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1> 토성동 486호 출토유물(정인성 2013)
<그림2> 평양 대동군 상리 출토유물(이후석 2014)
<그림3> 황북 은파군 갈현리 화석동 출토유물(이후석 2014)
1.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위만은 효혜∼고후시기(B.C 195∼180)에 한나라의 신하로서 복속하는(臣屬) 대신에 병위재물(兵威財物)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사학계에서는 병위재물을 철제유물로 해석하여 위만이 한(漢)을 통해 철제유물을 사여받아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과는 다르게 서북한지역에서는 위만조선과 관련한 유물/유적이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이 발굴의 부재가 원인일까? 아니면 우리가 위만조선의 유물/유적이 발견됐음에도 이에 대해 확인하고 있지 못한 것일까?
2.
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낙랑군 유물/유적을 주목하고 있다. 잘 아시다시피 낙랑군에서는 단조철제유물과 함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하고 있다. 특히나 주목되는 것은 꽤 늦은 시기까지 세형동검계통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형동검계 유물은 고조선계의 토착 유물로서 기원전 4세기경부터 한반도에서 등장하여 청천강을 경계로 그 이남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조합이다. 즉 한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토착계 유물이 낙랑군 체제에 들어섰음에도 지속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계 유물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낙랑군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서 한나라에서 출토되지 않는 유물들은 비한식계(非漢式系) 유물로 보고, 이른 시기의 유적을 분석하면 고조선계 철기유물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한 것이 말수레부속구(車馬具)인 을자모양청동기(乙字形銅器)+대롱모양청동기(管形銅器) 그리고 권총모양청동기다. 이들 유물은 사용용도가 불명하며 한나라에서 발견되지 않는 형식이라서 토착계 유물로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위의 말수레부속구가 부장되어있거나 또는 부장되어있지 않더라도 이른 시기의 세형동검과 함께 부장되는 철기유물은 고조선계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일부 유적에서 철기유물과 함께 나오는 전국시대 청동거울(細地文鏡)과 진나라(秦)의 청동거울 등도 낙랑군 설치 이전에 철기유물이 사용됐음을 방증한다고 한다. 정리하면 세형동검계 유물 + 말수레부속구의 부장(없으면 이른시기의세형동검) + 간단한 철제 유물의 조합이 나오는 목관 또는 목곽묘계의 무덤은 위만조선계로 볼 수 있다.
3.
진·변한의 철기 유적도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과거에는 이 유물들이 낙랑군 설치 후에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성과에 힘입어 대구 팔달동, 경산 임당 고분 등이 조사되면서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전반에 철기 문화가 1차적으로 확산되고 그리고 낙랑군 설치 후 2차 확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경산 임당 F-Ⅱ 34호 무덤에서 출토된 주조철도끼(鑄造鐵斧)는 기원전 3세기 말의 세죽리-연화보 유형에서 발견되는 것과 그 모양이 같다. 즉 적어도 경산 임당 F-Ⅱ 34호 무덤은 기원전 2세기 전반으로서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이 철기문화를 사용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유적을 표로 아래와 같다.
