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2. 고조선을 건국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단군왕검
우리 민족의 시조로 천제 환인의 손자, 환웅의 아들로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 단군의 건국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다.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삼국유사 속의 단군신화
일연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는 흔히 단군신화라고 부른다. 신화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까? 호모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했음이 하인리히 술레이만의 평생 노력으로 밝혀졌듯이, 고조선의 경우도 그 실체를 알기 위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는 일정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서사시에 해당된다. 건국 이야기는 먼저 환웅의 부족이 태백산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면서 하늘의 자손을 내세워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한 것부터 시작한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 등과 같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통치 이념을 내세워 세상을 다스렸다. 이들은 자신의 요구에 순응한 곰 숭배 부족과 연합하고,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배제했다. 환웅부족의 환웅과 곰 숭배 부족의 웅녀가 결합하여 단군이 탄생되었다. 단군은 정치와 종교 두 분야에 걸친 세습 권력을 가진 지배자로서 그가 고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단군은 평양에 도읍을 하였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고, 기자가 조선에 오자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최소한 고조선이 환웅과 웅녀가 이끄는 서로 다른 두 세력의 결합으로 탄생했다는 점과, 평양, 아사달, 장당경 3곳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는 것은 일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의 위치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요동설, 평양설, 중심지 이동설 등의 여러 주장이 있다.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 다뉴문경, 미송리형 토기, 지석묘 등의 고고학 유물의 분포상황과 여러 기록들을 종합한 결과, 현재 연구자들은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왔다는 이동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삼국유사》등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하였으나,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시작 연대는 그 보다 훨씬 늦기 때문에 고조선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한반도가 아닌 요하 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면서, 요서 지역의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기원전 2000년∼기원전 1500년)와 고조선과의 연관성이 주목되고 있다. 이미 요서 지역에서 초기 국가의 모습이 등장하는 만큼, 하가점 하층문화를 발전시킨 집단은 고조선보다 앞선 세력이거나, 고조선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가진 환웅 세력이 주변에 신석기 문화를 가진 웅녀 세력을 변화시켜 하나로 통합하면서 이루어진 나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기록 속의 고조선의 모습
《삼국유사》보다 약 1400년 전에 사마천이 쓴 《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12세기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임명하였으나, 신하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기술함으로써, 이 시기에 이미 조선이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때 고조선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관자》에는 기원전 7세기경 산동 반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대외교역을 펼치던 제나라가 조선의 문피(文皮)라는 가죽제품을 교역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고조선은 확실한 정치제로 먼 나라와의 교역을 할 정도로 발전했으며, 그 지리적 위치도 요동보다는 제나라에 보다 가까운 요서 일대까지 세력이 미친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위략》에는 고조선이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원지역의 7개 강국 가운데 하나인 연나라와 대등한 실력을 가져 연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까지 갖고 있었으며, 왕이란 호칭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280년 무렵에 연나라 장군 진개의 공격을 받아, 고조선의 서쪽 땅 2천리를 빼앗기고, 고조선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서쪽 땅 2천리는 대체로 요하에서 난하에 이르는 요하 서쪽의 땅으로, 이를 계기로 고조선은 힘이 약해졌다.
고조선이 동쪽으로 중심을 이동한 시기도 이때라고 하겠다. 고고학 발굴의 결과도 고조선의 전기에는 요동지역에 비파형동검이, 고조선 후기에는 만주와 한반도일대에 세형동검이 집중 출토되고 있다. 고조선은 동쪽으로 옮겨온 이후에도 여전한 강자로서 다시 힘을 모았고, 중원의 지배자가 진나라에서 한나라로 바뀌는 틈을 이용해 다시 서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고조선의 건국 시점은 앞으로 고고학 발굴을 더 기다려야 하겠고, 위치와 영토 또한 아직은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고 해도, 고조선은 오래 역사와 큰 영토를 가졌던 우리 역사의 최초의 국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제왕운기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에 관한 기록 사진]
[단군왕검 영정 사진]
기자조선의 실체
기자는 은(상)나라 왕의 친척으로 기(箕)땅에 봉해져 자작이란 작호를 받은 자로, 은나라 말의 3대 충신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원전 1122년에 동쪽으로 조선 땅으로 떠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조선으로 간 것에 대해서 후대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대표적인 것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왕으로 봉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나라를 부정하고 떠난 그가 주나라의 책봉조치를 받아들인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기자가 죽은 지 천여 년이 훨씬 지난 후 만들어진 《한서》에는 은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짓고 길쌈하는 것을 가르쳤고, 낙랑 조선 백성들에게 금해야 할 법 8조목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내용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아주 크게 확대된다. 소중화 의식을 가진 조선 선비들에게는 기자가 조선에 온 것은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은 위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웠는데, 준왕이 곧 마한의 왕이 되었으니 우리 역사의 정통은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역사관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있다. 교과서에도 기자조선은 언급하지 않는다. 조선이 기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중국인들이 주변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사실과 무관하게 창작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오자, 고조선 사람들이 그가 성인으로 알고 그를 왕으로 모셨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일이다. 기원전 1100년경에 그가 하남성 지역에서 현재의 평양 땅까지 먼 거리를 무사히 이동해왔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런데 최근 기자조선에 대해서 2가지 주목해야 할 것들이 등장했다.
첫 번째는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기자조선을 최근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학자들이 다시 거론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단군조선은 신화라고 하면서 조선의 역사 시작은 곧 중국인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왜곡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후(箕侯)라는 글귀가 새겨진 청동솥이 발해만 북쪽 대릉하 상류지역인 요녕성 객좌현에서 발견된 것이다. 기자는 기국의 제후를 의미한다. 그리고 기국은 은나라 유민들의 나라다. 그런데 이들 기국 사람들, 즉 은나라 유민들이 동쪽으로 이동해 남긴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기자 집단은 분명히 동쪽으로 이동을 해왔다. 그렇지만 그들이 정착한 곳은 지금의 평양 일대가 아니라, 발해만 북쪽 대릉하 상류지역으로 만리장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다. 기자 집단의 동쪽으로 이동하여 대릉하 일대의 청동기 문화에 다소 변화가 생겨나기는 했지만, 고조선이 이 때문에 멸망당한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의 내용도 기자의 왕래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잠시 옮겨지기는 했지만, 다시 옛 수도로 돌아왔고, 여전히 고조선의 역사가 지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조선이 설사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고조선의 서부 변방지역에서 있었을 뿐이다. 기자는 우리 역사를 바꾼 큰 인물은 아니며, 오히려 기자가 조선에 온 것은 고조선의 영토와 역사를 밝히는 자료로서 새롭게 조명 받아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