 10.11.13 혹 상나라 이전에 직접 유물로 확인되는 청동기에 기록된 장문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갑골이 아닌 갑골문이 발견되다니 금시초문인데 혹 부호문자 한두개 그려진것 가지고 갑골문이 발견되것으로 오산하였던가 아니면 거짓정보이던가 둘중 하나같은데 그것도 알수없는 일입니다 금문의 신뢰성은 금문이 실제 은나라 말기
    부터 기록되기 시작하였으며 주나라 금문은 은나라 말기 금문을 계승할수 밖에 없는게 금속제련술이 은나라가 앞서있기 때문이외다 즉 주나라 동기제련술이 은나라보타 선진적임을 입증하기 전에는 모두 헛소리입니다
  • 작성자사르마뉴 @ 바얀칸 | 작성시간 10.11.13 금문으로 알수 있는것은 눈물을 흘리며 알고자 하는 조상귀신의 내력이나 이름밖에 있을수 없으나 갑골문은 정치 경제
    군사 조상귀신 조상귀신에게 제사지낸 방법 천문 지리 그리고 허신의 설문 헛소리 반증등 그 가치는 이루 헤아릴스없거늘 갑골문 가치가 금문에 비해 떨어지는냥 궁색한 소리를 하다니 허허헛 주공묘 값골문을 들어보셨는지 선주 호경일대에 대량의 갑골문이 발견된 사실을 알고계신가모르겠군요
  • 답댓글 작성자sorgai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13 우선 말씀하시는 바는 둘째로 하고 댓글의 언사가 교양인의 것은 아닌 듯합니다. 토론이 격해지면 감정적 언사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만, 토론도 하기 전에 이 무슨 언행인지....."상나라 이전에 직접 유물로 확인되는 청동기에 기록된 장문"이란 질문은 문자의 발전과정을 아는 분이라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장문의 정의가 애매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생활처럼 자유로운 문장을 말씀하신다면 '없다'가 답입니다. 초기의 기록은 4자-6자 사이에서 자신의 인척관계를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갑골문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주장도 님의 주장일 뿐 갑골은 이미 상당히 진전된 글자이기에 초기의 글자가 아니란 것을 말한 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sorgai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14 갑골문이 상당한 글자수를 가졌다는 자체가 이미 초기 글자가 아니란 증거입니다. 금문이 은나라 말기에서 주나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은 해석한 범위에서 하는 얘기에 불과한 것이고, 해석하지 못한 것은 이미 위에 올린 금문탁본과 같은 기록들입니다. 암각화 토기부호라면 '대문구 유물'과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모양인데 이미 그런 것들은 금문에서 구성요소들이 발견되어 있지요. 같은 기록을 청동기물에 남기면 금문이 되는 것이고, 이는 지배계층의 전유물인 것이지요. 갑골문과 금문은 엄연히 기록된 내용이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위에 사례를 든 초기 금문에 대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토론해볼만 할텐데 ...
  • 답댓글 작성자sorgai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14 "눈물을 흘리며 알고자 하는 조상귀신의 내력이나 이름밖에..." ▶ 그러기에 곽말약은 '옛날 글자는 인명외에 다른 뜻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을 설명하고, 업적을 남기기 위해 청동기물을 만들었던 겁니다. 실물이 있느냐? 물론 있습니다. 산동 양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소신여서존'을 비롯해 다수가 있지요. 이들이 도매금으로 '상나라 말기'로 연대가 매겨지고 있더군요. 우리학자(랄 것도 없지만)들은 이를 맹신하여 확대보급하고 있는 상태죠. 청동제련이 중국이 종주국이라 할진대 이름도 없는 태국의 반창에서 세계최고의 청동유지가 발견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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