<그림4> 무순 연화보 유적 주조철도끼와 경산 임당 유적 주조철도끼 비교(이남규 2005, 김도헌 2002)
<표1> 서북한지역 위만조선계통으로 추정되는 낙랑군 유적(박선미 2013)
유적이름 | 유 물 | ||||
철기 | 청동기 | 말수레부속구 | 토기 | 기타 | |
평양 토성동 486호 목곽묘 | 도끼, 끌, 활촉 쇠뇌부속, 극 | 쌍조형 안테나식검, 창, 청동꺽창 그릇, 방울, 국자 | - | - | 벽옥, 관옥, 금괴, 차돌 |
평양 정백동 96호 목곽묘 | 장검, 도끼, 끌 | 세형동검, 창 | 삿갓모양청동기 양산대꼭지 | 화분형토기 배부른단지 | - |
평양 정백동 97호 목곽묘 | 장검, 극, 찰갑 | 세형동검1 세지문경 (전국시대청동거울) | - | - | - |
평양 상리 목곽묘 | 검, 창, 극, 도끼 재갈받치개 환두대도 | 세형동검 검자루부속 2모양동기 청동띠걸이 | 청동수레부속 삿갓모양청동기 청동방울3 철제재갈 | 질그릇 | - |
황북 은파군 갈현리 화석동 목곽묘 | 장검1, 투겁창1 도끼1 | 세형동검1 투겁창1 검파두식1 쇠뇌1 | 일산살꼭지 등 수레부속과 철제마구류 | 화분형토기1 | - |
황남 재령군 부덕리 수역동 목곽묘 | 단검1, 도끼1 끌1, 쇠갈모11 등 거마구류 | 세형동검1 皇朝用(황조용) 명문 동모1 | 관형동기2 양산살꼭지, 철제 거마구류 | - | - |
<그림4> 기원전4~3세기말 서북한 일대의 유적(오영찬 2006)
4.
그러나 과연 위의 그림과 표에서 제시된 것이 위만조선의 물질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먼저 위만조선 이전의 서북한지역의 유물/유적이 주목된다. 기원전 4세기∼3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의 유적으로서 서흥 천곡리, 신계 정봉리, 백천 석산리, 재령 고산리 그리고 봉산 송산리 솔뫼골 유적 등이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2> 기원전 4~3세기말 서북한 일대의 유적(오영찬 2006)
유적이름 | 유 물 | |||
청동기 | 철기 | 석기 | 토기 | |
황남 서흥군 천곡리 석관묘 | 세형동검1 |
| 석촉1 검파두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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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 신계군 정봉리 석관묘 | 세형동검1 청동투겁창1 청동도끼1 |
| 석촉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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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 재령군 고산리 토광묘 | 세형동검1 T자형검손잡이1 도씨검(중국검)2 청동도끼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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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군 반천리 토광묘 | 세형동검1 청동새기개(銅鍦)1 정문경(청동거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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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 백천군 석산리 토광묘 | 세형동검1 청동꺽창1 검파두식1 | 철도끼(鐵斧)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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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북 봉산군 송산리 적석목관묘 | 세형동검1 청동끌(銅鑿)1 청동송곳(銅錐)1 청동도끼1 정문경(청동거울)1 청동새기개(銅鍦)1 동초(?)1 | 철도끼(鐵斧)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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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성천군 백원 노동자구 9호 고인돌 | 세형동검1 청동새기개(銅鍦)1 단추형 동기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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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목 항아리(長頸壺) |
평남 평원군 신송리 토광묘 | 세형동검1 T자형검손잡이1 청동새기개(銅鍦)1 용기편(用器片)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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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기편(土器片)1 굽다리잔(高杯)2 |
함남 신창군 하세동리 토광묘 | 세형동검1 청동꺽창1 청동투겁창1 방울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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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원전 3세기경까지 철제 유물로는 주조철도끼 1점만 부장되거나 아예 부장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까지 전혀 부장되지 않던 단조철기가 기원전 2세기에 들어 갑작스럽게 단조철기가 많은 양이 부장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즉 이와 관련한 과도기적인 양상과 점진적인 발전과정이 보여야 하나 이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물론 이는 위의 기록에서와 같이 효혜∼고후시기(B.C 195~180)에 한의 외신을 자처하는 대신 병위재물을 받아 철제유물이 들어왔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철제무기가 확산되는 것은 전한 중기 이후인 문제~무제 이후라고 한다. 밑의 <표3>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한 중기인 1기에는 철제유물이 잘 보이지 않다가 서한 중기 2기부터 철제유물이 증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중국 본토에서도 아직 확산되지 않은 철제유물이 전한 전기인 위만대에 철제유물이 확산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위의 주장에서 말수레부속구 중 을자형청동기+대롱모양청동기와 권총형청동기가 한나라에서 발견되지 않고, 사용용도를 알 수 없다면서 토착계로 주장했으나, 최근 이에 대해서 위의 유물들은 1마리 말이 끄는 쌍원차(雙轅車)의 말의 멍에와 말의 멍에대 끝장식이라고 한다. 한나라에서는 전한 중기 이전에는 쌍두마차(말 두마리가 이끄는 마차)를 주로 이용했으나, 전한 중기∼후기 이후에는 쌍원차가 유행하기 때문에 위의 유물도 낙랑군 설치 이후에 들어온 유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단조철기유물은 낙랑군 설치 이후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이는 낙랑군 유적에서 철제농공구는 거의 없고 철제 무기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설은 낙랑군 유물/유적을 기원전 1세기 이후로서 파악하고 있다.
