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창해군의 위치

작성자高璉|작성시간03.11.05|조회수196 목록 댓글 0
창해군에 대해서는 윤내현 교수님이 30여쪽이나 상세히 설명하고
계신데 이부분은 고조선사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창해군의 위치를 생각할 때는 위만조선의 위치를
확고히 염두에 둬야 하는데 윤내현교수님께 명확히
밝히신 위만조선의 위치는 [난하동쪽~요하서쪽]입니다.
이부분은 다른 글(위만조선은 우리의 단군조선의 원래영토의 서부에 있었다는 견해)로 올리겠습니다.

창해군의 위치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면

[ 창해군의 위치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이 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에 보인다.

彭吳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麻+非{밑에})然發動 - 사기 권30

彭吳穿穢(濊).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 (麻+非{밑에})然發動

- 한서 권24하

이 그것이다. 위 두 인용문은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 평준서에는 "팽오가멸조선"이라고 하여 팽오가 교역을 하면서 조선을 멸망시킨 것처럼 되어 있고, 한서 식화지에는 팽오찬예.맥.조선"이라고 하여 팽오가 예.맥.조선과의 교역로를 개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팽오라는 일개 상인이 조선을 멸하였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고, 또 그러한 사건도 있지 않았으므로 위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때 한서 식화지의 멸(滅)자는 예(濊)자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는 데 학자들은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따라서 위 두 기록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팽오라는 서한 상인이 예.맥.조선지역과의 교역로를 개척했는데 창해군을 설치하게 되자 제와 연사이가 온통 소요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예군 남려각 서한에 투항하는데 있어서 팽오가 어떤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해군을 설치하게 되자 제와 연사이가 온통 소요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창해군이 제와 연 상이에 설치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창해군이 齊와 燕사이에 설치되지 않았다면 창해군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와 연 사이에 소요가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요사건이 제와 연사이에서 일어났는데,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서주시대 이래 제는 지금의 산동성지역을 말하고 연은 지금의 북경과 천진지역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해군은 지금의 산동성 동부지역과 북경 사이인 발해만 서부연안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사기 유후세가에

良(유후 장량)은 일찌기 회양에서 禮를 공부했는데,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을 만나 역사를 얻고 무게 120근의 철추를 만들었다. 진황제가 동쪽으로 순유하였는데, (장)량과 자객(역사)는 진황제를 박랑사에서 저격하였으나 잘못하여 부차를 맞혔다. - 사기 권55

는 기록이 있다. 장량은 전국시대 한의 세가 였는데 진 시황제에 의해 韓이 멸망될 때 그의 가문도 크게 피해를 본 인물이다. 그가 자기 나라와 가문의 원수인 진 시황제를 저격하기 위해 회양으로붙터 동쪽으로 창해군을 찾아가 역사를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의 유후세가에 나오는 회양은 당시대의 진주로서 지금의 하남성 회양이다. 장량은 하남성 회양으로부터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을 만났던 것이다. 이 창해군에 대해 [사기색은]에 주석하기를, 서한 무제때
예군 남려가 투항해 옴으로써 만든 창해군은 그 명칭이 아마도 여기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므로 그 지역이 서로 가까울 것이라고 하였다.

즉 창해군이 살았던 곳은 후에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곳과 동일하거나 가까운 곳이라는 것이다. 장량이 창해군을 만난 후 역사와 함께 진 시황제를 저격했던 박랑사는 지금의 하남성 중모 근처였다.

그러므로 장량은 하남성 회양에서 동쪽으로 가서 창해군을 만나 역사를 구한 후 하남성의 중모지역으로 와서 진 시황제를 저격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진체국내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진제국의 동북 영토는 북경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까지였다.

그러므로 장량이 창해군을 만나기 위해 압록강 유역이나 강원도 또는 함경남도까지 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후세가의 창해군에대한 사기색은의 주석이 옳다면 창해군은 하북성이나 산동성의 동부해안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발해가 滄海(창해) 또는 蒼海(창해)로 불리어 졌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조조가 발해만 연안의 난하 유역에 있는 갈석산에 올라 발해를 바라보며 지은 [갈석편]이 시 가운데 한수는 [관창해]로 널리 알려져 잇다. 그 첫 구절은 동쪽으로 갈석에 오라 창해를 바라본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수서 來護兒전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요동의 전쟁에 (來)護兒는 루선을 인솔하고 창해로 나아가서 패수로부터 드어가 평양 60리에 가서 고(구)려와 서로 부딪혔다.-수서 권64

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창해는 발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구당서 지리지 하북도 '창해 上'에서는 창해에ㅔ 대해서 설명하기를 한시대의 발해군인데 수나라에서 그것을 따라다가 무덕 원년에 창주로 고쳤다고 했으니 창주라는 명칭이 발해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으.....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에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지역에 나타나는 예족과 맥족에 대해서도 상술하고 계신데 내용이 많은 관계로 생략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