<그림6> 말 한마리(쌍원차)의 수레 복원도(손로 2012)
<표3> 낙양 소구한묘 출토 철제 유물(이남규 2006)
유적이름 | 기 (期) | 개수 | 철기 | 청동 무기 | 시기 | ||
농공구 | 무기 | 기타 | |||||
낙양 (洛陽) 소구한묘 (燒溝漢墓) | 1기 | 18 | 자귀(錛)1 | 작은칼(小刀)1 | - | - | 전한 중기 |
2기 | 23 | 일자형구? (一字形具)1 | 장검(長劍)3 큰칼(大刀)1 작은칼(小刀)11 | 족집개?(鑷)1 | - | 전한 중기 | |
3기 전반 | 45 | 요자형구? (凹字形具)1 낫(鎌)1 도끼(斧)1 자귀(錛)1, 가위(剪)2 | 장검(長劍)11 큰칼(大刀)4 작은칼(小刀)17 투겁창(鉾)1 | 화로(爐)1 고리?(環)1 허리띠고리 (帶鉤)2 족집개?(鑷)1
| 화살촉 (鏃)1 | 전한 만기 | |
3기 후반 | 24 | 자귀(錛)1 가위(剪)2 손칼(刀子)2 | 장검(長劍)2 큰칼(大刀)6 작은칼(小刀)8 | 고리?(環)2 족집개?(鑷)3 | - | 신(新) | |
3기 | 31 | 요자형구? (凹字形具)3 손칼(刀子)12 | 장검(長劍)5 단검(短劍)8 큰칼(大刀)6 작은칼(小刀)8 투겁창(鉾)1 | 화로(爐)2 허리띠고리 (帶鉤) 고리?(環)2 구형기? (扣形器)5 정형기? (釘刑器)57 족집개?(鑷)1 | - | 전한 만기 ∼ 신(新) | |
4기 | 18 | 쟁기(犁)1 망치?(錘)1 | 장검(長劍)1 단검(短劍)8 큰칼(大刀)2 작은칼(小刀)10 투겁창(鉾)1 | 솥(釜)1 족집개?(鑷)1 |
|
| |
5기 | 12 | 일자형구? (一字形具)1 낫(鎌)1 손칼(刀子)2 | 큰칼(大刀)2 작은칼(小刀)7 투겁창(鉾)1 |
|
| 후한 중기 | |
6기 | 14 | 철자형구? (凸字形具)1 도끼(斧)3 자귀(錛)1 손칼(刀子)1 망치?(錘)1 가위(剪)3 | 큰칼(大刀)2 작은칼(小刀)19 투겁창(鉾)1 | 솥(釜)3 등잔(燈)2 족집개?(鑷)1 거울(鏡) | 쇠뇌 (弩機)15 | 후한 만기 | |
4.
이상 장황하게 위만조선의 철기유물과 관련하여 낙랑군 설치 이전설과 낙랑군 설치 이후설로 나누어 서술해보았다. 두 설 다 타당성은 있으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후자인 낙랑군 설치 이후설이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은 가 한다. 낙랑군 설치 이전설은 기존의 낙랑군 유물/유적으로서 파악되어오던 일부 유적의 연대를 끌어올려 위만조선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설들은 구체적으로 왜 이 유물들이 기원전 2세기로 올라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그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설의 특징은 진·변한지역에서 나오는 철제유물의 연대를 올림으로써 이를 합리화하는 측면이 있는데, 진·변한지역의 철제 유물의 연대가 올라간다고 해서 서북한지역의 낙랑군 유적이 위만조선대로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 근거가 너무 박약하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진·변한지역의 철제 유물은 1차, 2차 두 번에 걸쳐 철제유물이 파급되었다고 보는데, 1차는 위와같은 주조철도끼가 2차는 단조철기의 무기계통인 낙랑군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파급되고 있다. 즉 주조철도끼가 나온다고해서 단조철제무기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토착계라 한 말수레부속구가 왜 토착계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을 못하고 있다. 이 점들은 이 설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이다.
반면에 낙랑군 설치 이후설은 동아시아라는 큰 틀에서 철제유물의 발전과정상을 설명하고 왜 낙랑군 설치 이후에 철제유물이 들어왔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낙랑군 이전에 단조철기유물이 들어왔다는 것이 인정되려면 이러한 체계를 깨뜨리지 않는 이상 힘들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연나라는 전국시대부터 단조철기인 장검이나 투겁창 등 여러 무기를 생산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서북한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나, 연나라 수도인 연하도 외의 다른 지역 특히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농공구만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무기들은 연나라 수도에서만 한정적으로 생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특히나 연나라 외의 다른 나라들은 한나라 이전까지 청동기가 주무기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위만조선이 단조철기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다. 다만 아직까지 북한의 발굴성과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발굴성과에 의해 좀 더 밝혀져야 할 것이다.
각 표와 그림 출처 / 순서대로 표기
<표>
박선미, 2013, 『고고학 자료로 본 위만조선의 문화 성격 –평양 일대의 고분을 중심으로-』, 『東洋學 53』,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오영찬, 2006, 『낙랑군 연구 –고조선계와 한(漢)계의 종족 융합을 통한 낙랑인의 형성-』, 사계절
이남규, 2006, 『낙랑 지역 한대 철제 병기의 보급과 그 의미』, 『낙랑문화연구』, 동북아역사재단
<그림>
鄭仁盛, 2013, 『衛滿朝鮮의 鐵器文化』, 『白山學報』 96, 白山學會(그림1)
이후석, 2014, 『遼東∼西北韓地域의 細形銅劍文化와 古朝鮮』, 『동북아역사논총』 44, 동북아역사재단(그림2,3)
이남규, 2005, 『高句麗 國家 形成期 鐵器文化의 展開樣相』, 『고구려의 국가형성』, 동북아역사재단(그림4, 무순 연화보)
金度憲, 2002, 『三韓時期 鑄造鐵斧 流通樣相에 대한 檢討』, 『嶺南考古學』 31, 嶺南考古學會(그림4, 경산 임당)
오영찬, 2006, 『낙랑군 연구 –고조선계와 한(漢)계의 종족 융합을 통한 낙랑인의 형성-』, 사계절(그림5)
孫路, 2012, 『韓半島 北部地域 車馬具의 登場과 性格』, 『韓國上古史學報』 76, 한국상고사학회(그림6)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콜라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9.02 大欽茂 복기대 교수의 최근 행보라는 것은 요서의 청동기문화에서가 아니라 다른 분야를 말하는 거구요. 님은 어차피 공부도 안 하시는 분인데 제가 무슨 재주로 설득하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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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大欽茂 작성시간 15.09.02 콜라캔 님보다는 논문과 사서를 많이 읽었으니 염려 붙들어 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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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콜라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9.03 大欽茂 넵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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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키레네 작성시간 15.09.02 댓글이 좀 무의미하게 과열인듯한데 대흠무님은 반론글을 주시건 다른 서적이나 논문을 인용하시건 정리해주시는게좋지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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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콜라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9.02 보시다시피 위의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대흠무님께서 마음대로 결론 짓고 끝내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